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사기 강해(6)
쫓아내지 못한 이유
본문 : 삿1:27-36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출애굽 시키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를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으로 진군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신 것도...,
사막에서 굶어 죽지 않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신 것도,....
길을 잃지 않도록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것도,.....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신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그리고 점령하는 땅에서
이방신을 믿는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게 하신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단지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그 땅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그 땅에서 이방 민족들을
다 쫓아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다
몰아내게 하신데 에는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진멸의 의미).
바로 가나안 문화의 특징 때문입니다.
가나안 문화는 풍요를 위해
눈에 보이는 우상을
숭배하는 문화입니다.
눈에 보이는 않는
영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기 쉽습니다.
음란과 쾌락의 문화입니다.
신상 앞에서 음란한 행위를 하면서
풍요를 기원합니다.
이러한 문화는 사회 자체를 타락시킵니다.
오늘날에도 음란과 쾌락을 추구하는
세상 문화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세상 문화를 이길 수 있는
건전한 크리스천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은
땅을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
마지막까지 가나안의 이방 민족들을
몰아내는 것에서는 실패하였습니다.
절반의 승리요,
절반의 순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앞장을 섰지만
‘철 병거’를 두려워하여
쫓아내지 못한 유다 지파의
잘못이 큽니다.
첫 단추를 잘못 낀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뒤를 이은
지파들의 연속적인 불순종으로
이어졌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예루살렘에 들어온 나약한
베냐민 지파는 .....
본래 그 지역에 살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요셉 지파는 벧엘이라고 하는
매우 상징적인 곳을 점령했지만 .....
그 과정과 방법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룰 수 없게 하였습니다.
겉으로는 성공적인 것 같이 보여도
실상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실패였습니다.
비밀통로를 알려 준
사람을 살려 보내 줌으로써......
(그가 헷 족속 가운데로 가서
성읍을 세우고 그곳 이름을 ‘루스’라고 지음) .....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쫓아내라고
말씀하신 헷 족속을 온전히
쫓아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데는 성공한 듯이 보였지만....
그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우는 일에는 실패한 것입니다.
이러한 실패는 이어지는
다른 지파의 점령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므낫세 지파의 실패>
오늘 본문은 나머지 지파들의
가나안 정복 이야기입니다.
먼저 므낫세 지파의 정복이야기입니다.
<27-28절>
27절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28절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요셉 가문이 연합군을 구성하여
벧엘을 정복한 후에,.....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는
각각 자신들에게 분배받은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 본문 27절을 보면 므낫세 지파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결론 짓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27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던 땅을 아무런 저항 없이
그냥 내어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
결사적으로 저항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땅을 점령하려는
므낫세 지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므낫세 지파도 사생결단의 각오로
전쟁에 임해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 전쟁을 치르는
모든 이들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상대하야 하는 죄의 세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강력합니다.
죄의 세력, 사탄의 세력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필사의 항전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싸움에 임하는 자세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명령합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깨어 기도하며 맞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엡6:10-18).
그만큼 치열한 싸움이라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죄의 세력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의 말씀에서 죄의 세력과
싸우는 과정이 얼마나 치열하고
처절한지를 설명하십니다.
<마5:29-30>
29절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절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책망하면서.....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였다”(히12:4)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는
다 된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사생결단의 자세로 죄와 맞설 때
사탄의 세력은 쫓겨 가는 것입니다.
<쫓아내지 못한 이유>....
그런데 므낫세 지파는
사생결단의 자세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절(28절)을 보니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임이 드러납니다.
28절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피 흘려 싸우기 보다는 적당히 타협한 후에,
훗날 그들을 노예로 삼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탐욕’이 그들 마음에 자리 잡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힘이 없고 믿음이 없어(불신앙 때문에)
그들을 쫓아내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강성한 후에도 그들을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탐욕’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에
큰 해를 끼친 ‘아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탐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너지는 것을 아간을 통해 이미 경고하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행5:1-11)와 .....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데마’(딤후4:10)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탐욕’은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우리의 발목을 잡는 올무입니다.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약1:14-15>
14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렇습니다.
강제 노동을 통해서
‘공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곧 경제적인 이익을 취할 수 있다는
‘탐욕’에 눈이 멀어 그들과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탐욕’ 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개구리가 올챙잇적
생각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어디에서
구출 받아 가나안 땅까지 온 것입니까?
