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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
인 설 현
옥천 있는 문학관 들러
시집 받은 기쁨에
귀가 대전 전철 안에서
지은이 맘속에 빠졌다
옆자리 젊은 할멈이
손전화 핸드백에 넣고
시에 관심 많은 척하며
코가 잘생겼다 하기에
나에게 반했나 싶었다
80대 노인의 착각은
만남 두 번째 들통났다
할멈은 사이비 종교에
나를 끌어갈 속셈이었다
주여!
나를 어여삐 여기소서
※충남 예산 출생, 공주사범학교 졸업, 시집『착하고 귀한 선물』, 저서『재미나는 글짓기』,
『슬기로운 엄마 교육, 즐거운 자녀 공부』등
장날
풋고추 애호박이 먹고 싶어
유성장을 한 바퀴 빙빙 돌았습니다
서로 엉덩이 부딪치고
젖가슴도 스쳐 지나갔습니다
노인과 젊은이, 남자와 여자
어느 누구 하나도
성추행 당했노라 말하는 이 없이
유성장이 말끔하게 파했습니다
소식
한동안 내맘 괴롭힌
이웃과 떠나
소식 잊고 살았다
강산이 바뀌고
이 세상 떠났다는
소식 전해 들었다
기쁠 줄 알았는데
어쩐지 씁쓸한 게
무소식만 못하다
친구를 보내며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친구들과
팔순 고개를 함께 넘었습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 하는
바람마저 저버리고
하나둘 이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친구가 떠난 빈자리가
왜 그리도 휑한지
어둑한 시간이 지나갑니다
내가 떠난 자리도
남아 있는 친구들이
그리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그 빛난 여름
전 월 득
네가 오길 기다린 건 나였지
꽃이 지고 움이 트는 사이에도
나는 너를 그리워했지
하루하루 무르익을 더위를 생각하면서
날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싹둑거리고
머리를 갸웃거리기도 하며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너와 함께 했지
느긋한 얼굴에 미소를 담고 평화를 누리며
땀 한 방울도 허투루 흘리지 않았지
뭇사람들의 이마에 진한 땀이 흐르고
폭염에 언성 높일 즈음이면
오히려, 원숙한 여름에 사로잡히는 나
재봉틀과의 동행은 탁월한 선택이었어
그 누구에겐 덥고 짜증 나는
더딘 시간이었지만
나에겐 빵이 되고 시가 되었던 여름
그 빛나던 여름이 서서히 등을 돌리고 있다
그렇게 미련 없이 떠나갈 것을
뭇매를 맞으며 버티고 서 있었나?
그대가 떠난 후엔
또 어떤 인연이 기다리고 있으려나
※ 충남 부여 출생, «상상의 힘»(2020) 수필부문 신인상, jwd5038@naver.com.
가을이 오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황금빛 들길을 걸으리
들국화 무더기무더기 어우러진
산비탈 쪽으로
투덜대는 무르팍을 달래며
느릿느릿 초로(初老)의 발길로
하늘과 바람과 오감을 마시며
사색에 젖으리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늙은 소나무 옆으로 떨어지는
낙엽에게 다소곳이 다가가
진중하게 삶을 물으리
푸르던 청춘이 어느새
날개를 접고
작은 바람에
온몸을 저당하느냐고
문상
때늦은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봄볕 달아난 한낮에
예고 없이 날아든 부고로
그와의 이별을 고하였다
무거운 정적이 맴도는
국화꽃 단상 위에서
고요히 바라보는 당신
평온한 얼굴로 나를 맞는다
어서 오라고
그동안 잘 지냈느냐고
한 번뿐인 생인 것을
그렇게 살았노라고
중언부언
망자는 말이 없다는 건 거짓말
멀리, 혹은 가까이로
맨발로 뛰어다니며 혼잣말 한다
아린 가슴 달래고
세상 얘기 더 하고 싶어
이승에서 삼 일간 더 머물다 가겠노라고
머뭇거리며 도렷이 이야기한다.
