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집 제14권 / 비갈(碑碣)
문성공 안 선생의 옛터 비(文成公安先生舊基碑)
은(殷)나라의 태사(太師)가 명이(明夷)를 만나 동방으로 와서 동방이 크게 변하였다. 그러나 태사의 도를 얻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오직 우리 안 선생 한 분뿐이다. 선생은 고려 원종(元宗) 때 태어났다. 신라와 고려 때에는 불교가 치성하였는데, 고려 때가 더욱 심하였다.
뒤에 태학(太學)에서는 오직 부도씨(浮屠氏)에게 아첨하기만을 일삼자, 발분하여 시를 지어서 이단(異端)을 막고 오도(吾道)를 부호하는 것으로 자임하였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직위가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는데, 당시에 양현고(養賢庫)의 저축이 고갈되어 있었다.
이에 공이 건의하여 조신(朝臣)들로 하여금 은폐(銀幣)를 내게 해 태학으로 보내게 하고, 남는 것은 사신에게 부쳐 보내어 중국으로 들어가서 부자(夫子 공자(孔子)) 및 70 제자의 상(像)을 사 오게 하였으며, 아울러 제기(祭器)와 악기(樂器), 육경 및 여러 성현들의 서책을 사 오게 하였다.
그런 다음 크게 제례(祭禮)를 닦고 널리 학도들을 모았다. 그러자 경전을 끼고 다니면서 학문을 익히는 선비들이 항상 1000여 명을 헤아리게 되어 유풍이 크게 떨쳐 천하에 소문이 나게 되었다. 공은 사람됨이 장중하고 자상하였으며, 그 학문은 성경(誠敬)하기를 힘썼다. 항상 주자(朱子)의 상(像)을 걸어 놓고 경모하였으니, 학문한 바를 잘 알 수가 있다.
그 뒤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이 일어났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진유(眞儒)의 무리가 나와 위로는 태사(太師)를 잇고 아래로는 뭇 현인들을 깨우쳐 주었는바, 사(邪)를 억제하고 정(正)을 부호한 것은 모두가 공의 힘이었다. 만약 도통(道統)을 논해 본다면, 공이 그 조(祖)가 된다.
공의 휘는 향(珦)이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직은 벽상삼중대광(壁上三重大匡)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이며, 향년은 64세였다. 자손들은 대대로 드러났는데, 세계(世系)와 사업(事業)과 덕행(德行)과 문장(文章)에 대해서는 본전(本傳)에 실려 있다. 이상이 공에 대한 대략이다.
공은 고려조의 성묘(聖廟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우리 태종(太宗)께서 하교하기를 “안향(安珦)의 후손은 비록 서얼이라고 하더라도 군역(軍役)에 넣지 말라. 이는 그의 할아버지를 높여서이니, 영갑(令甲 법령(法令))에 적어 넣으라.” 하였다.
우리 동국에 예전에는 서원(書院)이 없었는데, 명종(明宗) 때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죽계(竹溪 풍기(豐基))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죽계의 북쪽에 있는 백운동(白雲洞)에 처음으로 서원을 창건하고 공을 제사 지내었다. 공은 바로 그 고을 출신이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안후 응창(安侯應昌)은 공의 14대 후손인데, 공보다 340년 뒤에 졸하였다. 공의 초상을 서원에서 배알하고 공의 옛 집터를 찾아보고는 종인(宗人)들을 모아 놓고 위연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도 오히려 우리 할아버지를 흠모하는데 하물며 우리 자손 된 자들이겠는가. 평리촌(坪里村)은 우리 할아버지께서 사시던 옛 집터이니, 자그마한 빗돌이나마 없어서는 안 되겠다.” 하니, 모두 그렇다고 하였다.
이에 드디어 빗돌을 세웠다. 무릇 효성은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안후의 이 일은 효라고 할 만하다.
명은 다음과 같다.
죽계 고을 평리촌은 / 坪里之村
선생의 옛 고향이네 / 先生之基
백운동에 있는 서원 / 白雲之院
선생 모신 사당이네 / 先生之祠
현명한 분 멀어져서 / 哲人已遠
뒤쫓아 갈 수가 없네 / 緬莫之追
상재 있는 곳을 보며 / 瞻彼桑梓
후손 효심 일어났네 / 後孫孝思
아아 너희 후손들은 / 嗟爾後孫
너희 조상 생각하라 / 爾祖念之
뭘 가지고 생각하나 / 念之伊何
이 빗돌을 볼지어다 / 視此刻碑
<끝>
[註解]
[주01] 은(殷)나라의 …… 변하였다 : 은나라의 태사는 기자(箕子)를 가리킨다. 기자는 은나라 주왕(紂王) 때의 현인으로, 이름은 서여(胥
餘)이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멸하자, 기자는 동쪽으로 와서 조선왕(朝鮮王)이 되어 조선 사람들에게 예의와 전잠(田
蠶) 등을 가르쳤으며, 팔조목(八條目)을 가지고 백성을 다스렸다고 한다.
명이(明夷)는 《주역》 64괘의 하나로, 해가 땅속에 들어가는 상(象)을 갖고 있는데, 암군(暗君)이 위에 있어 밝은 신하가 해침 당하
는 것을 상징한다. 흔히 불행한 운수를 만났다는 뜻으로 쓰인다.
[주02] 부도씨(浮屠氏) :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묻는 일종의 탑으로, 부도(浮圖), 부두(浮頭), 불도(佛圖)라고도 하는데, 부처나 불교나 승
려의 대칭(代稱)으로도 쓰인다. 여기서는 부처를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주03] 양현고(養賢庫) : 고려 시대 때 설치한 국학의 장학 재단으로, 1119년(예종14)에 처음 설치되었다. 예종은 당시 사학(私學)의 융
성으로 위축된 관학(官學)을 진흥하기 위하여 교육개혁을 단행하였는데,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학사(學舍)를 설립하고 유학
생(儒學生) 60명과 무학생(武學生) 17명을 입학시켜 이들의 교육과 국학의 재정적 뒷받침을 위하여 국학 안에 이 양현고를 설립
하였다.
그 뒤 고려 말에 와서 국학이 쇠퇴하고 양현고의 재원도 고갈되자, 안향(安珦)의 건의로 관료들이 섬학전(贍學錢)을 출연하여 양현
고에 귀속시켜 교육 진흥을 꾀하였다.
[주04] 성경(誠敬) : 정자와 주자의 학설 가운데 나오는 존성(存誠)과 거경(居敬)을 말하는데, 존성은 성실함을 보존하는 것이고, 거경은
몸가짐을 조심하여 삼가는 것을 말한다.
[주05] 상재(桑梓) : 뽕나무와 가래나무로, 향리(鄕里)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시경》 〈소반(小弁)〉에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반드시 공경
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이는 부모가 생전에 누에 치고 재목으로 쓰는 이 나무들을 담 아래에 심어 자손에게 물려준 것임을 말한 것
으로, 전(轉)하여 부모의 유업(遺業)이 있는 고향을 일컫게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