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국가 고창국 있던 투르판 현재 이슬람 교도들이 머물러
이교도 훼불·서구 열강 도굴로 베제크릭 석굴 곳곳은 상처가 일제 도굴품 일부 國博에 소장 “탐욕과 무지의 훼불 반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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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르판 베제크릭 석굴 전경. 57개의 석굴이 있는 베제크릭 석굴은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지어진 집’이라는 뜻이지만 석실 내부는 서구 열강의 도굴과 이교도의 훼불로 엄청나게 훼손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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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투르판은 수많은 소국(小國)들이 나타났다 사라진 영욕의 역사 한복판에 있었다.
한나라는 현재 투르판에서 45km 떨어진 곳에 고창성을 세우고 둔전을 실시했고, 이후 한나라가 패망하고 전란이 끊이지 않자 이를 피해 본토의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세력이 늘어나자 북량의 왕족 저거 씨가 450년 고창국을 세웠으나 유연의 압력으로 멸망했다. 498년 유연과 고차, 돌궐 등 북방민족은 이 자리에 국가를 세우고 고창왕이 돼 640년 당나라에 멸망하기까지 번영을 누렸다. 고창을 정복한 당나라는 이 땅에 안서도호부를 두고 서역 경영에 거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당나라의 국력이 쇠퇴하자 9세기에는 텐산 위구르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몽골 제국이 정복하면서는 차가타이한국에 예속됐다.
수많은 나라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면서 지역의 종교 문화도 변했다. 처음의 고창국은 독실한 신심을 자랑하는 불교국가였으나 이후 이슬람 왕국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이슬람 문화 영향권에 들어간다. 현재에도 이런 영향으로 투르판은 이슬람 민족인 회족들이 모여사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투르판, 곳곳에는 불교의 자취가
실크로드의 한 지점이자 구법승들의 구법 루트로 투르판이 활용됐음 알려주는 지점은 곳곳에 있다. 대표적인 것이 ‘화염산(火焰山)’이다. <서유기>에는 천축으로 불경을 구하러가는 삼장법사 현장(玄奬)은 계속 타오르는 산 때문에 이동이 어려웠고 이내 손오공이 철선공주에게서 파초선을 빌려와 산불을 끈 뒤 이 산은 더 이상 타오르지 않았다는 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곳에서 나오는 계속 타오른 산이 투르판의 ‘화염산’이다.
사실 화염산은 극한의 지역 중 하나다. 위구르어로 ‘커쯔러타거(克孜勒塔格)’라고 하는데, 이는 붉은 산을 의미한다. 특히 온도가 높아 여름에 가장 더울 때의 온도가 47℃가량, 태양이 직접 내리쬐는 곳은 80℃까지 오른다. 겨울에는 영하 20℃가량 떨어진다고 하니 혹서와 혹한이 반복되는 곳이다.
고창고성도 눈길을 끄는 곳이다. 지금은 폐허만이 남은 도시 유적인 이곳은 불교사원이 성 안에 마련돼 있다. 특히 630년 삼장법사 현장 스님이 1개월 동안 고창성에 머물며 설법을 하기도 했다.
이를 좀 더 살펴보면 당시 고창국 국왕 국문태는 신실한 불교 신자였고, 현장 스님이 당나라의 고승임을 알고 설법을 청했다. 현장 스님은 고창국에서 1개월 간 머물며 대중에게 <인왕반야경>을 설했다. 감복한 국문태는 계속 고창국에 남아있길 간청했으나 구법이 여로에 있던 현장 스님은 고사했다. 스님의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안 국문태는 행장을 마련해 주고 그를 호위할 병사 25명과 말 30필을 내줬다. 그리고 인근 24개국 국왕에게 현장 스님을 안전하게 통과시켜달라는 편지까지 써줬다.
폐허가 된 현재의 고창고성에는 현장 스님이 머물며 설법을 했을 절터만이 덩그러이 남아 있다. 사원의 기본구조는 인도식이고 인도식 복발탑과 거대한 방형탑, 승방 등이 남아있어 당시 고창국 왕족들의 신심을 가늠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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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르판은 불교국가 고창국이 있었던 곳이다. 고창고성의 한 가운데 지어진 대불사의 사지가 이를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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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불의 아픔을 간직한 석굴
투르판에서 유명한 불교 유적 중 하나는 베제크릭 석굴이다. 위구르어로 ‘베제크릭’은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뜻이지만, 찾아간 석굴은 인간의 탐욕과 무지로 크게 훼손됐다.