잠 못 드는 밤
며칠째 계속되는 찜통더위
이글거리는 태양을 뚫고
낡은 전봇대 같은 그이가 걸어온다
풋사과 한 봉지와
쫄 비빔면 그리고 짜글면 한 봉지까지
저녁 밥상을 가슴에 가득 안고
멍석같이 말아 쥔 입술을 쭉 내밀며
알통이 튼실한 종아리를 긁어댄다
여름날 모기와의 사투는 당연지사
놈들에게 당한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남편의 아린 가슴을 위로하며
연고와 반창고를 덧입혀 다독인다
너무 깔끔한 게 죄라면 죄지
날마다 쓸고 닦고 털어 대는
그이의 흰 살결에
겁도 없이 덤벼들어 입 맞추고 도망친 놈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찾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어
잠 못 들고 뒤척이게 하는
덧난 상처들
가을 소리
후드득후드득
가을을 부르는 빗소리가 밤새도록 울립니다
잿빛 어둠은
아침이 오는 줄도 모르고
서걱서걱 수군댑니다
방안까지 따라온
땀 냄새가 텅 빈 곡간을 보듬는 농부와
같은 꿈을 꿉니다
어둠이 투명해질 때까지
소리 없이 다가온 고운 이슬
조롱조롱 매달린 감나무에
대추나무에
고개 숙인 벼 이삭에
쓰담쓰담 얼굴 부비고
달아납니다
아침 햇살에 놀라
구름송이 만들다
달려온 날랜 소슬바람
살갑게 내 옆구리를 만지며
응석을 부립니다
당신
한 상 은
사는 동안 더 없는 인연 앞에
사랑의 끈으로 줄다리기하며
그렇게 그렇게 살아 온 세월
때때로 당신이 생각납니다
개나리 곱게 피는 봄날
달 아래 살포시 비춰오는
배꽃처럼 청순하던 그 모습
때때로 당신이 생각납니다
한여름 폭염 비켜 소나기 내릴 적
한걸음에 달려와
따스한 사랑으로 빗줄기를 받아내던
그때 그리움이 더해가네요
곱게 물든 단풍 나뭇잎에 숨어
수줍음을 더해가며
살포시 미소 짓던 국화꽃 당신
그때 그 모습이 생각납니다
하얀 눈 소리 없이 내리는 겨울밤
스카프 위로 소복이 내려앉던
그 눈을 맞으며 함께 걷던
그때 그 길이 생각납니다
다하지 못한 사랑 슬픈 파도로 남아
견디지 못할 그리움이 물결로 남아
헛헛한 바람 타고
밀려갔다 밀려옵니다.
※충남 천안 출생,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사랑❱수필 부문 신인상, hanse9700@naver.com
운명
깨어진 술잔처럼
운명의 장난은 얄궂어
뚫지 못하는 벽을 안고
그렇게 주저앉았다
함께 할 수 있는 길이 없음에
막막한 가을을 걷다가
잎사귀를 떨군 나목 되어
긴 세월을 아픔으로 보냈다
잎 무성했던 그 시절로
바람처럼 돌아가
흩어진 골목 어귀에서
그대를 만난다면
두 손을 맞잡아
남은 세월
아름다운 일기를 함께 쓰며
맑고 곱게 살고 싶다
그리 그리 거친 시간을
사랑으로 비켜가며
힘든 여정 살포시 밟아가며
노래하며 살고 싶다.
