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암빙벽에 흔적을 남기고 싶다."
글 한필석기자 /사진 정정현 기자 [월간 산 2006/03호 기사]
山 냄새가 이렇게 물씬 나는 산꾼은 모처럼만이다. 고어텍스 재킷은 적당히 때에 찌들어 있고, 모닥불 냄새까지 난다. 거기에 삼손을 연상케 하는 긴 머리카락과 뚜렷한 이목구비에 손과 발까지 커다라니 위압적인 면도 있다. 그런데 순박한 표정과 말투는 수십 년 사귀어 온 후배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 문철한(文 哲 漢.34.청악산우회)가 2년 3개월 만인 1월 18일 영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설악산에 들어갔다. 엉뚱한 발상에서였다. “”선배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습 니다 .”” 2003년 여름과 가을, 그는 설악산 소토왕골에 머물렀다. 새로운 길을 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0월 들어 출국을 앞둔 시점에서 선배들이 “나머지는 네가 해결하라” 했고, 그는 흔쾌히 “예” 했다. 그 밀린 숙제를 해결하러 귀국하자마자 설악산으로 달려간 것이다. 눈 때문에 지체한 날을 빼고도 닷새동안이나 강추위 속에서 절벽에 매달려 루트작업을 했다. 그렇게 해서 2피치만 개척 되어 있던 물길에 2피치를 추가시켜 4피치 루트를 완성시켰고, “어떤이의 꿈”은 잘못된 볼트의 위치를 바로 잡았다.
그 정도 했으면 부모님과 함께 지낼 법도 한데 그는 설악산에서 돌아오자마자 이튿날 또다시 설악산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선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를 만난 것은 바로 토왕폭 등반 이튿날인 2월 7일. ”원래 오늘 떠날 계획이었는데, 이틀 늦어졌습니다. 프라낭에 가서도 미뤄둔 숙제를 마무리할 생각인데, 일정이 늦어져 제대로 될지 모르겠네요.”
‘벙어리 1년, 장님 1년, 귀머거리 1년’
문철한은 천생 산꾼이었다. 중고시절 스스로도 말썽꾸러기로 기억될 만큼 공부는 뒷전에 두고 힘내기에만 신경을 쓰며 지냈다. 그런 철한에게 새롭게 생긴 목표가 산이었다. 고교 1학년 때 백운대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저거다 싶어서 인수봉 정상에서 점프(?)를 하며 하강하는 크라이머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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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프라낭 해벽등반. 98년 사고 이후 재기를 노리고 나선 등반투어였다. |
9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실천에 옮겼다. 막일을 해서 모은 돈을 들고 동대문시장으로 달려가 장비점에서 사귄 형들과 인수봉으로 향했다. 그런데, 겁이 없다고 자부해오던 그는 첫 바위에서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인수봉 취나드 B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길도 아닌데 첫 피치도 제대로 못 올라갔죠. 꼭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다시는 산에 안 간다고 다짐했을 정도니까요. 한데 목돈 들여 산 장비가 아까워 다시 인수봉을 찾았죠.” 몇 년 산에 다니는 사이 우쭐해졌다. 보란 듯이 스위스 아미나이프를 목에 걸고, 카라비너는 일부러 배낭에 달고 다녔다. 그래야 산꾼인 줄 알았다. 그렇게 3년쯤 산에 다녔을 때였다. 바위 밑에서 간혹 만나던 부근호씨가 “우리 산악회에 들어오지 않겠니?”물어왔다. 92년과 93년 캐나다로키의 빙폭을 한국 산악계에 알렸을 만큼 전문등반을 추구하는 청악산우회에 가입한다는 것은 한창 바위에 빠져 있던 철한에게는 너무나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철한을 볼 때마다 “왠 고교산악부?”