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날의 특징 (습1:7-13)
초점:죽는 날 (곧 사는 날)
요 약
여호와의 날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 날은 사는 날이 아니라 죽는 날이다. 그럼 무엇을 죽여야 하는가? 여기 죽일 대상에 대한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마음과 육체 자체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죽여야 할 것은 옛사람에 속한 잘못된 여러 성향들이다. 가령 하나님 뜻을 반하여 자행자지 하는 마음과 잘못된 양심과 잘못된 사상과 악의 생각들과 세상에 유혹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먼저 우리 마음에 역사하여 변화를 주시며, 나아가 신앙생활에 대 각성을 불러일으키신다.
(본 문)
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8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9 그 날에 문턱을 뛰어 넘어서 강포와 궤휼로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곡성이, 제 이 구역에서는 부르짖은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11 막데스 거민들아 너희는 애곡하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수운하는 자가 끊어졌음이니라 12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13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무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 거하지 못하며 포도원을 심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강 해)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 [여호와의 날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여호와의 날은 문자적으로는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날이지만, 본론적으로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성령 강림 그리고 재림을 가리키고, 현재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각인에게 성령의 임하심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회개하여 예수 믿고 구원받고 그리고 변화되는 이 사건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멸망에서 영생을 얻는 사건이니 보통 사건입니까? 이것은 성령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럼 여호와의 날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1. 사는 날이 아니라 죽는 날입니다.
7-8절에 여호와의 희생의 날이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실재로 바벨론이 침략했을 때 무수한 국민들이 죽고 포로로 잡혀가서 국토는 여우 집이 될 만큼 인적이 드문 곳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동안 선지자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외친 그대로였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날의 특징입니다. 사는 날이 아니라 죽는 날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맨 먼저 죽이는 은혜지 살리는 은혜가 아닙니다. 먼저는 죽입니다. 그러나 죽어야 사니까 결국은 사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은혜 받아서 죽을 생각을 해야 살지 내가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사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눅9:24 에 "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럼 무엇을 죽여야 합니까?
아무 것이나 죽이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7절을 보면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 했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고 죽는다는 것을 오해해서 불도 닦듯이 무념 무상 자신을 목석으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100% 악령이 침투합니다. 혹은 나는 하나님이 나를 움직이시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여 마음을 피동적으로 되게 해서도 안됩니다. 이 역시 큰 시험이 옵니다. 혹은 육신을 죽인다 하여 실재 육신을 죽이는 금욕주의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죽이려는 것은 육신적인 것이지 육신이 아닙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죽일 대상은 무엇입니까?
8-9절에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그 날에 문턱을 뛰어 넘어서 강포와 궤휼로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했습니다.
여기에 죽일 대상이 약 네 가지가 나옵니다. 그것은 방백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과 문턱을 넘어서 자기 주인에게 악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지도자들이나 상류급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상류급이 타락하면 모두 타락합니다.
그래서 구약 왕국시대는 멸망의 원인이 항상 왕과 지도자들의 타락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음 관리란 신앙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우리 마음 하나 타락하면 다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어리고 어리석어도 훌륭한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있을 때는 그 때만은 바로 행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늘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한다면 바로 살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그럼 은혜의 날에 죽을 대상은 무엇일까요? 먼저 죽을 자는 방백인데 그들은 유다 왕국의 관리들입니다. 그리고 왕자나 왕가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방 민족의 풍습에 물든 상류 계급인 이방 의복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불의 한 상전의 탐욕을 위해서 서민을 수탈하는 권력의 앞잡이들인 문턱을 넘어서 자기 주인에게 악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한 마디로 마음의 잘못된 여러 성향을 상징합니다.
먼저 방백은 왕 되신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행자지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 가지면 하나님의 뜻이 나라 끝까지 전달되지 않습니다. 즉 말씀을 듣지 않고 들어도 귀로만 듣고 행동까지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내 뜻대로 자행자지합니다. 여호와의 날에 이 자행자지가 죽게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삽니다.
