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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7장1-11절 2차선교여행05 데살로니가 교회 241001 원주희목사
2024.10.01 화 오전 7:38 ・ 16분 26초
이 말씀에 나오는 바울 사도와 이 말씀에 나오는 믿음의 흥신들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데사노니카 교회에 세워진 여정들입니다.
유대인이 회당에 들어가서 새 안식일 3주간입니다.
3주간 동안 복음을 전했는데 성경을 가지고 새해 안식일 동안 강론했더니 그들 중에서 복음이죠.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것, 그다음에 어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 이거 증거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라고 했어요.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 데사니카 교회에 데스 해당의 구성원들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하는 유대인과 결혼했든지 어쨌든 종교로서 유대교를 택한 헬라인들이 꽤 많았다는 겁니다.
그들이 큰 부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 귀부인들은 그 당시 이제 귀족 계급들이 있었으니까 귀족들 중에서 그의 아내 된 사람들이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신라를 따랐다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울과 신라를 따랐고, 그럴 때에 유대인들은 뭐 하여서 시기하고 저자의 시기다 했는데 시기만 한 건 아니겠죠.
그들이 알고 있는 유대교적 카테고리 율법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되어 있고, 그들이 알고 있는 구약 성경의 규정에 눈이 이렇게 씌어져가지고 복음을 보지 못하는 그런 분들이 계신 거죠.
근데 그분들이 그냥 자기들의 의견을 가지고 논쟁을 할 수 있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데 본문에 보면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서 선동가와 폭력배, 조직폭력배를 끌어들였다는 겁니다.
참 그렇게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성을 요동하여 소동하여 야손의 집에 해당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서 지금 됐습니까?
교회의 구성원들 중에서 야손이 아마 사도바울에게 숙소를 제공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소네 집에 침입해서 백성들 앞에서 바울과 신라, 디모데 이런 사람들입니다.
끌어내려고 했다는 겁니다. 끌어내려고 했는데 발견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이렇게 딴 데 가게 했든지 그런 것입니다.
그때 그때 야손과 외 형제들 대상가 교회에 처음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를 지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악한 쪽으로 꾀가 발달한 사람입니다.
말하기를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렀다.
복음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예수가 메시아다 하는데, 예수가 지금 돌아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 다윗의 왕국을 회복할 메시아가 아니고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다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은 자기의 민족주의 관점들 속에서 예수를 이해하려고 하니까 이해가 하기 싫은 겁니다.
이해가 돼도 이해하기 싫은 겁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 해도 나는 그렇게 안 믿고 싶어라고 하는 것들이 있는 겁니다.
때로는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아 이런 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성경으로 논쟁할 수 있고 물을 수 있고 의견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근데 이 사람들은 뭐라 했냐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왔다.
바울 것이라 천하를 어지럽게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자기들 공동체, 유대인 공동체에서 예수가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논쟁하니까 자기들 민족 공동체 내에서는 조금 시끌시끌할 수 있지만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이제 마타토를 던진 겁니다.
그리고 야손이 그를 맞아들여서 그를 대사까지 이제 끌어들였다.
근데 이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금 뭐라고 했냐 종교 논쟁에서 정치 논쟁을 바꿔놓습니다.
프레임을 바꿨습니다. 다 가이샤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이렇게 지금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신나는 예수가 다른 임금인 거 많은 거 맞습니다.
근데 그들이 말하는 다른 임금은 영적인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그 나라의 통치자로서 예수예요.
지금 이 땅에 부활하셔서 여기 지금 계시지 않습니다.
근데 지금 정치 논쟁으로 바꿔 놓습니다. 이게 지금 누구 모습입니까?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 잡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성전을 더럽혔다라고 하는 빌미이고 그리고 그 안에 핵심적인 내용은 종교 권력, 지방권력을 바리새파가 뺏기고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을 사도 계파가 지금 예수한테 넘어가고 있는 종교 권력에 대한 문제입니다.
종교의 문제예요.
근데 그들이 정작 예수를 고발할 때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
반역죄를 가지고 고발했습니다. 왜 빌라도는 종교의 문제는 너들의 문화의 문제니까 너희들이 해결해라라는 것들이고, 상호 존중 문화에 관한 것들은 니가 불교를 믿든지 천주교를 믿든지 기독교를 믿든지 다른 조로아스터교를 믿든지 간에 그 종교의 문제는 너희의 문화의 문제고 그게 내가 재판할 것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정치 문제는 달라요. 반역죄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주장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패 십자가에 대한 죄패에는 로마 국법에 고발된 대로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적혀 있다는 겁니다.
근데 그걸 또 달아놓고 난 뒤에는 십자가에 매달려놓고 하는데는 율법학자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해란 말이야 하면서 막 난리를 또 칩니다.
종교와 정치의 문제 이렇게 프레임을 바꿔서 정치로 고발한 겁니다.
