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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여섯 번째 이야기
독립운동가 박열
약력
1919 서울, 문경에서 3·1운동 참가
1922 흑도회, 흑우회 결성
1923 불령사를 조직하여 일왕 폭살 계획
1945 22년 2월간의 옥고 끝에 석방
박열(朴烈, 1902. 2. 3~1974. 1. 17)선생은 일제 강점기 동안 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중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18세의 나이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흑도회, 흑우회 등 항일 사상단체를 이끌어 온 그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의 와중에 일본국왕을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인해 그는 1945년 10월 27일 아키다(秋田)감옥에서 석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이라는 긴 시간의 옥살이를 치러야 했습니다. 해방 후 맥아더 정부에 의해 석방된 선생은 신조선건설동맹에 이어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단장을 맡았으며, 1949년 영구 귀국했다가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고 말았습니다. 북한에서 그는 조소앙, 엄항섭 등과 함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해 회장을 맡아 군대축소와 국제적 중립국화에 노력하였습니다. 1974년 1월 17일 서거하여 현재 그의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습니다.
선생의 집안은 누대로 전통적인 양반 가문으로 지방 사민(士民)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술국치 이후 자작농업과 소작료 수확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궁핍하였다고 합니다. 7세인 1908년부터 서당교육을 받았으며 10세 때에는 집에서 40리나 떨어진 함창공립보통학교에 다녔습니다. 이 지방 최초로 설립된 4년제인 보통학교에 통학하면서, 선생은 민족의식 형성에 큰 계기를 갖게 됩니다. 즉 1916년 3월 졸업식을 앞두고 조선인 선생님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그 동안 일본의 압력에 못 이겨 거짓교육을 시킨 것에 대해 눈물로 사과하며 조선역사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참여하였던 선생은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 다니는 치욕을 견딜 수 없다며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고향 문경에 돌아온 이후에도 선생은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로부터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탄압 만행을 전해 듣고, 더 이상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침내 1919년 10월 경 그는 도쿄로 가는 배에 몸을 싣게 되었습니다. 도쿄에 도착한 선생은 여느 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신문배달과 날품팔이,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인삼행상 등의 노동에 종사하였습니다. 이러한 험난한 고학생활 속에서도 그는 틈틈이 단기어학 전문학원인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다니며 학업에 전념하였습니다.
흑도회와 흑우회, 불령사 활동
도쿄 고학생 동우회와 혈권단 등으로 항일활동을 펼치던 선생은 김약수, 원종린 등 유학생들과 함께 1921년 11월 29일 첫 사상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하였습니다. 저명한 일본 아나키스트인 이와사 사쿠타로의 후원아래 다양한 항일투사들이 결집된 흑도회 기관지인 <흑도>의 발간책임을 맡아 창간호와 2호를 발간하여 항일세력의 규합과 선전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1922년 8월 니카다현 나가스가와(中津川)에서 조선 노동자들이 가혹한 노동착취와 학대로 다수가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진상조사 결과를 9월 7일 도쿄 YMCA에서 보고하기에 이르렀는데, 일본과 조선의 지식인들을 비롯해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이는 등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일왕폭살계획과 옥중투쟁
선생은 1923년 4월 중순경 흑우회와 별도로 ‘불령사’를 조직하였습니다. 조선인 15명과 일본인 6명 등 총 21명으로 조직된 불령사에서 선생은 정기모임을 통해 일본 아나키스트의 강연을 듣거나 국내의 파업투쟁을 후원하고, 사회주의를 매도한 조선기자를 폭행하는 등 반일 직접활동을 주도하였습니다. 나아가 그는 보다 적극적이며 파괴적인 의열투쟁을 펼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선생은 외국에서 폭탄을 반입할 방도를 논의하거나 직접 제조하려 하는 한편, 의열단의 중요간부인 김한을 만나 폭탄구입을 요청해 폭탄 50개를 반입하려 하였습니다. 세 번째에 걸친 폭탄 반입 실패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1923년 가을의 일본 황태자 결혼식 소식을 접하고 다시 거사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듣고 도쿄로 찾아온 김중한에게 폭탄구입 여부를 타진하였으나, 구입비용 때문에 잠시 보류하였습니다. 