하면 웃곤 하던 부근호씨는 세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벙어리 1년, 장님 1년, 귀머거리 1년”등 선배들이 어떤 일을 시키든 3년간 참아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어중간하게 산을 배운 철한에겐 정통 산악인이 되기 위한 과정이 새내기에 비해 휠씬 힘들었다. 부근호씨는 그래서 더 강하게 몰아쳤다. 등반 중 로프를 밟으면 입으로 물게 하고,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어쩔 수 없이 퀵드로를 잡는 날이면 퀵드로를 입에 문 채 벌을 서야 했다. 그렇지만, 철한은 오히려 그러한 선배들의 짖궃은 벌을 달갑게 받았다. 그렇게 해야 진정한 산꾼이 되고, 또한 말썽꾸러기가 제대로 된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맹렬한 산행 덕에 입대 신체검사에서 불합격을 받았을 만큼 무거운 몸은 80kg 이하의 날렵한 몸배로 바뀌었고, 이러한 열정을 높이 산 선배들은 입회 첫해부터 철한에게 해외등반의 기회를 주었다. 태국 프라낭은 그에게 딱 맞아떨어지는 등반지였다. 국내에서는 마땅히 등반할 곳이 없는 겨울철에 암벽등반을 즐길 수 있고, 아시아권에서는 드물게 5.14급의 고난도 루트가 여럿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매력이었다. 그렇지만, 즐거움만 이어지지는 않았다. 96년 1월 구곡빙폭 등반도중 낙석에 맞아 코끝이 칼로 벤 듯 잘리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던 그는 98년에는 치명적인 사고를 당했다. 소토왕골에서 빙벽등반 도중 스크류 2개가 바질 정도로 큰 충격을 받으면서 피켈이 무릎을 찍는 바람에 연골이 파열되고 말았다. 꼬박 6개월 동안 바위를 구경만 해야 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나으려니 했으나, 깁스를 풀었을 때 의사의 최후통첩은 “동네 뒤 산 약수터에도 오르지 말라”였다."하늘이 노래졌다.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무릎을 압박붕대로 동여매고 도봉산도 찾고 북한산도 찾았다. 그러다 테스트에 나섰다. 지리산 종주산행이었다. 뜻밖에 하산할 때까지도 큰 통증이 느껴지지도 않고, 그런대로 힘을 쓰겠다 싶었다. 이어서 바위에 다가섰다. 슬랩에 올라서고, 크랙에 발을 집어넣고 힘을 쓰기 직전 혹시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꾸준한 운동으로 의사가 불가능하다는 치료를 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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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소승폭 등반. 엄격한 선배인 부근호씨가 확보를 봐주고 있다.
세로토레 원정에 앞서 설악산 적벽에서 훈련등반중인 문철한씨. |
몸이 괜찮다 싶어지자 방랑벽이 되살아나 북미 등반여행을 생각해냈다. 1999년 2월 실천에 옮겼다. 설악산 훈련을 끝낸 뒤 프라낭으로 향했다. 프라낭 등반을 끝낸 다음 선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캐나다로키의 빙폭을 찾을 계획이었다. 그러다 프라낭에서 만난 알래스카 클라이머의 제안을 받아들여 발데즈 빙장을 방문했다. “300~500m 높이의 빙폭들이 무수히 걸려 있더군요. 프라낭에서 만난 친구와 하나를 올랐죠. 그런데 그 친구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니 같이 할 사람이 없더군요. 부근에 외국 클라이머들은 많았지만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죠. 깔봤던 거죠. 그래서 니들이 하면 얼마나 하겠느냐는 생각에 혼자서 올랐습니다. 높이가 구곡폭 세 배쯤 되는 빙폭이었습니다. 보란듯이 올랐죠.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찾아오더군요. 같이 등반하자는 거였죠.”