가을이 왔습니다
외진 길가 풀잎 위에
이슬방울 맺으며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무덥고 지루하던
여름이 떠난 자리에
바람결이 제법 선선합니다
이제는 닫아야 하는
창문을 바라보며
세월의 덧없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더위가 멀어지듯
손 저으며 떠나야겠지요
달빛도 삽상한 이 가을
섬돌 밑에서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오늘은 더 정겹습니다
클로버 카페
창가를 스치는 여인의 발걸음 소리
들릴 듯 들리는 듯
클로버 카페에 조용히 선율 흐르고
수통골 도덕봉 산자락 아래
마주한 찻잔에 향 내음 짙게 스미던
아담한 하얀 집 그 카페
두 손 모아 다소곳이 받친 찻잔
가녀린 미소에 취하고
아미에 갇혀 허둥대던 그곳
이제,
동행할 수 없던 굴곡진 삶 돌아
혼자라는 생각에 설움이 돋네
불같던 사랑 묵은 재 되어
놋쇠 그릇 닦아내는 잿김이로 남아
그리움의 카페를 지우고 또 닦네
마루턱에서
삶의 마루터기에서
지난 삶의 족적이 묻어나
눈물을 머금는다
붉은 울음 같던
검은 시간을 털며
몸을 비우고 또 비운다
그래도 이 나이에
산수에 닿아 돌아보니
여기까지 잘도 버텨왔다는 생각이다
마루터기는
멀리 볼 수 있어 좋고
돌아볼 수 있어 좋다
가을
오 병 남
붉은 관광버스
그 옆에
허리 굽은 할머니
사라진 푸른 세월
남아 있는 것은
한 장
가을 단풍
※충북 청주 출생, 청주교대 졸업, 한국미술협회 회원, 가톨릭 미술가회 회원, 대전사생회 회원,
시집『당신은 나에게 선물이었어요』
당신과 나
높은 산 아래
흐르는 맑은 물은
산을 부러워하지 않고
늘 그 자리만 지키는 산은
흐르는 물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둘은 다른 듯 같은 몸
산이 있어 물이 있고
물이 있어 산이 더 푸르나니
당신과 내가 함께 나눈 세월
어둠 속에서도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만큼
마음을 함께 했던 시간들
당신이 산이면
나는 물이 되고
당신이 물이라면
나는 산이 되리라
장맛비
후두둑두둑
엄마 태중에서 듣던 노랫가락
이젠, 생명의 소리 되어
내게 와서 속삭입니다
욕심으로 뜨거워진 세상을 어루만지고
으스러져 어지러운 찌꺼기들
모으고 뭉개고 비벼
말끔히 치워야 한다고
후두둑두두둑
흩어졌던 시간이
바다로 흘러갔다는 소식 들릴 때
옹달샘에서 솟아 나는
맑고 고운 내 영혼
현수막
김 기 태
길거리에 덕지덕지
똥칠해 놓지
국가를 위해 일 하겠단다
눈과 귀가 어두워
이해하기 힘들다만
눈치마저
늙은 것은 아니라네
단풍잎 떨어지는
교차로에 서서
‘나 예쁘지’ 하려는 거지
바보들
니 검은 속
내 모를까 봐
※충남 서천 출생, 글지이. 부름새, 서각인, 밥로스. 초상화, 생활공예, 수필가, 전)계룡건설 토목 본부장, 현)온동마을 촌장,
저서『삶의 시방서』,『소똥 위에 홍시』, 『살아보니 어뗘』,『그려』,『하고집이』등
가을
시골집 밤나무에 붙어
울고 불던 매미
오늘은 아파트 방충망에 날아와
무척이나 아는 체를 한다
새벽이슬을 먹으며
오래도록 다듬었을 소리
도르락도르락
시간을 열라고 한다
삶
흘러가는 시간
붙잡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것
돈두희안(豚頭喜顔)
몸이 없어도 씨익 웃고 있는 얼굴
옥황상제가 베어버린 목
豚頭의 주둥이와 코엔
배춧잎이 돌돌 말려
세종대왕도 율곡 할아버지도
웃는 얼굴에 입맞춤 하고 있다
오른쪽 귀는 목수 아저씨 드시고
왼쪽 귀는 철근 아저씨가 드시고
혓바닥은 말 많은 감리단장 드시고
욕심 많은 주둥이는 뚱땡이 업무연락관이 드시고
남은 것은 오신 손님 골고루 나눠 드세요.
일하는 사람들 안전을 기원하며
나에게 절을 하니
부처님의 눈웃음이 부럽지 아니하다.
슬픈 가을을 노래하다
김 근 수
가을이 지나가네
그리움에 눈물이 흘러내려
나 혼자 서성이는 그 길에
떠나지 않는 너의 그림자
바람에 실려 와 내게 스치면
슬픈 가을을 노래한다
노을 진 석양은
어둠에 가려져 하늘을 덮고
머무르지 않는 사랑의 추억들은
서서히 사라져 가고
내 마음도 조금씩 아련해진다
가을의 향기가 차가워져도
가을 노래가 내 마음을 흔들어도
슬픈 가을의 추억들은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거야
그리움에 가득 찬 남자의 목소리
슬픈 가을을 노래한다.
