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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3 자애경 (3) (법문: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아비담맛타상가하> 9장 깜맛타나(kammaṭṭhāna. 수행 주제) : 자애경 (3)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아비담맛타상가하> 제9장 “수행”에서 네 가지 압빠만냐(appamaññā. 한계 없는 마음) 중에서 첫 번째, 자애관하는 방법 강의하고 있습니다. 자애관 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미얀마의 빤디따라마에서도 자애하는데 지금 하고 있는 자애경과는 좀 다르게 합니다. “아항 아웨로 호미(ahaṃ avero homi. 나에게 적의가 없기를)”로 시작하는 자애관 들어보셨습니까? 미얀마에서 제일 많이 쓰이는 자애관인데, 자애관 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여러 가지 중에서 자기 취향에 맞는 거 골라서 하시면 됩니다.
자애경을 설하신 배경
지난 시간에 부처님 당시에 안거 3개월을 나러 멀리 떨어진 숲으로 간 비구들이 거기서 수행을 잘하지 못하고 계속 숲에 사는 정령들에게 위협 받습니다. 무서운 모습을 보이고, 목이나 팔다리 이런 것들이 잘린 귀신의 모습을 보여줘서 집중이 안 돼서 수행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자 자애경을 가르쳐 줍니다. “가서 이걸 독송하면 수행을 안정적으로 마음 편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가 질문했죠. “왜 비구들이 숲에 와서 위빳사나 수행을하고 성인이 되는 도와 과를 얻고 하면 숲에 사는 정령들에게도 좋을 텐데, 왜 위빳사나 하는 비구들을 수행 못하게 숲에서 내쫓아 놓고는 자애관을 하니까 반기고 수행할 수 있도록 했을까?” 위빳사나 해서 성인이 되고 도와 과를 얻고 아라한이 되면 숲속에 사는 정령들에게도 이로울 텐데 왜 정령들은 위빳사나 하는 비구들을 쫓아냈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답은 몇 가지가 있을 수 있겠죠.
대부분의 인간들에게도 듣기 거북하고 그리고 천신도 심지어 범천도 모르는 4성제를, 인간들보다 낮은, 숲에 사는 정령들은 인간보다 낮지 않습니까? 아헤뚜까(ahetuka. 원인 없는 마음)로 재생연결한 존재들이죠. 인간들은 최소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선업 원인으로 재생연결했는데 정령들은 대부분 아헤뚜까*로 재생연결한 존재들이라서, 정령들이 4성제, 고성제, 위빳사나 수행은 잘 이해하지 못해도 자애관은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자애관은 중생들이 밀접한 행복감을 쉽게 느낄 수 있는 수행이니까, 자애관을 했을 때는 좋아하고 위빳사나를 하는 수행자를 반기지 않았던 것이겠죠. 이게 정답인 것 같습니다. 인간들도 듣기 싫어하는 4성제나 고성제를 정령들도 납득하기 힘들겠죠.
근데 자애만은 이해하기 쉽겠죠. 사이좋게 지내는 자애관을 해서 정령들로부터 보호받고 그래서 위빳사나를 하게 되는 거죠. 위빳사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세상에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수행 정도를 좋아하지요. 자애관을 좋아하죠. 허나 자애관으로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위빳사나를 보호하기 위해 자애관을 닦습니다.
위빳사나를 하는 동안 보호받기 위해서 하는 수행들이 있습니다. 위빳사나는 건조한 수행입니다. 건조한 위빳사나 수행을 하기에 앞서 자애는 촉촉한 수행이라고, 대중의 관계를 촉촉하게 만드는 수행입니다. 위빳사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의 성질이 위빳사나는 건조하고 메마른 수행입니다.
위빳사나를 하는 동안 보호받기 위해서 하는 수행들이 4가지 있습니다. 이 자애관은 그중의 한 방법이고, 붓다눗사띠, 담마눗사띠, 마라나눗사띠, 멧따바와나 이 네 가지를 짜뚜라락카 바와나(Caturārakkhā-Bhāvanā. 네 가지 보호수행)라고 합니다. 붇다에 대해서 상기하고, 법에 대해서 상기하고, 죽음에 대해서 상기하는 것, 이걸 해서 위빳사나 수행하는 동안 보호받는 거죠. 수행을 잘 해나갈 수 있도록 보호받는 수행. 이것들은 사마타 수행이죠.
