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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군[海南郡]
전라남도 남서부에 위치한 군.개관
동쪽은 강진군, 서쪽은 신안군·진도군, 남쪽은 완도군, 북쪽은 영암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6°16′∼126°44′, 북위 34°17′∼34°45′에 위치한다. 면적은 1,013.14㎢이고, 인구는 7만 6194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3개 면, 514개 행정리(177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성내리에 있다.
자연환경
전라남도 남서부 해안에 위치한 관계로 해남반도·화원반도와 65개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토양은 화강암·반암·응회암 등의 충적층이 잘 풍화되어 있어 토양층이 깊다. 북쪽의 월출산(月出山)에서 뻗은 줄기가 두억봉(斗億峰, 529m)·흑석산(黑石山, 650m)을 이루고, 강진군과의 경계에 서기산(西基山, 515m)·석문산(石門山, 272m), 남쪽에 두륜산(頭輪山, 703m)·대둔산(大屯山, 672m)·도솔봉(兜率峰, 421m)·달마산(達摩山, 481m), 중북부에 금강산(金剛山, 481m) 등이 있다. 특히 군의 남쪽 끝에는 사자봉(獅子峰, 110m)이 있는데 일명 갈두산(葛頭山)이라고도 한다. 사자봉의 남사면 해안이 우리나라 육지부의 가장 남쪽 끝이다. 산 정상에 오르면 보길도(甫吉島)·어룡도(魚龍島)·흑일도(黑日島)·백일도(白日島)·당인도 등의 크고 작은 섬이 보인다. 북쪽의 금강산에서 발원한 금강천(일명 해남천)이 해남읍을 가로질러 복평만(垘坪灣)에 이르고, 두륜산에서 발원한 삼산천(三山川, 일명 어성천)이 삼산평야를 지나 화산면 해창만(海倉灣)에 이른다. 북쪽에는 옥천천(玉泉川)·계곡천(溪谷川)이, 남쪽에는 고현천(古縣川)·구산천(九山川) 등이 흐르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13.2℃, 1월 평균기온은 0.9℃, 8월 평균기온은 25.1℃이며, 연강수량은 1,330.8㎜이다.
역사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신석기시대 후기 유적인 두모(斗毛)조개무덤을 비롯해 그 이후의 유물·유적도 고루 분포한다. 마한 54국 가운데 구해국(狗奚國)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백제의 영역에 편입된 뒤로는 새금현(塞琴縣)과 황술현(黃述縣), 고서이현(古西伊縣)이 이곳에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새금현은 침명현(浸溟縣, 또는 投濱縣)으로, 고서이현은 고안현(固安縣, 또는 同安縣)으로, 황술현은 황원현(黃原縣)으로 개칭되어 양무군(陽武郡: 지금의 강진)의 영현이 되었다. 통일신라 말기에 대흥사(大興寺)와 미황사(美黃寺)가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서산대사의 의발이 대흥사에 유탁되면서 두륜산 일대가 조선조 불교문화의 요람이 되었다. 고려 초에 침명현은 해남현(海南縣)으로, 고안현은 죽산현(竹山縣)으로, 황원현은 황원군으로 개칭되어 영암군의 임내가 되었으며 뒤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제주도와의 내왕은 물론 송나라와의 무역항으로서 관두량(館頭梁: 지금의 화산면 관동리)이 이용되었다. 1409년(태종 9)에 왜구 때문에 육지부로 옮겨온 진도현(珍島縣)과 병합해 해진군(海珍郡)으로 개편되었다. 1412년에 읍치를 당악(棠岳: 지금의 현산면 고현리)에서 영암군의 임내인 옥산현(玉山縣)으로 옮겼다. 1437년(세종 19)에 진도와 분리되어 현감이 부임하였다. 1440년에 무안 대굴포(大掘浦)에 있던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황원곶(黃原串: 지금의 문내면 선두리)으로 옮겨와 전라우수영이 되었다. 1448년에 황원현(黃原縣)과 옥산현·죽산현 등 영암의 임내지역이 해남으로 이속되었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때 이곳 달량진(達梁鎭: 지금의 북평면 남창리)에 왜구가 내습했으나 격퇴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곳 주민 정운(鄭運)·이유길(李有吉) 등은 이순신(李舜臣)의 막하에서 큰 공을 세웠다. 윤현(尹俔)·윤검(尹儉) 등의 의병은 강진 병치(兵峙)싸움과 장흥 석대(石臺)싸움에서 적을 물리쳤다. 또한 대흥사의 승려들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승군에 참여해 크게 활약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12척의 전함으로 130여 척의 왜군선단을 격파한 명량대첩(鳴梁大捷)이 있었으며, 1688년(숙종 14)에 명량대첩비가 우수영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표해록(漂海錄)』 등을 저술한 최부(崔溥), 가사문학의 대가 윤선도(尹善道), 그의 후손이며 화가인 윤두서(尹斗緖) 등이 있다. 1895년에 나주부 해남군이 되었고 1896년에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개편되었다. 