그도 그럴 것이 베제크릭 석굴은 1898년 러시아의 클레멘츠가 확인한 이후 학계에 알려졌고, 독인의 그륜베델이 1902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조사했다. 또한 영국의 스타인 탐험대,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들어 출토품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는 베제크릭 석굴 도굴품인 벽화 4점을 한국에 두고 해방을 맞았고 현재 베제크릭 벽화 일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현재 박물관에 소장된 벽화는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원 안병찬 씨에 의해 복원됐다. 이를 제자리로 돌려보낼 때 서구 열강의 탐욕과 이교도의 무지로 인해 훼손된 문화재는 새로운 생명을 얻을 것이 분명하다.
본래 57개 석굴 안에는 아름다운 소조 불상과 호화로운 벽화들이 있을 터였지만, 굴실 안에 들어서면 벽화들은 이교도들이 전부 긁어 훼손했고 소상은 온데 간데 없다.
이에 대해 순례의 증명법사로 나선 덕숭총링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은 인간의 탐욕과 무지를 경계해야 한다고 순례 대중에게 설했다. 설법 중간에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먹이기도 했다.
설정 스님은 “이곳에서 우리는 인간의 무지와 탐욕이 얼마나 큰 폐해를 가지고 오는지를 절감했다. 서구 열강의 탐욕으로 벽화는 뜯겼고 이슬람의 무지로 불화는 훼손됐다”면서 “불상과 불화는 부처님의 지고지순한 가르침을 전한 것이고 신실한 신앙의 형태다. 그것을 탐욕과 무지가 파괴한 것”이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이어 “부처님은 탐욕과 무지를 경계하셨다”면서 “집착과 탐욕의 신앙인과 일반인들을 우리는 개도해야 한다. 개도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 이번 순례는 더욱 가열차게 정진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됐다. 더욱 진지하게 정진하자”고 강조했다.
남아있는 벽화를 답사하니 불화가 매우 한국적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광배의 화염 문양과 측면을 보고 있는 보살의 상호 등은 한국의 불화와 비슷했다.
또한 베제크릭 석굴은 축조 석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의 토함산 석굴의 연원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기도 하다. 돈황 막고굴들은 석실을 파내어 조성한 경우가 많지만 베제크릭 석굴은 흙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곳이 상당수다. 이는 인도 간다라의 붓카라 제2사원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유근자 한국미술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붓카라 사원은 돌로 된 벽돌로 쌓았지만 베제크릭 석굴은 흙벽돌로 바뀌었고 한국의 토함산 석굴암은 판석으로 축조했다”면서 “이는 축조 석굴사원의 변천과 발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 자료”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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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제크릭 석굴 69굴의 벽화 중 일부.
무지막지한 훼손에도 일부는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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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야 할 한국인
실크로드 순례를 하면서 새롭게 조명돼야 할 두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중국 돈황학 연구 창시자 김구경 박사와 조선족 화가 한낙연 화백이다. 1899년 경주에서 태어난 김구경 박사는 근대 선종사학자로 돈황 막고굴 문헌을 교정 발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27년 일본 오타니대학을 졸업하고 1930년 중국으로 건너가 돈황 석굴을 연구했다.
1931~1935년 <강원총서(薑園叢書)>라는 전집을 출간했다. 전집에 실린 문헌 중 <교간당사본능가사자기> <교간안심사본달마대사관심론> <교간대승개심현성돈오진종론>은 돈황 문서를 교정하여 발간한 것으로 1934년 완성된 일본의 <다이쇼신수대장경>에도 실렸다.
1945년 광복 후 귀국해 서울대와 연세대에 출강했으나, 1950년 6.25전쟁 중 서울대 문리대학 교정에서 북한군의 처형 위협을 받은 직후 행방불명됐다.
한낙연 화백은 길림성 출생으로 1914년 용정보통학교를 마치고 전화교환수 등으로 일하다가 1919년 상해로 가서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파리 루브르예술학원에 입학하고, 재학 중에 당시 유행했던 신인상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루브르예술학원 졸업 후에는 유럽 각국을 돌며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았으나,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돌아와 항일투쟁에 투신했다.
1941년 실크로드 여행 중 돈황 석굴 벽화에 감명을 받고 난주에서 본격적인 벽화 모사 작업에 착수했다. 또한 티베트 ·하사크 ·몽골 ·위구르족 등 중국 소수민족의 생활풍습 등도 생동감 있는 화법으로 묘사 ·소개해 중국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늘 한글서적과 일본의 조선침략사 책을 항상 소지하며 읽고 다닐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한낙연 화백은 1947년 다시 벽화모사와 유물고찰을 마치고 난주로 돌아오던 비행기의 추락사고로 생을 달리했다.
김구경 박사와 한낙연 화백에 의해 돈황 석굴의 문헌은 새롭게 조명될 수 있었고, 벽화는 새로운 생명을 가질 수 있었다. 1000년 전, 한반도 삼국의 구법승의 열정이 19세기 근대 한국인에게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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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ㄴ니다.그런 일도 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