飄雲旅情(3)
- 草秋의 영원한 우정과 예술을 따라서(1) -
추사 고택 과 일지암
가족을 먼 곳에 보내 놓고, 수많은 밤을 너 섬(여의도의 옛명칭)에 있는 13층의 한 빌딩에서 홀로 想念에 젖으면서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것이 어느덧 나의 습관이 되었다. 신문 마감시간에 쫓기는 날에는 이 곳에서 밤늦게까지 원고 작성에 몰두하기도 하고, 때로는 골치 아픈 사업문제로 홀로 생각에 젖어 들기도 한다. 또한 인생의 장년기(長年期)에 접어든 '나'를 뒤돌아보기도 하고 앞으로의 인생 여로를 어떻게 마감할 것인가 하는 것도 최근 나의 想念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깊은 밤, 따뜻한 녹차 한 잔을 들며 밝은 달빛이 한강 물위를 누비며 강 따라 흐르고 있는 것을 본다. 이 순간 나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다. 차를 끓이며 생각을 하고, 차를 마시며 고독을 달랜다. 그저 하늘의 달과 江上의 달이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된다.
밝은 달 촛불 삼고 또 벗삼아 흰 구름 자리 펴고 또 병풍도 하여 …… 흰 구름 밝은 달 두 손님 모시고 나 홀로 차 한잔 따라 마시니 道人이 앉은 자리가 이 보다 더 나을 손가 -草衣 東茶頌 31頌-
일찍이 茶聖 초의 스님은 차 한잔의 멋을 마음껏 즐겼고, 자연과 더불어 同化하면서 무아(無我)의 절대 경지에 도달 할 수 있음을 시 한 수로 노래하였다. 여든 한 살에 입적할 때까지 초의 스님은 40여 년 간 해남 대둔사의 부속암자인 일지암에서 홀로 孤高하지 않고 茶山, 秋史, 小癡(소치)등 당대의 많은 학자와 정치가, 예술가 등과 폭넓게 교류하며 조선조 말기의 문예부흥에 기여하며 살다가 갔다. 이 중에서 秋史 金正喜와의 종교와 신분을 초탈한 우정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된 친구의 뜻을 새기게 한다.
친구가 없는 세상을 생각하여 보자. 얼마나 쓸쓸하고 고독하겠는가. 진실한 친구와 마주 앉아 차를 들면서 정담을 나누고 인생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생활이 얼마나 즐겁고 커다란 활력소가 될 것인가. 친구의 격의 없는 충고와 조언은 우리의 판단력에 큰 도움이 되고 부족한 지혜를 보충해 준다. 그레서 참된 우정은 인생의 기쁨을 배로 늘리고 슬픔을 반으로 줄여 줄 수도 있다고 하지 않던가. 특히 취미와 사상이 같은 친구와의 대화는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해준다. 참다운 친구가 한사람도 없다면, 그 사람은 인생의 여정을 쓸쓸하게 가고 있는 것이다. 南道의 山僧 草衣와 세도가의 기린아 秋史의 아름다운 友情을 우리는 조선조 말의 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들의 삶을 음미하며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맺고 교유(交遊)한 곳을 필자는 40여 년 간 우정을 나눈 친구들과 함께 다녀오면서 그들과 함께 다시 한번 진정한 의미의 우정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龍宮里)에 秋史의 고택이 있다. 추사는 1786년 6월 정조 10년에 조선조 세도가 집안인 김노경(金魯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조부인 김흥경(金興慶)은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부인 김한신은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인 화순옹주에게 장가를 들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짐으로써 종척(宗戚)이 된다. 또 할아버지(김이주)와 10촌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가 영조의 계비가 되어 겹친 종척 가문이 되었다. 이로써 안동 김씨가 세도를 잡기 전, 추사 가문인 경주 김씨가 세도를 누리게 된다. 추사의 큰아버지인 예조참판 김노영이 후사가 없어 그에게 양자로 입적되니 월성위 궁의 봉사손(奉祀孫)이 되었다.