1906년에 진도군 삼촌면과 영암군 옥천면·송지면·북평면 등을 병합하였다. 1914년에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완도군·강진군·영암군의 일부 지역을 조절해 13개 면으로 편성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3월 10일 해남 장날을 기해 김동훈(金東勳)·김흥봉(金興鳳) 등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또한 학생들의 주도로 4월 6일과 4월 22일에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1921년에 완도군 군외면 어불도를 송지면에 병합시켰다. 1942년에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명량대첩비를 철거해 경복궁 뜰에 옮겨놓았다. 1947년에 철거된 적이 있는 명량대첩비를 되찾아 비각을 세우고 옮겨놓았다. 1948년 11월 1일에는 대구폭동의 영향을 받은 해남폭동이 발생해 큰 피해를 끼쳤다. 1955년 7월 1일에 해남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에는 육지의 최남단이라는 뜻을 가진 토말비(土末碑)가 세워졌다. 1983년 2월 15일에 북평면이 북평면과 북일면으로 나눠졌고, 마산면 맹진리 일부가 계곡면 덕정리에 편입되었다. 1990년 8월 1일에 옥천면 봉황리가 강진군 도암면에 편입되었다. 2015년 1월 1일에 화산면 중마리가 신설되었다.
유물·유적
신석기시대 후기 유적인 현산면 두모조개무덤을 비롯해 북평면을 제외한 전 지역에 지석묘군이 분포되어 있고 마제석촉 등이 출토되었다. 송지면에 해남 군곡리패총(사적 제499호)이 있다. 고분으로는 북일면에 해남 방산리 장고봉고분(海南方山里長鼓峰古墳, 전라남도 기념물 제85호)과 해남 신월리 방대형 고분(전라남도 기념물 제102호), 화산면에 해남 방축리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제115호), 삼산면 창리에 해남 용두리고분(전라남도 기념물 제121호), 현산면에 해남 월송리 조산고분(海南月松里造山古墳, 전라남도 기념물 제86호) 등이 있다. 성지로는 문내면 선두리에 전라 우수영성지(전라남도 기념물 제139호), 해남읍에 해남읍성·금강산성·옥산고현성, 삼산면에 녹산성, 마산면에 죽산고현성·산막리성지, 북평면에 만호성·달량진성지와 이진리의 이진성지(전라남도 기념물 제120호) 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삼산면 구림리 대흥사(사적 제508호) 경내에 북미륵암삼층석탑(北彌勒庵三層石塔, 보물 제301호)과 대흥사 삼층석탑(보물 제320호)이 있다. 또 대흥사 안에는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탑산사명 동종(보물 제88호)·서산대사탑(西山大師塔, 보물 제1347호)·서산대사유물(보물 제1357호)·천불전(千佛殿, 보물 제1807호)·천불상(千佛像,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용화당(龍華堂,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대광명전(大光明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관음보살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79호) 등이 있다. 송지면 서정리 미황사에는 대웅전(보물 제947호)·응진당(보물 제1183호)·괘불탱(보물 제1342호)·미황사부도군·석조(石槽) 등이 있다. 그리고 마산면 장촌리에 은적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隱跡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6호), 화원면 금평리에 서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瑞洞寺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보물 제1715호) 등이 있다. 절터로는 계곡면 성진리에 별진사지(別津寺址)와 여수리에 흑석사지(黑石寺址)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해남읍 수성리에 해남향교 대성전(海南鄕校大成殿,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7호), 대흥사 안에 표충사(表忠祠,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 마산면 화내리에 영산사 소장문서 일괄(英山祠所藏文書一括,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59호), 계곡면 방춘리에 방춘서원(芳春書院)이 있다.
