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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14~22(372) 행동하는 믿음 2021. 2. 7.
여러분도 귀에 익히 알려져 있는 미국의 마이크 펜스(Mike Pence) 전 부통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4년 후인 2024년 공화당 대권후보 1순위로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 펜스전부통령입니다. 펜스는 권력을 얻는다고 해도,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그리스도인 것을 명백히 밝히며 살아가고 있는 크리스천입니다.
펜스는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세 가지 사항을 빠지지 않고 말합니다. “나는 기독교인이고 보수주의자이며 공화당원이다”라고 말합니다. 세 가지는 1)기독교인이고, 2)보수주의자이고, 3)공화당원이라 말합니다.
이 세 가지 항목 중에서 첫 번째로 밝히고 있는 정체성이‘기독교인’입니다. 할아버지가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버스 운전사를 하며 정착을 했고, 아버지는 육군에서 복무하면서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동성훈장까지 받은 전쟁영웅입니다.
그는 어릴 때 가톨릭 신앙을 가졌는데, 대학을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됩니다. 그 이후, 공화당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후 6선 의원으로 활동합니다. 그리고 2012년 인디애나 주지사가 되었으며, 마침내 미국의 부통령이 됩니다. 펜스는 유세 기간 동안 상대 후보를 헐뜯거나 비난하면서 공격하는 부정적 캠페인을 펼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선거는 당선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헐뜯고 중상모략 합니다. 그래야만 애가 어부지리로 표를 끌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펜스는 이런 더러운 선거 전략을 절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 나는 그 죄인들 중에 최악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의원 시절에 술이 나오는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았고, 미국의회 성경 연구모임 회원이 되어 말씀을 공부합니다.
부통령이 된 이후에 낙태 시술을 지원하는 단체에 대하여 연방자금 지원 중단을 추진합니다. 그리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신앙적인 이유로 동성애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도 처벌받지 않는 종교의 자유 법안에 서명합니다.
미국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크리스천이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 입구에 “동성애자들은 출입금지”라는 문구를 걸어서 큰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조만간 우리나라에도 시행될 차별금지법이 있습니다. 성적소수자와 장애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지만, 실제로는 기독교인과 교회의 활동을 가로막는 악법입니다. 이런 차별금지법 같은 것이 미국에도 민주당 중심으로 이미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신앙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처벌받는 것을 펜스 부통령이 그 반대법에 서명을 하면서 힘을 실어 준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여야를 살펴 보면 기독교인이라고 밝히는 정치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현 문제인 대통령만 하여도 천주교 신자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있는 수십명의 크리스천 정치인들 중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예수님을 닮아 가고자 노력하는 정치인은 저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기독교의 비극의 시작점입니다.
그런데 마이크 펜스는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미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한국인 크리스천들에게서도 공히 인정되는 모습입니다. 단지 옷소매에 신앙을 매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라는 조끼를 아예 입고 행동하는 믿음을 보이는 분입니다. 미국이란 나라가 희망이 있는 것이 이런 신실한 크리스천 정치인들이 참 많다는 점이 희망입니다. 말로만 교인이 아니라 진정으로 행동하는 크리스천들이 있다는 것이 미국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본문에서 야고보 기자는 행함으로 입증되는 믿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행함이 동반되지 지 않는 믿음은 허구라고 말합니다. 허구(虛構)라는 말은 “사실에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만든다”는 말입니다. 고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믿음에 따른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것을 두고 거짓이고 가짜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 허구성을 밝히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행함이 있는 믿음은 산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음과 행함이 일치된 아브라함과 라합을 예로 들면서 행함으로만 믿음의 진정성이 입증될 수 있다고 강조를 합니다.
탈무드에도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화면을 보면 500원 동전이 나옵니다. 500원 동전의 앞면은 날아가는 학이 새겨져 있고 뒤는 500원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500원 동전을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반쪽만 잘라 한쪽면만 가지고 사용한다면 이는 법에 접촉됩니다. 즉 양면이 모두 있어야 정상적인 500원입니다.
믿음과 행함도 같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탈무드에서는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입증되고, 올바른 행함은 믿음의 바탕위에서 실행될 때에 참된 가치를 더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18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있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여기의 ‘보이리라’는 단어가 두 번 등장합니다. 네 믿음을 나에게 보이고,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너에게 보여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 ‘보이리라’는 단어의 의미가 ‘눈앞에 가시적인 실제를 드러내 보이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법적 용어로 말하면, 증거를 보여 주어서 사실관계를 입증하겠다는 말입니다.
2013년에 만들어진 숨바꼭질이라는 한국영화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에 술래를 정하여 숨고 도망가는 그런 천진난만한 놀이가 바로 숨바꼭질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천진난만한 영화가 아니라 사실 스릴러 공포영화입니다.
영화포스터에도 “우리 집에 낳선 사람이 숨어 살고 있다”고 말하며 영화를 소개합니다.
