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이명박대통령시대의 정치상황
경제 살리기를 최우선 정책으로 내건 이명박(李明博)은 박근혜(朴謹惠)와의 당내 경선을 거쳐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후에도 이른바 BBK의혹등 과거의 비리의혹 때문에 여당을 비롯한 여타 정치세력의 끊임 없는 공격에 시달렸다.
이 와중에 한나라당 당내 경선에 참여하지 않은 이회창이 보수세력의 대안임을 자처하고 탈당한 후 무소속으로 대선에 뛰어드는 기이한 사태도벌어졌다.
대통령선거를 불과 10여 일 앞두고 검찰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그에게 혐의가 없다고 확인했지만, 국회에서는 여권 주도로 그를 수사대상으로하는 특검법을 통과시켰다.
이명박 후보자는 특검법4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힌 가운데 실시된 2007년 12월 19일의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48.7%의 득표로 대통합민주신당1의 정동영 후보를 531만여 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대통령에 당선되었다.2)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2월 25일 취임해서 이명박정부를 출범시키면서 경제회생과 나라의 선진화를 약속했다.3)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초 전임 노무현 대통령이 시작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다.
그러나 곧이어 발생한 광우병 파동에 따른 여러 달에걸친 격렬한 대규모의 야간 촛불시위사태를 겪으며 새로운 정책을 추진할 정치적인 자신과 추진력이 현저하게 약화한데다 용산참사사태까지 생겨 법질서가심하게 훼손되었다.
더욱이 인사정책에서 '고소영'(고려대 출신, 소망교회 인맥, 영남출신)으로 징표되는 측근인사논란이 지속되고 대기업 우호적인 정책추진으로중소기업과 골목상권의 영세업자들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선거공약으로 내건 '한반도 대운하 계획'이 야당과 환경단체의 강한 저항에 부딪쳐 결국 '4대강 사업'으로 변경 집행하는 과정에서도 야당과 반대세력의 집요한 반대운동에 부딪혀 4년 만에 22조원의 공사비를 들여정권 말에야 겨우 완성했다.
그나마 부실공사 논란이 불거져 어려움을 겪기도했다. 이대통령이 영해안보차원에서 추진한 제주 해군기지건설사업도 임기 말까지 여전히 지지부진한 정체상태에 머물렀다.
다른 한편 국가의 재정부채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부동산 경기의 침체로 부동산값이 폭락하며 부동산거래가 현저히 줄어들면서 은행대출을 받아 집을산 사람들의 '하우스 푸어'(내집가진 빈곤층)라는 새로운 사회현상이 나타났다.
그 결과 가계부채가 1,000조원에 육박할 정도로 폭발적으로 증가해 커다란 재정 및 경제상의 위험요소로 남게 되었다. 그에 더하여 경제상황의 악화와 대량실업사태로 빈부격차가 더욱 커져서 사회의 경제적인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경제성장의 둔화로 인한 일자리부족으로 '워킹푸어'(근로빈곤층)현상과 '청년백수'로 불리는 젊은 대학졸업자들의 실업자가 늘어난데다 사회의 고령화 현상으로 인해서 정년퇴직세대도 퇴직 후의 생활대책을 고심하는 사회적인 불안요인이 심해졌다.
이러한 현상은 저출산 현상과 맞물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인 1.30의 출산율을 기록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도 성폭력사건이 빈발해서 성폭력사범에 대한 엄한 처벌과 대응책을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도 커져 성폭력범에 대한 화학적 거세와 전자추적장치부착 등 처벌이 강화되었다.
그 밖에도 대통령 측근에 의해서 야기된 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파동이생기고, 소위 정권 창출의 공신으로 불리는 대통령의 형을 비롯한 권력측근들이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형사처벌을 받는 등 부패정권의 오명까지 남겼다.
국회의장이 부정부패사건으로 불명예 퇴진하는 초유의 사태도 생겼다. 그에 더하여 정권 말에는 대통령 퇴임 후의 사저건축을 둘러싼 내곡동 부지매입과정에서의 부정의혹으로 대통령 가족이 특별검사의 수사대상이 되고 관련자들이 형사처벌을 받는 등 불명예스러운 기록도 남겼다.
게다가 현직검사의 뇌물수수, 성추문, 브로커역할 등 잇단 비위와 지휘부 내분에 따른 검란(檢乱)사태 등 검찰의 여러 가지 부정부패사건으로 검찰내외에서 검찰개혁을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요구하는 등 검찰이 위기 상황에 직면해 검찰총장이 불명예 퇴진하는 사태도 생겼다.
또 임기 말인 2013년 1월 말 무리하게 측근들을 위한 특별사면권을행사하는 바람에 여론의 거센 비난을 사기도 했다.
대북정책에서도 북한의 도발로 인한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침몰사태를 겪으며 대화가 완전히 단절된 채 또 다시 냉전시대로 후퇴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그러는 중에 북한에서는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고 그 아들 김정은이 3 대째 권력을 세습하는 일이 벌어진데다가 미사일 시험발사와 핵 실험등의 도발적인 사태를 이어가 국내적으로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한반도 주변정세가매우 불안한 상태를 이어가고 있다.
더욱이 중국은 미국과 겨루는 세계적인 강국으로 성장 발전한 가운데 시진핑 정권이 들어서고, 일본에는 노다 정권에 이어 아베 수상 등 국수주의의 극우정권이 이어지면서 독도문제 등 한일관계에도 새로운 긴장상태가 고조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말년인 2012년 4월 11일 실시한 제19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는 지지율이 떨어진 한나라당의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박근혜의원을 총선거의 전면에 내세워 서울에서는 완패했지만 예상과 달리 단독 과반의석인 152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 결과는 전적으로 구원투수로 나선 박근혜 의원의 개인적인 인기와 공로였다고 할 것이다.
박근혜 의원은 이대통령의임기 초인 2008년 4월 9일에 실시한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이어 두 번째로 여당에게 선거승리의 결과를 가져다 줌으로써 여당의 잠재적인 대통령 후보자로서의 입지를 확실하게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한편 이명박 대통령은 G20 정상회의, 핵 안보정상회의 등을 개최하고,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을 유치하며,국제기구화한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GGGI)를 주도하는 등 국가의 격을 높이는 한편 49회에 걸친 활발한 해외순방을통해서 84개국의 많은 외국 정상과 정상회담을 하는 등 국제무대에서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였다.
유럽연합(EU),아세안(ASEAN), 콜롬비아 등과 자유무역협정(FTA)도 체결했다.
미국과 남유럽에서 시작한 4년간의 세계적인 재정 및금융위기 속에서도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은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며 국가신용등급도 유일하게 상승해 일본과 중국을 앞질렀고 무역도 세계에서 9번째로 1조달러를 달성하면서 수출규모도 세계 7위에 올랐다.
국민소득도 2만 2천 달러를상회하는 경제지표를 남겼다.
임기 중에 치러진 런던 올림픽에서는 역사상 가장 좋은 종합 5위의 성과를 냈고, 2018년의 평창 동계올림픽도 유치했다. '강남 스타일'로 대표되는 한류문화의 세계화 현상도 두드러져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크게 이름을 떨치는시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