그리고 계곡면 여수리에 용연사(龍淵祠), 해남읍 용정리에 용정사(龍井祠)·오충사, 구교리에 해촌사(海村祠), 연동리에 죽음사(竹陰祠), 화산면 금풍리에 금성사(琴城祠), 옥천면 대산리에 삼충사(三忠祠)·충절사(忠節祠)·정운 충신각(鄭運忠臣閣, 전라남도 기념물 제76호) 등이 있다. 고가옥으로는 해남읍 연동리에 윤선도 고가인 해남윤씨 녹우당 일원(사적 제167호)이 있고, 현산면 초호리에 해남 윤탁 가옥(중요민속문화재 제153호), 백포리에 해남 윤두서 고택(중요민속문화재 232호), 황산면 우항리에 해남 정명식 가옥(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8호) 등이 있다. 문헌으로는 해남읍 연동리에 해남윤씨 가전 고화첩(보물 제481호)·윤선도 종가 문적(보물 제482호)·윤단학 노비허여문기 및 입안(보물 제483호)이 있고, 옥천면 송산리에 옥산서실 소장품(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1호)이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강강술래(중요무형문화재 제8호)와 우수영부녀농요(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0호)가 있다. 그리고 계곡면 덕정리에 해남 진양주(海南眞釀酒,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5호)가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삼산면 구림리에 대둔산 왕벚나무 자생지(천연기념물 제173호), 해남읍에 녹우단 비자나무 숲(천연기념물 제241호), 우항리 공룡·익룡·새발자국화석 산지(천연기념물 제394호), 성내리 수성송(천연기념물 제430호) 등이 있다. 또 해남읍 연동리에 윤두서 자화상(국보 제240호), 문내면 학동리에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 산이면 진산리에 청자 요지(사적 제310호), 마산면 맹진리에 암각매향비(전라남도 기념물 제137호)가 있고, 삼산면 구림리에 두륜산 대흥사 일원(명승 제66호) 등이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해남읍 수성리의 해남향교와 계곡면 방춘리의 방춘서원이 있다. 해남향교는 1398년(태조 7)에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1482년(성종 13)을 비롯해 수차례의 중수·개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면서 후학의 교화에 힘써왔으나 조선 중기 이후 교육기능이 약화되었다. 방춘서원은 이 지방에서 유일한 서원으로 1784년(정조 8)에 설립되었다. 그밖에 옥천면 대산리의 충절사 등 10여 개의 사우가 있었으나 1868년의 서원철폐령으로 모두 훼철되었다. 한말 이후 신교육이 발흥하면서 근대 교육기관들이 설립되었다. 1911년에 공립해남보통학교, 1918년에 달산공립보통학교(達山公立普通學校), 1919년에 우수영공립보통학교 등이 초기에 설립되었다. 그밖에 성진공립보통학교 등 14개교가 1920년대에 개교하였다. 이 중에는 1922년 4월에 개설된 옥천사립강습소(玉泉私立講習所)와 같은 해 11월에 설립된 북평사립보통학교(北坪私立普通學校)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3·1운동 이후의 교육열에 의해 설립되었다. 현재의 해남중학교 전신인 해남농업보통실습학교는 1920년 3월에 개교하였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1개교, 중학교 11개교, 고등학교 4개교가 있다. 문화행사로는 명량대첩제와 초의문화제가 매년 시행된다. 문예활동으로는 고산문학축제를 비롯하여 김남주·고정희문학제 등이 개최되고 있다.