발데즈의 빙폭을 7개 등반한 다음 요세미티로 이동했다. 평소 존경해오던 선배인 정승권씨가 엘캐피탄을 대표하는 고전루트인 노즈(31피치)를 단독 등반했다는 소문에 “나도 엇비슷한 루트에 도전해보자”는 각오였다. 그러나 시즌이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텅 빈 캠프장에서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릴 수는 없는 일. 조수아트리, 레드락, 유타, 콜로라도, 멕시코의 카브산 루카스에 이르기까지 이름난 등반지는 죄다 찾아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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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토레 베이스캠프에서 볼더링을 즐기는 문철한씨.
세로토레 1차 공격을 마치고. 맨오른쪽이 정승권씨, 그 왼쪽 문철한씨
2001년 매킨리 등반중 텐트에서 취사중인 문철한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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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만 주신다면 다시는 산에 가지 않겠습니다” 한국을 출발할 때 태국까지 원웨이 티켓 외에 가진 돈은 150만원이 전부였다. 그 돈으로 6개월을 지내자면 비행기 값을 빼면 하루에 3달러를 넘어서면 안 되었다. 결국 3달러로 하루 세 끼 먹고, 100kg 안팎의 짐을 옮기면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캠프장에 들어서면 승용차 번호판부터 살펴보았다. 다음 이동할 암장에서 온 차가 있나 없나 확인했다. 발데지 투어 때는 주차장 한쪽에 설동을 파 놓고 지내면서 방향 맞는 차를 찾기도 했다. 차 주인에게 다가가 출발 날짜를 물으면서 등반정보도 얻고, 그 사이 파트너까지도 얻을 수 있으니 매번 1석 3조의 효과를 가져왔다. “거지는 거지를 알아본다더니 그 말이 딱 맞더군요. 우리나라나 캐나다, 노르웨이나 산에 다니는 친구들은 거의 다 거지골이었으니까요. 그 친구들은 계절 따라 북미를 오르내리더군요. 초여름에는 요세미티로 내려왔다가는 7월 접어들면 알래스카로 올라가곤 했어요. 7월에는 낚시가 성행하여 고깃배에서 할 일이 많다면서요.” 이렇게 히차하이킹으로 미국뿐 아니라 멕시코 암장까지 순례한 철한은 6월 중순 요세미티로 이동했다. 그리곤 계획대로 살라테월(5.13b/C2+)에 도전했다. 35피치짜리 긴 루트였다. 트래버스가 끝나는 제 10피치까지 로프를 깔아놓은 다음 3박 4일간 먹고 지낼 식량과 장비를 끌어 올린 다음 등반을 시작했다. “루트를 처음 보는 순간 이건 된다 싶었는데 막상 붙으니까 쉽지 않더군요. 첫날 등반 때는 장비와 식량, 물 등이 담긴 홀백을 끌어 올리는 데 실패해 제 5피치에서 주저앉았어요. 그래도 제 11피치부터는 꼭 선배가 옆에서 지켜보고, 확보해주고 있는 듯해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가장 어려우리라 예상했던 제 14피치도 무난히 넘어섰으니까요.” 평삼심은 제29피치 등반 때 깨지고 말았다. 마침 생일이었다. 식수는 통이 찢어지면서 다 빠져나가고, 식량도 떨어져 이틀간 굶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무려 7회 추락했다. “바위 좀 탈 줄 안다고 너무 까분 게 아닌가 하면서 후회가 됐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으니까요. 나중에는 [주님! 부모님이 주신 몸뚱아리를 가지고 너무 심하게 장난쳐서 미안합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다시는 산에 다니지 않겠습니다] 하곤 누가 시키지도 않은 맹세를 했어요. 외로워지는 순간부터 형들이 너무나도 보고 싶어지더군요. 휴지, 봉지, 담배 껍데기에 이르기까지 볼펜이 써지는 것에는 모두 편지를 썼답니다.” 여덟번째 도전에서 난관을 극복한 뒤 무사히 등반을 마친 철한은 캠프장에 내려서자 약속대로 장비를 몽땅 팔아 치웠다. 그리곤 너무도 보고픈 선배들이 트래킹 중인 캐나다로키로 달려갔다. 그러나 바위 안 하겠다는 약속은 곧바로 깨지고 말았다. 스쿼미시를 보는 순간 마음은 벌써 바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듬해인 2001년에는 매킨리 등반에 나섰다. 1999년 8월 말 캐나다에서 귀국하자마자 정승권씨를 찾아가 살레테월 등반을 애기했다. 정씨는 뭐 이런 친구가 있나 싶었다. 그가 단독등반한 루트는 난이도는 조금 높지만 등반길이는 살레테월에 비해 3분의 2에 불과 한 “조디악”이었다. 그런데 그 살레테월을 무명의 한국 산꾼이 해냈다니 감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정승권씨는 후배에게 좋은 등반 기회를 주기 위해 아무런 요구 없이 매킨리 원정대에 합류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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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악산우회 선배인 원종민씨와 함께.
