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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므비보셋
삼하9:1-13
성경 66권에는 많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인간이 죄에 빠졌지만 어떻게 해서 그 죄가 사함받고 구원받게 된 것을 성경전반에 걸쳐 보여주고 있다.
아담과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죄에 빠졌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구원받게 되었고,
아브라함은 우상장사하는 가족의 집에 태어났는데 그의 이복누이 동생과 결혼하였다.
또한 애굽왕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여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으며 약속을 굳게 의지하지 못함으로 육신의 아내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던 연약함을 가진 인간이었지만 약속의 은혜로 인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했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는 자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해 창녀와 몸을 섞었다.
후에 그 여인은 자기 며느리로 알려지면서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그였지만 그 몸에서 다윗과 예수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어지는 영광을 누렸다.
요셉은 자기 꿈에 관한 확실한 믿음과 과신으로인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의 종살이로 팔려갔으나 오히려 이로인해 그 꿈을 이룰수 있는 길이 되어 자기 가족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으며,
모세는 애굽왕족으로 살수 있었으나 자기동족을 괴롭힌다는 이유로 사람을 살해해서 살인범으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을 보내다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놀라운 영적지도력을 보여주었으며,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보고 부적절한 관계를 하여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야를 전장맨 앞에 보내어 죽게 하였던 비열한 모습을 가졌고,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아들에게 쫓기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으나 은혜를 의지하고 나아가는 다윗이었기에 구원의 은혜와 예수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
베드로는 책임도 지지못할 경솔한 맹세를 하므로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하는 행위를 가졌으나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다시금 주님을 증거하는 수제자로 초대교회부흥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바울도 처음엔 예수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자의 맨 앞자리에 섰으나 다메섹 동산에서 주의음성을 듣고 주님을 위한 사도로 부름받게 된다.
이처럼 신앙의 사람들을 보면 처음부터 뭔가 잘하고 노력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택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겪고 죄로인해 마음이 상해진 자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그들을 구원시키시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신 것을 알 수 있다.
이토록 성경은 인간이 얼마나 죄로인해 추악하고 더러운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인간임에도 하나님은 자기를 희생하시면서 까지 인간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이유이다.
오늘은 다윗과 므비보셋에 관한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이 어떻게 은혜를 입는가 알아보고자 한다.
이스라엘에 왕의제도가 생겼다.
이스라엘의 제 1 대 왕은 기스의 아들인 사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왕은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다윗이었다.
세 번째 왕은 솔로몬이었다.
이 세 왕은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 시대의 왕이었고 솔로몬 이후부터 나라가 분열되어 유다와 이스라엘로 나뉘게 되어 유다는 2지파 이스라엘은 10지파를 갖게 되었다.
오늘 읽은 이야기는 나라가 나뉘어 지기전 다윗왕때 일어난 이야기이다.
사울왕이 이스라엘 왕으로 있을때에 처음에 그는 굉장히 훌륭한 정치로 나라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기대감과 그의 왕권력에 대한 욕심이 화를 불렀던 것일까?
그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중 임의로 자신을 위해 사용했으며 제사장이 오지 않는다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죄를 범했다.
그 후로 그는 늘 악신에 시달려 잠못이루는 고통스러운 밤이 되었다.(삼상16:14)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로 하여금 이새의 아들 8번째 아들인 다윗에게 가게 해서 왕으로 세우는 기름부음을 받게 했고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다윗은 젊고 어리지만 사울의 상한 심령을 치유할 수 있는 수금을 타줄아는 놀라운 재주를 가졌기에 사울의 옆에두고 궁중생활을 하게 하셨다.
(삼상16:23)
후에 블레셋나라는 거인 골리앗을 앞세워 이스라엘을 침략한다.(삼상17:4)
어느 누구도 감히 맞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는데 어린 다윗이 물맷돌 두개만을 들고 나가 거인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삼상17:49)
이후 사울은 이 다윗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 하지 않을까 하여 여러번 다윗을 죽이고자 했다.(삼상19:10, 20:33)
그런데 이 사울에게 요나단이 있었는데 이 요나단은 다윗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삼상18:1)
요나단은 하나님이 세울 이스라엘의 진짜 왕은 다윗이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언젠가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세워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할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삼상23:17)
그래서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고 죽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다윗을 피신하게 해서 다윗의 마음에 요나단으로 하여금 큰 은혜를 입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사울의 뒤를 이을 요나단과 앞으로 이스라엘 왕이 되어질 다윗의 관계는 원수지간 일수도 있다.
