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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한낮
김 명 동
그 폭염 바람에 살을 베이고
화상이든 아픈 한여름
뙤약볕에 살갗은 검게 타고
걸음마다 무거운 숨소리가
귓속에서 천둥을 친다
몇 년 전 시골살이 좋다고
아랫집 빨간 지붕 교장 선생님
밭뙈기에 고추 심고 감자 심은
초보 농사꾼 행세에 지친 머리는
자연 흰색으로 염색이 되고
씽씽하시던 그 사모님 허리 디스크
허리 협착증에 절룩거리며 마당을 서성인다.
어쩌나 동경하며 찾아온
전원생활, 뼛속까지
다 골다공증으로 부러질 것 같다는 푸념이
남의 일 같지 않으니
농사꾼의 지친 하루가 노을 따라 산 고개를 넘는다.
겨울로 가는 편지
찬바람이 쉼 없이
마른 가슴을 후려칩니다.
낡은 콘크리트 벽 틈새 사이로
겨울이 찬바람으로 기어들어 오고
이유 없는 슬픔에
가슴은 얼어붙어 차가운데
가을은 마지막 잎새에
손을 놓으며 저만치 물러서 뒷걸음치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는
담장 너머 돌아가는 바람으로 떠나갑니다
삶을 잃은 메마른 것들이
주인 떠난 봉당에 앉아
헛기침을 하고 있고
바람에 베인 가슴은
날카로운 계절병을 앓고 있습니다
상사화 같은 그대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
아픈 그리움을 열어 보여줄 수는 없지만
오늘도 시린 가슴을 풀어 놓고
눈물짓는 낙엽 위에
부치지 못할 겨울로 가는 편지를 씁니다.
상사화(相思花)
그리움은
가슴을 파고드는 화살이 되어
어디쯤에서 날아오고 있는 것일까
기다림은
얼마나 많은 날을 내 마음속을
멍들이고 있을까
그대 향한
마음은 바람 속에 숨어
날아가지만
볼 수 없는 아쉬움
슬픈 사랑 곱게 접어
한 잎 두 잎 떨구며
헤어짐에 눈물짓는다
기약 없는 만남은
기다림의 예약도 없이
하염없는 눈물 속에 숨겨온 사랑
잎새는 시들어 고개 숙이고
어디서 햇살의 도움으로 곱게 피어나
어디로 흘러가는 그리움인가
그대 지울 수 없는 상사고(相思苦)
어둠 속에 연분홍 꽃잎은 떨어지는데
* 경북 상주 출생, 시집 어느 바보의 작은 가슴(1990), 고향은 저만치(1992), 꿈속에 별 달(1993), 그대를 사랑하는 이유(2002), 그리움의 마당에는 당신이 주인입니다(2006), 사랑춤(2015), 누군가 다녀갔다(2020), 노을동행(2020), 건널목(2023), 수필집『칠보십장생(2015), 동시집 별빛이 내려와서(2018), 전)한국문인협회 영동지회장, 영동예총 회장, kimydo812@hanmail.net
우단동자
송 은 애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겨울을 두어 해 이겨냈더니
만개한 기쁨을 안게 되었네 그려
여기저기 손때 묻은 질문들
가슴앓이로 안고 살았다
결론이야 내가 이겼지만
흘러간 많은 시간들
피멍처럼 남아
발갛게 물들었다
아름다움의 극치
함박꽃 사연
엄마의 꽃 함박꽃
향기 잃을 정도로
혼절한 삶은
죽음 아니면 행복한 요람
극에서 극을 달하는
태양 아래
엄마의 기막히고 번득이던 시절
꿈꾸던 그 사연 들킬까 봐
요절한 한 떨기 꽃
* 월간《순수문학》시 등단(1996), 시집 詩! 꽃을 혁신하다 외 9집, 꽃시집 밟혀도 피는 꽃(2020), 산문집 고택의 門을 열다, 길마루길 64 출간,한국예총예술문화대상(2013), 대전문학상 수상(2015). sea5610@hanmail.net.
씻김굿
박 헌 영
아내 손에 이끌려 엑스포광장‘슈퍼 콘서트’에 갔다.
한 팬이 보내온 소고기에 청하 두 병째,
취기에 춤기가 올라 사람들 뒤쪽에서 한참 춤추었다.
돌아오며 아내가 당신 춤 어디서 배웠어? 한다.