(추사 고택: 돌기둥 해시계 石年이 집 앞에 있다)
추사의 고택은 영조의 부마인 증조할아버지 월성위가 지은 집이다. 추사 사후 백여 년이 지나는 사이, 건물이 퇴락 되어 충청남도에서 이 고택과 그 일대를 매수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로 1977년 보수를 하게 되었다. 지금은 지방문화재 43호로 지정되어 안채, 사랑채, 문간채, 솟을대문 등으로 말끔히 정리되어 조선시대 사대부의 삶을 보여주는 전시장이 되었다. 사랑채 댓돌 앞에는 추사가 직접 새긴 석년(石年)이란 돌기둥 해시계 하나가 서 있다. 이 돌기둥은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추사가 제작한 것이다. 고택을 돌아보면 기둥마다 판각되어 걸려 있는 수많은 글씨가 우리들의 눈길을 끈다. 모두가 해동 제일의 추사가 남긴 글씨이련만 나와 같은 나그네가 그 뜻을 느끼기보다는 붓의 운필을 따라 다니다 보면 획마다 뻗쳐 있는 힘의 리듬을 느낄 수 있다.
(추사 증조 할머니 화순옹주 정려문)
고택 바로 옆에 추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려문이 있다. 이 정려문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나온 최초의 열녀문이다. 월성위 김한신은 왕의 부마가 된 후에도 영화를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언행이 엄정하였고 옹주를 깊이 사랑하며 선비와 같은 평범한 생활을 보내다가 38세로 세상을 먼저 요절하였다. 그의 부인 화순옹주 또한 비록 영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지만 인효정숙(仁孝貞淑)하고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면서 지내다가 남편을 여의게 되니, 십여 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주야로 통곡하다가 남편의 뒤를 따라 갔다. 사위가 죽자 영조는 옹주에게 다시 대궐로 들어 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고 죽음을 택한 것이 못내 서운하여 정려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일 정조가 이 열녀문을 내렸다고 한다. 요즈음에는 들을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얘기이다. 월성위와 화순옹주의 무덤은 정려문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그들의 마음을 엮듯 합장되어 있어 나의 발길을 오랫동안 머물게 한다.
(추사 고조부 김흥경 묘와 그가 북경에서 갖고 와서 심은 白松이 묘앞에 서 있다)
추사의 중시조인 김자수(경주 김씨)는 고려말의 성리학자로 고려의 충절을 지키고자 충청도 관찰사 직위를 버리고 은거하던 중 태종 방원이 형조판서로 부르자 한양 가는 길에 정몽주 묘소에 이르러 자결함으로써 절의를 빛낸 가문의 후손이다.(고려사열전 33권. 김자수전) 그로부터 5대를 내려와 서흥부사가 된 연(堧)은 대도 임거정을 토벌하고 안주목사를 지냈는데 그가 바로 이 곳 가야산 서쪽 취령봉 아래에 터를 잡은 것이 한다리 김문(金門)이 시작된 것이다. 그 후 추사의 증조부 월성위는 이 곳 한다리의 용산, 오석산 일대를 친산(親山)으로 사들였다. 그는 이 곳에 부모의 산소를 쓰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영조가 하사한 둥궁리 일대에 향저를 지었다. 가야산을 둘러 싼 예산, 서산, 홍성, 태안과 아산 등지를 우리는 내포(內浦)라고 부른다.내포 땅은 기암절벽을 이루는 절경은 아니지만, 비산비야(非山非野)와 같은 들판과 구릉이 연결되어 굽이치는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고, 낮은 구릉지대는 농경지로 적당하여 곡식과 채소가 부족함이 없고, 산과 바다를 겸하였으니 산해물산이 풍부하여서 예로부터 이곳 사람들의 생활과 인심이 넉넉하였다. 더구나 서울과는 하루 뱃길에 불과한 거리에 있어 서울의 세력 있는 많은 사대부들이 이 곳에 농토와 집을 두고 근거리를 삼아 왔다. 특히 지세가 한쪽으로 막히어 있어, 임진, 병자 두 난리의 피해도 이 곳에는 미치지 아니 하였다. 지형과 인심이 부드럽고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무슨 연유인지 내포 땅이 배출한 역사적 인물은 온화한 성품이기보다는 개성이 특출하고 기골이 강한 사람들이 많다. 고려의 충신 최영 장군을 비롯하여 보우 대사와 중 신돈, 사육신의 성삼문, 임진왜란의 이순신, 김대건 신부, 자결한 구한말 의병장 최익현, 개화당 김옥균,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윤봉길 의사, 상록수의 심훈, 만해 한용운, 남로당의 박헌영, 화가 이응로, 그리고 조선후기의 예술가 추사 김정희 등 모두가 우리나라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다 떠나신 분들이다. 가야산의 정기가 내포 땅을 항상 감돌고 있어, 이러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것 같다.
