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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신들과의 교신을 위하여(동아시아 이미지의 계보학, 문학동네)』에서 신화학자 정재서는 “우리의 상상력은 과연 자유로운가?”라고 질문합니다. 상상력은 무한이고, 당연히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지. 무슨 엉뚱한 질문이냐고 반박하고 싶으신가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상상력의 근원이 신화이고, 현행 신화학이 그리스로마신화를 표준으로 하고 있어 상상력의 세계도 평등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인어를 생각할 때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미지가 혹시 아가씨인가요? 아니면 중년의 아저씨인가요? 인어를 생각하면 예쁜 인어 아가씨 이미지가 떠오르는 건 안데르센 동화를 통해 인어는 예쁜 아가씨라고 교육받아온 탓입니다.
중국신화에서 인어는 평범한 아저씨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크레타 섬의 미노타우로스가 사람의 몸에 소머리를 한 식인괴물인 것도 인간중심사고가 강한 그리스에서 반인반수 형태를 폄하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세상에는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존재하는데, 우리는 서양의 신화만 편식하고 있다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갔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나 안데르센 동화 및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 등 서양의 신화와 마법담은 수많은 이야기들 중의 하나일 뿐 전부가 아닌데, 어느새 우리가 알고, 알아야 할 이야기의 전부가 된 것은 아닐까요? 이제 동양의 신화, 동아시아 신화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고 우리의 뿌리인 동아시아신화에 빠져보시면 어떨까요?
※ 2024 고양시립행신도서관의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 <알아두면 쓸모 있는 신화 속 동아시아> 강좌에 참여하며, 연세대학교 중국연구원 김선자 신화연구소장을 인터뷰했습니다. 인터뷰는 지난 9월 10일 연세대학교 백양누리 지하1층 <더 라운지> 안의 교직원과 교직원 동행인만 이용 가능한 공간에서 3시간가량 진행했습니다.
질문: 고양시에서 강의하거나 고양시민들을 만나볼 기회가 있으셨나요?
김선자소장(이하 김선자): 아, 처음입니다.
질문: 신화강연을 들을 기회가 별로 없는데, 연세대학교 중국연구원 신화연구소의 연구원과 소장님의 강의를 체계적으로 들을 수 있어 정말 기쁩니다. 행신도서관을 통해 고양시민들과는 첫 만남입니다. 고양시민들께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김선자: 제가 좋아하는 신화로 고양시민들과 이야기할 수 있어 정말 반갑고 즐겁습니다. 강의 첫날,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분이 오셔서 눈을 반짝이며 집중해서 들어주셔서 강의하면서 신이 났어요. 고양시와 ‘신화’를 통해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되어 기쁘고 감사합니다. 앞으로 고양시와 더 자주 인연을 맺으면 좋겠습니다.
질문: 저도 동감합니다. 김선자 선생님을 여기서 뵙게 되다니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몇 년 전에 해녀 관련 책을 찾다가 『제주신화, 신화의 섬을 넘어서다』 를 읽고 동아시아신화와 제주신화의 연관성을 알고 감탄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런데 행신도서관과 연세대학교 중국연구원 신화연구소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나요?
김선자: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제가 연세대학교에서 <동아시아신화기행>이라는 교양 수업을 오랫동안 진행해왔는데, 학생들이 꽤 흥미를 갖고 들어주었어요. 우리 연구소의 이석구 선생님이 이 강좌를 외부에서도 해보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셔서 시도해본 것인데, 마침 고양행신도서관에서 환영해주셨어요.
질문: 고양시에도 연세대학교 중국연구원 신화연구소와 연결된 것은 굉장한 행운입니다. 신화 강의를 통해 고양시민들이나 강좌를 듣는 시민들께 기대하는 부분도 궁금합니다.
