어머니 품같이 포근한 지리산의 방재능선 아래 새끼노루 마냥 포근히 자리잡은 마을. 구례군에서 경남 하동포구로 흘러가는 섬진강을 따라 난 19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보면 넓은 들을 만난다.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대간의 한줄기, 소백산맥이 지리산 왕시루봉을 빚고 그 맥이 흘러내려 섬진강을 만나는 강가에 만들어진 오미리 구만들.
어머니같은 지리산에 안기고 섬진강에 둘러진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任水)의 명당이 바로 오미리라.
풍수지리학자들에 따르면 천상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금환락지(金環洛地)의 형국이어서 자손대대로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가락지는 본래 여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는 정표로서 출산을 의미한다. 설화에서 가락지가 손가락에서 빠졌다는 것은 곧 생산을 의미한다. 때문에 토지면 오미리 일대는 금환락지, 곧 풍요와 부귀 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명당으로 일컬어진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면 난세를 피해 찾아드는 사람들이 많아 마을은 한때 150여세대에 이르 큰 세(勢)를 과시하기도 했다.
전국 3대 명당 중 한곳인 오미리(五美里)는 다섯가지 아름다움을 지닌 동네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오동(五洞)으로 불렸으나 이 마을에 정착한 유이주가 월명산·방장산·오봉산·계족산·섬진강의 아름다움에 취해 오미리라 불러 지금에 이른다.
유이주는 명당중 명당 오미리에 운조루(雲鳥樓)를 세웠다.
‘雲無心而出岫하고 鳥倦飛而知還이라’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나래짓에 지쳐 둥지로 돌아오네)
그는 중국 도연명의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가운데 첫머리인 운(雲)과 조(鳥)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 터는 금구몰니(金龜沒泥, 금거북이 진흙에 묻혀있는)의 명당으로 꼽히기도 한다.
운조루는 곧 오미리의 역사나 다름없다.
200여년전인 1776년 경상도 안동태생의 유이주(柳爾胄)라는 사람이 전라도 승주(지금의 순천)에서 낙안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수백명의 장정을 동원해 이곳에 99칸 집을 짓고 그 알가들을 모아 살도록 만들었다.
운조루 앞마당 한켠의 ‘위석류’라는 나무는 당시 유씨가 중국 위나라에서 가져왔던 나무로 장구한 세월이 지나 고목이 됐다. 본체는 썩어 잘려나가고 뿌리부근에서 새싹이 돋아 웅장하게 재생하고 있다.
이곳 마을 정착사의 시작인 유씨가문 뿐만아니라 오미리 마을 사람들의 역사를 대변해주는 듯 8월 한낮의 더위에도 유유히 푸르름과 생기를 흠뻑 머금고 있다.
오미리의 나머지 아름다움은 단연 주변의 자연경관과, 비옥한 평야, 풍부한 물, 그리고 후덕한 인심을 꼽는다.
지리산 자락의 맑은 공기, 섬진강 청류가 오미리 사람들의 가슴을 씻어낸 듯 이곳 사람들의 삶이 순박한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인 듯하다. 오미리를 찾은 사람들은 훈훈한 인심을 통해 사람사는 이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해방이후의 혼란한 상황과 한국전쟁 최후의 격전지로서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지리산의 자연림은 여전히 태고의 원시미를 간직하고 있고 산아래 삶터를 일궈온 그네들의 삶 또한 한국의 전통농가의 순박한 심성을 지닌다.
전국 3대 명당중의 한곳인 오미리에 대해 아직까지 일반인들이 기대하고 생각하는 고관대작이나 입신양명한 걸출한 인물이 배출 된 것은 아니지만 마을사람들은 마을의 평화로움 만으로 그 명당의 효험이 발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이 지고지순한 순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문승이 향토사연구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