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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죄 아래에 있다(롬 3:9~18)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ㄹ)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3:9∼18)
오늘은, 오늘의 제목을 가지고 설교를 하기 전에 제목과 관계 없는 말씀을 하나 하겠습니다.
이어서 본문과 약간 관계있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제목 “다 죄 아래에 있다”를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제목과 관계 없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6월 25일입니다.
여러분, 73년 전 오늘, 그러니까 1950년 6월 25일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거 모르는 분은 이 가운데 한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담임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6․25에 대해 미리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입니다.
6․25가 일어났을 때 저는 우리 나이로 일곱 살이었고, 이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일을 조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육군본부가 전쟁기념관 자리에 있었습니다.
한강에 다리는 한강대교 하나만 있었습니다.
저 밑의 큰 길, 한강대로가 그 한강다리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부근은 군인들과 피난민들이 뒤엉켜 대단히 혼잡했습니다.
그 광경,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 동네의 여기는 내무서, 그 의는 인민군 무기고, 여기는 인민재판 하던 곳, 잊지 않고 있습니다.
멀쩡하던 이웃집 아저씨가 빨간 완장을 차고 나타나 눈을 부라리며 돌아다니던 모습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의 결론은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 하는 것입니다.
다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도 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 질문의 답을 성도 여러분과 함께 얻고 싶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6․25가 일어난 날, 1950년 6월 25일은 무슨 요일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과 같이 주일이었습니다.
북한은 왜 주일에 남침을 시작했습니까?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일요일, 쉬는 날이니까 경계가 느슨해지는 것을 노려서 그날 쳐들어 왔다고 말입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전쟁에 대한 준비가 거의 없었습니다.
특히 군대는 긴장이 너무 풀어져 있었습니다.
6월 24일 저녁에는 육군장교회관 낙성식이 있어서 군 간부들과 중요인사들이 밤늦게까지 파티를 했다고 합니다.
그 육군장교회관이 이 부근, 대통령실 주변 어디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파티가 끝난 다음에 시내에 나가 이차모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이차모임이 밤 두 시에 끝났는데 새벽 네 시에 인민군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이렇게 느슨해진 것을 노린 것이 주일에 남침을 시작한 이유의 전부일까?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는 질문, 어떤 영적인 의미는 없을까?
일요일을 주일이라고도 하는데 주일은 ‘주님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주일은 예배 드리는 날입니다.
주일은 ‘작은 성일’입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을 골라 남침을 시작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목사님, 그건 오버센스예요!’하시겠습니까?
저는 6․25 전쟁이 다른 요일이 아니고 주일에 일어난 것이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일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6․25에 대한 결론은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적으로도 대비를 잘 해야 합니다.
그와 함께 영적인 무장도 새롭게, 튼튼하게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영적인 무장 상태, 지금 어떻습니까?
자, 이제 주제와 반쯤 관계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여러분, ‘어, 리듬이 있네(리드미컬하네!)’ 느꼈을 것입니다.
‘산문이 아니고 운문(韻文) 같네’ 하실 것입니다.
그런 느낌을 주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시편을 많이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10절은 “기록된 바”라고 시작되는데 이것은 ‘구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10절의 말씀은 시편 14편 1절 이하와 53편 1절 이하를 인용한 것입니다.
13절 앞부분은 시편 5편 9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13절 중간부터는 시편 140편 3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14절은 시편 10편 7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15절은 이사야 59장 7절 이하를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서도 40장부터 끝까지는 거의 대부분이 운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18절은 시편 36편 1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분량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이렇게 시편 여섯 군데와 이사야서 한 군데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아, 바울 사도가 성경을 참 많이 읽고, 많이 연구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지금 ‘성경’이라고 한 것은 구약인데요, 성경에 통달해 있으니까 이렇게 자유자재로 인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는 어떤가?’ 반성했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성경 읽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갖는 일은 불가능했고, 회당에 가서 두루말이 성경을 어렵게 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대도 바울은 성경을 구석구석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3년 전에, 정확하게 말하면 2020년 1월 12일에 주일 오후예배에서 “성경을 백독(百讀)하겠습니다”라는 제목으로 간증이라고 할 수 있는 설교를 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가기 전까지 성경을 백 번 통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인데 그런 마음을 갖게 된 구체적인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들은 그때 말씀 드렸는데 기본적인 것은 성경을 더 잘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 떠나기 전에 정말 백 번을 통독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잘 진행되고는 있습니다.
은퇴하기 전에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던 시간에 지금은 성경을 통독하고, 필사하고, 기도하면서 ‘나홀로 새벽기도회’를 두 시간씩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열심히 읽으세요.