위빳사나는 위빳사나이고, 사마타를 해서 위빳사나를 할 때 보호받을 수 있게. 사마타를 합니다. 사마타를 하는 것과 위빳사나를 하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방법도 반대이고 얻게 되는 결과도 전혀 다르고, 업의 바퀴를 반대로 굴리는 수행입니다. 방향을 따지자면. 사마타는 윤회하게 하는 수행이고, 위빳사나는 윤회의 바퀴를 멈추게 하는 수행이죠. 세상의 중생들은 윤회자체를 고통으로 보지 않아서 조건을 바꾸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해서 계속 더 나은 조건을 바랍니다. 벗어나기보다 세상에서 행복하게 편안히 살길 원하니까 좋은 조건을 주는 자애관을 하면 좋아하겠죠.
지난 시간에 했던 게 짜뚜라락카 바와나, 즉 위빳사나를 보호하는 네 가지 수행을 하는데 시간을 오래 투자하지 않습니다. 아주 짧게, 네 가지를 모두 끝내는데 5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빤디따라마에서는 5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네 가지를 다 끝내니까 아주 짧게 합니다. 길게 하면 위빳사나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짧게 합니다. 위빳사나를 보호는 하되, 위빳사나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짧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전혀 다른 수행이라는 것을 아시겠죠? 이 사마타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위빳사나에 방해가 됩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하겠습니다. 자애관을 닦아서 선정까지도 얻을 수 있어요. 아항 아웨로 호미(ahaṃ avero homi), 나에게 적의가 없기를, 아비야빳짜 호미(abyābajjha homi), 성냄이 없기를. 이렇게 하는 자애관은 그냥 선업을 짓는 자애관이고, 선정을 얻을 수 있는 자애관은 다르게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합니다. 선정을 얻으려면 한 명에게 집중해서 자애관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자애관하는 방법 528가지가 있다고 했죠. 그렇게 하는 것은 선정을 얻는 자애관은 아닙니다. 나의 자애 마음을 일으키기 좋은 상대에게 집중해서 한 명에게 집중합니다. 그래서 선정의 집중을 얻는 거죠. 자애 대상을 처음에 한 명에 집중한 다음에, 자기 마음을 점점 다른 대상으로 넓혀갑니다. 넓혀서 자애 마음이 적을 떠올렸을 때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게 선정을 얻는 없는 자애관입니다.
그렇게 할 때 남성은 남성에게만 하고, 여성은 여성에게만 자애를 보내야 합니다. 왜 이렇게 하냐면 자애와 집착은 아주 밀접하기 때문에, 집착과 자애가 혼동될 수 있는 거죠. 집착과 자애는 분명히 다른데, 이성에게는 집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그 집착을 자애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게 동성만을 자애의 대상으로 떠올려서 자애 마음을 집중적으로 키웁니다. 키워서 나중에는 모든 중생에게 자애 마음이 다 가도록 하는 겁니다. 자애로 선정을 얻는 방법입니다.
사마타 수행하는 파욱 센터에 자애관을 하는 방법을 제가 물어봤는데, 거기서는 4선정까지 얻고 자애관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자애관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4선정까지 얻고 난 뒤에 자애관을 가르친다니. 자애관으로 선정을 얻기가 어렵답니다.
자애관을 할 때 제일 먼저 자기 자신에게 하고, 자기와 친한 친구에게,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에게, 그다음에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불특정한 대상에게, 이렇게 네 종류로 나누어서 자애관을 합니다. 처음에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4가지 존재에 구분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네 명에게 내 마음을 쓰는 게 구분 없이, 나와 남과 적과 그리고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존재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 자애를 쓰는 데 구분되지 않는다고 나옵니다.
미얀마에서 두타행하는 스님이 계셨는데 법랍이 많으셨습니다. 이분이 숲에 사니까 짐승들로부터 보호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짐승들로부터 보호받아야 수행을 할 수 있는 거죠. 이분의 자애가 아주 뛰어나서 숲에서 모닥붓을 피우고 쬐고 있으면, 옆에 호랑이가 와서 같이 모닥붓을 쬈답니다. 같이 앉아서 모닥붓을 바라보면서 모닥붓을 쬐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자애관 가르치는 수행센터들이 있는데 먼저 자신에게 자애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나부터 시작합니다. 나부터 사랑해야 된다는 거죠.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자애경에는 나 자신부터 “적의가 없기를” 이렇게 시작하지 않습니다. 제가 드린 책 안에 있습니다. 거기 자애경에는 그런 내용은 없는데 요즘 자애관은 나부터 시작합니다. 자애 수행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처음에는 자기 자신에게도 자애를 보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나부터 “행복하기를” 하면서 먼저 자애를 보내고 그다음에 점점 넓혀서 모든 중생에게 자애를 보내는 자애관을 보통 하고 있습니다.