김선자: 네, 감사한 일입니다. 고양행신도서관과 잘 연결되어 우리 연구소 선생님들도 즐겁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원래 학교 강의는 신화와 역사의 관계에 관한 내용부터 시작합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신화’라는 단어가 원래부터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즉, 국가나 민족의 위대함을 말하기 위해 신화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좀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00여 년 전, 근대 시기 동아시아 3국의 세계사적 위치와 지금의 위치는 많이 달라져 있기 때문이지요. 신화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야 할 것 같습니다. 자민족의 위대함이나 오래된 문명을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아득한 옛날에 사람들이 신화 이야기를 시작할 때 어떤 마음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아이들에게 전해줬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환경문제, 경제적 불평등이나 혐오문제 등을 단번에 풀 수 있는 명쾌한 해답은 아닐지라도 동아시아 신화 속의 지혜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 신화학이 그동안 역사나 이데올로기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었다면 이제는 좀 다른 방향으로, 즉 신화가 원래 갖고 있던 가치를 되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가장 오래된 지혜가 담겨있는 신화가 현대 인류가 맞닥뜨린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동아시아 여러 민족이 전하는 신화들은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이야기라는 생각도 드실 거예요. 그리스로마신화는 많이 알고 들어보셨지만, 만주나 윈난(雲南) 신화는 처음 들으실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들으시다 보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데?”라는 생각도 하실 거예요. 신화가 단순히 상상력의 산물이 아닌, 실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주는 이야기라는 것을, 동아시아신화 강의를 통해 함께 느끼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질문: 서울신문이나 경향신문에 기고하신 선생님 칼럼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고양시민들께도 동아시아신화를 통해 삶의 실제적인 지혜를 소개하고 싶으셨군요.
김선자: 네, 맞습니다. 신화가 여러분의 삶에서 지혜의 등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신화는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또한 많은 지혜를 담고 있기도 해요. 우리가 힘겨울 때 이야기 속에서 위로와 힘을 얻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신화가 ‘지혜의 등불’이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인생길을 걸을 때 신화 속의 지혜가 여러분의 길을 비추는 작은 등불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질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화학자이자 동아시아 신화전문가로서 이야기의 힘, 신화의 힘을 믿게 된 계기나 과정이 궁금합니다.
김선자: 처음에 공부한 것은 문헌신화였어요. 동아시아에서 신화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게 근대, 20세기 초반입니다. 동아시아 근대 시기에 동아시아 3국이 처했던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신화가 특히 민족의 시조를 많이 소환했죠. 일본의 아마테라스, 중국의 황제(黃帝), 우리나라의 단군 등을 불러내면서 민족을 통합하고 민족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초기 신화학의 목표였어요. 그 이후 신화 연구는 대부분 문헌신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요.
그런데 중국답사를 시작하면서 소수민족 지역을 다니다 보니까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분량의 신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중국의 소수민족 지역은 동아시아를 2천 년 동안 지배한 유가 사상이나 유교 이데올로기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곳이에요. 기존의 문헌신화가 건국 시조를 중심으로 자국 문명의 위대함과 오래된 역사를 부각했다면, 소수민족 신화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어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확장하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존에 관한 이야기가 되죠.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곳은 산악지대나 초원, 사막, 고원 아니면 아열대 등 살기가 정말 열악한 곳인데, 그런 곳에서 살아가는 분들의 표정이 정말 밝고 환했어요. 그분들의 소박한 삶의 자세와 환한 웃음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소수민족 신화를 공부해보니 알 수 있었어요.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공존’이었죠.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잘 사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분들은 중요하게 여기고 계셨죠. 소수민족 신화에는 그들의 환경에서 나온 공존의 지혜가 들어있어요. 실제 그들의 삶을 보며 느낀 것과 텍스트로 읽은 것이 맞아떨어진 거죠. 그때부터 소수민족 신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신화의 진정한 힘이 중국 소수민족 신화에 있다고 느꼈어요.
질문: 신화의 힘을 믿게 된 계기가 중국의 소수민족 마을을 답사하면서 그들 속에 열악한 환경을 넘어서는 웃음과 최소한으로 소비하는 소박한 삶에서 공존의 지혜를 경험하신 거네요.
김선자: 네. 제가 읽어 온 소수민족 신화 텍스트와 삶이 일치하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어요.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승해온 창세신화 등 신화 서사들을 텍스트로 채록한 것을 읽으면서 그들의 삶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 바로 텍스트란 사실을 알게 되었죠.