특히 학생들, 젊은 성도들, 더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학생 시절, 젊은 시절에 기억한 것은 오래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향을 많이 미칩니다.
어떤 청년이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추천서를 받으러 왔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다니는 동안 최소한 성경을 네 번은 통독하겠다고 약속해야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했습니다.
왜 네 번인가 하면 하루에 평균 다섯 장씩 성경을 읽으면 여덟 달이면 성경을 한 번 통독할 수 있습니다.
신학대학원 3년, 36개월, 그러면 최소한 네 번 이상 통독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이번 주간에 그 학생에게 전화해서 공부 잘 하고 있느냐고 묻고 성경 몇 번 통독했느냐고 확인하려고 합니다.
통독을 여러 번 하다보면 속도가 빨라집니다.
저는 지금 하루에 열 장씩 읽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독해서, 성경을 잘 알아서 ‘이런 경우에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지?’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재판관들이 판결을 할 때 ‘앞에서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판결했지?’, 판례(判例)를 참고합니다.
판례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것은 대법원 판례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성경 말씀이 대법원 판례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다 죄 아래 있다“입니다.
이 제목은 오늘 본문의 소제목을 그대로 옮겨온 것입니다.
“다 죄 아래 있다” 너무 심한 말인 것 같지만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죄 아래 있습니다.
죄인들입니다.
지금 세계 인구는 80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80억을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피부색에 따라서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국적에 따라서 한국 사람, 미국 사람, 일본 사람, 중국 사람, 러시아 사람, 여럿으로 나누어집니다.
나라 안에서도 서울 사람, 강원도 사람, 충청도 사람, 전라도 사람, 경상도 사람, 제주도 사람, 지역으로 나누어집니다.
이렇게 여럿으로 나누어지지만 죄인이라는 점은 모두 같습니다.
사람은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 여러 계층으로 나뉩니다.
계층은 여럿이지만 모두 죄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좌파 진영이냐, 우파 진영이냐 진영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가 있는 삼각지는 진영 문제의 복판에 있습니다.
저기 지하철 1번 출구, 우리은행 앞에서는 토요일 오후마다 우파 진영의 시위가 열리고 있습니다.
전쟁기념관 후문, 삼각지 파출소 앞에서는 좌파 진영의 시위가 자주 열립니다.
좌파에 속한 사람, 우파에 속한 사람,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데 한가지 공통점,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인간관‘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선한 존재이다’
‘아니다, 인간은 악한 존재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여러 종류의 인간관이 있습니다.
‘인간은 원숭이가 진화된 존재이다’는 것은 ‘진화론적 인간관’입니다.
기독교의 인간관은 무엇입니까?
죄인으로서의 인간관입니다.
저는 로마서 강해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죄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살필 수 있게 된 것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죄인이라는 것을 잊고 있을 때도 있는데 로마서는 ‘너는 죄인이야!’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오래 전부터 긍정적 사고, 적극적 생활태도, 행복, 부흥, 교세확장, 이런 것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질 문제인 죄의 문제, 속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설교는 그렇게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식사를 할 때 밥이 중요한데 밥보다 맛있는 반찬들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 때문에 빚어진 문제들이 적지 않습니다.
로마서는 사람은 모두 죄 아래 있음을 깨우쳐주면서 믿음으로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중요한 성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로마서를 통해 죄의 문제, 믿음을 통한 사죄, 다시 말해 구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아까 사람은 모두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다시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죄인 그대로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과,
믿음을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대로 우리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었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었습니다.
선을 행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혀로 속임을 일삼았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우리의 발은 피 흘리는 데 빨랐습니다.
파멸과 고생이 우리의 길에 있었습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죄의 목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죄의 목록은 오늘 본문보다 훨씬 많고 복잡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이와 같은 일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여러분,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믿음을 가졌으면, 그래서 죄인의 반열에서 벗어나 의인의 반열에 들었으면 우리는 의인답게 살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이 이야기는 몇 해 전에 설교시간에 한 번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60년대, 70년대, 80년대에는 거리에서 간첩들의 자수를 권유하는 표어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불안에 떨지 말고 자수하여 광명 찾자”,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때 간첩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면 국가보안법으로 아주 무거운 처벌을 받았습니다.
간첩이 자수하면 처벌하지 않고 남한에 정착하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때 부흥사 한 분(고명균 목사님)은 부흥회를 할 때마다 “우리는 자수한 간첩들입니다!” 했습니다.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나는 죄인입니다” 고백을 해서 용서를 받은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 다음을 강조하곤 했습니다.