설악산 천하대에서
소토왕골에서 볼트작업중인 문철한씨
2002년 이탈리아 아르코 암장 투어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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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킨리에서 고소증도 겪고 첫 고봉 등정의 감격도 맛본 철한은 2002년에는 세로토레 등반에 나섰다. 이 역시 정승권씨의 권유로 이루어진 원정이다. 첫 기회는 철한에게 주어졌다. 정승권 대장을 비롯해 3명이 1차 공격에 나섰다. 그런데 딱 하루의 등반거리를 남겨놓은 지점에서 무심하게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사흘간 식량으로 닷새를 기다렸다. 그러다 더 이상 기다릴 상황이 아니다 싶어 베이스 캠프로 내려섰다. 그런데 캠프에 도착, 뒤 돌아서는 순간 세로토레는 파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었다. 결국 2차 공격의 기회는 베이스캠프에서 대기 중이던 다른 대원에게 넘어가고, 그 등반이 성공적으로 끝나 재도전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2002년 이탈리아 아르코와 발도나 빙장을 비롯해 유럽 암빙장 순례에 이어 호주 암장순례도 다녀온 그는 2003년 10월 한국을 아예 떠났다. 이번에는 기간을 정하지 않았다. 오르고픈 바위와 빙벽을 모두 오르고, 보고픈 것은 몽땅 보고 나서야 돌아올 각오였다. 우선 거의 매년 찾던 프라낭 해벽을 찾았다. 95년 이후 아홉번째 방문이다. 그런데 등반이 끝날 즈음 엉뚱한 봉변을 겪었다. 이 봉변으로 새로운 등반생활을 맞이한다. “여권 말고는 몽땅 잃어버렸습니다. 도둑이 교묘하게 방가로를 턴 거죠. 겉에 있는 돈은 그대로 놓아두고, 속에 있는 돈만 빼내갔으니 언제 털린지도 모른 채 여러 날 지냈던 셈이었죠. 게다가 여러 장의 신용카드 가운데 유일하게 사용 가능한 카드를 빼갔으니 참으로 황당했죠.” 한국을 떠날 때는 세계의 유명 등반대상지를 실컷 돌아다닐 생각에 비행기표도 원웨이 티켓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표 값을 구하기 위해 막일이라도 할 결심을 했다. 그런데 몇 품 되지 않는 일당으로는 3년 모아야 비행기표 한 장 겨우 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고민만 하고 지내던 터에 한 달간 함께 자일을 묶고 지내온 영국 클라이머로부터 제의를 받았다. “영국 가서 등반하지 않겠냐?” 2003년 11월이었다. 그에게 300달러를 빌린 문철한씨는 밀린 숙박비를 갚고 우선 계획했던 대로 말레이시아, 라오스,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일원을 여행했다. 그리곤 2004년 5월 영국으로 향했다. 함께 런던에 도착한 영국 클라이머는 클라이밍 인스트럭터를 권했다. 등반 수준이 이미 궤도에 올랑 있는 문씨에게 적당한 직업이다 싶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적어도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택한 게 막일이었다. 툭하면 남미쪽 사람들이 시비를 걸어왔다. 자기가 해야 할 몫을 문씨에게 하라고 시키는가 하면, 물건을 건네줄 때는 집어 던지듯 했다. 그때마다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한치 밀리는 순간 바닥까지 추락하리라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힘은 들지만 한국에서도 해봤던 일이기에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그런데 직장이랍시고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버리고, 그로 밀린 봉급도 받지 못한 채 두어 달 지나자 사태가 심각해졌다. 