질문: 일상의 삶과 이야기가 일치하는 지점을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김선자: 구이저우(貴州)성 먀오족 마을에 갔을 때인 것 같아요. 아침에 사람들이 물 긷는 샘이 있어요. 그 샘물에 뚜껑도 있고요. 그 물을 긷기 위해 아침에 가장 먼저 샘에 가신 분은 물통을 샘물에 첨벙 바로 던져 넣지 않아요. 풀로 된 매듭을 먼저 샘물에 던져 띄우는데, 물의 신을 깨우기 위해서죠. “제가 물을 좀 길어 올릴게요.” 물의 신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긷는 거죠. 해발고도 2천 미터가 넘는 곳에 자리한 소수민족의 마을에서 물은 그들 모두를 살게 하는, 굉장히 소중한 존재죠. 물이 그들을 먹여 살리는 아주 소중한 신이라는 의식, 물에게도 예의를 표하는 삶의 방식이 신화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어요.
질문: 그러면 이제 제주신화로 이야기를 옮겨 볼까요? 제주신화 책을 쓰신 많은 학자가 있지만, 제주신화와 동아시아 신화와의 관련성을 면밀하게 짚은 선생님의 책, 『제주신화, 그 섬을 넘어서다』는 제게 굉장히 신선하고 깊은 통찰을 줬어요. 사실 이미지, 즉 형상은 신화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것이잖아요? 사람들의 무의식에까지 깊이 각인되니까요. 창세여신인 설문대할망을 쪽진 할머니로 이미지화하니까 젊은 여성이나 다른 형상으로 생각할 여지가 처음부터 차단된다는 느낌이 들었는데요.
김선자: 현용준 선생님이 쓰신 『제주신화의 수수께끼』를 읽으면서 제가 그동안 공부해온 동아시아 신화와 제주신화를 연결해봤어요. 현용준선생님이 제기하신 의문들에 대해 저 나름의 답을 해본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국내 연구자들이 더 많은 연구를 해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주신화는 고립적으로 전승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이 오고 가며 이야기도 오가는 것이라서 유라시아대륙의 모든 신화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제주신화도 마찬가지예요. 제주가 가진 문화적 색깔 자체가 다양하잖아요? 특히 남, 북쪽의 신화적 요소들이 섞여 있고, 맥락이 복합적이라 제주가 중요한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창작자로서 설문대할망을 만나러 제주 돌문화공원에 갔을 때 창세여신의 강렬하고 진취적인 에너지를 느끼고 싶었어요. 그런데 오백장군 형상이 중심이고, 설문대할망이 빠져 죽었다는 물장오리 조형물을 크게 만든 것에 실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김선자: 좀 안타깝죠. 오백장군 전설은 설문대할망 이야기의 원형이 아니라 후대의 변형이라고 생각해요. 「중국 소수민족 창세여신과 설문대할망의 원형-설문대할망의 호칭과 ‘할머니’ 형상, 창세여신과 비극성에 관한 문제」이라는 제 논문의 말미에도 썼지만, 동아시아의 창세여신은 비극적인 신격을 갖고 있지 않아요. 대부분의 창세여신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낙천적이에요. 중국의 소수민족 중 야오족(瑤族)의 창세여신이 있어요.
신이 인간을 빚을 때 보통 흙으로 빚잖아요. 이 여신도 흙으로 빚어봤는데, 인간이 안 되고 항아리가 돼버려요. “재료가 잘못 됐나?”하고 풀로 만들었더니 메뚜기가 되고, 밥풀로 빚었더니 술이 되었대요. 여러 번 실패를 거듭했지만, 결국은 밀랍으로 인간을 만들어내요. 즉 창세여신도 실패를 거듭한 후에 마침내 인간을 만드는 거지요. 여신은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계속 도전해요. 굉장히 낙천적이고, 과정도 비극적이지 않아요. 실패하더라도 그 과정에 비극적인 정서가 전혀 드러나지 않지요. 그러니까 동아시아 신화의 맥락에서 볼 때, 창세여신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낙천적이라 할 수 있죠. 제주도 창세여신이라고 하는 설문대할망의 비극적인 결말에 대해 당연히 아쉬움이 있어 논문을 썼죠.
