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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和會(종교간 화합을 위한 모임) 會報
푸른 들소리[제 15권 5호](통권 257호)(2013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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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고대사, 두 민족으로의 진화에 관한 수상록
장 기 홍
古代동아시아의 고조선 부여 등 동이족은 물결처럼 남으로 동남으로 이동해 갔다. 한반도에 머문 무리들과 머물러 살다가 현해탄을 건너가 왜인(倭人)이 된 무리들이 있다. 그런 큰 흐름에서 보면 한일 두 민족은 조상이 같다고 할 수 있다. 해협이 가로놓여 두 민족으로 갈라졌을 뿐이다. 형제나 이웃 간에 사이가 나빠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므로 지금의 한일 간의 불화는 어찌 보면 예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일 두 민족이 지금처럼 미워하고 다투면 서로 손해요 자해(自害)라는 사실이다.
한일 두 민족은 자세히 보면 다르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모습이 서로 닮았기 때문에 서양사람들은 흔히 구별을 못하겠다고 고백한다. 인류가 다 형제라면 한일 간의 우리는 가까운 형제이다. 미움을 극복하고 갈등을 지양할 필요성에 직면했음을 깨닫고 이 필요에 순응하면 유익이 보상으로 주어질 것이다. 과거를 돌아다보고 역사를 아는 일이 요긴하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쓴다.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의 이주는 BC 400년경 시작되었다 한다. 이주민 마을(‘무라’)은 흔히 고국의 이름을 붙여져 지금도 ‘가라’ ‘백제’ ‘고려’ ‘신라’로 불리는 마을과 신사(神社)를 만나볼 수 있다. 고향이나 고국과는 실제적, 정서적 유대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 중에는 출신국의 분국(分國)이라 할 만한 집단도 있었을 것이다. 중국 사서(史書)에는 ‘백여국’ 혹은 후에는 ‘삼십여국’으로 나뉘어 서로 싸왔다고 적혀 있다. ‘삼십여국’의 ‘왜국대란’의 시기를 거쳐 ‘야마타이’나 ‘야마토’ 같은 패자가 출현했다.
일본의 죠몬(縄文)시대는 원주민의 신석기시대로서 무늬가 독특한 토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야요이(彌生)시대(BC300-AD300)는 주로 삼한(三韓) 사람들이 벼농사와 철기문명을 가지고 가서 살던 시대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청동기시대를 거치지 않고 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바로 이어졌다. 야요이시대에는 남한과 큐슈가 벼농사와 옹관묘 등 공동문화를 가졌었다. 일본의 고어(古語)는 고구려말과 공통성이 많다 하는데, 고구려는 부여에서, 부여는 고조선에서 나왔으므로, 같은 고대어에서 한국어와 일본어가 파생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언젠가 한국대통령을 맞은 일본천황은 “귀하의 선조들은 우리 조상들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오셨다”고 감사했다. 그러나 ‘우리 조상’, ‘당신 조상’의 분별은 다소 엉뚱한 것이니 그들이 살던 당시에는 구별이 없었다. 재일(在日) 학자 김달수 선생은 가르칠 목적에서가 아니라 새 터전을 찾아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넜던 개척민이었다고 강조하면서, 마치 유럽사람들이 미국을 개척했던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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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 강 병 조.
일본 역사학자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는 황실 도서관에서 근무하다가 동경대학 교수가 되었는데 신도(神道)가 한반도의 제천(祭天) 고속(古俗)에 유래함을 밝힌 논문 때문에 신도가(神道家)와 국가주의자들의 배격을 받아 교수직에서 쫓겨났다(일본인명사전에 의함). 국가주의적 편견 때문에 정견(正見)이 박해를 받는 한 예에 불과하다. 고대한일史를 연구한 홍윤기 박사는 일본인들도 우리처럼 단군의 자손이라고 했다. 일제가 한일동조(同祖)를 한일합방의 구실로 써먹은 일이 있어서 한일동조 자체를 금기로 여기지만 일제의 나쁜 저의만 가려서 버리고 선의를 취하면 된다.
한반도인이 건너가서 일본인이 되었다면 왜 그들이 후에 임진왜란이나 일제침략을 하게 되나를 두고 필자는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그것이 바로 진화의 한 양상임에 생각이 미쳤다. 자연히 내 서가에는 한일고대사의 서적이 모였다. 죽기 전에 한일고대사를 정리해보아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이것저것 책을 읽는 동안 그림이 떠올라 이 수필을 쓰게 되었다.
일본인들에 대한 혈통 조사를 하면 한반도인의 유전요소가 80-90% 라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선조가 죠몬인이라고 배운다. 죠몬인들과도 일부 혼혈이 되었겠지만 압도적인 혈통을 한반도계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죠몬인이 조상이라는 정서를 가짐으로써 독립정신을 가지려 한다.