지세의 대부분이 낮은 구릉인 이 곳에 유일하게 용산이라는 낮은 산이 있다. 이 산 양끝이 봉우리를 이루는데 북쪽이 '앵무봉'이고 남쪽이 '오석산'이다. 앵무봉아래에 추사의 생가와 그 분의 묘소, 증조부모의 묘소, 고조부의 묘와 백송이 있다. 오석산 중턱에는 백제 때 창건된 화엄사가 있는데, 당시 추사의 증조부가 재건하여, 추사 댁의 집안 절이 되었다. 추사가 태어날 무렵 천연두가 만연되어 추사의 어머니는 세도가 마을인 서울의 장동을 떠나 예산으로 내려와서 출산하였다 한다. 이 산 아래에서 태어난 추사는, 유년시절 서울 장동의 능소꽃 불게 피던 월성궁으로 올라갈 때까지 자주 이 절에 놀러 다녔으며, 그 곳 스님들과도 친히 지냈다 한다. 추사는 유년기에 고향의 산과 절에서 받은 인상을 잊지 못하여 유배에서 풀려난 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다녔던 봉은사에서 불교에 귀의코자 몸과 마음을 준비하였다 한다. 노고지리 지저귀고, 아지랑이가 피는 따뜻한 봄 날 혹은 아침 안개가 온 삽교평야를 뒤덮었다가 깨끗이 개이는 모습을 추사는 가끔 오석산의 남쪽 기슭 소봉래(小蓬萊) 암벽 위에 서서 바라보았다. 이를 추사는 연강첩장(煙江疊障)이라고 한다.
추사고택에서 북쪽으로 앵무봉을 끼고 2Km쯤 돌아가면, 조수물이 드나들던 삽교천에 다다른다. 1868년 오페르트 일행이 덕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친산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던 때, 100여명의 무장병력을 실은 배 60톤짜리 '그레타호'가 침입한 강이 바로 이 삽교천이다. 옛날에는 무척 넓었다는 이 강가에서 추사는 낚시를 즐겼다. 그래서 그의 호를 노어초(老漁樵)라고도 하였다. 대망을 품은 사나이, 이씨 왕조의 중흥이라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흥선군 이하응은 풍수지리설을 믿고 있었다. 내포 땅에는 덕산 가야산의 二大王子之地(2대가 왕위에 오를 자리)와 홍성군 광천의 萬代榮華之地(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자리)인 두 곳의 명당자리가 있다는 지관의 말에 흥성군은 단연코 二代王子之地인 덕산의 가야산을 택하고 자기 부친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만대의 영화보다는 짧은 기간이지만 권력을 잡아보겠다는 뜻이다. 그 후 7년 후에 영특한 차남을 얻고 그가 12살이 되었을 때 왕위에 오르니, 이장 후 19년만에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잡게 되고 순종까지 2대에 걸쳐 왕의 보위를 누리게 된다. 인간의 가장 큰 욕심인 '권력욕'의 한 면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대원군 부 남연군의 묘: 二大王子之地)
그 무렵에는 누가 뭐래도 조선 제일의 세도가는 경주 김씨였다. 위로는 왕실과 겹겹의 사돈이요, 영의정을 위시해서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냈고 당대에도 일가 20여 명이 지체 높은 권좌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추사는 가장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물론 생부 김노경도 추사를 장차 가문을 이끌어 갈 재목으로 믿었다. 그 추사가 어쩌다 초의 스님과 사귀자마자 그만 그에게 폭삭 빠져 버린 것이다. 이조판서인 아버지 김노경은 그것이 걱정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이 사귀는 친구에 대한 부모의 관심은 큰 것이다. 정쟁과 당파 싸움이 심하였던 조선조 때, 정부요직에 있는 추사가문인지라 승려와 지나치게 가까운 것은 출세에 지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느 날 김노경은 아들의 교우관계를 직접 살피기 위하여 한 달 여의 여정으로 직접 초의를 만나기로 결심하였다.