민속
이 고장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줄다리기와 농악을 들 수 있다. 줄다리기는 보통 정월 초에 당산굿을 끝마친 뒤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거행한다. 아름드리 굵기로 동아줄을 감아 암수 두 개를 만든 뒤, 양쪽 줄 머리에 고를 달고 비녀목을 끼워 사용한다. 이 줄다리기는 풍년을 기원하고 재액 소복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이곳의 농악은 호남우도농악의 특징을 그대로 지녀 쇠가락이 구성지며 흥겹다. 농악의 구성은 상쇠와 부쇠·종쇠·징잽이·장구잽이·북잽이·소고잽이 등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도 강강술래와 윷놀이·그네뛰기·달맞이·씨름 등 세시 민속놀이가 전한다. 송지면 산정마을에는 진법군고라는 민속놀이가 전해오고 있다. 달마산 미황사에 뿌리를 두고있는 이 놀이는 12차에 이르는 다양한 가락을 갖고 있으며 놀이패도 100여 명의 큰 규모다. 마을 단위로 산신제·당제·도제·거리제·중구제·짐대제 등 다양한 동제가 거행된다. 제일은 정월 초하루가 가장 많으며 정월 대보름이나 초사흘, 2월 초하루인 경우도 있다. 제신은 주로 산신령·당할아버지·당할머니 등으로 마을 뒷산 당집이나 당나무에 모시는데, 때로는 상당과 하당이 있어 각기 다른 신을 모시기도 한다. 화산면 해창마을의 산제에서는 큰당에서 산신령을 모시는 제를 지낸 뒤 작은당에서 당주할머니에게, 처서님당에서는 처서님에게 제를 따로 지낸다. 송지면 동현마을에는 마을 뒷산에 상당과 하당이 있는데, 상당은 웃당산 또는 할아버지당이라 하여 천제신·지신·용왕신을 모시는 제를 지내며, 하당은 할머니당이라 하여 주로 제를 준비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
이와 반대로 산이면 예정리 예동마을에서는 하당인 옥령당의 당할머니에게 먼저 제를 지내고, 상당으로 올라가 옥수봉 산신령에게 제를 지낸다. 제의는 보통 유교식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며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한다. 이 때 펼쳐지는 농악놀이 등은 마을민들의 화합과 단결에도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설화·민요
이 고장에는 이의신(李懿信)·이진원(李振原) 등의 인물전설과 미황사의 연기설화 등 다수의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명나라에서 주부 벼슬을 한 이의신이 소년시절 밤에 서당에 다녔는데, 고갯마루에서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 입에서 입으로 매끄럽고 향기로운 구슬을 주고받으며 희롱을 하였다. 이 일이 매일 밤 계속되자 의신은 파리하게 야위어 갔다. 자초지종을 캐물은 훈장은 그 소녀가 100년 묵은 여우의 화신임을 알고 의신에게 구슬을 삼켜 버리라고 했다. 다음 날 의신은 소녀가 주는 구슬을 훈장의 말대로 삼켜 버렸고, 이후 의신은 명지관(名地官)이 되었다. 그러나 의신이 어머니의 묘를 옮기려고 지금의 돌산 가재터에 묏자리를 잡고 인부를 시켜 곡괭이질을 하였다. 그러자 요란한 소리가 나고 안개가 피어오르면서 그 안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그래서 결국 의신은 어머니의 묘를 이장시킬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 터가 왕터였으므로 하늘이 말려 그와 같은 변괴가 일어난 것이라 하였다. 한편, 이진원은 이 고장 출신의 명의로 그에 얽힌 일화들이 많이 전해온다. 