요즘 자애관을 하는 이유는 좀 전에 말씀드렸듯이 위빳사나 수행이 보호를 받기 위해서 자애관합니다. 네 가지 보호하는 법 네 가지에 자애관이 들어간다. 자애관이 끝나면 위빳사나로 넘어가죠. 위빳사나 수행을 보호받기 위해서 하는 게 자애관입니다. 자애관이 끝나면 안 됩니다.
붓다께서 주신 자애관의 다음 문장은 이렇습니다.
자애경 본문 –난다말라비왐사 큰스님 11. 딛틴 짜 아누빡깜마, 실-라와- 닷사네-나 삼빤노-, 까-메-수 위네-야게-당, 나히자-뚝 갑바세-야 뿌나레-띠. (Diṭṭhiñca anupaggamma sīlavā, dassanena sampanno; Kāmesu vineyya gedhaṁ, na hi jātu’ggabbhaseyya punaretīti.) 계행과 지혜를 완벽하게 지니는 수행자는 잘못된 견해에 얽매이지 않으며,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고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다시는 잉태되어 윤회하지 않는다. 『난다말라비왐사 큰스님 가르침』, (식카와띠 위뿔라냐니 옮김, 我無말들 출판사, 2022), 143-146쪽을 참조. https://cafe.daum.net/DHAMMADIPAKOREA/DTZD/3 |
“딧틴 짜 아누빡깜마”
잘못된 견해가 없어집니다. 자애관을 하고 난 뒤에 보호받으면서 위빳사나를 하면 위빳사나의 끝에 도와 과를 얻어서 수다원이 되면 유아견이 뽑히죠. 그러니까 잘못된 견해가 사라지는 거죠. 바른 견해의 시발점은 깜맛사까따 삼마딧티(kammassakata- sammādiṭṭhi)입니다. 업과 업의 결과를 믿는 것, 의도와 의도의 결과를 믿는 것, 이게 바른 견해의 시발점이고, 바른 견해의 끝(완성)은 유아견이 사라지는 거죠. 그게 “딧틴 짜 아누빡깜마”입니다. 유아견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견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이제 중생이라는 관념이 없어집니다. 이 관념을 없애지 않고는 위빳사나를 할 수 없습니다. 관념을 없애 가는 과정이 위빳사나입니다. 점점 관념을 빼면서 위빳사나가 마지막에 완성되는 거죠.
위빳사나의 대상은 물질과 마음뿐이죠. 존재도 아니고 중생도 아닌데, 근데 자애관은 중생에게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관념이라는 중생 대상에게 하는 게 자애관입니다. 근데 위빳사나는 그 대상 자체가 다른 거죠. 중생이 아닙니다. 위빳사나 할 때는 중생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수행입니다. 위빳사나는 그냥 독보적인 수행입니다. 전혀 다른. “딧틴 짜 아누빡깜마”, 유아견이 뽑히고 물질과 마음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계가 완성됩니다.
“실-라와- 닷사네-나 삼빤노-”
실라, 지계와 “닷사나(dassana)”는 “봄. 견해”인데 여기서는 견해입니다. 견해가 “삼빤노(sampanno)” 하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견해가 완성된다는 것은 유아견이 떨어진다는 거죠. 삼마딧티(sammādiṭṭhi. 바른 견해)가 완성됩니다. 바른 견해가 완성되는 거는 보는 눈이 확실해지는 거죠. 항상 무상·고·무아로 본다는 것. 5계를 어기지 않게 됩니다. 자애관을 하고 위빳사나를 했을 때, 위빳사나의 지혜가 완성됐을 때 그렇게 된다는 거죠.
“까-메-수 위네-야게-당”
까마(kāma)는 5욕락입니다. 완전히 5욕락에 대한 갈애를 제거한다는 겁니다. “까메수 위네야게당(kāmesu vineyya gedhaṁ)” 5욕락에 대한 탐착이 끊어지면 아나함이 되는 거죠. 아나함이 되면 감각적인 대상으로 행복을 느끼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져서 더 이상 마음이 몸의 감각적인 대상 쪽으로 가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히자-뚝 갑바세-야 뿌나레-띠.”
이렇게 됩니다. “나(na)”는 하지 않는다, “갑바세야(gabbhaseyya)”는 자궁입니다. “갑바(gabbha)”는 집(자궁)이란 뜻입니다. 콘크리트로 지은 집 있죠? 그런 집이라는 뜻입니다. “갑바세-야”는 자궁에 입태하는 존재들을 말합니다. 욕계 존재들 중에 천신이나 아귀처럼 뿅! 하고 나타나는 화생(化生)이 있고, 자궁에 입태하는 태생이 있고, 그리고 습기에서 나타나는 습생이 있죠. 난생도 있죠. 난생은 두 번 태어난다고 합니다. 알로 들어갈 때 재생연결을 하고, 알을 깨고 나올 때 또 한 번 태어나죠. 알로 사는 동안에도 생명이 있는 거죠.