질문: 지금 우리가 중국의 소수민족 신화와 동아시아 신화를 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김선자: 저는 신화의 힘을 ‘지혜’에서 찾습니다. 『오래된 지혜』라는 책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했어요.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제도적 문제가 심화되고, 기후와 환경문제 역시 우리가 직접 몸으로 느끼고 있어요. 『오래된 지혜』를 쓴 것이 10년이 넘었는데, ‘오래된’이라는 단어에 신화를 공부하면서 추구하는 것이 담겼어요.
지혜 담론은 사실 굉장히 오래된 담론이에요. 저는 신화를 지혜 담론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봤고, 서구의 지혜 담론이 담을 수 없는 동아시아의 지혜 담론을 만들 수 있다는 맥락에서 『오래된 지혜』를 집필했어요. 그 작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지요. 신화 속에 들어있는 동아시아의 지혜를 통해 삶의 어려운 순간에 위로와 힘, 도전정신을 배울 수 있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질문: 그러면 이제 신화와 역사의 관련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김영수 선생님의 중국 역사서 『사기』 강의도 듣고, 또 다른 분의 『사기』 강의를 들으면서 한동안 『사기』에 푹 빠져있던 때가 있어요. 그런데 선생님의 책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신화』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았어요. 사마천의 『사기』에 묘사된 황제가 이미 ‘역사화’된 것이라는 내용이 그것이었지요.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신화』 출간연도가 2007년인데, 2024년 현재 진행되는 중국의 역사고고프로젝트와 관련한 역사왜곡과 동북공정이 궁금합니다.
김선자: 오래전 『이야기 중국신화』 개정판을 내면서 중국에서 진행 중인 <중화문명탐원(기원을 탐색)공정(프로젝트)>을 소개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중화문명탐원공정>이라는 역사고고프로젝트를 우리나라 학계에서 많이 연구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우리 학계에서는 그 프로젝트가 전혀 소개되어 있지 않았어요. 10년 넘게 중국에서 진행하는 역사공정을 파헤치는 연구논문이나 서적이 한국에 거의 없다는 사실이 이상했어요.
중국에서 <중화문명탐원공정>에 앞서 역사연대를 정리하는 프로젝트인 <하상주 단대공정>(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역사연대를 올리는 프로젝트)을 먼저 했거든요. 1996년부터 2000년까지 5년 프로젝트를 끝내고, 2001년부터 이어진 게 <중화문명탐원공정>이예요. <하상주단대공정>이 끝났을 때, 서구학계와 중국학계가 엄청난 논쟁을 했어요. 서구학계는 “연구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하고, 중국학계는 “우리는 중국식 고고학을 한다”며 치열한 논쟁이 붙었는데, 우리 학계는 조용했어요.
질문: 중국에 대한 관심의 부족일까요? 아니면 중국에 대한 접근 자체가 어려워서였을까요?
김선자: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앞에서도 말씀드렸듯 동아시아에서는 신화와 역사가 워낙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었기에 ‘신화의 역사화’ 문제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공부를 해왔지요. 그런데 중국의 역사공정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 성과가 우리나라에 너무 적은 것을 보고, 실태를 알리겠다고 2년간 열심히 자료 수집을 했어요. 모든 자료와 결과물을 최대한 찾고, 관련 지역 답사를 다니면서 공부했어요.
질문: 중국 자료나 결과물에 접근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어떠셨어요?
김선자: 네, 쉽지는 않았지요.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자료를 찾았고, 중화민족의 시조라고 하는 황제와 염제(炎帝)를 중심으로 구축한 기념비적 건축물들도 찾아다녔어요.지금 중국 어디서나 “중화문명 오천 년”이란 문구를 볼 수 있어요. 이전에 “중화문명 오천 년”이란 단어는 없었어요. 근대에 들어와 생긴 거죠. 1990년대 들어와 <중화문명탐원공정>을 시작한 궁극적 목적도 결국 오천 년 전에 황제라는 제왕이 있었고, 그 시대에 이미 중국은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끊어진 적이 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 것들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어 쓴 책이 바로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신화』입니다.