하루는 그에게 한 부인이 찾아와 배가 아프다고 하므로 배를 열어 보니 창자가 한 토막 없는 것이었다. 진원은 즉시 마당에 있던 개를 잡아 그 창자로 부인의 부족한 곳을 채웠다. 또, 어느 날 용왕의 사자가 찾아와 용왕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였다. 진원은 용왕의 아가미에 질경이풀이 무성한 것을 보고 백마의 오줌을 구해 용왕의 병을 낫게 하였다. 용왕은 그 보답으로 진원에게 수궁에서 가장 높은 직책을 내렸으나 진원은 끝내 사절했다고 한다. 「미황사전설」은 언젠가 바닷가에서 황소 한 마리가 등에 불상과 불경을 싣고 와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이르러 한 번 크게 울고는 쓰러져 죽었으므로 여기에 절을 짓고 미황사라 하고, 이 소를 묻은 마을을 우분리(牛墳里)라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밖에도 부씨(夫氏) 부부가 불상을 함부로 파내어 옮기는 바람에 벌을 받아 죽고 말았다는 산이면 금송리의 「미륵불전설」, 평생 정절을 지키며 맹인 시아버지를 모신 열녀 김씨이야기, 백반상 망부석이야기, 대흥사 천불상이야기 등이 전한다. 이 고장의 대표적인 민요로 「우수영농요」를 들 수 있다. 이 노래는 주로 부녀자들이 협업의 일종인 품앗이를 하면서 부른다. 1972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이 노래는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터로 일하러 나가면서 부르는 「길노래」, 김을 매면서 부르는 「들노래」, 타작소리에 맞추어 부르는 「도리깨노래」, 방아를 찧으면서 부르는 「방아타령」, 추석·대보름 등의 명절에 달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둥덩애타령」 등이다. 각 노래를 몇 구절씩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길노래」는 “가노라 간다네 내가돌아서 어허간다/ 정든님 팔아서 얼싸내가 돌아를 어허간다/ 아하 에헤야 어어얼사 지화자 절사좋다 … 저건너 갈매봉에 비가따북 묻어온다/ 비장을 두르고 얼사 김을 매세 ….”라고 부른다. 「들노래」는 “저건너 묵은밭에 쟁기없어서 묵었느냐/ 임자가 없어서 묵었느냐/ 아하하 헤에요 아하하 기화자좋네 … 호박나물 덩클한들 동새와같이 구벙하리/ 아하하 헤에요 아하하 기화자좋네.”와 같이 부른다. 「도리깨노래」는 “쌀보리가 늘보린가 낙실낙실 때려주소/ 아―하 훠라훠 허리 하아요/ 달떠온다 달떠온다 각시방에 달떠오네/ 아―하 훠라훠 허리 하아요 ….”와 같이 부른다. 「방아타령」은 “에야 에야 에훠야 허 이것이 방아로구나 나지나 나니 노나니 방아로구나/ 노자 강변에 비둘기 한쌍 물것하나 물어다 놓고/ 에야 에야 에훠야 허 이것이 방아로구나 나지나 나니 노나니 방아로구나/ 암놈물어 쑥놈주고 쑥놈물어서 암놈주고 ….”로 부른다. 「둥덩애타령」은 「솜타기노래」로 불리기도 하며, “때론다 때론다 유윤선 때련다/ 쌍고동틀고 헤고동틀고 거덜거리고 내려온다/ 둥덩애덩 둥덩애덩 덩기둥덩애 둥덩덩 … 배차배차 봄배차는 봄비오기만 기다리고/ 옥에갇힌 춘향이는 이도령오기만 기다린다네 ….”와 같다. 이 밖에 「땅다지기소리」·「가래소리」·「논매기노래」·「모찌는 노래」·「모내기노래」·「물레노래」 등의 노동요가 전승된다.
산업·교통
2014년 기준으로 군의 총 경지면적은 3만 6639㏊인데, 이 가운데 논은 2만 3042㏊이고, 밭은 1만 2327㏊이다. 특히 온화한 겨울, 서늘한 여름의 기후 조건과 해안 입지조건으로 진딧물 등의 해충이 적어 단감 등의 유실수와 고추·고구마 등의 재배에 적합하다. 이곳의 세발낙지와 참게젓·계곡진양주는 그 특이한 맛을 자랑한다.