알을 보면 생명이 살아있다고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계란을 깨 먹게 되는 거겠죠.
네 종류의 빠띠산디(paṭisandhi. 재생연결)가 있는데 “나히자-뚝 갑바세-야 뿌나레-띠.” 자궁을 빌려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까-메-수 위네-야게-당”, 5욕락이 떨어져 나가면 더 이상 자궁으로 재생연결하지 않습니다. 화생(化生)으로 재생연결합니다. 범천계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나히자-뚝 갑바세-야 뿌나레-띠”, 이것은 정확히 말하면 욕계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나함이 되면 욕계에 태어나지 않고, 범천계(색계, 무색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까-메-수 위네-야게-당”, 5욕락을 제거해서 더 이상 자궁에 빠띠산디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게 아나함이죠. 여기까지입니다. 이 문장의 정확한 해석은 “아나함이 된다.”입니다. “아라한이 된다.”가 아닙니다. 정확히 하면 "아나함이 돼서 더 이상 욕계 중생으로 태어나지 않다.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욕계 천신으로도 태어나지 않고.
자애 마음을 관찰해서 위빳사나 지혜를 닦습니다.
난다말라 사야도의 법문 중에는 자애 마음을 대상으로 위빳사나 지혜를 닦아서 아나함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마음이 머무는 자리, 심장은 물질로 관찰하고. 마음이 심장에 머문다고 이 책에도 나와 있네요. 마음은 머리에 있지 않고 심장에 있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많이 흘러서 시대가 퇴보할 수도 있고, 발전할 수도 있겠지만, 발전한다면 뇌과학은 엉터리였다고 밝혀질 수도 있겠죠.
자애를 증장시켜서 마음을 대상으로 관찰하고, 그다음에 마음이 머무는 자리, 심장 물질을 관찰하다 보면, 위빳사나 지혜가 점점 무르익어서 수다원이 됩니다.
이게 “딧틴 짜 아누빡깜마, 실-라와- 닷사네-나 삼빤노-” 여기까지입니다. 수다원이 되고 그 다음에 “까-메-수 위네-야게-당”하면 5욕락이 떨어져서 아나함이 되고, 아나함이 되어서 “나히자-뚝 갑바세-야 뿌나레-띠.” 더 이상 자궁으로 재생연결하지 않는다. 어디로 할 수 있냐면 범천계, 아나함이 되면 정거천에 태어나겠죠. 범천 중에서도 4선정, 아나함 이상들만 태어나는 범천계에만 태어나겠죠. 거기서 더 수행하면 아라한이 되겠죠.
자애관의 처음 시작은 뭐였습니까?
“까라니-야 맏타꾸살레-나(Karaṇīyam-attha-kusalena)”, 이로운 일(kusala. 선업), 앗타(attha)는 이익 되는 일에 능숙해서 “까라니야(Karaṇīya)”, 그런 일을 해야만 하고, 이로운 일에 능숙하게 돼야 하고, 최고의 경지를 원하는 사람은 정직하고, 가르치기 쉽고 부드럽고 교만하지 않아야 됩니다. 이 앞부분들은 자애관을 할 수 있는 소양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수행해서 수다원이 되고 아나함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설하신 자애경입니다.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편집자: 담마삐야
[편집자 주]
*아헤뚜까(ahetuka. 원인 없는 마음) : 인간이나 천신으로 태어나는 재생연결식에 3종류가 있다. 1) ‘탐욕없음, 성냄없음, 지혜’라는 세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 2) ‘탐욕없음, 성냄없음’이라는 두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 3) 원인 없는 마음으로 태어나는 경우이다. 세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만 그 생에서 수행하여 선정과 출세간 도과를 성취할 수 있다. 천신이 두 가지 원인 마음이나 원인 없는 마음으로 태어나는 경우 낮은 천신으로 태어난다. 특히 이들 중 악처에서 아귀 등과 같이 살아가는 경우를 위니빠띠까(vinipātika. 악처에 떨어진 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뿌납바수 경(S10:7)> 등에서 보듯이 위니빠띠까(vinipātika)로 태어났지만 세 가지 원인 마음을 가져서 도과를 성취하는 경우도 있다.
* 2023-07-03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398
일부용어 수정.