하지만 요나단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면서 다윗과 약속을 했다.
“다윗아 나는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을 안다. 지금은 비록 도망자처럼 쫓기는 어려운 상태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실 거다. 그때 나를 기억해서 우리 집안의 자손들을 해하지 말고 생명을 보호해 주고 지켜주고 살려다오 하고 부탁을 하자 다윗이 좋다 하면서 약속을 하게 되었다.(삼상20:14-16)
그것은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새긴 약속이었고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한 약속이었다.
이처럼 다윗과 요나단은 여인의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삼상20:17)
세월은 흘러서 마침내 블레셋과의 전쟁중에 사울과 그아들 요나단과 그의 많은 가족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사울이 죽고 난뒤에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고 난뒤에 오늘 읽었던 므비보셋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과의 약속을 잊지 아니했다.
비록 요나단은 죽었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느날 다윗은 신하들을 불러 “여봐라 사울의 집에 오히려 살아있는 가족들이 있는가 한번 찾아봐라” 하고 명을 내렸다.
(삼하9:1)
이 말을 들은 신하들은 어이쿠 드디어 올것이 왔구나 하고 마음이 쿵 내려 앉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윗이 자신이 옛적에 사울에게 당한 것을 보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권력을 이루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란이 일어날 모든 세력들은 다 처치 해야만 한다.
이 사실을 모를리 없는 신하들은 온 이스라엘에 사방 팔방을 뒤져서 사울의 가족중에서 남아 있는 직계 자손을 찾아보라고 하니까 그 가족은 못찾고 대신 사울의 집안에서 일을 해주고 있던 시바라고 하는 종을 찾아내어 왕앞에 데리고 왔던 것이다.(삼하9:2)
다윗이 시바에게 묻는다.
“지금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신하들과 시바가 그 말을 곧게 믿겠는가?
안 믿는다. 사람의 마음이란 알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권력을 쥐고 있는자가 이전에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복수할려고 한다라고 생각하지 오히려 은혜를 준다고는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속으로는“ 그러면 그렇지 다윗도 인간인데. 별수 없는거야 사울이 다윗에게 행한 것을 보면 자손만대라도 멸할수 있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옛날에 역적은 삼족을 멸해 버린다.
삼족을 멸하면 그 집안은 없어져 버리는것이다.
족보가 끊기고 다시는 복수할 수 없을 정도로 그집안을 완전히 멸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 생각에도 다윗이 왕위에 오르니까 다시는 반란을 못일으키게 할려고 멸하려 하는것이구나 하고 추측 했을지도 모른다.
왜냐?
이들은 다윗과 요나단과의 약속을 전혀 모르기때문이다.
여러분 은혜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은혜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
우리가 잘해서 받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였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받아드리지 못하면 우리는 항상 의심할 수 밖에 없으며 이 불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을 수 가 없다.
다윗이 사울의 왕가중에 남아있는 사람을 찾고자 하는 이유를 말해 주어도 그들은 네~ 하면서도 속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도 찾아내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죽일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윗의 신하들과 사울의 종 시바가 그랬다.
그때 시바가 왕께 고하되
왕이시여 사울집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고, 남아있는 사람이 딱 한사람 있습니다.
“오~ 그래 누구냐? 빨리 이야기 해보라!!”
“저 그런데 왕에게 말씀드리기가 좀....”
“어허~~”
네,....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뭐라고 어떠하다가 그렇게 되었는가?
다윗이 자초지종을 물어봤을 것이다.
그래서 사울의 종 시바는
다섯 살때에 절뚝발이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사울이 죽고 나니까 가세가 기울어서 다 사울집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때 므비보셋에게는 유모가 있었는데 다윗이 왕이 된후 사울집의 사람들이 다윗한테 신분이 발각되면 다 죽을 것 같으니까 므비보셋만이라도 살리려고 도망가다가 떨어져 그때부터 다리 병신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삼하4:4)
그런데 여러분 절뚝발이에 관한 다윗의 에피소드가 있다.