그리고 왕자와 왕가는 왕의 충성된 고문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자기 왕자들로 왕의 벗과 고문으로 삼아 백성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충성된 직고자가 되게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그 일을 하지 않아서 왕을 타락케 만들었습니다. 우리 심령 속에 이 직고하는 기능이 무엇입니까? 양심입니다. 이처럼 양심이 잘못되면 하나님 앞에서 바로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하면 이 양심이 바로 됩니다.
그리고 이방 의복을 입은 자란 이방의 풍습에 물든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방 나라의 여러 풍습을 걸치고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여기 옷은 행실로서 이방의 의복은 죄악된 행실입니다. 이 죄악된 행실은 잘못된 가치관과 죄관에서 비롯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합리화를 꾀하거나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그럼 문턱을 넘어서 자기 주인의 탐욕을 채워 주기 위해서 서민들에게 수탈을 일삼는 앞잡이들이란 우리에게 적용하면 생각입니다. 이 생각은 문턱을 넘듯 국경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잘못되면 자나깨나 욕망의 앞잡이 노릇을 합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지 않고 자기 욕망을 위해서 일합니다.
이상의 네 가지를 들었는데 이 중 하나라도 잘못되면 그 인격은 곁길로 나가고 맙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날에 이 네 가지를 하나님께서 죽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은혜 받으면 심령 전체가 바꾸어진다니 얼마나 귀합니까?
그 날에는 죄악이 패망하는 회개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곡성이, 제 이 구역에서는 부르짖은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했습니다.
여기 어문, 제 이 구역, 작은 산들이 나오는데 어문은 예루살렘 성 북쪽의 문으로 고기를 잡아 들어오는 곳이요, 제 이 구역은 북쪽 변두리의 신시가지요, 작은 산은 성전과 왕궁이 건설되어 있던 모리아산의 북쪽 언덕입니다. 그러니까 여기가 무너져서는 안될 곳입니다. 역사를 보면 이 예언은 그대로 응하여 바벨론 군대들이 먼저 북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
여기 북쪽 지역이 공략 당함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루살렘은 동서남 3면은 낭떠러지의 천혜의 요새지만 북쪽은 산맥과 연결되어 가장 취약지구입니다. 이처럼 사단이 우리를 시험할 때도 영은 직접 공격하지 못합니다. 몸은 될 것 같지만 몸도 직접 공격이 안됩니다. 그럼 어디가 공격이 가능한가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먼저 지배한 후 범죄케 하여 심령도 상하게 하고 몸도 병들게 합니다.
이 원리는 은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으로 복음의 말씀을 수납할 때 우리 영혼이 살게 됩니다. 그래서 계3:20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할 때도 맨 먼저 중부 가나안의 여리고부터 정복한 것도 여리고가 마음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의미 심장한 사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먼저 마음의 변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통곡하듯 가슴 치며 애통하고 바로 사는 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작은 산이 무너지듯 불순종의 자아가 꺾고 믿음과 순종으로 바뀝니다.
그 날에는 죄악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11절에 "막데스 거민들아 너희는 애곡하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수운하는 자가 끊어졌음이니라" 했습니다.
이것이 막데스의 거민들이 애곡한다는 의미입니다. 막데스의 거민들은 예루살렘 성내 상업지구의 상인들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상인들과 거래해왔는데 가나안이 망하니까 이들도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막데스의 거민들은 사고 파는 속성으로서 유혹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7족으로서 7은 완전수로서 인간의 전적 부패한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막데스의 거민들이 애곡한다란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시니까 마음속의 부패한 속성들이 처리되어 이제는 더 이상 탐욕을 추구하지 않게 됨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은혜를 받으면 더 이상 죄악을 사려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에도 바벨론의 상인들이 더 이상 물건을 사는 자가 없어 애통했습니다. 사는 자가 없다는 것은 바벨론 상인들에게는 비극이지만 성도들 편에서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은혜는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 없는 은혜라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은혜가 임하면 신앙생활에 대 각성이 일어납니다.