<아비담맛타상가하> 9장 깜맛타나(kammaṭṭhāna. 수행 주제) : 자애경 (3)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아비담맛타상가하> 제9장 “수행”에서 네 가지 압빠만냐(appamaññā. 한계 없는 마음) 중에서 첫 번째, 자애관하는 방법 강의하고 있습니다. 자애관 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미얀마의 빤디따라마에서도 자애하는데 지금 하고 있는 자애경과는 좀 다르게 합니다. “아항 아웨로 호미(ahaṃ avero homi. 나에게 적의가 없기를)”로 시작하는 자애관 들어보셨습니까? 미얀마에서 제일 많이 쓰이는 자애관인데, 자애관 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여러 가지 중에서 자기 취향에 맞는 거 골라서 하시면 됩니다.
자애경을 설하신 배경
지난 시간에 부처님 당시에 안거 3개월을 나러 멀리 떨어진 숲으로 간 비구들이 거기서 수행을 잘하지 못하고 계속 숲에 사는 정령들에게 위협 받습니다. 무서운 모습을 보이고, 목이나 팔다리 이런 것들이 잘린 귀신의 모습을 보여줘서 집중이 안 돼서 수행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자 자애경을 가르쳐 줍니다. “가서 이걸 독송하면 수행을 안정적으로 마음 편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가 질문했죠. “왜 비구들이 숲에 와서 위빳사나 수행을하고 성인이 되는 도와 과를 얻고 하면 숲에 사는 정령들에게도 좋을 텐데, 왜 위빳사나 하는 비구들을 수행 못하게 숲에서 내쫓아 놓고는 자애관을 하니까 반기고 수행할 수 있도록 했을까?” 위빳사나 해서 성인이 되고 도와 과를 얻고 아라한이 되면 숲속에 사는 정령들에게도 이로울 텐데 왜 정령들은 위빳사나 하는 비구들을 쫓아냈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답은 몇 가지가 있을 수 있겠죠.
대부분의 인간들에게도 듣기 거북하고 그리고 천신도 심지어 범천도 모르는 4성제를, 인간들보다 낮은, 숲에 사는 정령들은 인간보다 낮지 않습니까? 아헤뚜까(ahetuka. 원인 없는 마음)로 재생연결한 존재들이죠. 인간들은 최소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선업 원인으로 재생연결했는데 정령들은 대부분 아헤뚜까*로 재생연결한 존재들이라서, 정령들이 4성제, 고성제, 위빳사나 수행은 잘 이해하지 못해도 자애관은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자애관은 중생들이 밀접한 행복감을 쉽게 느낄 수 있는 수행이니까, 자애관을 했을 때는 좋아하고 위빳사나를 하는 수행자를 반기지 않았던 것이겠죠. 이게 정답인 것 같습니다. 인간들도 듣기 싫어하는 4성제나 고성제를 정령들도 납득하기 힘들겠죠.
근데 자애만은 이해하기 쉽겠죠. 사이좋게 지내는 자애관을 해서 정령들로부터 보호받고 그래서 위빳사나를 하게 되는 거죠. 위빳사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세상에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수행 정도를 좋아하지요. 자애관을 좋아하죠. 허나 자애관으로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위빳사나를 보호하기 위해 자애관을 닦습니다.
위빳사나를 하는 동안 보호받기 위해서 하는 수행들이 있습니다. 위빳사나는 건조한 수행입니다. 건조한 위빳사나 수행을 하기에 앞서 자애는 촉촉한 수행이라고, 대중의 관계를 촉촉하게 만드는 수행입니다. 위빳사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수행의 성질이 위빳사나는 건조하고 메마른 수행입니다.
위빳사나를 하는 동안 보호받기 위해서 하는 수행들이 4가지 있습니다. 이 자애관은 그중의 한 방법이고, 붓다눗사띠, 담마눗사띠, 마라나눗사띠, 멧따바와나 이 네 가지를 짜뚜라락카 바와나(Caturārakkhā-Bhāvanā. 네 가지 보호수행)라고 합니다. 붇다에 대해서 상기하고, 법에 대해서 상기하고, 죽음에 대해서 상기하는 것, 이걸 해서 위빳사나 수행하는 동안 보호받는 거죠. 수행을 잘 해나갈 수 있도록 보호받는 수행. 이것들은 사마타 수행이죠.