다윗은 비록 몰골이 형편없이 얼굴이 못나도 그런 것은 문제를 삼지않는데 다윗이 누구를 제일 싫어하느냐 하면 소경하고 절뚝발이를 제일 싫어하는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다윗이 왕이 되었을때 예루살렘 성을 빼앗으려고 하니까 여부스 사람들이 다윗을 보고 비웃었는데 뭐라고 비웃었느냐 하면 “ 야 다윗 너 교만해도 한참 교만하구나 네가 여부스 성을 빼앗으려고 하다니! 푸하하 우리성에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당장에 물리치리라”라고 야유를 퍼부었던 것이다.(삼하5:6)
여부스 족속의 말은 완전히 다윗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이고 다윗을 업신여기는 말이었다. 그래서 다윗이 말하기를 “누구든지 제일 먼저 여부스 성에 올라가서 점령하는 사람은 내가 장관을 시켜 주겠다”고 제안했고 다윗의 군대들이 올라가서 여부스 성을 함락했는데 거기가 바로 지금의 예루살렘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부터 다윗이 법을 하나 세웠는데 누구든지 소경이나 절뚝발이는 예루살렘의 성에와서 살수가 없다는 것이다.(삼하5:8)
그만큼 다윗의 마음에 절뚝발이와 소경을 미워했었다.
그런데 신하들의 생각에 므비보셋은 출신도 원수 집안의 출신이요, 신체조건도 다윗이 제일 싫어하는 절뚝발이 인것이다.
그런데 므비보셋이라는 이름은 또 어떤가?
그 이름의 뜻은 수치, 부끄러움, 창피를 뿌리는 자란 뜻을 가졌는데, 그러니까 므비보셋이 가면 가는 곳마다 속된말로 산통이 다 깨지는 것이다.
마치 머피의 법칙처럼 그가 움직이는곳은 이상하게도 일이 꼬이고, 사건 사고가 일어나고, 한마디로 왕재수 없는 그런 인물이 므비보셋인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좋은말을 듣고 살아갈 때 인품이 좋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 므비보셋은 그러한 인품도 없는 한마디로 형편없는 자가 므비보셋이었다.
이 므비보셋 역시 자신의 신분을 알았기 때문에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죽을것만 같은 두려움에 그는 로드발이라고 하는 길르앗 땅에서 살고 있었다.
요단강 건너 예루살렘으로부터 먼곳으로가서 은둔 생활을 했는데 그게 사람사는 것이 아니었다.
로드발은 “꼴이 없는 목장”이라는 뜻인데 사람이 살다가 황폐해져 버린 도시를 말한다.
과거에는 풀도 있고 물도 있고 소와양들이 떼를 이루었던 곳이었지만 므비보셋이 있던 때는 물도 없고 모래와자갈로 뒤덮혀진 황량한 곳이었던 것이다.
므비보셋은 그런곳에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절뚝발이로 비참하게 살았던 것이다.
드디어 이 므비보셋이 다윗왕앞에 섰다.
므비보셋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두려움에 몸을 떤다.
(삼하9:7)
자신은 왕앞에 불려갔으니 나는 그때 당시 무슨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해도 이제 나는 사울왕가의 손자라는 그 이유 때문에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는 사실에 절망감에 빠졌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같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은혜를 입지 못하면 사단의 세력안에 살고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멸망당해 죽을뿐이다.
내가 죄를 짓고 안짓고는 상관없다.
하나님의 공의의 눈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를 보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안이 아니면 예수그리스도 안이 아니면 사단의 종노릇 하는자가 되어있는 신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선하고 착한일을 하고 도덕과 윤리를 가지고 서기관 바리새인처럼 열심있는 신앙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다.
사울왕가의 손자라는 이유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므비보셋 정말 그 이름대로 하는일마다 어긋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내 놓을 수밖에 없는 불쌍한 자였다.
(우리가 바로 이런자이다.)
므비보셋 그는 왕앞에서 사시나무 떨 듯 떤다.
그리고 주의 종이 여기있나이다.(삼하9:6)라고 말한다. 종은 무엇인가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는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숨은 오직 왕께 달려있다는 자기 포기의 말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떤가?
무엇 때문에 므비보셋을 살려주고 그에게 은혜를 입히고자 하는가?
그가 잘나서도 아니고 왕가의 자손이라서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더 왕의 미움을 부채질 할 뿐이다. 잘나면 언젠가는 교만됨으로 반역을 저지를 것이고 왕가의 자손이기에 많은 사람을 끌어모을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은(잘나고 똑똑한 자기중심의 마음) 므비보셋이나 이글을 읽은 우리의 마음에서 완전히 제외 시켜야 한다.