배우긴, 술이 춤춘 거지. 답하다가 오래전
동생이 사시 합격했을 때 동생 친구가 마련한 나이트클럽에서
내 파트너 아가씨가, 춤 못 춘다더니
이렇게 춤 잘 추는 사람 처음이라며
내 시집을 사겠다고 했다.
술에 취하면 웃음이 많아진다.
허랑허랑한 게 삶이고 텅 빈 게 춤이다.
옷을 벗고 때를 벗으면
입술 없는 치아처럼 웃음이다.
술로 씻겨야 나오는 내 숨.
수십 년 전, 진도에서 씻김굿이 열렸다.
3년 육탈한 초분에서 눈물 환히 웃던 어머니,
그 씻김굿, 내 술.
창문
벽,
반쯤 창문이다.
나머지는 네가
봐라.
* 전북 부안 출생. 시 동인 <천칭> 회장, 시선집 <즐거워라, 죽으러 가는 저 물소리> 외, 조형 시집 <나의 거울> 등. parny57@naver.com
둘이서
배 수 자
둘이 있으면 참으로 좋다.
서로 마주 보며 웃기도 하고
같은 방향을 보며 미래를
꿈꿀 수 있어서 좋다.
진달래꽃이 만발하고
새소리 지절대는 오솔길을
둘이 손잡고 네잎클로버를 찾으면
너와 나의 만남은 행운이어서 좋다.
비 오는 날 한 개의 우산으로
둘은 서로 젖은 어깨를 감싸며
울창한 숲속 공원을 거닐면
나는 더없이 행복하다.
노란 은행잎이 떨어진 실개천
징검다리 위에서 내 손을 잡아줄 때
마음과 눈동자가 따뜻해져 오는
전율을 느낄 때 나는 참으로 좋다.
둘이서
항상 순정을 주고받으며
오가는 눈빛만 보아도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이체(異體) 일심(一心)으로 웃으며 살아갈 거야.
* 문학박사, 제4회 나혜석 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마음의 향기, 얼음새 꽃 소리, 사색의 오솔길, 시들지 않는 꽃,
수필집 만남의 심미학 등
그 교회
김 창 유
지난날 X마스 카드처럼
마을 뒷동산에
소망의 성으로
우뚝 자리한 그 교회
딩동 딩동 구원의 종소리
이젠 멈춘 지 오래지만
믿음의 등대요 사랑의 빨간 십자가
기쁘면 기뻐서 슬프면 슬퍼서
아프면 아파서 근심되면 답답해서
찾아가는 그 교회
용서도 받고 위로도 받고
평안도 받고 소망도 찾는
언제나 보듬어 주는
우리의 안식처
누구나 맞아주는
믿음의 전당
나의 애마
잘 가서 살아야 한다
나의 애마야
나의 발 나의 길동무였던 너
십여 년이 넘도록 고락을 함께 했었지
너는 어디든 마다치 않고 돌아다니니까
장승보다는 살아있는 생명체
그러나 이젠 헤어질 때
막상 새 주인에 팔려 가니 왜 이리 허전하냐고
넌 사람도 아닌데…
부디 새 주인 잘 모시고
너무 서둘지 말고 다치지도 말고
오래오래 살아야 해
험한 꼴로 폐차장 근처는 아예 얼씬도 말고
나보다 새 주인과 더 잘 지내주길…
어느새 나도 유치한 늙은애가 되나보다
진짜 다정도 병이련가?
* 충남 서천 출생, 한국공무원문학협회 이사, 한국공무원문학상, 세종대왕 애민문화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서양화가, 서예가, 중구문화원 자문위원, 시집 ≪아름다운 이름으로≫, kcy482@daum.net
쇠딱따구리
백 경 화
산책하다 만난 딱따구리
길가 나무 위에서 딱딱딱
나무를 쪼고 있다
뾰족한 부리 하나로
집터를 파내고
동그랗게 다듬어내는 솜씨는
조각 예술가
하루에 집 한 채씩
거뜬히 짓는다는
훌륭한 건축가
올 때마다 살던 집은
집 없는 다람쥐나 동고비
다른 동물에게 무상으로 주고
다시 집을 짓고 산다는
인심 좋은 딱따구리
딱 딱 딱
투명하고 맑은소리
청아한 울림은
긴 여운으로
내 가슴을 파고 든다
* 충남 부여 출생, ≪문학세계≫(2001) 시 등단, 수필집 산의 향기를 찾아서, 시집 술래잡기, 울림으로 다가온 자연의 노래 등, 대전문인협회 회원, 대전국제펜문학 회원, 펜 문학상 수상, ≪꿈과 두레박≫ 회원, (사)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 bak0799@hanmail.net
시외버스 예찬론
이 종 근
戀.