위빳사나는 위빳사나이고, 사마타를 해서 위빳사나를 할 때 보호받을 수 있게. 사마타를 합니다. 사마타를 하는 것과 위빳사나를 하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방법도 반대이고 얻게 되는 결과도 전혀 다르고, 업의 바퀴를 반대로 굴리는 수행입니다. 방향을 따지자면. 사마타는 윤회하게 하는 수행이고, 위빳사나는 윤회의 바퀴를 멈추게 하는 수행이죠. 세상의 중생들은 윤회자체를 고통으로 보지 않아서 조건을 바꾸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해서 계속 더 나은 조건을 바랍니다. 벗어나기보다 세상에서 행복하게 편안히 살길 원하니까 좋은 조건을 주는 자애관을 하면 좋아하겠죠.
지난 시간에 했던 게 짜뚜라락카 바와나, 즉 위빳사나를 보호하는 네 가지 수행을 하는데 시간을 오래 투자하지 않습니다. 아주 짧게, 네 가지를 모두 끝내는데 5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빤디따라마에서는 5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네 가지를 다 끝내니까 아주 짧게 합니다. 길게 하면 위빳사나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짧게 합니다. 위빳사나를 보호는 하되, 위빳사나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짧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전혀 다른 수행이라는 것을 아시겠죠? 이 사마타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위빳사나에 방해가 됩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하겠습니다. 자애관을 닦아서 선정까지도 얻을 수 있어요. 아항 아웨로 호미(ahaṃ avero homi), 나에게 적의가 없기를, 아비야빳짜 호미(abyābajjha homi), 성냄이 없기를. 이렇게 하는 자애관은 그냥 선업을 짓는 자애관이고, 선정을 얻을 수 있는 자애관은 다르게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합니다. 선정을 얻으려면 한 명에게 집중해서 자애관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자애관하는 방법 528가지가 있다고 했죠. 그렇게 하는 것은 선정을 얻는 자애관은 아닙니다. 나의 자애 마음을 일으키기 좋은 상대에게 집중해서 한 명에게 집중합니다. 그래서 선정의 집중을 얻는 거죠. 자애 대상을 처음에 한 명에 집중한 다음에, 자기 마음을 점점 다른 대상으로 넓혀갑니다. 넓혀서 자애 마음이 적을 떠올렸을 때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게 선정을 얻는 없는 자애관입니다.
그렇게 할 때 남성은 남성에게만 하고, 여성은 여성에게만 자애를 보내야 합니다. 왜 이렇게 하냐면 자애와 집착은 아주 밀접하기 때문에, 집착과 자애가 혼동될 수 있는 거죠. 집착과 자애는 분명히 다른데, 이성에게는 집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그 집착을 자애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게 동성만을 자애의 대상으로 떠올려서 자애 마음을 집중적으로 키웁니다. 키워서 나중에는 모든 중생에게 자애 마음이 다 가도록 하는 겁니다. 자애로 선정을 얻는 방법입니다.
사마타 수행하는 파욱 센터에 자애관을 하는 방법을 제가 물어봤는데, 거기서는 4선정까지 얻고 자애관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자애관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4선정까지 얻고 난 뒤에 자애관을 가르친다니. 자애관으로 선정을 얻기가 어렵답니다.
자애관을 할 때 제일 먼저 자기 자신에게 하고, 자기와 친한 친구에게,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에게, 그다음에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불특정한 대상에게, 이렇게 네 종류로 나누어서 자애관을 합니다. 처음에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4가지 존재에 구분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네 명에게 내 마음을 쓰는 게 구분 없이, 나와 남과 적과 그리고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존재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 자애를 쓰는 데 구분되지 않는다고 나옵니다.
미얀마에서 두타행하는 스님이 계셨는데 법랍이 많으셨습니다. 이분이 숲에 사니까 짐승들로부터 보호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짐승들로부터 보호받아야 수행을 할 수 있는 거죠. 이분의 자애가 아주 뛰어나서 숲에서 모닥붓을 피우고 쬐고 있으면, 옆에 호랑이가 와서 같이 모닥붓을 쬈답니다. 같이 앉아서 모닥붓을 바라보면서 모닥붓을 쬐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자애관 가르치는 수행센터들이 있는데 먼저 자신에게 자애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나부터 시작합니다. 나부터 사랑해야 된다는 거죠.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자애경에는 나 자신부터 “적의가 없기를” 이렇게 시작하지 않습니다. 제가 드린 책 안에 있습니다. 거기 자애경에는 그런 내용은 없는데 요즘 자애관은 나부터 시작합니다. 자애 수행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처음에는 자기 자신에게도 자애를 보낼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나부터 “행복하기를” 하면서 먼저 자애를 보내고 그다음에 점점 넓혀서 모든 중생에게 자애를 보내는 자애관을 보통 하고 있습니다.