질문: 굉장히 두꺼운 책이었어요. 워낙 방대한 분량에 지금껏 듣지 못한 이야기를 풀어낸 저작이라 몇 십 년 공들인 저작일 거라 생각했는데, 홀로 2년간 집중해서 답사하고 공부하셨다고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어요. 그동안 신화학자로서 김선자 선생님 나름대로 역사를 치열하게 연구한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대중교양서로 쓰신 덕분인지 중국사를 모르는 제게도 술술 읽히면서도 중국역사공정의 과정을 깊이 들여다본 신기한 책이었어요. 분량이 많아 전체를 읽지는 못하고 발췌독을 했지만, 중국사의 면면을 분석한 혜안에 감탄했어요. 동북공정은 들어봤지만 역사공정은 생소했거든요.
김선자: 많은 분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대중교양서를 표방해 좀 쉬운 단어들을 사용해서 썼지만, 사실은 학술서적이죠.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서적으로 선정되었으니까요. 동북공정과 역사공정은 따로 떼어서 말할 수 없어요. 그들은 과거 중국 땅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역사를 모두 중국 내부의 사건이라 보고 있죠. 중국은 고구려도 별개의 왕조가 아닌, 중원 땅에 당 왕조가 있을 때 “중국 동북지방에 존재했던 소수민족정권”이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어요. 1990년대에는 소위 다민족일체론에 근거해서 중화민족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요.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이 사는데, 그것을 한족과 하나로 묶어 중화민족이라고 보는 거죠.
질문: 그러니까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고구려를 중국의 동북지방에 존재했던 소수민족왕조로 편입시킨 중국의 관점, 즉 동북공정을 비판하는 거네요. 김영수 선생님의 『사기』 강의에서 동북공정을 중요하게 다루셔서 관심이 갔어요.
김선자: 사실 동북공정은 중국의 역사고고프로젝트의 한 부분으로 역사공정 속에 있어요. 중국의 역사 왜곡에 관심 있는 시민들도 ‘동북공정’은 알지만 ‘역사공정’이란 말은 처음 듣는다는 분이 의외로 많습니다. 중국의 역사고고프로젝트를 전반적으로 봐야 동북공정도 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어요.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신화』를 2007년에 내고, 2017년에 『절반의 중국사』를 번역한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절반의 중국사』는 산둥성의 작가 가오훙레이가 썼어요. 고전문학에 대한 소양이 굉장히 뛰어난 분이라 책은 아주 잘 읽힙니다. 작가는 서쪽의 탕구트족, 남쪽의 여러 민족들, 북방의 흉노, 거란, 말갈 등 과거에 한족과 얽힌 거의 모든 민족의 역사를 썼어요. 그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면서 재미도 있어요. 어떤 분은 무협지 읽는 것처럼 흥미로웠다고 말씀하셨어요.
질문: 『절반의 중국사』는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신화』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천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더군요. 인터뷰를 위해 선생님이 번역하신 『절반의 중국사』도 맛보기로 읽었는데, 정말 빨려 들어가더라고요. 특히 흉노와 돌궐 이야기가 흥미로웠어요.
김선자: 『절반의 중국사』를 번역할 때 갈등을 좀 했어요. 저자가 굉장히 해박하고, 글도 무척 재미있게 썼는데, 시각이 문제였어요. 중국 관방(官方)의 시각을 확실히 대변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번역을 결심한 이유는 중국 관방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책이라서였어요.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분들만큼은 중국 관방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실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중국 안에 존재했던 과거 모든 민족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고 흥미롭게 기술한 책이라는 점은 이 책의 미덕이에요. 재미도 있지요. 그래서 번역을 시작할 때는 충실한 번역자 역할만 하려고 했는데,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에 대해서는 개입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역주를 달다 보니 거의 170쪽이 되었어요. 문제 되는 시각마다 역주를 달았고, 상세한 부분에서는 한국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도 많이 소개했어요.
질문: 정말 어마어마한 각주더군요. ‘제2의 창작’이라고까지 불리는 번역가로서의 고충이 짐작이 안 됩니다. 천 페이지나 되는 중국 책 번역도 만만치 않을 텐데, 번역한 책을 반박하는 각주가 170쪽이라니요.