※ 한국문인협회 회원, (사)국보문인협회 작가협회 회장, 제11회 대한민국 국회 문화예술 명인대전 시 부문 대상, 대전광역시 대전사랑 시장 표창, 대전 중구 청소년 문예 대상 수상, 국무총리 청소년보호위원회 유공자 표창, 문화체육관광부 ‘책읽기 캠페인’ 초청 작가, 한국농촌문학상 대상 수상,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상 수상, 한국문학신문 대전광역시 본부장. 기자, 세계 청소년동아리대회 백일장 심사위원, 서원대학교 통일부 주관 전국 시 낭송대회 심사위원장, 시집『유천동 블루스』,『오월의 연가』외
어찌 그 주·주는 닮아 가지고
이 석 구
돌이켜 보면
늘 미숙에 빠져 살았다
하늘이 참 곱게도 푸르던 날
봉황동 오거리 지나 스물넷 청춘이 다리를 건넜다
공산성까지 길게 뻗은 곧은 길은
초입부터 드문드문 허름한 삶이 오갔건만
주체할 수 없는 황홀한 설렘은 주변을
온통, 영의 고요 속에 묻어 버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서정주의 서시를 나는 참 좋아해요
찰라, 미숙이 의식 밖으로 던져졌다
아이 무식해라 그게 어찌 서정주람
이미 한 번 던져진 어둠은 구천을 떠도는 고독한 넋
서정주의 서시면 어떻고 윤동주의 서시면 어땠기에
그냥 서시면 되었던 것을
하긴, 스물일곱 짧은 인생
꺾일 줄 모르던 그의 고고함을 어찌 함부로 팔 수 있겠는가
가슴에 들어앉은 당신은
굴욕의 날 무참하게 짓밟고 계셨으니
아, 어찌 그 주·주는 닮아 가지고
※충남 논산 출생, 이학박사, ≪상상의 힘≫ 신인상(2020), 시집『초승달에 걸터앉아』,『서두르지 않아도 돼요』,『흐뭇한 삶』등, seokkoo@hanmail.net
※※윤동주의 <서시> 부분 인용
하고 싶은 대로 해
뜨고 싶어 뜨는 걸까
하고 싶은 대로 해
그 말처럼 자유를 주는 말이 없는 듯하다
아니 그 말처럼 구속하는 말이 없는 듯하다
한없이, 자유를 주는 듯하면서도 구속하는 말
기표의 무능함이 이처럼 크단 말인가 아니면
다양한 기의의 낯짝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탓인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 말
도대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인지
아니면 절대 함부로 날뛰지 말라는 것인지
헛갈리는 모호의 늪에서 오늘도
혼란한 하루가
삶의 노을에 잠기고 있다
저 하늘엔 또
어두운 별 초롱초롱 뜨고 있다
다만 일러줄 뿐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일러줄 뿐
어떤 것도 선택은 너의 몫인 것을
어머니도 그랬으리라
마음에 담아둔 바람들
겁 없이 내보이시든 젊은 시절 있으셨으리라
듣고 흘리고, 듣고 흘리고
오랫동안 자식에게 당해왔던 그 상처들이 진하게 엉켜
언젠가는 돌만큼이나 딱딱한 관솔로 굳어졌을 어머니
삼백예순다섯 날을 참고 또 참으시다
바람 쉬이 드러내지 않으리라, 체념하셨을 어머니
가슴 저 바닥에서 삭히고 삭혀온 기대가 썩은 퇴물로 울컥 솟아
가끔은, 작은 불똥 하나로도 활활
그것도 한 백 년쯤은 너끈히 타고도 남았을 어머니
오늘도 외로운 바랑 하나 짊어 메고
산소골 언저리를 침묵으로 서성이시는 걸 보면
그렇게 터득 하셨음이 분명하다
나도 이제 그렇게 닮아
다만 일러줄 뿐
바람은 바람대로 그냥 묻는다, 가슴에
깨달음
심 현 지
볼 수 없는 것들이 보이고
느낄 수 없는 것들이 느껴지고
들을 수 없는 것들이 들리는
내 안의 굳은 속살
※ 대전 유성 거주, ≪중도문학≫ 신인상 수상(2022), hg42500@gmail.com
소금
바닷물이 언덕을 넘어
햇볕과 바람으로 목욕을 하면
빛나는 보석이 되지
얼마나 수도를 했으면
하얀
사리 무덤 남기고 떠났을까
얼마나 세월을 삼켰으면
눈부시게 윤기나는
흰색으로 환생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