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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로부터 깊은 산속에서 한 달을 살아보자는 제안이 왔다. 처음에는 산속에서 한 달이나 살다니 뭐 하고 살아야하나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병을 고치는 신기한 샘물이 울진에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여 속는 셈치고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늘 시간에 쫓기던 모든 일정을 내려놓고 집을 떠나려는 결심을 하니 준비가 의외로 쉬웠다. 몇 권의 책과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무조건 집을 나섰다. 모든 것을 잠시 멈추고 오롯이 폐암 2기인 언니와 자유로운 방랑자를 위한 시간을 가져보자는 심산이었다.
사실 이번 산골살기를 결심한 데는 지인의 글이 한 몫 했다. 위암 수술 후 회복하자마자 해파랑길 50구간 770km를 완주하겠다는 도전장을 던진 그의 이야기를 듣고, 미루기만 했던 산골살기에 용기를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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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9일, 남편과 함께 포항으로 출발했다. 형부의 첫 제사에 참석하고, 다음 날 잠시 경주에 들렀다. 마침 벚꽃이 만개해 보문호수를 한 바퀴 돌며 봄의 정취를 만끽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의 워밍업을 마친 후, 4월 1일 울진 산골마을로 들어갔다. 심플하지만 충만한 한 달 살기가 시작되었다.
여기는 북면 주인2리라는 첩첩산중이다. 앞도 산, 뒤도 산, 옆에도 산이다. 그렇다고 자연인처럼 나물과 약초를 캐며 살아가는 건 아니다. 마을에서 지은지 얼마 안되는 현대식 펜션에서 머물고 있으니 불편함은 없다. 이 마을은 몇 세대 살지 않아 사람 보기 드물다. 대신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넘친다. 가까이엔 응봉산이 있고, 국내 유일의 자연 용천수로 유명한 덕구온천도 있다. 구수곡 계곡의 물은 어찌나 맑고 부드러운지, 이틀 간격으로 덕구온천에서 보양을 하며 몸의 가벼움을 실감했다.
산골 생활은 단순하다. 해가 뜰무렵 일어나 언니와 노래를 부르거나 강연들 들으며 시골길을 산책한다. 언니가 싱싱한 재료로 차려준 정성 밥을 먹은 뒤엔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는다. 때로는 바닷가나 계곡을 찾아 조금 더 먼 곳까지 산책을 다녀온다. 단조로워 보이는 일상이지만 심심하지 않다.
얼마 전엔 청정 계곡에 다슬기가 어찌나 많던지 그것들을 주워왔다. 집주인이 먹어도 된다는 밭에서 뽑아온 싱싱한 파로 된장국을 끓였다. 담백하고 구수한 국물에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더니 힘이 나는듯 했다.
주일이 되면 바닷가 북면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작고 아름다운 바닷가 성당의 회색 벽에 담쟁이가 타고 올라간 모습은 마치 유럽을 연상하게 하는 한 폭의 그림 같다. 원통형 종탑에 올라가 바라본 바다 풍경은 잊지 못할 장관이다. 이곳을 지나는 이들에게 아름다운 북면성당에 가보기를 꼭 추천하고 싶다.
매달 1일과 6일에는 부구터미널 근처에서 오일장이 선다. 규모는 작지만 산나물, 과일, 생선 등 다양하고 신선한 물건들이 있다. 시장에서 갓 구운 국화빵을 사 가지고 와서 주인집 할머니께 드렸다. 하루 종일 말없이 부지런히 움직이시는 그분의 모습에서 인간 본연의 정이 느껴진다.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단순하지만, 매 순간이 소중하다. 몸과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다. 산과 계곡, 그리고 사람의 따스함이 내게 속삭인다.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다고.
이 곳에서의 한 달 살기는 단순히 몸을 쉬게 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놓치고 있던 소소한 일상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평화를 느끼게 했다. 산과 계곡, 그리고 온천이 선물하는 자연의 온기는 지친 나를 위로했고, 사람들의 소박한 정은 잊고 있던 인간다움을 일깨워 주었다.
삶은 늘 바쁘게 흘러가지만, 가끔은 멈추고 자연 속에서 나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곳에서의 시간들이 가르쳐준 가장 큰 선물은, 결국 삶의 행복이란 복잡한 도시나 화려한 환경에 있지 않고, 단순함 속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도시로 돌아가겠지만, 이 곳에서 얻은 느림의 미학과 소박한 행복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려 한다. 울진 산골에서 보낸 이 한 달은 내 삶에 오래도록 따스한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프롤로그
한 달 지낸 펜션은 주인2리 마을에서 지은 현대식 건물이나, 너무 오지라 그런지 손님은 우리 밖에 없었다.
펜션 앞마당에서 햇살을 등지고
가끔 물감을 펼쳐들었지만
봄인데도 산속이라서 추웠다
주인리라는 동네
난 주인2리에 지내고
가끔 주인1리나 3리로 산책을 간다
주인3리도 몇 가구 없다
주인1리에 가면 폐교에서 창작촌을 만들어
그림 그리는 유명한 화가 홍경표 작가의
작업실도 있다
다슬기
응봉산 가는 길에 만난 맑은 계곡
북면성당
작고 예쁜 성당은 매번 천상의 파티장이다
언니가 차려준 건강 밥상
매일 신선한 즉석 반찬을 해 준
고마운 언니
바닷가 산책
어쩌다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바닷가로 나갔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알고보니 해파랑길이었다.
한 달 동안의 산골살이
내게는 또다른 추억이다
모든 것이 그립다
첫댓글 고즈넉한 산골 마을에 고요와 평화가 가득 머물고 있네요 자연과 하나된 같은 후정샘 모습이 참 보기 좋아묘
여길 다녀온지도 벌써
몇 년 되었네요
놀라운 사실은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산불 났을 때
할머니가 궁금해서 전화 드렸더니
펜션이 홀라당 타버렸다네요
그래도 할머니집 본채는 무사하다니 다행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