지금 야손과 바울과 신라가 외치는 그 복음의 얘기들을 그들의 시기와 시기와 투기 이런 것들 때문에 그들이 가지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논쟁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싸울 수도 있고 그냥 말할 수도 있고 한데 도를 넘어서서 가이샤의 명을 거역하여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라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정치 문제 반역죄로 고발했다는 겁니다. 근데 다행히도 바울과 신나는 여기 없고 야손과 현지인들 몇 사람이 있습니다.
지방 사람들이니까 그들에게 무리와 읍장이 이 말을 듣고 소동했는데 야성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무엇을 받고 풀어줬다 보석금을 받고 놓아주었다라고 했어요.
보수금을 낼 정도면 돈이 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분들도 나름 대상의 권력자들입니까?
그게 무슨 얘기고 하면서 하다가 통치자들이 돈 받고 그냥 풀어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밤에 생각과 교회에 처음 성도들이 바울과 신라 디모데도 같습니다.
디모데 이런 분들을 대사령으로 보내었습니다. 여기 있다가 큰일 납니다.
반역죄로 지금 고발당했기 때문에 잘못하면 큰일 납니다.
빨리 가세요. 그래서 베레아로 보내었고, 그들이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베레야에서 말씀을 나눌 때 세상을 버린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
이렇게 베리아의 산성교회의 축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서신서 사도행전에는 베리아 교회가 나오는데, 사도바울의 서신에는 베레아 교회가 사도바울 인격적 관계를 맺고 계속 영적 교제를 한 흔적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대산리가 교회는 이런 핍박을 지나갔고, 이들도 예수님 때문에 반역죄로 잡혀가 가지고는 목숨이 날아갈 위기예요.
보석금 내고 풀려나긴 했지만은 돈이 재정적인 손해를 입었습니다.
그들이 그들 나름의 핍박을 지나갔습니다.
그런 이 데살리카 교회는 사도바울이 떠나고 난 뒤에 남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의 은혜를 구하고 이런 핍박 중에 예수를 믿다가 보면 무엇을 자꾸 기다리게 되냐 마르나타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에 대한 사모함이 깊어지게 됩니다.
떼사넬바 교회는 전서 우서를 보게 되면 떼사누바 교회는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 그래서 하나님 앞에 너무 열심히 기도하는 그러한 교회로 성장해 갑니다.
거기에 또 맹점이 있죠. 현실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살아가고 사랑을 이루어 나가는 그런 면에는 좀 부족해질 수 있어요.
어쨌든 데사과 교회는 사도바울과 계속 인격적 관계를 맺어가면서 복음이 그 앞에서 활성화되고 복음 앞에 세워진 그러한 교회로 세워지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말로만 전해질 뿐 아니라 역사와 표적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런데 복음은요. 핍박 중에서 복음이 전파되면 한번 따라 합시다.
인격이 드러납니다.
핍박주의 복음이 전파되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인격이 드러납니다.
그들이 그 인격 핍박 중에서 정말 예수의 인격이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보입니다.
대산에가 교회는 핍박을 지나가면서 복음에 있는 또 다른 면들을 본 것입니다.
세계 기독교회 안에서 이적 중심의 기독교회, 순복음 교단, 말씀 중심의 기독교회, 복음주의 교회, 침례교나 장로교회 다 좋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예수의 인격이 나타나야 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성품이 나타나야 합니다.
복음 성가 중에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용서할 것과 또 용납할 것과 너그러움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품는 인격, 그 인격이 데사니가 교회 안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핍박 중에 그것이 나타나는 것들을 보면서 빌립보 교회에도 대상이고, 교회도 사도, 바울과 계속 인격적 관계 안에서 계속 자라가는 교회였습니다.
베리아 교회는요. 말씀을 듣는 태도 너무 좋습니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
너무 귀하지요. 여기에 뭐가 둬야 되느냐 말씀 앞에 순종,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 고난과 어려움 중에서 말씀을 붙들고 살아내는 능력, 그런 것들이 되어질 때 전인격적인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복과 은혜가 우리 내난주일 교회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하고 주를 섬기는 교회에 특별히 지도자급 저희들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기를 또한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대산교 교회의 축복과 도산 인도 교회의 어려움들을 묵상하여 보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땅에 어디가 만만한 데가 있습니다마는 하나님 우리가 주를 숨겨가는 여정 안에서 닥치는 핍박과 또 어려움과 모든 것들을 기도하며 사랑하며 인내하며 이겨내며 견뎌내며 승리의 내는 저희들 되게 축복하여 주시고, 그것을 해서 참된 교회에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그 교회를 세워가는 은혜가 있기에 축복하여 주옵소서 이곳에 성도들을 더하여 주시고 빈자리를 채워주시고 영혼 영혼이 복음을 깊이 만나고 예수를 제대로 만나서 예수 안에 자랑하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한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행17장11-15절 2차선교여행06 베레아사람들 241002 원주희목사
2024.10.02 수 오전 8:09 ・ 9분 13초
사도 바울이 2차 선교에 마게데다 지방을 선교하러 다닐 때 만났던 지역, 지역들, 핍박과 어려움에 있었던 지역들을 이렇게 열거해 놓고 있는데 배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베리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사노니카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뭐 하다 합니까?