다윗이 은혜를 입히고자 하는 것은 오직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 밖에 없다.
그 요나단의 약속안에 므비보셋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가 사울의 손자이든 절뚝발이든 재수없는 인간이든 상관없이 그를 요나단처럼 귀히 여길 수 있게 되는것이다.
요나단과의 언약이 있기 때문에 므비보셌은 자기 공로 없이도 살아날 수 있었다.
요나단과의 언약이 있기 때문에 다윗은 절뚝발이는 예루살렘에 있는 내 성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자기 감정의 소리자 법을 단번에 철폐할 수가 있었다.
요나단과의 언약이 있기 때문에 그토록 싫어하는 절뚝발이지만 자기 아들처럼 대해줄 수가 있었다.
므비보셋 그는 죽음의 자리에서 왕과함께 식사하는 위치로 올라간다.
누구 때문에 다윗과 요나단과의 언약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누구의 언약을 믿고 살아가는가?
우리는 새 언약의 법을 믿고 살아간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므비보셋과 같은 비참한 인생에서 왕앞에 나갈 수 있는 영생을 허락하셨다.
누구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언약 때문에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로 하여금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수십 수백 수천년동안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만인구원을 선지자와 사도를 통해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앞에 나아갈 때 내 믿음 내 공로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그 약속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시며 그 증표는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인 것이다.
우리는 사단의 세력 안에서 사단의 종노릇하는 패역한 인간이다. 여기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약속의 말씀을 받아드는 것 밖에 없다.
그 약속의 말씀이란
렘31:31-34이며 히8:8-13이다.
이말씀을 믿고 약속에 의해 내 마음에 죄가 다 사라진 것을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는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은혜가 주어졌는데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므비보셋 그 자신이다.
그는 왕의 은혜를 입고 먹고 입고 사는데 다윗의 왕자와 같은 혜택을 누리고 살지만 그 마음이 아버지 요나단이 다윗과 맺었던 약속이 임하지 못하면 그는 늘 두려워 떠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 약속과 법은 약한자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다.
그런데 이 므비보셋은 그러한 온전한 마음을 갖지 못했다.
이 다윗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쫒겨난후 다시 예루살렘을 되찾아 오게되었을때 므비보셋이 다윗과 함께하지 않음을 인하여 다윗이 물었다.
너는 어찌해서 나와 함께 가지 않았느냐?
(삼하19:25)
여기서 므비보셋은 자기 형편을 이야기 하고 있다. 자신은 절뚝발이이고 자신의 종이 자기를 속여 내 주 왕께 참소 하였나이다.
내 주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사오니 처분대로 하옵소서(삼하19:26-28)
우리는 이 므비보셋의 말을 듣고 보면 엎드려 절하는 그 모습과 수염도 깍지 않고 옷도 빨지 않은채 자숙하는 마음으로 자기 형편을 통해 어쩔수 없는 상황을 합리적으로 겸손하게 말한다는 생각을 갖게 될것이다.
그러나 내 주 왕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될뿐이라는 것을 말함으로서 다윗이 마음만 먹으면 자기를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불안한 마음을 품은 것을 다윗앞에 드러내어 말하였다.
다윗은 요나단의 약속으로 그를 자기 아들처럼 여기며 비록 압살롬에 의해 쫒겨나가는 신세가 되었어도 그는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므비보셋과 함께 하고 싶었다.
만약 그가 절뚝발이라서 피난길에 오르는 것이 불편하면 왕으로서 그는 얼마든지 불편함 없이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함께 가지 아니했고 다시금 다윗이 예루살렘에 돌아 와서 함께하지 못함을 물었을때 이일로 그는 자기를 내치지 않을까 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당신은 이런 분이 아닙니까? 하면서 남들 죽이듯이 자기도 얼마든지 죽이시는 사자와 같은 왕으로 더군다나 원수의 집안의 손자인 자신을 한순간 죽일수도 있는 자기 육신의 소리를 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어찌하여 네일을 말하느냐!!