요즘 자애관을 하는 이유는 좀 전에 말씀드렸듯이 위빳사나 수행이 보호를 받기 위해서 자애관합니다. 네 가지 보호하는 법 네 가지에 자애관이 들어간다. 자애관이 끝나면 위빳사나로 넘어가죠. 위빳사나 수행을 보호받기 위해서 하는 게 자애관입니다. 자애관이 끝나면 안 됩니다.
붓다께서 주신 자애관의 다음 문장은 이렇습니다.
자애경 본문 –난다말라비왐사 큰스님 11. 딛틴 짜 아누빡깜마, 실-라와- 닷사네-나 삼빤노-, 까-메-수 위네-야게-당, 나히자-뚝 갑바세-야 뿌나레-띠. (Diṭṭhiñca anupaggamma sīlavā, dassanena sampanno; Kāmesu vineyya gedhaṁ, na hi jātu’ggabbhaseyya punaretīti.) 계행과 지혜를 완벽하게 지니는 수행자는 잘못된 견해에 얽매이지 않으며,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고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다시는 잉태되어 윤회하지 않는다. 『난다말라비왐사 큰스님 가르침』, (식카와띠 위뿔라냐니 옮김, 我無말들 출판사, 2022), 143-146쪽을 참조. https://cafe.daum.net/DHAMMADIPAKOREA/DTZD/3 |
“딧틴 짜 아누빡깜마”
잘못된 견해가 없어집니다. 자애관을 하고 난 뒤에 보호받으면서 위빳사나를 하면 위빳사나의 끝에 도와 과를 얻어서 수다원이 되면 유아견이 뽑히죠. 그러니까 잘못된 견해가 사라지는 거죠. 바른 견해의 시발점은 깜맛사까따 삼마딧티(kammassakata- sammādiṭṭhi)입니다. 업과 업의 결과를 믿는 것, 의도와 의도의 결과를 믿는 것, 이게 바른 견해의 시발점이고, 바른 견해의 끝(완성)은 유아견이 사라지는 거죠. 그게 “딧틴 짜 아누빡깜마”입니다. 유아견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견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이제 중생이라는 관념이 없어집니다. 이 관념을 없애지 않고는 위빳사나를 할 수 없습니다. 관념을 없애 가는 과정이 위빳사나입니다. 점점 관념을 빼면서 위빳사나가 마지막에 완성되는 거죠.
위빳사나의 대상은 물질과 마음뿐이죠. 존재도 아니고 중생도 아닌데, 근데 자애관은 중생에게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관념이라는 중생 대상에게 하는 게 자애관입니다. 근데 위빳사나는 그 대상 자체가 다른 거죠. 중생이 아닙니다. 위빳사나 할 때는 중생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수행입니다. 위빳사나는 그냥 독보적인 수행입니다. 전혀 다른. “딧틴 짜 아누빡깜마”, 유아견이 뽑히고 물질과 마음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계가 완성됩니다.
“실-라와- 닷사네-나 삼빤노-”
실라, 지계와 “닷사나(dassana)”는 “봄. 견해”인데 여기서는 견해입니다. 견해가 “삼빤노(sampanno)” 하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견해가 완성된다는 것은 유아견이 떨어진다는 거죠. 삼마딧티(sammādiṭṭhi. 바른 견해)가 완성됩니다. 바른 견해가 완성되는 거는 보는 눈이 확실해지는 거죠. 항상 무상·고·무아로 본다는 것. 5계를 어기지 않게 됩니다. 자애관을 하고 위빳사나를 했을 때, 위빳사나의 지혜가 완성됐을 때 그렇게 된다는 거죠.
“까-메-수 위네-야게-당”
까마(kāma)는 5욕락입니다. 완전히 5욕락에 대한 갈애를 제거한다는 겁니다. “까메수 위네야게당(kāmesu vineyya gedhaṁ)” 5욕락에 대한 탐착이 끊어지면 아나함이 되는 거죠. 아나함이 되면 감각적인 대상으로 행복을 느끼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져서 더 이상 마음이 몸의 감각적인 대상 쪽으로 가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히자-뚝 갑바세-야 뿌나레-띠.”
이렇게 됩니다. “나(na)”는 하지 않는다, “갑바세야(gabbhaseyya)”는 자궁입니다. “갑바(gabbha)”는 집(자궁)이란 뜻입니다. 콘크리트로 지은 집 있죠? 그런 집이라는 뜻입니다. “갑바세-야”는 자궁에 입태하는 존재들을 말합니다. 욕계 존재들 중에 천신이나 아귀처럼 뿅! 하고 나타나는 화생(化生)이 있고, 자궁에 입태하는 태생이 있고, 그리고 습기에서 나타나는 습생이 있죠. 난생도 있죠. 난생은 두 번 태어난다고 합니다. 알로 들어갈 때 재생연결을 하고, 알을 깨고 나올 때 또 한 번 태어나죠. 알로 사는 동안에도 생명이 있는 거죠.