초의가 한양에 올 때 만나 볼 수도 있었지만 그가 평소 어떤 생활을 하는지를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해남 대둔사 일지암까지의 여정은 요즈음도 차를 타면 하루종일 걸리는 거리인데 당시에는 서울에서 해남까지 2주일은 걸렸다. 때아닌 이조판서의 나들이에 해남이 발칵 뒤집혔지만 김노경은 바로 초의가 있는 일지암으로 가서 그를 만났다. 김노경은 해남현 동헌에서 유숙하기를 간청하는 현감을 물리치고 초의와 함께 토굴과 진배없는 일지암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행자가 장만한 산나물과 우거지 국으로 저녁공양을 마치고 밤이 새도록 담론을 나누었다. 화제는 경서, 詩作, 금석, 서화 그리고 일상 다반사에 이르기까지 거침이 없었다. 일지암 토굴 뒤 안에는 솟아나는 샘물로 초의가 손수 끓인 차를 연거푸 들었다. 노경은 유천으로 끓인 차를 소락( 소酪:우유를 가공하여 만든 진미)같다고 감탄하였다. 김노경은 흐뭇한 마음으로 초의에게 넉넉한 미소를 보낸다. '과연 내 자식이야, 더는 시험하고 알아 볼 것도 없다. 이만한 인물이니 正喜가 빠질 수 밖에…'
일지암을 찾아
예산을 떠나 우리 일행은 국토의 숨결이 다하는 해남의 두륜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대둔사(대흥사)와 일지암을 찾았다. 신라 말기나 고려 초에 건립된 대둔사는 서산대사가 1605년 묘향산에서 85세 때 입적한 후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안치하고부터 유명해졌다. 서산대사는 이 곳이 바다와 산에 둘러 싸여있고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니 외침을 받지 않고 만세토록 훼손되지 않을 땅이라 하였다. 이러한 연유인지는 몰라도 서산대사 이후 6·25 동란 중에도 피해가 없었고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한 명찰이 되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 주위에 무질서하게 있었던 식당, 상점, 여관 등을 절에서부터 2Km이상 떨어진 외각 지역으로 전부 이전하였다. 이제는 대둔사로 들어가는 길이 조용한 숲길이 되었다. 소나무, 떡갈나무, 벚나무, 단풍나무 등의 노목들이 하늘을 가리는 나무터널로 장관을 이룬다. 봄·여름·가을·겨울 어느 계절에 와도 제 빛을 한껏 돋우고 있다. 대둔사 입구에 유선 여관이라는 운치 있는 한옥이 있는데, 철거대상에서 제외된 이 집은 아직도 장작불을 때는 전통한옥인지라 목욕탕, 화장실이 불편하지만 옛날 구들장의 멋을 간직하고 있어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 여관에 내가 가끔 투숙하는 이유는 우선 조용한 山寺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하룻밤을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집에 있는 두 마리의 진돗개 누렁이가 보고 싶어서이다. 이 개들은 참으로 영리하다. 이 집에 투숙하는 손님을 반갑게 맞아 줄 뿐 아니라 제일 먼저 새벽에 일어나는 손님을 인도하여 같이 등산도 하고 대둔사, 일지암 까지 어두운 새벽길을 앞장서서 안내한다. 이 곳에서 처음 찾아와서 투숙한 날, 우리는 이 두 마리 진돗개의 안내를 받기 위하여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제일 먼저 일어나 누렁이를 찾아 머리를 쓰다듬으니 반갑게 꼬리치며 앞장서 간다. 대둔사 대웅전을 보고 난 후, 일행중 한 친구가 다음은 어디로 갈까하고 망설이고 있으니 누렁이가 잽싸게 앞장서서 천불전, 극락전, 지장전등을 차례로 안내하고 난 후 일지암을 향하여 산길을 이끈다. 새벽이라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초의 선사의 영정을 모신 표충각은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산길을 약 30여분간을 올라가니 초의 선사가 지었다는 일지암이 어스름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해동의 茶聖 草衣선사가 39세 때인 1824년 이 곳에 띳 집을 짓고 '뱁새는 항상 한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가지(一枝)에만 있어도 편하다'는 詩의 내용에서 一枝庵이라고 이름하였다. 조그마한 연못과 왼쪽에는 초의의 茶室인 초암(草庵), 오른쪽은 기와를 얹은 선원(禪苑)이 있다. 초암의 부뚜막에는 곱돌 솥을 놓아 물을 끓이게 하는 차 부뚜막을 만들어 둔 것이 다른 부뚜막과 다른 점이다. 주위에는 그 옛날 초의가 심어 놓은 차나무로 덮여 있다. 