나는 그가 편하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부산 사상터미널로
가는 내내
흐뭇한 그리움덩이다.
예닐곱 살쩍, 시골 외가를 향해
엄마 허리춤을 잡고 쫓아가던
무의식의 질주인 양
넉넉한 품의 그가
유년의 애착을 하도 닮았다.
比.
고속열차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차비는 차치하더라도 세상 밖,
산의 춤추는 날씨와 강의 의젓한 계절을
게슴츠레한 졸음의 눈으로 읽어낸다.
愛.
얼마만큼 전율을 일으켜주며 사랑을 촉진할까. 저 반대편 길에 겹겹이 쓰러지는 전봇대와
이팝나무들
꼼꼼하게 전수 조사하듯 오래도록 묵혀두었던 사랑 愛를 복잡한 머릿속에서 건져낼 법하여
내 간헐적 자유의
벅찬 충동과 게으른 욕망을 반추할 수 있어서 나는
그가
더욱 좋다.
回.
부산 사상터미널에서 서울 남부터미널로 세월을 돌려 옮기며 네 시간 반쯤은 족히 걸리지만, 휴대전화 앨범 속에 담긴 엄마와의 달곰한 포옹처럼 때로는 푸근하고 때로는 야릇하게 그저 놀고먹는 백수의 품성을 빼닮은 나는
그가
더없이 부담 없다.
原.
(그를 두고 놀고먹는 백수를 빼닮았다고 해서 엄청 미안해요)
(그가 늘 기다려준 마음이라고 내 간헐적 자유가 단정하여 내뱉은 실언 같아요)
(그래도 지속 가능한 평온한 원초적 이드[ID]로 여겨 또 뵙고 싶을 거예요)
의식주에 대하여
衣.
그 어떤 날은 종일 장마에 폭삭 늙는다고 투덜대면서도 집 밖에서 치킨과 맥주의 섭취처럼 노닥거리다가 들어와
낯선 세탁기 앞에서
흠뻑 젖은 불면증의 옷을 훌렁 벗어 던지고
감기처럼 약국에서 지은 치유라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食.
그 어떤 날은 화장실 변기에 주어진 뜨거운 삶을 내리는 버튼처럼 하루에 눌러앉아 위생 식단을 구상하는 조리사처럼
주방에 서서 굳게 닫힌 냉장고의 문을 열고
냉담의 쌀을 전기밥솥에 안치는 사유의 밥 한 끼로
엄청 황송하였다
住.
그 어떤 날은 베란다에 피어난 해바라기가 아름답다고 말하곤 목을 빼내어 우는 강아지처럼 쓰다듬고
노랗게 익어가는 꽃향기를 맡다가
취한 잠처럼 사나흘 틈새를 이불만 덮고
정갈하게 숲의 동거라는 맛도 있었다
慾.
그와 같은 욕정은 어느 뉘가 독담의 비상처럼 탐하겠느냐
그처럼 안락한 욕구의 울타리가 곡진한 사랑으로 솟구친다
애착의 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1
1. 다… 그러고 싶다
모처(母妻)에서 기거하는 밤, 한참을 잊었던 비가 싹싹하게 내린다
인기척 없던 날이 꽤 시간이 흘러 집모기가 극성이다
참신함이라곤 엿볼 수 없는 침실, 습기가 차오른 꿉꿉함에 퍼뜩 향을 피우며 마른걸레질을 해댄다
오래된 과거로의 회귀, 유년 연연 회상 추억 영정 벌초… 케케묵은 짐들의 행렬이 구토하여 소름이 돋는다
매년 매시 모처로 찾아들 때면, 이 작자의 관습은 항상 나프탈렌 한 뭉치를 들고 간다
가위에 눌리지 않을 궁상, 의식은 차분함이다
그저 그러고 싶다
2. 음… 점점 더 그러고 싶음
모처의 기온 18도는 엊그제와 같음
글피는 비중 높은 애착을 보일 것으로 보이지만 별다른 일은 없을 것임
두렵고 무섭겠지만 노련하게 밴, 유연함 그리움 썰렁함 한가함 쌀쌀함… 이 작자의 팔다리는 엄마가 덮던 이불을 붙들고 있음
점점 더 그러고 싶음
향을 지펴야겠음
물이 고프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2