이때까지 선생은 폭탄을 구입해 이를 언제, 어디에 투척할 것인지 분명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선생과 가네코 후미코, 그리고 불령사 회원들은 9월 3일경 보호검속이란 명목으로 검속되었습니다. 일본경찰은 이어 ‘일정한 거주 또는 생업 없이 배회하는 자’를 명분으로 한 달간의 구류에 처하더니, 곧 불령사를 ‘비밀결사의 금지’ 위반혐의로 들어 구속 기소시켜 버렸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선생과 불령사를 오랫동안 감시해온 경찰의 사전계획에 의해 취해진 것입니다. 경찰의 취조 도중 선생의 폭탄구입계획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이때부터 일본정부와 검찰은 불령사를 폭동과 일왕 암살을 꾀한 조직사건, 즉 ‘대역사건’으로 비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검찰은 이듬해 1월 27일 선생 부부의 폭발물 유입계획과 불령사 조직을 연결시켜 이 사건을 ‘대진재(大震災)를 틈탄 조선인 비밀결사의 폭동계획’으로 보도하였습니다.
선생은 검찰에 기소된 이후,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총 21회에 걸친 신문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사과정에서 그는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습니다. 특히 그는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죄인취급하지 말 것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조선 관복을 입을 것, 조선어 사용 등 4가지 조건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사법부가 그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임에 따라 그는 조선 전통관복을 입고 출두해 반말투로 답변하는, 초유의 법정투쟁을 벌인 것입니다. 나아가 미리 써 두었던 ‘음모론’과 ‘나의 선언’. ‘불령선인이 일본 권자계급에게 준다' 등의 글을 읽으며 일왕의 죄를 폭로하였습니다.
일본정부는 1926년 3월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1주일만에 특별 감형시킨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스스로 조작사건의 실체를 드러내 준 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형판결 후에 선생은 미소를 지으며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 하였고, 부인 가네코 후미코는 사면장을 갈갈이 찢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저항의지에 대해 일본 재판장까지도 감동하여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가 파면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해방 후 재일본거류민단 단장 활동과 납북
21세의 젊은 나이에 투옥된 선생은 1945년 10월 27일 홋카이도 변방의 아키다(秋田)형무소에서 44세의 중년이 되어 석방되었습니다. 실로 22년 2개월이라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최장의 수감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후 선생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전에 초대되어 귀국했으며, 고향을 찾아 부인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를 참배하고 친지들과 옛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재단법인 박열 장학회를 설립하여 후학들을 위한 장학사업에 뛰어 들었으며, 이듬해 5월 영구귀국을 결심해 돌아와 서울에 머물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했고, 사흘 뒤 인민군은 그를 북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북으로 건너간 이후 선생의 행적에 관한 자료는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와 함께 북으로 끌려간 다른 납북인사들의 소식과 함께 일부 전해질 뿐입니다. 그 중 주목할 만한 일은 그가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한 사실입니다. 이 협의회는 당시 그와 함께 북으로 끌려간 조소앙, 안재홍, 엄항섭, 김약수 등 민족 지사들이 남북한 정권 모두에게 자주적 평화통일 원칙을 촉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입니다.
선생을 비롯한 조헌영 등은 이 협의회에 몸담으면서 위원장과 최고위원 등을 맡으며 평화통일을 촉진하는 활동을 꾸준히 펼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72세를 일기로 영면하였고, 그 해 2월 남한에서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회가 열렸습니다.
이에 우리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지침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문을 돌리며 고생하면서 ‘조국’ ‘애국’을 생각하는 사람이 몇 명이 되겠습니까. 이제 우리 국민들은 애국정신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서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자료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박열 [朴烈] - 일왕암살 누명으로 체포 (독립운동가, 김명섭,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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