김선자: 분량도 엄청나게 많은데, 번역자에 비판자 역할까지 하려니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하지만 역사 이야기 속의 인물들에 빠져 아주 재미있게 읽으며 번역했습니다.
질문: 170쪽의 각주를 단 것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연구자들 논문을 소개하셨잖아요. 연구자들 논문을 소개하려면 또 읽어야 하잖아요. 이 놀라운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김선자: 호기심과 재미예요. 신화도 궁금하고 재미있으니까 했어요. 신화공부가 재미없었다면 지금까지 오기 힘들었을 거예요. 신화라는 학문이 다른 인접 학문과 다 연결되어 있어 더 좋았어요. 좋아하는 역사, 심리학, 인류학, 민속학 등 신화는 거의 모든 학문과 연결되어 있지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공부라 호기심을 자극하니까 더 좋았어요.
질문: 선생님 말씀을 듣다보니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선생님께 ‘재미’란 어떤 의미일까요? 사람들은 해도 해도 끝이 없어서 재미없다고 하는데, 선생님은 해도 해도 끝이 없어서 재미있다고 하셨어요. 선생님이 쓰신 책은 정말 방대한 분량인데요.
김선자: 제가 궁금한 게 많은 거 같아요. 저건 왜 저렇지? 이건 뭘까? 새로운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 자료를 찾고 읽고 나름의 의미 있는 답을 얻을 때 즐겁지요. 파고들고 몰입하는 성향이 두꺼운 책들을 쓰고 번역하는 동력이 되었어요. 궁금한 하나의 주제에 대해 열심히 찾아보고 생각하고 공부하면서 한 단계 마무리하면 책 한 권이 나오는 것 같아요. 지금도 관심을 갖고 자료들을 모으고 있는 분야가 있어요. 책으로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죠.
질문: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까 책이라는 물성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한 신화학자가 수년간 고민하고 연구하며 써낸 힘든 과정의 결과물을 독자의 한 사람으로 혜택을 누린다고 생각하니 새삼 감격스럽습니다.
김선자: 제 책을 읽어주시는 독자님들이 제게는 더 소중하고 감사해요.
질문: 지금도 중국의 역사고고프로젝트가 진행 중이겠죠? 선생님이 책 출간하신지 꽤 오래되었잖아요. 당시와 지금이 비슷한가요? 아니면 더 확대되었나요?
김선자: 더 확대됐죠. 황제(黃帝)의 예만 들어보더라도, 산시(陝西)성에 황제의 무덤이 있는데, 황제의 무덤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이 처음보다 점점 확장되고 있고, 그 앞에서 하는 의례의 규모도 커지고 있어요. 이제는 매체의 시대잖아요. 중국 내에 살고 있는 중국인 외에 전 세계에 퍼져있는 화인(華人)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구심점으로 지금도 황제의례가 작동하고 있어요.
황제를 중심에 두고 특히 중국의 내몽골지역에 적봉(赤峰)이라는 곳이 있고, 여기에 홍산(紅山)문화유적지가 있어요. 홍산문화유적지는 황하문명의 중심지인 중원지역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요. 랴오둥(요동)반도 위쪽에 있지요. 오랫동안 ‘오랑캐의 땅’이라 여겼던 지역에서 중국의 제일 오래된 신석기시대 유적지가 발굴된 거예요. 1980년대쯤부터 발굴되기 시작했는데, 중국의 대표적인 신화학자가 홍산문화유적지가 황제족의 땅이고 그 황제족이 곰 토템을 갖고 있었다고 얘기해요.
우리 단군신화에도 웅녀, 곰이 나오는데 중국의 대표적 신화학자가 중국이 곰 토템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한 거죠. 황제족이 갖고 있는 곰 토템, 곰에 대한 숭배가 만주지역에 사는 퉁구스계통 민족을 매개로 해서 한반도까지 들어왔다는 식으로요. 홍산문화유적지가 황제의 땅이라는 논의를 만들어간 거죠. 제가 이것에 대한 비판적 논문들도 썼어요. 황제와 관련한 논의들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에요. 우리도 그것을 비판적 시각에서 계속 지켜보아야 합니다.