또 일본학자들은 대륙의 문화가 한반도를 경유하여 들어왔다고 애써 대륙과 문화전파를 강조한다. 거기 대해 최재석 교수는 이주가 먼저요 문화는 따라 들어갔다고 강조한다. 철과 철기를 가지고 갔기 때문에 정복자가 될 수 있었으나, 인구가 성글던 당시에는 빈 땅을 찾아 정착하면 원주민과의 다툼을 피할 수 있었으리라. 또, 원주민은 물고기를 잡아먹던 자연인이었으므로 쌀농사를 짓는 개척민과는 생태계가 달랐다.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연안 곳곳에서 발굴되는 고지(高地)성 주거와 환호(環濠)가 성했던 시대는 사서에 있는 왜국대란의 시기와 비슷해서 2세게 말 3세기 초에 이주자 마을들끼리의 약탈과 방어의 흔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백여국이, 후에는 30여국이 얼마나 치열한 투쟁을 했는지 창칼에 찔린 유골이 무수히 발굴되고 있다.
고대에 한반도로부터 배를 타고 파상(波狀)적으로 이주했던 집단들은 주로 망명객과 피난민이었다. 가서는 거기에서도 살벌한 투쟁에 휘말렸다. 철과 기술을 지참하는 후착민(後着民)은 강병(强兵)을 꾀하던 수장들로부터 환대를 받았으리라.
소위 ‘왜국大亂’으로 싸움이 끊이지 않았을 때 무당(巫堂) 여왕이 나서서 종교적으로 통치하자 잘 다스려졌다는 기록을 보면 야요이시대 후기는 아직도 제정일치(祭政一致)가 유효하던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30개국이 여왕 아래에서 소국들의 연합체로 통일되었던 야마타이국을 상상할 수 있으며 그것이 기내(畿內)의 야마토國으로 이행했던 것 같다.
야마토(大和)정권은 AD350년경에는 호족들을 제치고 패자(覇者)로 떠올랐다. 그 정부는 불과 몇 십년 사이에 왜(倭)군을 한반도로 보내어 신라 수도 경주(금성)를 위협했다. 마침내 왜군의 경주 입성(入城)이 경각(頃刻)이었을 때 신라왕의 요청으로 400년경 광개토대왕의 원정이 있게 된다. 보기(步騎)5만이 싸운 상대는 주로 왜군이었으니 남한에 와 있던 그들이 대군(大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야마토국(國) 수장(首長)은 472년에는 대왕(大王)이라, 507년에는 천황(天皇)이라 자칭한다. 672년에는 ‘일본’이란 국명을 썼고, 8세기 초에는 별개 민족으로서의 독립선언 같은 사서들(古事紀와 日本書記)이 편집된다. 이들 초기사서(史書)는 백제기(百濟記)라는 백제역사서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한다. 그들은 자기네 역사를 꾸밀 때 백제의 역사를 마치 왜의 역사인 것처럼 바꾸어 썼던 것이니, 그들은 백제인을 향하여 “우리가 남인가?’ 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기로 갈수록 많은 백제인이 야마토 조정을 이루었으므로, 우리는 허심탄회하게 당시의 처지로 돌아가 그들의 정서를 이해해야 한다.
차례차례 현해탄을 건너갔던 모두가 일본열도라는 격리(隔離)된 도가니 속에서 일본민족이 되어갔다. 이러한 민족형성은 진화학(進化學)에서 말하는 ‘격리(隔離)에 의한 진화적 분기(分岐)’에 해당하고, 철학에서는 변증법에서 예상되는 발전과정의 소산이다. 본래는 하나였으나 모순, 갈등, 대립, 투쟁으로 두 민족이 되는 것이다.
한사군(漢四郡)이 섰던 BC 108년부터 한(漢)문화는 반도와 열도에 쉬 흘러 들어갔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 AD 25- ) 때에는 “왜인(倭人)들은 百餘國으로 나뉘어 있는데, 해가 바뀌면 낙랑군에 와서 (총독을) 뵙는다”고 기록되어 있다(漢書地理誌).
