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바람이 불지만 좋은 날씨입니다. 좋은 봄기운과 오늘도 함께 하기를요...^^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 장’으로 불립니다.
13장 문맥은 12:31b(‘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와 14:1a(‘사랑을 추구하며’)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 글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상호간의 관심과 섬김의 필요를 강조하기 위해 그리고 특별히 예배 중에 영적 은사 사용이 개인의 유익과 자랑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록한 듯 합니다.
먼저 13:1-3절에서 바울은 사랑의 절대 필요성에 대하여 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천상 세계와의 직접적인 의사소통이라고 간주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방언이 그렇게 영광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 없는 방언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것으로 변질되고 만다고 합니다. 다른 놀라운 은사들도 사랑 없이 시행된다면 마찬가지로 무익하다고 합니다(1-3절). 그러나 이것은 사랑만 중요하고 은사들은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공동체에 은사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은사들(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므로)은 사랑의 정신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7절에서 바울은 사랑의 특성을 행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것으로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사랑에 대한 긍정적인 진술(4a-4b절, 6b-7절)과 부정적인 진술(4c-6a절)들이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분명한 방향이 됩니다. 사랑은 달콤한 감정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행동으로서 훈련과 반복을 통해 습관화될 행동이요 더 나아가 성품화될 습관인 듯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바울은 8-13절에서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을 비롯한 은사들은 종말에 사라질 것이지만, ‘사랑은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다(8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시대뿐만 아니라 오는 시대에도 영원합니다.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을 오늘 우리의 본성으로 확고하게 붙들어 매어 놓아야겠습니다.
14장에서 바울은 12장과 13장의 기초 위에서 고린도 교회의 예배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기 시작합니다. 일부 고린도교인들은 방언의 은사를 과도하게 높이 평가하여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천상의 실체와 직통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 모임 중에서 자기들의 높은 영성을 과시하고자 경쟁적으로 방언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예배에 어려움이 있었고, 바울은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해야 성령을 억제하지 않으면서도 질서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바울의 해결책은 예배 모임에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은사를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14:1-5절에서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방언보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유는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어 말하는 자신만 유익을 얻고, 예언은 교회에 유익을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4절). 예언은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요, 듣는 사람이 믿음에 서 있도록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입니다(3절). 바울은 방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을 신비한 방식으로 세워주기 때문에 본인은 모두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방언(만일 방언 통역하는 자가 있어서 방언을 통역하여 그것이 교회의 이익이 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보다는 예언하기를 더 바랍니다. 여기서 은사들의 중요성을 평가하는 바울의 기준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 곧 교회에 유익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6-12절에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의사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계시와 지식과 예언과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않고 방언으로만 말한다면, 교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여러 가지 유비를 사용하여(여러 악기들의 예, 외국인 등) 얘기를 하면서(7-11절), 그러므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얘기합니다. 곧,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주는 은사라면, 그런 은사는 더욱 풍성하도록 구하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해 가능한 예언과 같은 말씀의 은사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 합니다.
13-19절에서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최선의 길은 영으로만 기도하지 말고, 마음(이성)으로도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15절). 이 말은 곧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며, 그런 다음 방언을 통역하면서 기도하고 찬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Hays). 방언이라는 것은 성령에 감동된 언어 곧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와 찬송입니다(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방언은 일반적인 언어는 아님). 방언으로 기도하면 다른 교인들이 알아 듣지를 못하고 덕이 되지 않습니다(16-17절). 그래서 통역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바울이 방언의 세계를 경험해보지 못해서 또는 방언에 초보자여서, 지금까지 방언에 대해 절제하라고 얘기를 해왔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울은 방언의 달인입니다. 이 방언과 관련해서 개인적인 영성 시합을 한다면, 그 누구도 바울에게 압도될 것입니다. 바울은 방언에 대해 그렇게도 잘 알고 있지만, 개인적인 영성 자랑이 아니라 교회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서 많은 방언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9절). 바울은 20-25절에서 통역되지 않은 방언은 불신자들에게도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방언을 듣는 자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게 되고 불신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방언은 불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심판의 표시입니다. 하지만 예언을 듣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우침을 받아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언은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표시입니다(22절). 바울은 그렇게 주장하는 의도를 좀 더 분명하게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23-25절).