질문: 워낙 연구자의 내용이라 기사에 다 포함하지는 못하겠지만, 제게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일대일 중국신화 과외시간입니다.
김선자: 학생들에게 중국의 황제신화와 역사공정을 소개할 때 꼭 보충하는 말이 있어요. 신화를 민족의 역사나 문명을 증명하는 도구로 쓰게 되면, 지나친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의 덫에 빠지기 쉽다. 민족의 시조에 대한 신화 자체가 굉장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데,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과학적이어야 하는 고고학이 역사학과 결합하면서 이데올로기가 된다.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 우리 단군신화도 같은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해요. 중국의 역사공정을 비판하는 것과 같은 잣대로 우리 신화의 이데올로기도 경계해야 하죠.
질문: 저 역시 건강한 역사의식과 객관적 시각을 갖도록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래된 지혜』 책에서 신화가 강조하는 인간의 4가지 조건이 인상 깊었어요. 선량함, 지혜, 나눔, 성실함. 이 네 가지가 공동체사회를 유지하고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중요 덕목이자 가치라고 하셨어요. 최근 10대 여학생은 물론이고 여교사를 포함한 딥페이크 여성 성착취 영상을 텔레그램에서 24만 명이 만들고 본다는 거예요. 딥페이크 여성 성착취 영상을 유포하는 것을 넘어 협박하는 등 심각한 사회적 범죄로 대두되었어요. 특히 피해자, 가해자 대부분이 10대라는 사실과 전국의 초·중·고등학교 지도가 그려질 정도로 만연하다는 게 충격을 주는데요. 신화학자이자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김선자: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 여성을 소수자나 약자로 여기는 시각이 아닌, 동등한 존재로 봐야 해요. 신화 속의 가치와도 통하는 거죠. 자연계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인간과 동등한 생명의 가치를 가졌다고 하는 게 신화 사유의 근본이에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와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새기고 실천해야 해요. 자연계의 모든 존재는 생명이 있고 자신들만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요. 인간의 언어만 언어가 아니죠. 새들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건 오히려 인간이죠. 동네고양이 한 마리도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공존의식을 회복한다면 성폭력이나 비인간 존재에 대한 폭력은 줄어들 거예요.
저는 교육이 여전히 힘이고, 이야기가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화 속 이야기들을 통해 “이야기는 힘이 세다”는 걸 전하고 싶어요. 어떤 것을 하라는 가르침보다 이야기를 들려주면 체화하기 때문에 더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지요.
질문: 마지막으로 ‘봉봉이와 코코의 집사’로서 이 글을 읽을 고양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과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양이 ‘봉봉이와 코코의 집사’로 살면서 동물은 물론이고 바람과 물, 나무 등 신화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가 똑같은 가치를 갖고 있다는 인식이 강화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각각의 존재가치가 있고, 동등하다는 걸 생활 속에서 깊이 경험해요. 신화학자로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는 넓은 가슴과 깊은 눈을 가지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동아시아신화 공부가 여러분께 그런 삶으로 가는 등불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명한 신화학자이신 김선자 선생님께 신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정말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10월 10일에는 한국 인문학계에 크게 축하할 소식이 두 가지나 있었습니다. 한국 작가 최초의 노벨문학상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작가 한강이 선정되었고, 같은 날 한국계 미국 작가인 김주혜가 장편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로 2024 러시아 톨스토이 문학상(야스나야 폴랴나상) 해외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런 떠들썩한 잔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고양시 소식이 있어 안타깝습니다. 고양시가 2025년부터 모당공원작은도서관, 고양작은도서관, 호수공원작은도서관, 삼송작은도서관 등 공립작은도서관 4곳을 추가로 폐관하고, 마상공원작은도서관과 강촌공원작은도서관은 계약직사서를 배치해 한시적으로 운영한 뒤 문을 닫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에 고양시민들은 ‘고양시 공립작은도서관 폐관에 반대하는 시민모임’을 만들고 대대적인 반대서명을 받습니다. 적극 동참해주시기 바랍니다.
*고양시 공립작은도서관 폐관 반대서명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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