AD 57년에는 왜의 백여 나라 중 남쪽에 위치한 “노국(奴國)의 대부(大夫)가 와서 조공했고....광무제(光武帝)가 인수(印綬)를 내렸다”(後漢書東夷傳). 책봉(冊封)이 되었다는 증거로 금인(金印)이 주어졌다. 奴國왕의 사신이 낙양까지 가서 광무제로부터 받았다는 그 도장은 세월과 흙에 묻히었다가 1784년 큐슈(九州) 후쿠오카市 하카다만(灣) 시가(志賀)섬에서 밭을 갈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필자는 짐짓 志賀섬 현지를 둘러보았다. ‘漢의 황제가 위임한 奴國王印’(漢委奴國王印)이라 새겨진 이 도장은 지금 후쿠오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세월과 흙에 가리웠다가 발견된 그 도장이 묻혔던 밭이 바로 노국 정부가 있던 자리였으리라. 奴國 곧 지금의 후쿠오카는 한반도에서 현해탄을 건너면 처음 닿는 땅이니 한반도로부터의 이주민이 세운 나라였음에 틀림없다.
AD 107년(安帝 원년)에는 “왜의 국왕 사승(師升) 일행이 와서 황제를 뵙고 노예 160인을 바쳤다.” 왕, 노예, 대부가 있는 계급사회였다.
AD 147-189년: “...30여개국으로 난립한 왜가 오래 서로 공벌(攻伐)했다”(魏志倭人傳). 이른바 ‘왜국대란(倭國大亂)’의 시기이다.
3세기 前半, 30여국을 아우른 연합국가 야마타이(邪馬臺)국이 생겨났다. 샤마니즘적 신도(神道)적 제정일치의 나라 야마타이를 위(魏)왕은 상당히 우대하여 여왕 히미코에게 친위왜왕(親魏倭王)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여왕 히미코(卑彌呼)가 귀도(鬼道)로서 다스리니 평온해졌다” 했으니, 그 이전 남자 왕들이 다스릴 때는 왜국대란의 난세(亂世)였다가 그녀가 무교(巫敎) 혹은 신도(神道)로서 종교적으로 다스리니 평화가 왔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녀가 AD 247년경 죽으니, 무덤이 백(百)여보(餘步)나 되고 순장된 노비가 백여명이었다. 그 후 남(男)왕이 들어서니 복종하지 않고 서로 싸워 천여 명이 죽었다. 그러나 히미코의 13세 된 종녀(宗女) 대여(臺與)가 왕이 되니 온 나라가 조용해졌다.”
248년, 대여가 위(魏)나라에 조공했다. (위나라는 265년에 멸망.)
266년, 臺與가 서진(西晉)에 조공했다. 이것을 끝으로 대중외교는 근 150년간 끊어진다.
왜의 대(對)중국 견사(遣使)가 재개(再開)된 해는 AD413년이다. 그리고는 421-478년간 宋 조정에 ‘왜 5 왕’이 차례로 사신을 아홉 차례나 보내게 된다(晉書). 후에 천황으로 받들어진 이들 야마토(大和) 5왕은 사신을 통하여 중국황제로부터 책봉(冊封)을 받으려 했다. 요구조건이 적힌 신청서를 제출하면 황제는 검토한 후 인증인(認證印)을 발행한다.
421년 왜왕 찬(讚)이 사신을 보냈다. 讚이 과연 어느 천황이냐를 두고 연구한 학자들은 제 15대 응신(應神)천황, 16대 인덕(仁德)천황, 17대 이중(履中)천황을 각각 주장했다. 지금은 履仲천황이라는 견해가 지지를 얻고 있는데 그 견해는 알려진 제위기간(400-405)의 수정을 전제로 한 것이다.
438년의 사신은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秦韓), 모한(慕韓)의 6국에 대한 군사통제권을 요구(要求)했다. 그러나 황제는 다만 “왜국왕”의 호칭만을 허락했다.
451년에는 졸리다 못해 “왜, 가라, 신라, 임나, 秦韓, 慕韓의 안동(安東)대장군”이란 칭호을 허락했다. (사신의 거듭된 주청(奏請)에도 불구하고 백제에 대한 군사통제권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478년에도 백제에 대한 권한을 인정해 줄 것을 거듭 요구했으나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에 대한 권한만 인정만 받고 돌아왔다. 사신을 보낸 왕은 무(武)라고 기록되어 있다. 武를 웅략(雄略)천황(제위 456-479)이라고 보는 데는 학자들 간에 이의가 없다.
단적으로 말하면 왜5왕의 복안은 백제에 대한 군사통치권을 손에 넣자는 것이었다. 백제에 대한 욕심이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고대중국의 사서(史書)에는 왜(倭)기사(記事)가 AD 266년부터는 147년간 단절되었으니 이것이 소위 왜 기록의 ‘공백기’이다. 그 중간쯤(AD350경)에 야마토(大和) 정권이 탄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생물의 진화역사에 있어서도 어떤 큰 도약(跳躍)이 있을 때는 그 기록인 화석은 극히 희귀하여 잘 발견되지 않으므로 ‘missing link(미씽 링크)’라 불린다. ‘잃은 연결고리’라는 뜻이다. 그러다 화석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늘 신종(新種)임이 밝혀진다. 흡사하게도 일본고대사의 147년 공백기 동안 언젠가에 야마토(大和)라는 신생(新生)국이 탄생했다. 그 공백기는 국가 초산(初産)의 진통기 같은 것이었다.
