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로마서 11-12장입니다. 11장은 쬐금 깊이 있게, 12장은 간략하게 정리했습니다.^^
롬10장에서 본 것처럼, 이스라엘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를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이었습니다(10:21). 이러한 이스라엘의 실패는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되어버렸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다는 말인가?(11:1a)
하나님의 옛 백성에겐 희망이 없는가? 바울의 대답은 ‘그럴 수 없느니라’입니다(1b). 즉,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파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를 믿는 자기 자신을 언급합니다(1c). 즉, 자신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라는 것(만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겠다고 굳게 작정하셨다면 자신 역시 버림받았을 것인데, 그러나 그렇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 그렇다면, 다른 유대인들도 자신처럼 하나님이 자기백성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엘리야 이야기를 꺼냅니다(2절). 엘리야는 불경건한 자들에게 쫓기고 있는 자신이 마지막 남은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이 더 있다.’ 즉,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계속적인 신실하심이 있다는 것인데(4절), 이러한 상황은 바울 당시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하나님의 백성)가’ 있다는 것입니다(5-6절).
그런 가운데서 바울은 7-10절에서 구원의 복을 얻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남은 그룹(이 그룹은 11장의 문맥상 아마도 그리스도를 믿기를 끝까지 거부한 자들 + 아직은 거부하지만 나중에 돌아올 자들이지 않나 싶습니다/제 생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들에게는 다윗이 메시아를 대적한 자에게 내리기를 원했던 저주가 임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은 어두워져서 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들은 율법 아래 종노릇하는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인가? 그들은 십자가에 걸려 넘어져 완전히 망하게 되었는가? 바울의 대답은 즉각적이고 단호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입니다. 이스라엘이 넘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11절). 그러니까 복음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믿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제공되었습니다(행13:46). 그런데 이것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넘어졌던 이스라엘은 결국 이방인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복을 보고 시기하게 되어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충만함’(온 이스라엘의 회심)은 종말론적인 복의 충만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합니다(12절).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이방인들에게 설명하면서(3-15절), 조상들 안에서 선택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은 변함이 없다고 말합니다(16절/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뿌리’는 조상들,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가리키고 ‘떡덩이와 가지’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킴/‘Dunn’과 ‘라이트’). 즉, 조상들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선택받았으며, 그 선택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 하나님의 약속은 철회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일부가 언젠가는 그 약속에 참여한 자들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유대인들을 향해서 자긍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17-22절).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자긍은 원 가지인 이스라엘이 꺾기고 대신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이 접붙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며 이스라엘을 대체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에 대해 자긍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첫째,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뿌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접붙임을 받은 가지가 자기를 지탱해 주는 뿌리를 멸시해서는 안 되고, 이스라엘에 접붙임을 받아 영적인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17-18절).
둘째,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교만하면 유대인처럼 찍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배척이 이방인의 구원의 전제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유대인보다 이방인을 선호하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유대인이 꺾인 것은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구원의 은혜를 거절했기 때문이고, 이방인은 복음을 영접하여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즉, 이방인이 유대인보다 우월한 부분이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면서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합니다(19-22절).
이처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한 후에 바울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다시 진술합니다(23-24절). 현재 이스라엘이 불신앙 때문에 잘려 나갔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이방인에게도 이 일을 행하셨다면, 이스라엘/자기 백성에게는 더더욱 그렇게 하실 것).
25-32절의 단락에서 바울은 ‘신비’라고 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말합니다.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으로, 이를 통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수 많은 이방인이 복음을 듣고 구원에 참여하게 되면 이스라엘이 시기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들 역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온 이스라엘’이 누구를 가리키는가? 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습니다. 그냥 국가적인 이스라엘이냐? 아니면 예수를 믿는 새 이스라엘이냐? 등등, 저는 새 이스라엘로 보고 있습니다. 즉, 유대인 그리스도인 + 이방인 그리스도인 + 아직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중에서 예수를 영접할 미래의 그리스도인들!).
