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사하와 정유재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성석린은 “직산이 비록 조그만 고을이지만 그래도 족히 나의 인덕을 시험해볼 만하네.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불쌍하고 의로운 이에게 먼저 하고, 세를 받는 데는 부자인지 가난한지를 묻는다”라고 하여 민중의 고통과 함께하고자 하는 심사를 밝혔다.
이곳 직산의 객관 동북쪽에 제원루(濟源樓)가 있었는데, 조선 초기의 문신 서거정이 기문을 지었다.
내가 사신으로 영남에 갈 제 직산을 지나게 되었다. 직산 객관 동북쪽에 한 누각이 있기에 올라가서 조금 쉬다가 주인에게 “이 누각의 이름을 무어라 하는가?” 하고 물었다. 주인은 알지 못하여 좌우 사람에게 물으니, 고을 사람이 ‘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객들은 제원이란 뜻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이라 한 것은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대개 백제의 시조 온조란 분은 본래 고구려 동명왕 주몽의 아들로서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망했는데, 사서(史書)에 쓰기를 온조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잡다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했으니, 이곳을 세상에서 직산이라 한다. (······) 지난해에 『삼국사절요』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책을 상고해보니, 직산이 첫 도읍지였던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온조왕 이후 직산에서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곧 지금의 한도(漢都)다. 뒤에 금강으로 옮겼으니 지금의 공주요, 또 사비하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다”라고 하였다.
온조가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이곳에 첫 도읍을 정하고 위례성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은 『동국여지승람』, 『직산현지』, 『대록지(大簏誌)』 등에 전하며, 『삼국유사』에도 직산의 위례성을 백제의 수도로 칭하고 있다. 이처럼 고려와 조선시대 학자들은 위례산 정상부를 감싼 위례산성 때문에 이곳 직산을 위례성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이 주장은 힘을 얻지 못하고 있고 서울의 풍납토성이 위례성으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입장면 호당리와 북면 경계에 있는 위례산(慰禮山)은 일명 위례성, 검은산으로도 불리는데, 금남정맥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북쪽 면이 급경사라서 천연 성벽을 이루고 있는 이 산에는 그러한 산세를 이용하여 둘레 약 550미터, 높이 약 3미터의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서쪽 기슭에는 산신을 모신 당집이 있는데, 이곳 주민들은 예로부터 가뭄이 심하면 이곳 또는 위례산정에 있는 용샘에서 제사를 지낸다.
직산에서 평야지대를 20리쯤 가면 평야가 끝나면서 소사하(素沙河, 지금의 안성천)가 나오는데, 소사하의 북쪽이 경기도 남쪽의 경계가 된다. 『택리지』에는 정유재란 때 소사하에서 왜적을 몰아낸 이야기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선조 정유년에 왜적이 남원을 침략한 뒤 전주를 지나 북쪽인 공주에 올라왔고, 군세가 매우 강성하였다. 당시 명나라 장수 형개는 총독으로 요동에 머물러 있었다. 경리(經理) 양호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하였다. 양호가 연광정(練光亭)에서 저녁밥을 먹는 중에 급한 기별이 날아들었다. 양호는 밥을 먹다 말고 포(砲) 한 방으로 영(令)을 내린 뒤 말을 타고 남쪽으로 내달렸다. 기병이 급히 따르고 보병도 그 뒤를 따랐다. 평양에서 한양에 이르기까지 7백 리 길을 하루 낮 이틀 밤 만에 달려갔다. 양호는 달단(韃靼) 출신인 해생, 파귀, 새귀, 양등산에게 철갑 기병 4천 명과 말을 탄 원숭이 수백 마리를 거느리고 소사하 다리 밑의 들판이 끝나는 곳에 숨어 있게 하였다.
그때 직산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왜적의 모습은 마치 숲 같아 보였다. 드디어 그들이 숨어 있는 곳에서 백여 보 떨어진 곳까지 왜적이 진격해오자 말을 탄 원숭이를 풀어놓았다. 원숭이들은 말을 타고 채찍질을 하면서 왜적의 진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나라에는 본래 원숭이가 없으므로 사람 같기도 하면서 아닌 원숭이를 처음 보고 괴이하게 여겨서 진에 머물러 발을 멈추고 멀거니 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왜의 진에 가까이 간 원숭이는 곧 말에서 내려 그들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왜적이 사로잡고자 하였으나, 원숭이가 잘 피하면서 온 적진을 휘젓고 다니자 진은 드디어 혼란에 빠졌다. 이 틈을 타서 해생 등 네 장수가 기병을 풀어 공격하자 왜적은 총과 화살을 한 번도 쏘아보지 못하고 크게 패하여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덮었다.
이겼다는 기별을 들은 양호는 비로소 군사를 정돈하고 남쪽으로 왜적을 쫓아서 경상도 바닷가에 이르렀다. 왜적들이 우리나라를 침범한 이래로 이와 같은 큰 승리는 없었다. 양호의 지략과 용기는 이여송이 평양에서 거둔 승리보다 훨씬 컸지만, 주사(主事) 정응태는 양호가 자신에게 사유를 알리지도 않고 홀로 공을 세운 것을 분하게 여겨 싸움에 이겼다는 것이 거짓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양호는 탄핵을 받은 뒤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사례 한 가지만 봐도 명나라 조정 역시 다른 여느 나라와 별 다를 바 없이 문란했음을 알겠다.
