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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원 에세이】
겸허한 인품의 철학자 지교헌 교수님을 그리워하며
― ‘목욕할 때마다’ 구순의 원로 학자 ‘욕실 풍경’을 떠올리는 이유
― 작품 교류를 통해 맺은 인연 ‘평론’ 소감으로 이어진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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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원의 청촌편지[6]】 겸허한 인품의 철학자 지교헌 교수님을 그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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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원의 청촌편지[6]】
겸허한 인품의 철학자 지교헌 교수님을 그리워하며
― ‘목욕할 때마다’ 구순의 원로 학자 ‘욕실 풍경’을 떠올리는 이유
― 작품 교류를 통해 맺은 인연 ‘평론’ 소감으로 이어진 사연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 존경하는 지교헌 교수님께 교수님이 먼 여행 떠나신 지 50여 일이 지났습니다. 저는 교수님이 그렇게 먼 길 떠나신 것 같지 않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올사모’(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 카페에서 작품을 교류하고, 댓글 공간에서 따뜻한 덕담을 듣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특히 ‘목욕을 할 때마다’ 교수님을 떠올리면서 그리워합니다. 집안의 ‘욕실 풍경’을 소재로 한 교수님의 수필 옥고가 떠오르기 때문이지요. ‘작가는 가도 작품은 독자의 뇌리에 영원히 남는다’라는 말이 맞습니다. ‘목욕할 때마다’ 구순의 원로 학자 ‘욕실 풍경’을 떠올리는 독자가 어디 저뿐일까요? 교수님의 수필을 읽은 수많은 독자가 그럴 것입니다. 교수님 수필을 읽고 감명받아 소감을 썼지요. 저의 졸고 독후감이 계간 문예지 『한국문학시대』 <평론> 지면에 실렸을 때, 교수님이 놀라시면서 반가워하시던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과분한 칭찬을 주셨지요. 감동적인 격려의 말씀을 주셨지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저의 졸고 ‘독후감’과 함께 <덧붙이는 글>이라는 제목의 소감을 교수님 수필집에도 실으셨습니다. 그만큼 저의 독후감을 귀하게 받아주셨고, 사랑의 눈길로 읽어주셨습니다. 존경하는 교수님. 그러면 제가 어찌하여 ‘목욕할 때마다’ 교수님 욕실 풍경을 떠올리는지, 그 이유를 독자에게 설명해야겠지요? 오늘도 저의 운동 코스인 도솔산 산책 후 ‘욕실에서 나와’ 이 글을 씁니다. 학계와 문단에서 고매한 인품으로 존경받아 온 지교헌 교수님. 동양 철학을 수필 문학에 접목하시면서 독자에게 많은 영감(靈感)과 화두(話頭)를 던져주신 노학자님. 교수님은 이제 천상(天上)에서 ‘목욕의 의미’와 ‘삼독번뇌(三毒煩惱) 탐진치(貪瞋癡)’를 굳이 설파하지 않으셔도 남겨주신 수필 옥고만으로도 독자들은 그 뜻을 깊이 헤아리고 있습니다. 모쪼록 편안한 영생 누리시면서 저의 부족한 글도 변함없는 사랑의 눈길로 살펴 주시옵소서. ♣ 2024. 12. 21. 대전에서 윤승원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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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교헌 작가 수필집에 수록한 <소감>과 필자의 <평론>】
[지교헌 소감]
■ ‘윤승원 독후감’에 덧붙이는 글
지교헌(池敎憲) 철학자, 수필가, 소설가,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나는 그럭저럭 30여 년이나 수필을 써 온 셈이다. 그러나 문학의 한 장르를 이루는 수필은 나의 전공 분야가 아니므로 그저 쓰고 싶은 충동에 따라 부담 없이 자판을 두들긴 잡문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내면적인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내 글은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고 기라성 같은 작품들의 저 멀리 뒷전에서나마 수필가들의 그늘 밑에서 명맥을 부지해 왔다.
나는 나의 첫 작품집 《질경이와 마디풀》 (교음사 1994)에 대하여 “문학적 서정성과 철학적 지성의 융합”이라는 아름다운 평가를 받았다. 강석호 평론가의 말이었다. 그 후로 몇몇 평론가의 평가는 나의 작품 수준을 넘어선 칭찬으로 들렸다.
그런데 여기 소개한 윤승원 수필가의 글은 나의 작품에 대한 다른 어떤 평론보다도 나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어떤 점에서 본다면 그는 나의 작품뿐만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품격을 이리저리 마구 뒤흔들어 정신을 빼놓고 나서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얌전히 어루만지며 화려한 의상과 장식품으로 분장하여 영예로운 옥좌로 안내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결코, 흔히 볼 수 없는 진정한 문학인의 주술적 능력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수준이다.
