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부친 김동진(당시 60세) 모친 박분희(당시 57세)옹을 중심으로 16명의 대가족이 함께 사는 충북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 담배창고 앞 보금자리는 선대로 이어받은 터전으로 6.25동란 에도 피해를 입지 않은 평화로운 곳이다.
어머니의 증조할머니와 양부모님이신 김동진·박분이 내외, 큰오빠 김홍식 부부, 둘째 오빠 내외 인식, 셋째 오빠 홍기(당시23세 결혼 현79세), 동생 홍철 현재70세 , 여동생 화성리 이모님 등 16명의 대가족이 한 지붕아래 살아가니 식량보태기도 힘들었다.
마땅한 간식거리도 없고 하루 세끼 주식에만 의존하다보니 사람 키만 한 뒤주에 쌀이 쑥쑥 들어가 누가 퍼 간 것처럼 없어졌다. 밥상도 여러 개를 차려야 하는데 안방에 증조할머니와 부모님 한상, 큰오빠 4식구 한상, 작은오빠 4식구 한상, 등 안방에 2상 마루에 2상 올케들은 그나마 마루에도 못 올라가고 부엌에서 2상에 나누어 먹던 시절이니 오죽했을까..
그나마 농삿 거리가 없어 외할아버지는 강칭이란 동네에서 머슴살이하며 품삯으로 연명하고 큰오빠는 관기, 화령장날 등으로 소달구지 운 반품으로 양식을 대며 밥 굽는 날이 허다했다.
큰 오빠가 이따금 품삯으로 받은 생태를 달구지 뒤에 코를 매달고 덩렁덜렁 거리며 집에 들어오는 날엔 온 식구가 포식하는 날로 생태를 넣고 무를 큼직하게 썰어 한 솥 끓여놓으면 온 식구가 달려들어 오랜만에 배를 퉁퉁거리며 포만감을 느꼈다
인간이 제일 견디기 어려운 때가 있다면 굶주림아니던가, 그러나 요즘 세대에서 밥을 굶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그 고통을 알지 못한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과 무기력감, 우리세대도 가끔 단식을 하지만 생활로 느끼는 정신적 고통 앞에 한낮 사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콩깻묵(외국에서 기름을 짜고 난 밥)에 보리쌀을 맵돌에 갈아 죽을 끊여 뚜가리로 하나 먹으면 포만감은 있으나 이내 배가 꺼지곤 했다. 6.25동란 이후 흔한 감자도 없어 뒷집 복혜(청주, 육군 장교와 결혼)네 집에 가면 맷방석을 깔고 앉아 마당에서 감자를 실컷 먹던 기억이 잊혀지질 않는다. 그래서인지 어머님은 지금도 감자를 너무 좋아하시어 ‘감자대장’ 이라고도 불린다.
논 농사거리가 없던 외갓집은 당시 관기장터 뒤에다 팥, 수수, 콩, 목화밭을 일구어 목화씨에서 나온 실로 솜틀을 만들고 결혼할 때 이불을 해주는 삯으로 살림을 보탰다.
“팬티만 입고 목화밭 외할머니를 지켜주신 어머님,”
어머니는 소학교 시절 외할머니를 따라 목화밭을 자주 가셨고 외할머니는 어린데도 자신을 돕는 어머니를 누구보다도 예뻐 하셨다.
한 여름 퇴약 볕이 내리쬐는 목화밭에서 일을 하다보면 온몸이 땀에 젖어 할머니는 목화밭 고랑 그늘에 누워 단잠을 청하시는데 어머니는 할머니 머리맡을 떠나지 않고 저고리와 치마도 벗어가며 할머니 얼굴에 햇살과 개미가 들어가지 않도록 돌보셨다 고 한다.
잠에서 깨어나시어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팬티만 입고 머리맡에 앉아있는 딸의 착한 모습을 바라보시던 외할머니의 잔잔한 미소가 떠오른다.
최근 어머님의 생신이라며 전화인사를 주신 온양 작은 외삼촌은 “누님, 제가 어머님이 살아계실 때 목화밭 얘기를 듣고 불쌍한 누님을 도와드려야 겠다고 다짐을 했었답니다.” “어머님을 그리워 할 때마다 누님생각이 먼저 떠오른다.”고 하셨다.
어머님도 “내가 답답하고 아쉬울 때 마다 이렇게 외삼촌이 도움을 주는 것이 아마 어머님이 하늘나라에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외삼촌을 통해 도와주시라고 하는 것,” 같다고 연신 고마워하신다.
실지 외삼촌댁이 삼청동 머무시던 시절에는 매년마다 외할머니를 모시고 생신축하연을 마련하셨는데, 외할머니의 74세 생신날 외삼촌은 다락방에 올라가 수표책을 뜯어 외할머니의 복주머니에 넣어드렸더니 외할머니는 복주머니를 속치마 속에 넣고 또 넣으시더니 외숙모를 보고 얘기하는척하며 10만원권을 꼬깃꼬깃 말아 어머니에게 건네주셨다고 한다.
그때를 떠올리며 어머니는 전씨 집안에 시집와서 돈을 주체하지 못하던 청산 갑부시절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