사실 내가 사는 집에 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옷장 속에 숨어 있고 천정 속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무서움입니다. 이 영화가 그런 내용입니다. 아무리 오래 숨어 살았다고 하더라도, 생떼를 쓰면서 내 집이라고 우기더라도, 싸울 필요 없습니다.
이상한 사람이 자신의 집이라고 우깁니다. 자신의 차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윽박지릅니다. 이럴 때에 싸울 필요 없습니다. 집주인이라는 등기와 내 차량이라는 소유증서만 보여 주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법적인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18절에서 믿음과 행함을 보여 주겠다는 말이 이런 사실적 근거에 따른 변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모습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게다가 행함을 보여 주고 믿음을 보여 주는 것을 두고, 강력한 의지와 확신을 나타내는 직설법 능동태의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간단한 내용입니다. 내 집이고 내 차라면 행동이 어떠할까요? 당당하고 떳떳하게 물러서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행함과 믿음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행동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행함이 바로 이런 당당한 모습입니다. 믿음을 숨길 필요가 없듯이 믿음에 따른 선한 행동의 모습도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행동으로 뒷받침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당당하고 떳떳한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구체적인 행위나 삶으로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성도들은 행함이 있는 믿음, 믿음을 수반한 행동을 어떻게 보여야 할까요?
1. 온전한 믿음은 유익이 있는 믿음입니다.
무디 목사님의 집에 친한 친구 목사님이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차를 한 잔 마신 후에 정원을 거닐게 되었는데, 이때에 정원에서 아이 두 명이 함께 정답게 노는 것을 보게 됩니다. 친구 목사님은 무디목사님에게 “자네 아들들인가?”라고 물어 봅니다.
무디 목사님은 “한 명은 내 아들이고 다른 한 명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무디 목사님은“누가 내 아들인지 자네가 한번 맞추어 보라”고 말합니다. 두 아이 얼굴이 모두 무디 목사님과 비슷하게 생겨서 친구 목사님은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무디 목사님은 두 아이를 부르더니 나무 위로 올라가 보라고 말합니다. 이에 두 아이가 나무위로 다 올라갑니다. 목사님은 조금 더 올라가라고 말하면서 제법 높은 위치까지 아이들이 올라가게 됩니다. 이때에 목사님은 아이에게 갑자기 뛰어 내려 보라고 말합니다.
무디 목사님의 말이 떨어지자 말자 한 아이는 서스럼 없이 나무 아래로 뛰어 내립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의 팔 안으로 떨어집니다. 반대로 다른 한 아이는 뛰어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면서 울기만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무디 목사님은 “이래도 모르겠느냐?”말합니다.
무슨 뜻이 여기에 담겨져 있는 것일까요?
주저함 없이 뛰어 내린 아이가 바로 무디 목사님의 아이입니다. 왜 목사님의 아이가 뛰어 내린 것인가요? 자신이 뛰어 내려도 아버지가 자신을 충분히 받아 주면서 안전하게 땅에 내려올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머뭇거리는 아이는 이웃집 아이로서 목사님이 좋은 사람인 것을 알겠지만, 자신의 아버지처럼 100% 완벽하게 다 믿을 수 없었기에 나무 위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했던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이 모습을 두고 “이것이 바로 완벽하게 믿는 믿음의 행동”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를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아들은 온전하게 아래로 몸을 던지는 행동을 주저함 없이 합니다. 온전한 믿음은 주저하지 않는 행동을 수반하게 됩니다.
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여기의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반어법 질문은 “온전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이미 죽은 것이기에 무익하다”는 뜻입니다. 살리는 생명력이 없는 죽은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반면에 행함이 있는 살아 있는 믿음은 나를 살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살리고, 모두에게 유익함이 되는 믿음이 됩니다. 이런 유익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나의 믿음이 행함이 수반되고 있는 온전한 믿음인지 점검해 보어야 합니다. 작년 3월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는 한국성도들의 믿음의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되었습니다. 비대면예배로 교회에 모이지 못하고 영상으로 예배를 드렸던 적도 있습니다. 아직도 온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주일 오전 예배만 드리면서 성도의 교제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힘든 와중에도 믿음이 성장하는 성도가 있는 반면, 종잇장처럼 쉽게 구겨지고 무너지는 믿음을 보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예배를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자인가? 아니면 예배를 구경하는 시청자인가? 하는 두 종류의 행동 때문입니다.
저는 저를 비롯하여 여러분 모두가 예배를 즐겁게 구경하는 관람자가 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중요한 것이라서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예배의 구경꾼 또는 예배를 시청하는 사람이 절대 되지 마십시오. 예배는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구경하듯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적당히 형식 차리고 시청하는 것이 올바른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자인가? 구경꾼인가? 이 간단한 차이점이 바로 온전한 믿음인가? 무니만 있는 형식적 믿음인가를 구분합니다.
2. 믿음은 나를 온전한 행함을 만듭니다.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믿음과 행하는 것의 상관관계를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한다고 말합니다. ‘함께 일 한다’는 말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서 분리되지 아니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그 기능의 역할을 백분 발휘한다는 말입니다.