12-13절에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그들의 재물이 노략되며 그들의 집이 황무할 것이라 그들이 집을 건축하나 거기 거하지 못하며 포도원을 심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여기 나타나듯이 그들은 재물도 많고 집도 새 집에 포도원도 있는 잘사는 중산층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안정적인 환경에 안주하여 하나님의 복도 필요한 줄 몰랐고 화도 자기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앞날을 다 대비해 놓았기에 예루살렘 멸망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기 말씀대로 포도주의 가라앉은 굳은 찌끼처럼 위에서는 부어 쏟든 젖든 퍼가든 아무 상관없이 최고의 안정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을 샅샅이 뒤져서 그들을 찾아내어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은혜가 임하면 신앙의 대 각성의 역사가 있다는 교훈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영적인 문제 투성이었지만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했지만 은혜를 받고 깨달음이 있어 신앙생활의 대 각성이 생겨나 열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진정으로 은혜 받은 심령은 의에 주리고 목마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주임을 목말라 사모합니다. 은혜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 심정이 바로 은혜 받은 심령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자나깨나 은혜는 받고 봐야 합니다. 우리에게 여호와의 날은 은혜 받는 날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날을 강조하며 은혜 받기를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이 은혜가 아니고는 참된 영적 생활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의 날은 사는 날이 아니라 죽는 날입니다. 죽어야 할 것은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안일무사한 태도도 처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놀라운 은혜의 여호와의 날이 오도록 항상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스바냐 1장에서 본 여호와의 날
주제 - 여호와의 날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다.
이 심판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성령 강림 그리고 재림이다.
이 심판은 현재적으로는 죄인을 구원하시며 성도의 죄를 척결하시는 은혜의 날이요,
궁극적으로는 세상 끝 날에 악인을 벌하시는 심판의 날이다.
이 날의 큰 특징은 먼저 성도의 옛 사람에 속한 것을 철저히 멸하심이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입혀주시는 날이다.
여호와의 날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 날은 사는 날이 아니라 죽는 날이다.
그럼 무엇이 죽는 날인가?
죽일 대상이 있으니 그것은 마음과 육체 자체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죽이는 것은 옛사람에 속한 잘못된 죄의 성향들이다.
즉 하나님 뜻을 반하여 자행자지 하는 마음과 잘못된 양심과 잘못된 사상과 악의 생각들과 세상에 유혹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음에 역사하여 변화를 주시며 신앙생활에 대 각성을 불러일으키신다.
이 날은 구원 역사가 임하는 은혜의 큰 날이다.
이 은혜는 이미 곁에 도착해 있어 심히 가까우며, 의식할 수 없을 만큼 믿는 자에게 신속히 임하고,
그러나 반드시 복음 진리와 함께 임하며, 완악한 심령도 회개의 영으로 부드러워지고,
그 속에서 살았던 지난날의 불신과 죄악의 삶을 분노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이 얼마나 환난이요 고통이며 황무함과 패괴함인지 깨달으며,
세속에 대한 애착이 사라지고 이별함과, 하나님 두려운 줄 아는 경건함이 심령에 깃들게 된다.
이 날은 성령의 지배가 나타나는 강력한 은혜의 날이다.
이 날은 견고한 성읍처럼 완고한 마음도 무너지는 날이다.
이 날은 높은 망대를 치듯이 교만까지도 깨어지는 날이다.
이 날은 더 이상 죄악을 추구하지 않고 도리어 죄악을 저주하며 수치로 아는 날이다.
이 날은 인간의 방법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방법이 나타나는 날이다.
이 날은 심령에 불을 받아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날이다.
(결론) 선지자들이 외친 극렬한 풀무불 같은 여호와의 날은 예수님의 초림을 통하여 임했고
성령으로 임하고 있으며 재림으로 온전히 임할 것이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온전케 하시는 날이지만 죄와 악은 심판하여 처리하는 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은혜로 예수 믿고 성령 충만 받게 됨 자체가 귀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