알을 보면 생명이 살아있다고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계란을 깨 먹게 되는 거겠죠.
네 종류의 빠띠산디(paṭisandhi. 재생연결)가 있는데 “나히자-뚝 갑바세-야 뿌나레-띠.” 자궁을 빌려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까-메-수 위네-야게-당”, 5욕락이 떨어져 나가면 더 이상 자궁으로 재생연결하지 않습니다. 화생(化生)으로 재생연결합니다. 범천계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나히자-뚝 갑바세-야 뿌나레-띠”, 이것은 정확히 말하면 욕계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나함이 되면 욕계에 태어나지 않고, 범천계(색계, 무색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까-메-수 위네-야게-당”, 5욕락을 제거해서 더 이상 자궁에 빠띠산디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게 아나함이죠. 여기까지입니다. 이 문장의 정확한 해석은 “아나함이 된다.”입니다. “아라한이 된다.”가 아닙니다. 정확히 하면 "아나함이 돼서 더 이상 욕계 중생으로 태어나지 않다.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욕계 천신으로도 태어나지 않고.
자애 마음을 관찰해서 위빳사나 지혜를 닦습니다.
난다말라 사야도의 법문 중에는 자애 마음을 대상으로 위빳사나 지혜를 닦아서 아나함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마음이 머무는 자리, 심장은 물질로 관찰하고. 마음이 심장에 머문다고 이 책에도 나와 있네요. 마음은 머리에 있지 않고 심장에 있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많이 흘러서 시대가 퇴보할 수도 있고, 발전할 수도 있겠지만, 발전한다면 뇌과학은 엉터리였다고 밝혀질 수도 있겠죠.
자애를 증장시켜서 마음을 대상으로 관찰하고, 그다음에 마음이 머무는 자리, 심장 물질을 관찰하다 보면, 위빳사나 지혜가 점점 무르익어서 수다원이 됩니다.
이게 “딧틴 짜 아누빡깜마, 실-라와- 닷사네-나 삼빤노-” 여기까지입니다. 수다원이 되고 그 다음에 “까-메-수 위네-야게-당”하면 5욕락이 떨어져서 아나함이 되고, 아나함이 되어서 “나히자-뚝 갑바세-야 뿌나레-띠.” 더 이상 자궁으로 재생연결하지 않는다. 어디로 할 수 있냐면 범천계, 아나함이 되면 정거천에 태어나겠죠. 범천 중에서도 4선정, 아나함 이상들만 태어나는 범천계에만 태어나겠죠. 거기서 더 수행하면 아라한이 되겠죠.
자애관의 처음 시작은 뭐였습니까?
“까라니-야 맏타꾸살레-나(Karaṇīyam-attha-kusalena)”, 이로운 일(kusala. 선업), 앗타(attha)는 이익 되는 일에 능숙해서 “까라니야(Karaṇīya)”, 그런 일을 해야만 하고, 이로운 일에 능숙하게 돼야 하고, 최고의 경지를 원하는 사람은 정직하고, 가르치기 쉽고 부드럽고 교만하지 않아야 됩니다. 이 앞부분들은 자애관을 할 수 있는 소양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수행해서 수다원이 되고 아나함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설하신 자애경입니다.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편집자: 담마삐야
[편집자 주]
*아헤뚜까(ahetuka. 원인 없는 마음) : 인간이나 천신으로 태어나는 재생연결식에 3종류가 있다. 1) ‘탐욕없음, 성냄없음, 지혜’라는 세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 2) ‘탐욕없음, 성냄없음’이라는 두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 3) 원인 없는 마음으로 태어나는 경우이다. 세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만 그 생에서 수행하여 선정과 출세간 도과를 성취할 수 있다. 천신이 두 가지 원인 마음이나 원인 없는 마음으로 태어나는 경우 낮은 천신으로 태어난다. 특히 이들 중 악처에서 아귀 등과 같이 살아가는 경우를 위니빠띠까(vinipātika. 악처에 떨어진 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뿌납바수 경(S10:7)> 등에서 보듯이 위니빠띠까(vinipātika)로 태어났지만 세 가지 원인 마음을 가져서 도과를 성취하는 경우도 있다.
* 2023-07-03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398
일부용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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