나는 그의 평론에서 보이는 예리한 필봉(筆鋒)을 감각하면서 그의 글을 드높이 올려다보게 되었다. 수필을 사랑하는 모든 동지들에게 간단한 소감을 털어놓는다.
2022.7.22. 지교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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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종합문예지 계간 『한국문학시대』 2022년 봄호 <윤승원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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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구순 원로 철학자 지교헌 수필
「쓰고 싶지 않은 글」 讀後記
― ‘반어(反語)적 수필 읽기’의 긴장감과 ‘숨은 그림 찾기’
윤승원 수필문학인 (1990·한국문학) /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전) 금강일보 논설위원, 『문학관에서 만난 나의 수필』 외
근래에 이만큼 긴장하면서 조심스럽게 읽어본 수필이 흔치 않다. 숨도 크게 내쉬기 어려웠다. 섬세한 묘사, 밀도 있는 문장이 몰입도를 높여 준다.
모순덩어리 세상을 향한 외침이기에 반어(反語)적 수필 문장 표현 기법이 은유나 상징의 시어 못지않게 공감과 감동의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 번뇌’를 안고 살아가는 인생, 그 더러운 때를 벗기라는 준엄한 일깨움이다.
구순의 철학자 지교헌 수필가(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와의 인연은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올사모]’ 카페 창작실 수필 작품 교류를 통해 이어왔다.
오늘 내가 읽은 지교헌 수필은 위트 속에 바늘이 숨어 있다. 그런데 찔리면서도 재미있다. 나만 찔리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가. 수필 문학이 지향하는 ‘구체적 사실의 의미화’를 철학적 관점에서 충족시켜 준 성공한 수필이다.
동양 철학을 전공한 노학자의 엄격한 사생활을 감히 훔쳐보다니, 그림자도 밟아선 안 되는 고매한 인품의 노학자 알몸을 감히 샅샅이 훑어보다니,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용납해야 한다. 수필 평자나 소감 한마디 쓰려는 독자에게만큼은 용서가 돼야 한다. 원로 문인은 수필가이기 이전에 소설가였다는 점이 문장에서 감지된다.
수필가로서의 엄격함, 절제된 내면, 흐트러짐 없는 인격에다가 재미를 추구하는 소설가로서의 풍부한 상상력과 섬세한 묘사력이 더해진 수필. 쉽게 만나기 어려운 철학 수필이다.
‘찰흙처럼 엉겨 붙은 묵은 때’, ‘커다란 바가지로 한 바가지’라는 묘사는 수필가의 위트와 소설가로서의 유머가 결합된 문장이어서 긴장 속에서도 웃음을 자아낸다.
『나의 몸뚱이는 때 투성이로 구성된 특수한 몸뚱이인 것 같다. 신축년(辛丑年)을 보내고 임인년(壬寅年)을 맞이하는 이 한밤에 나는 온몸에 찰흙처럼 엉겨 붙은 묵은 때를 벗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낡은 살갗이 함께 벗겨져 나왔는지도 모르지만 벌써 벗어진 때만 해도 커다란 바가지로 한 바가지는 될 것만 같다.』
- 지교헌 수필 「쓰고 싶지 않은 글」 중에서
(출처: 경기한국수필가협회 카페 『지교헌 서재』 2022.1.12. 발표)
그래서 지교헌 수필은 심각하지만, 재미가 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중거리 슛’을 타임아웃 5분 전에 성공시킨 백전노장 축구선수의 통쾌한 골인 장면처럼 관중을 즐겁게 한다.
『여기저기 손이 닿는 곳은 고루고루 비누를 칠하였다. 그러나 등에는 좀처럼 손이 미치기 어렵기 때문에 타월을 얼른 집어서 비누를 흠뻑 칠하고 어깨부터 등까지 고루고루 문질러 댔다. 그리고 타월을 어깨에 걸치고 마치 톱질을 하듯이 당겼다 놓기를 반복하며 목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윽고 목욕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타월을 던져두고 손으로 여기저기를 더듬어 보았다. 그런데 나의 예상과는 달리 완전히 더킹이가 된 때가 여기저기서 수북하게 밀려 나오지 않는가.』
‘더킹이’라는 말, ‘더께’라는 낱말은 알아도 ‘더킹이(또는 더깽이)’라는 충청도 방언을 아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문장에서 ‘더킹이’ 덕분에 충청도 촌놈인 나는 웃었다.
그리하여 팽팽했던 긴장감이 느슨하게 풀렸다. 이런 맛에 수필을 읽는다. 수필가 지교헌의 묘사력은 그래서 탁월하다.
자신의 좋은 점만 드러내고 싶은 게 인간 본연의 심리이다. 부끄러운 점은 감추고 자랑스러운 점만을 노출하고 싶은 게 인간의 타고난 천성이요, 길들어진 생활방식이다.