이말은 나는 너를 네 아비 요나단과의 약속에 의해서 너를 평생 네아들로 여겨 왕자와 같이 생각하는데 너는 왜 계속 나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가지느냐 하는 섭섭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이상하다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무엇을 하더라도 섭섭하고 괘씸하고 자기뜻을 몰라주는 사람이 미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다 주었던 재산을(삼하9:9) 다윗은 시바에게 나눠주라고 하는 것이다.(삼하19:29)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죄사함받아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아직도 자기 사정과 형편에 매여있어 하나님의 마음을 흘려 받지 못하면 우리는 자기 부인이라는 과정을 이루지 못해 그 믿음이 거짓이 될 수 밖에 없는 불행을 겪게 된다.
네가 어찌하여 네 소리를 하는가?
믿음으로 사는 자는 자기 생각 자기 소리가 없다.
내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만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주안에서 이끌림을 받는 삶이다.
만약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자가 자기 생각 자기 소리를 낼때 그 믿음은 전부 가짜가 되는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이 자기마음 안에 들어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를 주는 사람의 마음과 같이 같은 마음이 안되면 주는사람의 마음과 받는 사람의 마음이 달라서 불편해 진다.
여러분 가족끼리 먹는 밥상에는 부담없이 밥알을 흘리고 시끄럽게 먹어도 아무 문제가 안된다.
모든 가족들이 같은 한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의 집에 더군다나 대통령앞에 식사 초대를 받아 음식을 먹을때는 쩝쩝거리는 소리도 제대로 낼 수 없다. 혹여나 몰상식한 사람으로 취급 받을까봐 그렇다. 먹어도 소화가 안된다.
차라리 집에서 찬물에 밥을말아 무우김치 한입 베어먹는게 맛있고 소화도 잘되지 그런곳에서는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봐도 본것같지 않다.
베푸는 사람의 마음과 하나가 안되면 항상 부담스럽고 어려운 마음만 드는 것이다.
므비보셋이 겉으로는 왕의 식사자리에 앉아 왕자중 하나처럼(삼하9:11) 밥을 먹고 있지만 그 마음이 편하겠는가?
아무리 다윗이 배려를 하고 부담없이 만들어 주어도 므비보셋의 마음에 아버지 요나단과의 맺은 언약이 자기 마음에 중심을 이루지 아니하면 그는 늘 왕의 원수인 사울의 손자요 왕이 싫어하는 절뚝발이 존재로 인식할까 되어져서 오히려 고통만 더 할 뿐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앞에 죄사함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내 마음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늘 언젠가는 내 죄를 가지고 하나님이 심판 하시겠지 내가 주님을 믿어도 또 죄를 범하고 사는데 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약속에 의한 믿음이 깨어져서 우리스스로 정죄하고 하나님을 떠나가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한다.
우리가 또다시 멸망에 빠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만에 하나 멸망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새언약의 약속을 마음에 두지못하고 스스로 정죄하는 이유인 것이다.(아멘)
므비보셋은 왕앞에 은혜를 입고 왕의 자리에 앉아 왕자처럼 대우받으면서 식사를 해도 그는 여전히 다윗이 싫어하는 절뚝발이이며 사울의 손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예수그리스도를 믿고나서 거듭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죄안짓는 천사처럼 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므비보셋처럼 연약한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놔두시고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가 되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바꾸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이끄심인 것이다.
삼하9:13을 보라 므비보셋의 마지막 모습은 언약에 의해서 왕자의 신분으로 살고 있지만 그 걸음은 여전히 절뚝거리며 걷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면서도 항상 넘어지고 상처받는다.
예수믿었다고 해서 금방 바울이나 엘리야처럼 능력의 사도같은 사람이 되어 환란핍박도 역경도 느끼지 못하는 그러한 행복에 겨워 사는 사람이 되는것도 아니다.
우리는 항상 므비보셋처럼 하나님앞에 불리움을 받을때 까지 비틀거리고 넘어질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새 언약의 약속만을 받아가지고 있자.
이 약속이 내 마음에 있는 그순간 우리는죽을 수밖에 없는 심판대의 저주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아주 영원히 하나님앞에 택한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떳떳히 하나님앞에 설 수 있게 된다.
이 므비보셋은 죄에 빠진 인간상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이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므비보셋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하나님의 그림자인 다윗을 통해 약속을 은혜로 응답받는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고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창세전부터 계획한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을 때 이 약속을 받아 가진다면 더 이상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앞에 나서기가 불안해 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서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느냐 가 아니라 나를 온전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받아가지고 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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