간첩이 자수하면 용서 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 법을 잘 지키고 선하게 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우리도 속죄함 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정결하게 살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말입니다.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요즘은 자수간첩 이야기는 실감이 별로 나지 않는데요, 대신 탈북민들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탈북민들 가운데 남한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불행하게 되는 분들이 많습니다.
탈북민들 가운데 교도소 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이 늘 백 명 안팎 정도가 있습니다.
재탈북을 해서 북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여럿 있지요.
저는 탈북민들에게 남한에 오셨으니 힘든 점이 많더라도 남한사회에 잘 적응하기 위해 힘쓰며 살 것을 간곡하게 권하곤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가는 것이 그 일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곤 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교회는 이런 일에 힘써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합니다.
우리는 좌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007년에 나왔고 전도연과 송강호가 주연을 맡았는데 그해의 대한민국 영화대상을 받은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 특히 기독교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인지, 비판적으로 그린 것인지, 논란이 많았습니다.
그 영화 가운데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주인공 전도연의 아들이 유괴되었습니다.
유괴범은 그 아이를 죽였습니다.
그 유괴살인범이 체포되어 교도소에 갇혔습니다.
전도연은 많은 고통 가운데 지내다가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유괴살인범에 대해 ‘내가 그를 용서해야지’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교인 몇과 함께 면히를 갔습니다.
그런데 유괴살인범은 밝은 얼굴로 면회실에 나와서 ‘나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았습니다’고 웃으며 말합니다.
전도연은 놀라고 격분하면서 면회장 밖에 나와서 ‘아니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용서 받았다고 할 수 있느냐’고 부르짖다가 졸도를 합니다.
그 유괴살인범이 먼저 해야 할 마땅한 행동은 자기가 유괴해서 살해한 아이의 어머니를 향해 눈물로 사과를 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오늘날 교인들이 그 유괴살해범과 같이 ‘아, 나 사죄 받았어!’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속죄함을 받았으면 속죄함 받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로마서는 11장까지는 믿음을 통한 구원에 대해 말하고 12장부터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합니다.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에서 시작해서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계속해서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을 조목조목 가르치고 있습니다.
11장까지는 이론이고, 12장부터는 실천입니다.
우리는 회개의 삶을 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 날에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 보며 회개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일예배에서 대표기도를 맡은 분들은 기도 중에 지난 한 주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을 고백하는 내용을 거의 빼놓지 않습니다.
대표기도하는 분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에 교회에 왔을 때 모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 13:10)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목욕은 죄의 고백과 사죄의 선언으로, 발을 씻는 것은 매일 매일의 회개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회개에 힘쓸 때 우리의 영이 맑아집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랍니다.
그것이 얼굴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그런 얼굴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 자체가 전도입니다.
매일 매일의 회개에 힘쓸 때 행동이 달라집니다.
삶이 달라집니다.
감리교의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가 성화(聖化)인데 성화가 됩니다.
저는 찬송가를 살피다가 회개와 용서에 대한 찬송이 많은 것을 알고 조금 놀았습니다.
찬송가 250장부터 282장까지 설흔세 장의 찬송이 회개와 용서를 주제로 한 찬송입니다.
그 가운데 259장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서”는 의문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후렴에서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하지요.
“예수의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한 분도 빠짐없이, ‘네, 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깨끗하게 씻김을 받았습니다’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이 찬송은 2절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주 예수와 밤낮으로 늘 함께 그대는 행동을 하는가”
저는 “네, 그렇습니다”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네,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는 대답하려고 합니다.
찬송가 283장은 속죄함을 받은 후의 생활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4절까지가 “나 속죄함을 받은 후”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후렴에는 “나 속죄 받은 후”라는 말이 세 번 들어 있습니다.
이 찬송가의 가사대로 늘 찬송하면서, 주 뜻을 준행하면서 죄길을 버리며, 하나님 자녀된 것을 곧 증언하면서 늘 평안한 가운데 사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며 마칩니다.
주제 밖이지만, 우리는 73년 전 오늘 일어난 6․25를 생각하며 영적 무장을 더욱 강하게 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를 본받아 성경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나는 죄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고 심판과 멸망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보혈로 속죄함을 입은 것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속죄함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기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저희에게 복음을 주셔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새생명을 얻은 자로서 영생을 누리며 주님과 함께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은 6․25 전쟁이 일어난 날인데 북녘에도 복음이 전해져서 남과 북이 복음안에서 하나가 되는 복음적 평화통일이 속히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에게 로마서를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잘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종에게도 주시고 성도들에게 더욱 풍성하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