수치스러운 자신의 내면은 꽁꽁 감추고 현란한 말장난으로 독자를 교묘히 속이는 글쟁이들이 있다면 지교헌 수필을 읽고 크게 뉘우칠 일이다.
부끄러운 자신의 내면을 감추고 외양만 번드르르하게 치장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비수가 지교헌 수필에 번득인다.
『다시 말하면 육체적인 몸만 더러운 때로 뒤덮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내 마음이나 영혼도 더러운 때로 뒤덮인 것이다. 참으로 고개를 들기 어렵고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다. 그러니 어찌하랴. 그래도 나는 더러울망정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주변만은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더욱이 민족과 국가를 입에 올리고 자유와 권리와 민생과 국가의 발전을 밥 먹듯이 외치는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이나 지도자들은 나처럼 더럽지 말기를 바란다.』
뜨끔하다. 바늘보다 더 아프다.
수필은 흔히 자기 고백의 나신(裸身)과 같은 문학이라고 한다. 하지만 자기 고백은 저속하지 않아야 하고, 과대포장되지 않아야 하고, 현학적이지 않아야 한다고 만고의 진리처럼 경고한다.
얼핏 맞는 말 같지만, 전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수필 문학의 정석은 아니다. 저속, 과대포장, 현학은 부정적인 요소가 담긴 말이지만 이를 적절히 활용할 때 의미 있는 문장이 나오고 감탄할만한 창작물이 탄생한다.
해학이 재치 있게 드러나는 문학 작품이 대체로 교훈적일 때가 많다. 교훈은 남의 실수를 통해 얻어진다. 남의 수치스러운 고백을 통해 교훈을 습득할 수 있다.
교훈은 반듯하고 완벽한 인간의 모습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차마 드러내기 어려운 자신의 허점이 실수로 노출됐을 때 관객의 웃음이 빵 터진다는 사실, 배삼룡 스타일의 폭소 속에 숨은 삶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지교헌 수필의 제목 「쓰고 싶지 않은 글」은 정직한 것 같지만 정직하지 않은 반어(反語)에 성공한 예술품이다. ‘쓰고 싶지 않은 글’을 통해 ‘꼭 읽고 싶은 글’을 만들어 낸 명수필이다.
작가가 부끄러운 내면을 완벽하게 감추고 멋을 한껏 부리려고 했다면 그런 제목을 붙이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어떤 탐진치(貪瞋痴)」 정도의 현학적인 제목을 붙였음 직하다.
하지만 지교헌 수필은 독자가 접근하기 쉬운 제목을 의도적으로 붙였다. 능청스럽지만 귀엽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유치원 손자의 응석(?) 같은 제목을 택했다.
구순(九旬) 원로 문인이 마치 유치원생 손자처럼 ‘팔이 아프다’라고 어리광하면서 ‘때 밀기’를 포기하고 마는 욕실 풍경이 ‘몰래카메라’처럼 세밀하게 포착됐다.
독자는 이내 안쓰러운 마음을 숨길 수 없다. 대중목욕탕 옆자리 노인 ‘등 때 밀어주기’처럼 구순 어르신 세신 봉사(洗身奉仕)라도 자처하고 싶어진다.
※ 사랑방 이야기 : 노인 ‘욕실 사고’도 많다. 다리 힘이 없는 노인들은 욕실에서 자칫 미끄러지기 쉽다. ‘노인은 화장실에서 주의해야 하고, 욕실에서 낙상 사고를 주의해야 한다’라는 말이 그래서 노인 본인은 물론, 가족들도 각별히 신경 써야 할 조언이다. 더구나 심야에 노인 혼자 욕실에서 힘들게 때를 벗기는 일은 독자를 잔뜩 긴장시키는 일이다. [소감 필자 생각]
즐겁게 웃으면서도, 작가가 정작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가 ‘숨은 그림 찾기’를 위해 다각도로 두뇌를 회전시킨다.
그러다가 그만, 급 제동 장치를 어느 순간에 밟아야 할지 잔뜩 긴장하면서 목적지까지 안전 운행해야 하는 게 지교헌 수필의 백미, ‘사단칠정(四端七情)’론 등장이다.
겸허한 인품의 노학자는 자신의 글을 몹시 부끄러워하지만, 제삼자인 독자는 옥고 결말에 가서야 원로 문인의 품위와 지성을 잃지 않는 고백적 산문의 진수를 맛본다.
원로 문인은 ‘쓰고 싶지 않은 글’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무례하게 욕실 풍경을 훔쳐본 독자는 각오해야 한다. 양해 없이 이런 감상문을 썼으니, 혼날 각오 단단히 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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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전문총 명예회장 김영훈 작가
생시에 주현미의 노래 『야래향(夜來香)』을 좋아하셨습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셨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0XObyTHB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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