자아(自我)에는 개인의 자아와 국가(민족)라는 자아가 있다. 일본이라는 자아가 AD350년경에 형성되었다면, 한반도의 삼국통일이 AD676년이니 한민족의 자아는 400년이나 늦게 형성되었다. 그 전에는 삼국은 서로 원수였고 민족의식 같은 것은 없었다. 이렇게 유리한 고지에 일찍 올라선 일본열도에는 한반도가 겪었던 삼국(三國)전쟁 같은 고도로 조직적인 치열한 국가간 전쟁은 없었다. 야마토 정부는 호족들 상대의 권력투쟁만 치르면 되었다. 야마토 정부군은 힘의 출구를 한반도에서 찾게 되었으니 한반도의 삼국은 북으로 당(唐)이나 연(燕)과 대결하고 남으로 왜와 대결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섬나라의 왜는 바다가 국방을 맡아주는 지리의 혜택을 누렸다. 한반도는 당과 왜의 힘에 대처하면서 삼국 상호의 통일전쟁의 고역을 치렀다.
열도에서 패자로 부상한 4세기 후반의 야마토 정권은 군사력을 한반도로 향하게 된다. 가야와 백제는 야마토 조정과는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자연히 왜의 주적(主敵)은 신라였다. 일찍이 일본의 북쪽 해안에는 신라에서 가까운 이즈모(出雲)라는 소국이 있었다. 일본 중앙부에 자리잡은 야마토(大和)에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가야와 백제의 이민(移民)이 우세했다. 그래서 야마토 왜는 이즈모 왜와는 오랜 숙적이었음이 그들의 신화에 반영되어 있다. 그런 해묵은 대립이 야마토왜의 신라정벌로 이어진다. 야마토정부는 일단 열도(列島) 내 호족들을 제압하자 방향을 틀어 한반도에서 군사활동을 했다. 광개토대왕의 원정을 부른 왜의 신라침공이 그것이었다.
삼국사기에는 5세기말까지 550년간 왜가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사가 33번 나온다고 한다. 왜의 세력이 대단했다는 것은 삼국사기에 백제왕 신라왕들이 동생이나 아들을 왜왕에게 볼모로 보냈다는 기록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397년에는 백제의 아신왕이 태자를 인질로 보냈고, 402년에는 신라의 실성왕이 아우를 인질로 보냈다. 신라의 충신 박제상이 단신으로 왜에 가서 볼모로 있던 왕자를 구출하고 홀로 남아 갖은 고문으로 객사했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반대로 왜의 볼모가 잡혀와 있었다는 말은 들어볼 수 없다.
AD413년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서거한 해이고, 이듬해(414) 광개토대왕비가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AD400년 전후의 한일(韓日)의 사정을 알려주므로, 비문은 ‘왜 기록 공백기’를 위하여 상당한 빛을 던져준다. 다 같은 동이(東夷)족인 한일 두 나라 사람들은 기록을 남길 줄 몰랐다. 다행히 광개토대왕비가 있어 체면을 조금은 세워준다.
역사기록의 결핍은 고고학을 통하여 보충된다. 일본의 ‘고분시대’는 전기(前期)가 대략 4세기이고, 중기(中期, ‘巨大고분의 시대’)가 대략 5세기이지만, 근래의 연구로는 각 시대는 약 25년씩 앞당겨야 된다고 하니, 고분시대 前期는 275-374, 中期는 375-474년간이 된다. AD266은 일본의 고분시대의 시작과 대략 같다. ‘고분시대 중기’야말로 이른바 巨大고분의 시대로서, 야마토 통일국가의 초기역사에 해당된다.
거듭 말해보거니와 야마토정부는 4세기 후반에는 정부군을 한반도로 내몰아 외침을 감행함으로써 열도내 세력들의 관심을 밖으로 돌려 힘을 모으는 효과를 거두는 한편 군사훈련도 시켰다. 그 야마토 조정의 위세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버금가는 규모를 뽐내는 5세기의 거대고분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야마토國은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싸울 상대가 필요했으며 상비군은 계속 군사훈련이 필요했다. 백제는 고구려와의 대결을 위해 왜를 동맹국처럼 대우하고 있었다. 백제와 신라에 끼어 협공을 당하던 가야 제국(諸國)도 서로 왜군을 환영했으리라. 그렇게 親왜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결국 신라가 자연히 야마토의 일순위 정복대상이 되어 있었음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