그렇다면 이상에서 강조된 ‘예언’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이 주제는 학자들 사이에 많은 토론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으로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저도 뭐라고 정확히 말씀드리지 못하겠어요... 주석을 더 찾아 봐야 될듯요...^^). 29-30절에 의하면 사전에 준비된 설교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갑작스럽게 주어진 말씀이 것 같기도 한데요, 얼마든지 컨트롤이 가능하다고 하고, 14:3, 19, 25절을 참고했을 때, 일종의 교훈적이고 권면적인 말씀?(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히 아닌 듯 함/29절, 복음의 기준에 따라 분별을 받아야 하므로~) 이지 않나 싶습니다. 하여간 바울은 이러한 예언에 대해 긍정적입니다.
26-35절은 예배 질서에 대한 지침입니다.
다양한 은사들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당시 예배 모임에 이러한 것들이 나타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바울의 중요 메시지는 다양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6절). 그래서 방언에 대한 지침도 있고, 예언에 대한 지침도 있습니다. 게다가 예언은 모든 성도들에게 열려져 있는 은사라고도 합니다(중요한 것은 절제와 질서가 필요). 바울이 이토록 은사의 질서 있는 사용을 강조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이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33절). 바울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이 말씀을 받은 영적 열광주의자들에게 말씀에 대한 잘못된 독점 의식을 깨우쳐 주면서(36-38절/하나님의 말씀은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임한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정리해줍니다(39-40절).
첫째, 예언하기를 열심히 구하라!
둘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통역 없이는 방언을 말하지 말하고 했지만, 방언 자체를 금하지는 않았다.)
셋째, 예배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모양이 좋고 질서 있게 하라!
저도 통독 말씀을 정리하면서 여러모로 도움이 되고 도전을 받네요...
오늘도 예수님과 동행하는 복된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첫댓글 바울은 성도들에게 방언과 예언의 은사가 풍성하길 기대합니다. 은사사용의 목적은 사람들이 배우고 권면을 받음으로 교회를 이롭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방언의 통역과 예언이 질서있게 이루어질때 믿지않는 자들도 하나님이 성도 가운데 함께 하심을 선포하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이 일어납니다.(14장)
성도들은 교회에서 자신의 은사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의 믿음을 세울 수도, 반대로 다른 사람이 베푸는 은사의 혜택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 속에 섞여서 살아가야하는 성도에게 교회에서의 시간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말씀과 예배는 세상의 유혹과 속임수에 맞서고 고난중에도 견딜 수 있는 온전한 믿음과 소망을 향해 나아가고 사랑 가운데 서로를 힘있게 세우며 그리스도인답게 살게 합니다. 각자의 은사는 그런 교회의 일이 더 활발히 일어나도록 돕습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그 은사가 서로에게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준비하는데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로 판명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받은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길 원하실까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받은 은사를 잘 캐치해서 귀하고 아름답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렸을 때 교회 주변에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분들이 종종 계셔서 만나본 경험이 있어요. 그런데 고린도 전서에서 말씀하는 "예언"은 "말씀의 은사"를 의미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하는 것 (14:19)", "다른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권면을 받게 하는 것 (14:31)" 등과 같은 의미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말씀", "계시", "방언", "통역" 등을 한 데 어울려 "예언"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마도 오늘로 말하자면 설교와 같은 의미 아닐까 생각합니다 (25절).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맡게 되는 이 예언의 사역이 다른 이들에 의해 분별을 받게 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4:29) 또한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의 제재를 받게 되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어요(14:32). 따라서 이 은사를 사용해 공동체를 위해 사용한다 하면서, 그릇된 것에 대해 제재 받기를 거절하는 어떤 이들 (본문 속에서는 "여자들")은 책망의 대상이 되며, 그 무질서한 행태를 멈춰야 하는 것이었어요 (14:34-36).
어느 날 문득 제재의 대상이 되었을 때도 순복할 수 있길 기도하게 되었어요.
아멘입니다. 말씀 외에 절대 옳은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도 지혜인줄로 믿습니다.^^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여 교회와 성도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방언과 예언에 대해 주신 말씀을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네~ 주님이 주신 은사를 일부로 제지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나의 자랑이 아닌, 공동체를 위해서 질서 있게 사용될 때 주님이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으로 모든것을 품위 있게하고 질서있게 화평의 하나님을 기쁘게하는 삶이기를 바라며 주의깊게 생각하며 나아갑니다
아멘아멘입니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품위 있게!, 질서 있게! 주님이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