거칠고 높은 산정, 母의 젖이 아니라도
엉금엉금 기어오르고 싶은
산간의 신앙에
아슬하게 턱을 괴고 있는 돌탑
나의 종교는
무턱대고 母의 정수라며 마셔보라기에
바가지인 양 수리에 담아
벌컥벌컥-
들이켠다, 유년 시절 학교 운동장
수돗가에서의
점심 한 끼인 양
궁핍이라, 말하지 않기로 언약해도
대놓고 드러내며 훌쩍훌쩍 떠들고 싶은
아침을 건너뛴 담박질에
긍휼마저 달아난
두 끼와 같은 결핍이라, 벌컥벌컥-
(母의 産苦는 이보다 더했을 갈증)
* 중앙대학교 행정대학원(석사) 졸업.《미네르바》등단. 제1회《서귀포문학작품공모전(서귀포예총)》에서 당선하고, 제2회《박종철문학상(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최우수상, 제1회《부마민주항쟁문학창작공모전(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우수상, 제2회《국립임실호국원나라사랑시공모전(국립임실호국원)》최우수상, 2021년《제주문학관개관기념문예작품공모(제주문학관)》최우수상 등 다수의 창작 시(詩) 공모전에서 수상. 천안문화재단 <문화예술창작지원금> 수혜. 시집『광대, 청바지를 입다』발간,
그래도 꽃
이 영 순
머리 딴 산거울 만났다
도솔산 접힌 가파른 그늘에서
갈색 치마폭에 싸인
초록 산거울
누가, 왜
비탈진 언덕에
쪼그려 앉아 땋았는지
산만한 그 모양에 문득
축축 늘어지는 자신을 만났을 사람
절망처럼 흩어진 가닥들을
가지런히 보듬으며
혹여 누가 볼까, 제 마음 달랬겠지
생각이 바람으로 흐를 때
저만치 웃는 노란 산거울꽃에
잔주름 비집으며 나오는 내 하얀 이
일상의 압박붕대 풀고
비탈에 앉아 나도 쫑쫑 땋았다
꽃 측에도 못 낀다는
노르스름한 산거울꽃 되었다
그리움 3
일렁이는
봄의 물결이다
꽃피는 이치를 물으며
한없이 흘러내리던 물줄기다
가냘픈 울음 울며 버둥거리던 시간
봄날의 아지랑이다
웅크린 속내 몽땅 쏟아지라고
물구나무서서 본 세상이다
뒤집힌 풍뎅이로 돌던 심정이다
봄볕 하늘거리는 날
산 그늘에 묻어둔 세 글자다
꽃마다 올라앉아
씰룩거리게 만드는
짙은 향기다
몸의 눈물
엷은 안개구름에 덮여
흐려진 초승달이 나무 끝에 걸렸는데
은평공원 가로등 밑 체조하는 사람들
버둥거리는 잿빛 풍경 속
흥건한 땀방울 위로
녹아내리는 빙하가 번뜩여
그 눈에 속절없이 나도 흔들렸다
스스로 담금질하는 심정
저 초승달은 모르겠지
삐걱거리며 찾아드는 낯선 손님
온몸으로 밀어내는 첫 경험의 두려움을
.
기분 따라 뒤죽박죽 살아 온
여백 없이 엉킨 날들
슬슬 뒤틀리는 지구 같은 몸의 눈물
몸살처럼 찾아오는 종말의 시작
초승달의 시작은 어둡고
종말의 보름달은 밝겠지
* 대전 출생, 월간《문학세계》신인문학상, 한밭문학 작품상 수상, 시집 길은 어디에, 절하며 산다, 나비의 뼈,《백지》동인,《꿈과 두레박》회장, ly1103@hanmail.net
80대의 삶
인 설 현
팔십 인생 돌아보니
이슬 같은 순간인데
더 차지하고 누리려
아등바등 발버둥 친
안개 속의 삶이었네
앞날은 덤으로 사는 것이려니
욕심과 부끄럼 없이
자존감 지그시 살려가며
봄 맞는 새싹 되어
신바람 나게 즐기려네
내 영혼 떠나는 날은
그분만이 알겠지만
두려움과 미련 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훨훨 나비 되어 떠나려네
* 충남 예산 출생, 공주사범학교 졸업, 시집 『착하고 귀한 선물』, 저서 『재미나는 글짓기』,『슬기로운 엄마교육, 즐거운 자녀공부』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