요즈음에는 잘 착용하지 아니하지만, 사람들 손목에서 시간을 알려주는 손목시계가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값비싸고 유명한 시계들은 모두 기계식 무브먼트를 가진 시계들입니다.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귀에 익은 오메가나 롤렉스시계가 모두 부품 하나하나를 만들어서 정성껏 조립한 기계식 시계입니다.
시간을 가장 정확하게 맞추는 것은 전자식 시계입니다. 일초의 틀림도 없이 시간을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하지만 전자식 시계를 두고 고급시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전자식 시계는 고급시계로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대부분 중저가 상품의 시계가 전자식 시계입니다.
어떤 날에는 조금 빠르고, 어떤 날에는 조금 느리게 가는 기계식 시계가 왜 고급시계로 인정을 받는가요? 시계에 들어가는 수 십개 작은 톱니바퀴와 부품들이 하나하나 제 역할을 다 하면서 함께 움직여서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손목시계 하나에 수 억씩합니다.
오늘 22절 말씀에서 말하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특히 ‘온전하게 된다’는 말의 헬라어 원어의 뜻은 “완전하게 만들다. 또는 완성되다”라는 뜻입니다. 고로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면서 믿음이 더욱 더 완전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모두 행함으로 온전하게 드러나는 믿음을 가지시길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사랑의 행동, 선한 행동, 그리스도의 덕을 드러내는 행동을 주저함 없이 표현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WEC 국제선교회(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의 선교사 훈련 프로그램 중, 마지막 훈련 순서에 선교본부 지하실을 방문하는 순서가 있다고 합니다. 지하실에는 선교사들의 물건을 보관해 놓은 방이 있는데, 선교사 개인 물품들이 이름을 붙이고 전시되어 있습니다.
각 가방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습니다. 짧게는 1년 된 가방, 길게는 10년이나 20년 이상 된 가방들도 있습니다. 가방의 주인들은 선교지로 떠난 선교사들입니다. 지하실에서 옆방에 가면 벽에 사진들이 붙어 있습니다. 사진 밑에는 의사, 간호사, 목사의 약력이 간단히 적혀 있습니다. 그들은 가방을 맡기고 해외 오지로 나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순교한 선교사들의 사진입니다.
훈련받는 선교사들은 그 사진과 남겨진 물품들을 보면서, 자신도 언제 저렇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죽더라도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죽는 것은 보람 있는 것이라는 믿음의 결단을 합니다. 믿음을 가졌고 가진 그 믿음을 뒷받침하는 행함이 온전하게 함께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맺어지는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듯이 행함을 보면 믿음의 온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온전하게 되는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17절,“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행동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살아 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을 구분하는 그 기준점이 무엇인가요? 무엇을 보면 살아 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을 구별할 수 있나요?
어떤 사람이 헐벗고 굶주리고 있습니다. 먹을 양식이 없어서 근근이 연명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살아 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이 될까요?
16절 보세요,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 말씀 중에 ‘평안히 가라’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면 다음 구절의 말씀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먹을 양식이 없어서 꼴꼴 굶고 있는 사람에게 평안히 가라는 말은 어딘지 어색한 말입니다. 이 부분을 직역하면, ‘나는 너가 잘 지내길 바란다’는 말입니다.
굶고 있는 사람에게 쌀 한 톨 주지 않고 몰아 냅니다.
그리고는 ‘너가 잘 되길 바란다(I wish you well)’는 말은 축복이 아니고 저주입니다. 배고픈 자에게는 먹거리를 주고, 추위에 떠는 자에게는 외투를 건네 주면서 ‘나는 너가 잘되길 바란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격려이며, 살아 있는 행함의 믿음입니다.
도날드 반하우스(Donald G. Barnhouse) 신학자는 ‘현대 교회에 자폐증 크리스챤(Autistic Christian)이 많다’고 지적했습니다. 자폐증(自閉症)은 표현하지 않는 증세를 지닌 발달 장애성 질환입니다. 현대 교인을 두고 자폐증 기독교인이라 말합니다.
설교를 잘 듣습니다. 나름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읽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행동으로 표현을 잘하지 않습니다. 자폐증 환자가 수많은 생각을 하지만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을 빗댄 말입니다.
과연 나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신앙고백을 하고 아름다운 선율에 맞추어 찬송을 부르고 편안한 마음으로 설교를 드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마세요.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귀에 거슬리는 말이 들리면, 시험에 빠져 상처를 운운하며 교회를 등지려 하는 어리석은 모습이 되어서 안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입니다. 어떠한 역사도 나타나지 않는 무기력한 믿음입니다.
이번 주간은 구정 연휴가 있는 주간입니다. 비록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가족 간의 왕래가 제한이 된다고 하더라도, 가족 간의 사랑의 모습마저 제한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사랑의 온기를 나누는 구정 명절이 되길 소망합니다.
아울러 믿음과 행함으로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 2월의 모든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행함의 증거가 없는 죽은 믿음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행함으로 유익을 가져오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행함으로 온전하게 되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을 보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