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
1559년 - 1626년
청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 청 태조(재위 1616~1626년).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웠으며 명과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 여러 번 대승을 거두어 청나라 건국의 초석을 다졌다.
그가 병사한 후 아들 홍타이지가 국호를 대청으로 고치고 청나라 제국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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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후의 중화제국 통일왕조인 청나라(후금)의 창업군주이다.
창업군주이다 보니 일반적으로 청태조나 천명제는 잘 사용하지 않고 성명 및 휘인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누르하치로 불린다.
1583년 추장에 오른 뒤 건주여진을 통합하면서 강성해졌다. 그러자 명나라가 경쟁 부족인 해서여진과만 무역을 하겠다며 건주여진에게 금수조치를 내렸다.
이에 반기를 든 그는 만주를 통합하고 명나라로 쳐들어갔다가 명나라의 마지막 명장이었던 원숭환에게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한 뒤 붕어했다.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의 아이신(愛新)은 쇠을 뜻하고, 기오로(覺羅)는 큰 여섯 부족을 말한다. 즉, 아이신기오로는 쇠 부족이라는 뜻이다. 누르하치(努爾哈赤)의 뜻은 만주어로 멧돼지 가죽이라고 한다.
누르하치(백두산지역 출신) / ⓒ 청아출판사
성 아이신줴뤄[愛新覺羅]. 시호 처음에는 무황제(武皇帝), 나중에는 고황제(高皇帝). 묘호 태조(太祖). 만주의 푸순[撫順] 동쪽 훈허강[渾河], 싱징[興京] 분지의 한 곳에 위치한 건주여진(建州女眞)의 한 추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1583년 처음으로 독립을 위한 군사를 일으켜 수 년 사이에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1587년 쑤쯔허[蘇子河] 상류에 후대에 ‘옛 노성(舊老城)’이라는 뜻의 퍼아라[佛阿拉, 지금의 新賓縣 永陵鎭 二道村]라고 불리는 성을 쌓고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1603년에는 ‘허투아라[赫圖阿拉, 赫圖阿喇, 黑秃阿喇, 黑圖阿拉 등으로로 표기, 지금의 遼寧 新賓縣 永陵鎭 老城村]’에 성을 세우고 근거지를 옮겼다.
1589년 명으로부터 도독첨사(都督僉事)로 임명되었으며, 1595년 용호장군(龍虎將軍)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1599년에 해서여진(海西女眞)의 하다[哈達]를 멸망시키고, 이어 1607년에는 후이파[輝發], 1613년에는 우라[烏拉] 등을 병합하여 여진의 대부분을 통일하였고, 1616년 한(汗)의 지위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하였다. 그동안 여진문자를 발명하고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제정하는 등 제도를 정비하였다.
후금의 성립은 명에 커다란 위협이 되어 마침내 명과 충돌하게 되었는데, 1618년에 명의 푸순[撫順]을 급습하여 취하고, 이어 칭허[淸河]를 공략하여 빼앗았다. 1619년에는 명과 일대 결전을 각오하여 진격, 푸순 관외의 살이호(薩爾滸)전투에서 명군 10만을 격멸하여 대승하였고, 1621년에는 랴오둥[遠東]을 공략하여 랴오허강[遼河] 이동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랴오양[遼陽]에 천도하였다가, 1625년에 다시 선양[瀋陽]으로 도읍을 옮겼다.
1626년에 명의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하였으나 명장 원숭환(袁崇煥)의 고수로 실패, 부상만 입고 후퇴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 해 4월 몽고의 파림(巴林)부를 직접 공략하다가, 도중 9월에 병사하였다. 그가 확립한 기초 위에 그의 아들 홍타시가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고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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