예, 애굽의 압제에서,
바로의 압제에서,
‘강제 노역’에서 구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다른 족속을
자신들의 노예로 삼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거룩한 뜻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세우시고자 했던 참 하나님이 다스리는 ...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을 무시하고
부끄럽게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는 소위 ‘강제 노동’이 없는 나라입니다.
누구나 평등하고, 누구나 자유롭고,
누구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나라를 약속의 땅에 세우는 것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 지파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는 대신에
그들에게 노역을 시켰던 것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식 사고방식에 젖은
사람들은 므낫세 지파를
변호하고 싶을 것입니다.
시대를 앞서간 매우 지혜롭고
합리적인 지파라고.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거나
그냥 쫓아내는 것보다는,
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이득입니까?
오늘날 이러한 사고방식이
비록 노예제도는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소위...
‘비정규직’이나 ‘파견직’이라는 이름으로
현실화되어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해도
같은 보상을 받을 수 없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구조적인 차이를 만들어냈습니다
(기독교 기업으로 이름난 이랜드,
그러나 알바생의 임금을 착취 – 부끄럽다).
지금 이 시대는
사다리가 부러진 시대입니다.
자기가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치워버렸습니다.
이러한 우리 사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좁히는 역할을 헤야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입니다.
정치의 역할입니다.
투표 잘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우기 위하여...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을 위해 가르치고,
기도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기타지파의 연속적인 실패
-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므낫세와 마찬가지로
그의 동생 에브라임도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29절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
그 다음 스불론 지파도
마찬가지입니다.
30절 “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
스불론 지파 역시 므낫세 지파가
보여준 패턴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아셀 지파에게서는
큰 변화가 감지됩니다.
<31-32절>
31절 “아셀이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절 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큰 변화가 눈에 보입니다.
므낫세 지파나 스블론 지파의 경우에는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였다’고 했는데.....
이제는 전세가 역전이 되어
‘아셀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고’있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해서 세를 주는 것이 아니라
세를 사는 느낌이 듭니다.
이러한 표현은
납달리 지파에서도 나타납니다.
33절 “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더라.”
납달리 지파가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에게
노역을 시키기는 했지만....
그들 역시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 땅의 주인입니까?
지금은 납달리 지파가 군사적인 힘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어서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키고 있지만,
언제 주객이 전도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급기야 이스라엘 족속과 가나안 족속의
주도권이 완전히 뒤바뀐
최악의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바로 단 지파의 경우입니다.
<34-36절>
34절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35절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36절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
단 자손이 분배받은 땅은
팔레스타인에서 아주 비옥한 평지입니다.
그런데 거기로 들어가려면
산지에서부터 골짜기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이 산지에서 내려오지 못하도록,.....
그 길목에 있는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결심’하고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단 자손은 아모리 족속의 힘에 밀려
평지로 내려오지 못하고
산지에 갇혀있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단 자손은 자신들에게
분배받은 땅에 제대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방황하다가 후에
팔레스타인 북쪽 끝에 있는
‘라이스’로 이주하여,
그곳에 ‘단’이라는 이름의
성읍을 세우고
거주하게 됩니다(사사기 18장에 자세히 기록).
물론 훗날 아모리 족속들도
결국에는 노역을 하게 되었지만.....,
단 자손이 아니라 ...
요셉 가문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힘에 눌려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이스라엘 족속과 가나안 족속의
주도권이 완전히 역전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와 타협한 결과입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어지니
나중에는 끼울 구멍조차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은 이와 같습니다.
배에 작은 구멍을 방치하면
결국은 침몰하고 마는 것입니다.
죄를 방치하면 결국은
죄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에 실패하고
결국 사사시대의 암흑기를
맞이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신앙적 안일함과 불순종,
그리고 탐욕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도
적당히 신앙생활하려는
신앙적 안일함과 불순종,
그리고 탐욕은 결국
우리를 파멸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각 지파의 실패를 거울삼아
신앙적 나태와 불순종을 버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고
치열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이 !
죄의 세력,
사탄의 세력과 싸워
끝내 승리고 울리고....
하나님께로 칭찬 듣는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