옥석공예(玉石工藝)는 황산면 옥동리에서 생산되는 토속 수공품으로서 그 모양과 품질이 뛰어나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다. 쌀 생산량은 지속적인 증가를 보여 도내 생산량의 10% 이상을 차지한다. 보리 생산량은 최근 감소하고 있다. 특산물로는 참다래·월동배추·벌꿀 등이 있다. 인근 바다에서 고막·굴 양식이 활발하다. 광산자원으로는 현산면 구시리의 구시광산과 황산면 부곡리의 백암광산에서 납석이 생산되고, 현산면 조산리의 창일광산에서 규석, 황산면 옥동리의 옥매광산에서 고령토의 일종인 도석과 황산면 부곡리의 황산광산에서 고령토가 생산된다. 상업활동으로 1930년대에는 해남읍 해남장, 화산면 화산장, 송지면 송지장, 북평면 좌일장, 마산면 칠일장, 옥천면 이일장, 황산면 남이장, 문내면 우수영장 등 8곳이 있었다. 광복 이후 시장 수는 증가해 해남읍 해남장이 1·6일, 화산면 화산장과 화원면 화원장이 5·10일, 현산면 월송장과 문내면 우수영장이 4·9일, 송지면 중앙장과 북평면 남창장이 2·7일, 북일면 좌일장과 황산면 남리장이 3·8일에 각각 열린다. 주요 거래품목은 쌀을 비롯해 맛좋은 고구마와 해안에서 잡히는 어류 등이다. 특히, 해남장은 가장 중심적인 장으로 규모도 크고 교통 요지에 위치해 제조품 및 농산물의 수집·분배점으로서 도매기능을 하며, 지방의 집산물을 대도시로 공급한다.
도로는 광주에서 영암·강진·해남을 거쳐 완도에 이르는 국도와 기타 지방도가 발달해 교통은 편리하다. 특히 해남∼진도 간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斜張橋)인 진도대교가 1984년에 완공됨으로써 해남은 다도해 관문으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현재는 우수영국민관광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관광
이곳에는 수려한 산악 경관을 자랑하는 두륜산도립공원이 있고, 인근에 윤선도의 유적지와 땅끝[土末] 마을 등이 있어 학술·문화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두륜산에는 고찰인 대흥사가 있으며, 대흥사 왼쪽 계곡을 따라 오도치·진불암·대둔산을 거치면 유명한 구름다리가 있다. 두륜산 꼭대기에서는 수려한 다도해의 경관을 볼 수 있다. 해남읍에는 윤선도의 생가인 녹우당이 있다. 그리고 송지면 송호리에는 모래가 좋고 수심이 얕은 송호해수욕장(松湖海水浴場, 일명 송지해수욕장)이 있다. 주위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며 주변의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야영장으로도 적합해 여름에는 전라남도 각지에서 해수욕객이 모여든다. 특히 해변에 큰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천연의 피서지로 각광받고 있다. 앞바다에는 많은 바위섬과 유인도·무인도가 흩어져 있고 좋은 낚시터를 제공해 피서를 겸한 낚시터로도 각광받고 있다. 황산면 우항리에는 9천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새발자국, 나무줄기화석과 함께 수많은 공룡발자국이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인 갈두산(156m) 사자봉 남쪽 해안에 땅끝을 표시하는 토말비(土末碑)와 사자봉에는 토말탑이 세워져 있다. 이전에는 전혀 관심없이 버려진 곳이었으나 1981년에 토말비가 건립되고 송호리 갈두마을 지역의 2,000㎢가 1986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개발되어 새로운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2002년에는 높이 39.5m의 땅끝전망대가 세워져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또한 화원반도를 따라 남서쪽으로 가면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비가 있는 우수영에 도달한다. 명량대첩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전쟁이었다. 우수영은 진도와 해남을 잇는 진도대교의 완공으로 새로운 관광지로 등장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08-07 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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