너그러웠다 했어요.
다른 말로 신사적이었다. 더 너그러웠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받고 난 뒤에는요.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무엇을 상고했다 성경을 상고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으로 봐서 이 베레에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일까 유대인이 아닐까요?
유대인이죠. 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만약에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면 헬라 철학의 플라톤 철학은 어떻게 됐을까 이렇게 비교했을 거예요.
이분들은 배경이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상고합니다.
근데 말씀을 받는 태도가 이렇습니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하나님 말씀 앞에 이 중심이 세워지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은 성령이 기록하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 말씀을 이렇게 읽다가 보면 몰입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성령이 하시는 모든 일에는 몰입의 단계가 있습니다.
기도도 몰입되어지고요. 찬양을 하다가도 몰입되어집니다.
성경을 읽다가도 몰입되어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몰입되어지면 성경을 기록한 성령님의 임재가 성경을 읽는 중에 계속해서 흘러나옵니다.
그러면서 내 안에 있는 성령님과 성경책 속에 기록하신 성령님 사이에 영적인 일치, 영이 교통하기 시작해요.
그리고 심지어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의 영성이 같이 이렇게 읽혀집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그 시대와 그 역사 속으로 이렇게 빨려들어가는 현상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관상 기도의 한 형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쨌든 말씀 안에서 내가 깊이 해석되어지고 그 말씀 속에서 예수를 깊이 만나고 성령 충만함을 받는 은혜도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베리아 사람들은 그런 태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대사과 사람과 비교해 놨습니다. 그래서 기분 나쁠 수 있어요.
근데 하나님 나라의 일은 모르지 이 베리아 데살로니까 그다음에 빌립보 이런 도시가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거든요.
그래서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의 그룹에 들어가면 베레아가 들어갑니다.
그래서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에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인지 고린도후서 8장에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렇게 들어가면 그루핑이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러나 개별 이름으로 베레아 교회라는 교회에게 사도바울이 편지 한 적은 없어요.
그래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는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끝까지 보낸 게 있고요.
대산누리가 교회에 보낸 편지는 환난과 핍박 중에서 믿음을 지키면 종말 신앙으로 이렇게 세워져 있는 대산누리가 교회에게 축복하는 말이 믿음의 믿음의 행함과 소망의 인내와 사랑의 헌신들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었는지를 칭찬하는 그런 구절들이 이렇게 있습니다.
베리야 교회는 그 뒤로 베리아 교회에 특정해서 보낸 사도바울의 편지가 없어요.
그렇게 보면 그건 좀 안타깝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근데 베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맞는 태도 이것이 우리의 태도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서 성경을 상고하고 왜 이 성경을 그러한가 하여서 성경을 상고해야 되느냐 예수라고 하는 진리를 지금 전하는데 구약 성경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예수는 진짜 메시아가 맞는가 안 맞는가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와 다윗이 전한 다윗의 하나님 나라, 그들이 기대해 왔던 다윗의 후손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가 다른 과 똑같은가 이게 진짜 맞는 말이야 이것에 대한 교차 검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상고하고 그다음이 뭐겠습니까?
말씀을 받고 성경을 상고하고 그다음요 따라서 그 말씀 붙들고 살고 그래 가야 됩니다.
근데 자칫 주지주의에 빠지면 성경 공부를 좋아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거 좋아하고 성경의 배경을 연구하는 거 좋아하고 성경을 예 해야죠.
근데 베리아 사람들의 좋은 모습 중에서 이런 성경을 말씀을 받는 것 배우는 태도 그다음에 그가 성경을 연구하고 검증하고 귀한 태도인데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고 할렐루야 그래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뻗어나가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서 말씀이 되어지는 겁니다.
말씀은 믿음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 안에서 우리에게 레마의 말씀으로 바뀌어지는 거예요.
레마의 말씀이 우리 영혼의 양식이고요. 레마의 말씀이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주님께 칭찬받을 진정한 제목인 것입니다.
그 여정이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우리 내남 죄 열기 가운데 충만하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지성에 임한 성경적 가치관이 우리에게 세워지고 성경적 가치관과 함께 영적인 충동, 그다음에 감정적인 충동들이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이렇게 잡혀지고 이건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임하고 마음 붙들고 우리 가치관을 따라서 믿음의 가치관을 따라서 의지 의지를 들어서 행동하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대에 세미나 많고 성경 연구 많이 하는 교회들을 사단이 미혹해버리면 율법주의에 빠지고 주지주의에 빠져서 성경이 하나님이 돼버려요.
성경은 하나님은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본질적 가치가 있습니다.
그 가치 안에서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 되고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내고 그 말씀으로 세상의 빛을 밝히는 그러한 교회 우리 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베리아 사람들의 믿음의 태도들을 봅니다.
주님 이 태도가 우리 내 남자 인류의 태도가 되기를 소망하고 말씀을 전하는 종의 태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또 연구하고 겸비하고 이 말씀 앞에 겸비하게 서서 이 말씀을 나의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말씀으로 승리해 내는 은혜가 있게 축복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한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