이 곳에서 녹차 한잔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산사(山寺)의 새벽공기가 싸아하니 두 볼을 흘치고 달아난다. 어디선가 茶香이 흘러와 코끝을 스치는 듯도 하다. 이러한 마음을 아는 듯 같이 간 친구 東巖(임 영남)이 배낭을 푼다. 주섬주섬 배낭 속에서 茶器와 찻잔이 나오니 어이 반갑지 않으랴. 이미 알고 동암은 서울에서부터 茶器를 준비해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초암 툇마루 턱에 앉아서 차 한잔을 다려 마신다. 초의 스님과 추사의 우정이 이 茶로 이어졌듯이 우리도 茶를 다리는 정성처럼, 茶에서 풍기는 은은한 香처럼, 가슴과 가슴으로 영원한 우정이 따뜻하게 흐르기를 기원해 본다. 茶山 정약용도 秋史 김정희도 외로운 유배 생활 중에 가장 가까운 벗은 한 잔의 茶였다. 이들이 외로울 때, 함께 차를 즐기며 위로를 나눈 이는 초의 스님이었다. 다산의 실학, 추사의 금석학, 소치의 남종화. 이들의 학문과 예술은 한잔의 차를 소중히 다룬 초의 스님의 격의 없는 우정과 茶道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알지암: 현판은 剛庵 宋成鏞<1913-19999>의 글씨)
초의 스님은
초의는 1786년 4월 5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추사보다 두달 먼저 태어났다. 속성은 張씨, 법명은 의순(意恂)이다. 다섯 살 때 물에 빠진 것을 어느 스님이 구해준 것이 속세를 떠나게 된 동기가 되었다. 15세(1800년)에 나주군 茶道面의 운흥사에서 벽봉(碧峰)스님께 의지하여 중이 되었다. 20세(1805년)에 대둔사의 완호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고 21세때 大敎를 수료하였다. 草衣는 완호 스님이 준 그의 법호이다. 그는 24세 때에 강진의 다산 초당으로 찾아가 茶山 정약용을 뵙고 그로부터 유학을 공부하였고 茶山과 차를 나누었다. 다산과 친교를 맺어 온 백련사 주지 스님이 급환으로 열반하기 전 초의를 다산에 소개하였다. 초의는 팔자에 역마살이 끼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한양 나들이가 잦았다. 조선의 최남단 해남 대둔사에서 도보로 한양을 내왕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그는 한양에 오면, 으레 도봉산 아래 청량사에 머물렀다. 초의가 청량사에 와 있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지면 '촌놈의 중'을 만나려고 내 노라는 명사들이 줄을 이었다. 30세(1815년)에 처음으로 추사 김정희를 만났으며 다산의 아들 정학연, 학유 형제, 정조의 사위 홍현주, 이재 권돈인, 위당 신관호 등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 당파를 초월하고 당대의 수 많은 명사, 유학자, 예술가들과 사귀었다. 왜 그랬을까. 그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당시의 대유학자 신헌구는 그의 책에 초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양의 명사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덕망 높은 수도승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구나 친근할 수 있는 인간성 때문이다. 특히 우리들이 그를 아끼는 것은 그의 詩, 書, 畵 및 茶道가 밖으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차근차근 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의 선사)
우리나라 남종화(南宗畵)의 대가로 詩와 글씨(書)에까지 뛰어 난, 허유(許維) 소치(小癡)는 초의와 추사를 만나지 않았던들 진도 섬에서 민화나 그리다가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진도에서 그림공부를 위해 27세가 되는 1835년 바다를 건너 일지암의 초의 스님을 찾는다. 그는 초의 밑에서 茶道를 익히며 그림공부를 하였다. 초의의 추천으로 허유는 추사에게서 본격적인 그림공부를 배워 대가를 이루게 된다. 강진의 다산초당(茶山草堂), 진도의 운림산방(雲林山房), 세한도의 고향 제주도 대정의 추사 적거지(謫居地)를 다녀보면서, 茶를 통한 추사와 초의의 교유와 두 사람의 제자인 남종화의 대가 진도 출신 허소치의 사제지간의 사랑, 정다산과 초의 스님의 종파를 초월한 관계를 계속해서 다시 얘기 하고자 한다. (계속)
199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