그러면, 바울이 현재 완악해진 이스라엘이 장래에 구원받을 것을 확신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첫째, 철회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28-29절/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들을 버리지 아니하심). 둘째, 하나님의 자비 때문입니다(하나님이 이방인에게 긍휼을 베프심/30절, 그 긍휼로 유대인들도 긍휼을 얻게 됨/31절).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진노와 은혜, 엄위와 인자, 적대와 사랑 등 두 얼굴을 나타내십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자비인 것입니다(32절).
이와 같이 바울은 하나님의 신비한 구원 계획, 망가진 세상을 바로잡으시고 실패한 인류를 하나님의 참 형상으로 회복해 가시는 놀라운 방식, 그리고 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부요와 지혜와 지식을 보고 경외심으로 충만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33-36절).
12장은 일반적인 권면 부분입니다.
권면의 내용은 주로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섬김과 사랑,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분열된 공동체의 연합에 대한 호소입니다.
바울의 호소의 토대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치안에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자비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영적 예배’인데, 그것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라고 합니다(1절). 참된 영적 예배는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가 직면한 삶의 모든 현장에서 몸의 지체를 죄에게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포함합니다(6:13, 19절).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하는데(2절), 그럴려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생각하라는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주어지는 권면은 믿는 자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살라는 호소입니다.
3절의 권면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하지 말고, 믿음이라는 기준에 따라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처럼 로마교회 성도들에게도 여러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현란한 은사를 받은 자들이 있어, 우월 의식을 가지고 다른 형제자매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다른 교우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하나됨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각기 다른 은사가 주어졌다 하더라도, 모두가 한 몸을 이룬 동등한 지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한 몸 안에서 서로 다른 기능을 하지만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기 때문입니다(5절). 또한 교회는 은사를 소유한 자와 은사를 소유하지 않은 자로 나뉘지 않고, 모두가 적어도 하나 이상의 은사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각 은사는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할 뿐 아니라 물론, 중요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한 존재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동등한 자비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은사는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에게 봉사하기 위해 주어지고, 모두가 상호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공동체의 생명은 각 은사의 조화로운 상호 작용에 달려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은사 중에서 상당수가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은사라는 사실입니다(6-8절).
9-21절은 헝제자매에 대한 사랑과 외인들, 즉 안 믿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랑을 행하는 것도 섬김과 수고이기 때문에 지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령의 힘으로 섬길 때 가능하게 된다는 것 같습니다(9-12절). 그리고 외인들에 대한 사랑은 주님을 품지 않으면(악한 세상에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는 일이므로~/참고 14절)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듯 합니다. 결국, 원수를 정복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이 인간에게는 없으므로 바울의 권면에 순종하려면 예수로 충만해야 될 듯 합니다(14-21절).
‘하나님의 자비’로 늘 승리하는 은혜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댓글 바울은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살라고 합니다. 그렇게 새로워진 마음은 겸손히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진 지체와 연합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게 합니다. 또한 환난중에도 소망과 인내, 기도에 힘쓰며 원수까지도 선으로 대하도록 격려받습니다.
바울은 이 어머어마한 일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해서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해도 우리를 변화시키는 성령님의 도움없이는 그런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가진 믿음조차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은사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12:1,3,6)
구원받은 신자의 삶 어디에도 우리가 자신을 자랑하거나 교만해질 구석이 없습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기때문입니다.(11:36)
내가 오늘 믿음안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환난중에도 포기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기도가운데 물으며 나아갈때,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살수있는 힘을 공급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다 더 풍성히 만나길 기대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내가 오늘 믿음 안에 서는 것이 주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인 줄을 알고 오직 감사함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2:21)
삶을 통해 부딪히는 문제들을 동일한 세상의 잣대로 대응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칠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입니다. 늘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서 예수님의 지혜와 사랑으로 선한 영향력을 온전히 끼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