그 뒤 선조가 사신을 보냈는데, 양호가 무고를 당하였음을 변명하여 정응태는 관직이 갈렸다. 그러나 그는 동림당(東林黨, 중국 명나라 말기의 당파 가운데 하나)에 가담하였고, 정응태의 아들이 그 아버지의 일을 동림당에 호소하였다. 전목재도 그 말을 믿고 자신의 문집에다 정응태가 옳은 양 기록하였으니, 동림당의 허술함과 대부분의 군자라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알 수가 있다. 그 들판에서 밭가는 사람이 지금도 가끔씩 창이나 칼 등속을 줍는다고 한다.
봉선홍경사 사적갈비
봉선홍경사가 있던 자리에 세운 비석이다. 비갈에는 절을 창건하게 된 내력과 조성연대 등이 적혀 있다.
한편, 직산고을 북쪽 15리에 홍경원(弘慶院)이라는 원과 봉선홍경사 1) 라는 절이 세워진 것은 고려 현종 때였다. 이곳이 갈림길의 요충지인데다가 민가가 멀리 떨어져 있고 무성한 갈대숲이 들판에 가득해서 행인들을 약탈하는 강도가 많았다. 그리하여 임금이 승려 형긍에게 명하여 절을 세우게 하였는데, 병부상서 강민첨 등에게 감독을 맡겨 병진년부터 신유년까지 2백여 칸의 건물을 짓게 하고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라는 절 이름을 내렸다.
또 절 서쪽에 객관 80칸을 세우고 이름을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고, 양식과 마초를 저장해서 행인들에게 제공하였다. 그 뒤에 비석을 세우면서 한림학사 최충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고 글씨는 백현례에게 쓰게 하였는데, ‘봉선홍경사갈비(奉先弘慶寺碣碑)’라고 새겨진 이 글씨가 유명하여 국보 제7호로 지정되었다. 비의 갓 위에 돌 세 개를 던져서 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아들 없는 부인들이 돌을 많이 던져서 많이 파손되었다. 현재는 비각을 세우면서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게 하여 그 비문을 보호하고 있지만,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현재 절은 없고 원과 비석만 남아 있으므로 절 이름을 따서 홍경원(弘慶院)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관해 이색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큰 들 넓고 넓어 손바닥처럼 평평한데,
뭇 산이 사면에 멀리 뾰족뾰족 푸르네.
중도에 푸른 기와 큰길에 비치는데,
큰 비석 우뚝 높다랗게 솟았네.
우는 새들 바람 따라 위아래로 나는데,
말 가까이 잠자리들이 나는 것 보겠네.
평생에 멀리 놀아 안계가 넓고,
운몽택(雲蒙澤) 가슴 속이 시원히 트였네.
학야(鶴野)로부터 가는 말을 몰았고,
동산에 올라 노나라를 작게 여겨 공자의 상달을 배웠네.
고향으로 돌아올지로다. 살 만한 남은 땅 있으니,
어찌 이불 가지고 들어가며 종알종알하리.
나는 구름 갑자기 오니, 빗방울 가는데,
평택에 한 점 저녁 햇빛 비치네.
내 말 왕자성(王字城) 앞을 달리노라니,
맑은 바람 솔솔 손의 옷에 부네.
흥이 일어 글 읊으며 억지로 꿰맞추니,
다른 날 남의 비방 듣는 것 근심하지 않네.
한편 이첨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말을 홍경사에 쉬게 하고, 다시 옛 비문을 읽네.
글자가 지워진 것은 들 중이 때린 것이요,
이끼가 남은 것은 봄에 들 불탄 흔적일세.
현산(峴山)에는 장차 떨어지는 해요,
진령(秦嶺)에는 정히 뜬 구름일세.
현묘에서 능히 효도를 도탑게 해서
규모를 후손들에게 남겨주었네.
한편 이곳 천안에 있는 세성산(細城山) 자락에 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쓰라린 역사 이야기가 전한다. 세성산은 성남면 화성리에 있는 산으로, 해발 220미터 위에 성 터가 있다. 이곳의 성이 삼한시대의 농성이라고 하며, 동쪽에 방아확으로 된 바위 둘이 있는데, 이 성을 쌓을 때 쌀을 찧던 곳이라고 한다.
고종 31년(1894)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 접주 김복용이 동학도를 이끌고 이 성에 웅거하고 있었다. 그는 동학교도들에게 종이쪽지로 눈을 가린 뒤 동학의 열세자 주문인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주문만 외우면 관군의 총대에서 물이 나오며, 비록 총탄이 비 오듯 하더라도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의 말을 믿은 동학도들은 관군이 쏘는 총알에 수없이 죽어 가는데도 눈을 가린 채 주문만 외웠다. 이 광경을 지켜본 우선봉 대장 이두황이 크게 놀라 총 쏘는 것을 중지하고 군사들을 시켜 남은 교도들을 일일이 일깨워 화를 면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죽은 사람이 수백 명은 되었으므로 이 산을 그 뒤부터 시성산(屍城山)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