상황을 눈치 챈 영국 친구는 다시 한번 클라이밍 인스터럭터를 권유했다. 한 풀 꺽인 그는 실내암장에서 잡일을 할 생각으로 런던 웨스트웨이 클라이밍월(West Way Climbing Wall)을 찾아 이력서를 제출했다. 이외의 대답이 왔다. 일단 20시간쯤 인스트럭터 보조를 일해 보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만남 위해 세계를 떠도는 보헤미안
보조강사로 일하는 사이 우리나라와는 너무도 차이 나는 모든 수준에 감탄했다. 등반루트가 600개, 볼더링 코스 또한 300개가 넘었다. 인스트럭터 70명에 매니저도 6명이나 됐다. 게다가 유치원생에게서부터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수강생의 나이와 수준도 다양했다. 모든 교육은 흥미를 유발시킴으로써 한 단계 한 단계 수준을 높이게끔 커리큘럼이 짜여 있었다. 인스트럭터의 등반수준이 5.10급 정도인데도 인기가 높으면 수강생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직장이라면 지낼 만하다 싶어진 그는 인스트럭터 자격시험에 응시했다. 실기는 무난히 통과했다. 필기시험이 문제였다. 오랜 실전을 통해 생활영어는 가능했지만, 학창 시절 원낙 공부를 등한시 해왔던지라 뒤늦게 문법과 단어를 체계적으로 배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민 끝에 시험관에게 자시의 상황을 솔직히 털어 놓았다. 그리곤 50문항의 문제지를 집에 가지고 가서 사전을 들춰보면 답을 작성해오겠다는 말했다. 뜻밖에 시험관은 기꺼이 응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2000년 말 SPA클라이밍 인스트럭터 자격을 딴 그는 정식 인스트럭터로서 웨스트웨이 클라이밍월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 차례 실수로 교육받던 어린이가 추락하면서 다리가 부러지고 허리를 다치는 사고를 겪은 뒤 죄책감에 한 달 반 이상 근무를 하지 않은 적도 있었으나, “당신 실수가 아니다”며 매니저가 배려해주어 다시 인스터럭터 생활을 계속 할 수 있게 됐다. 이번 귀국은 휴가 기간 중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2년 3개월만에 귀국하자마자 설악산으로 달려가는 치열한 산꾼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뿐 아니라 문철한씨는 취재 사흘 뒤 프라낭으로 갔다. 출국 전날 다시 만났을 때 그의 배낭 안에는 묵직한 드릴용 배터리가 들어 있었다. “프라낭은 이번이 아홉번째 투어입니다. 정말 등반하기 좋은 곳이랍니다. 세계 각국의 클라이머들이 몰려들어 함께 지내는 즐거움도 쏠쏠하고요. 이번에는 루트를 몇 개 만들 생각입니다. 지난 번 투어 때 보아둔 벽이 있답니다. 이쯤 되면 제 루트도 있어야겠다 싶어진 거죠. 기왕이면 5.14급 루트로 말입니다.” 그는 2남 2년 중 막내로 72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진학할 즈음 서울로 왔다. 막내를 공부 잘 시켜 훌륭한 사람 되게 하겠다는 대한민국 부모님의 일반적인 꿈 대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골통이라고 기억할 만큼 공부와는 무관한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산에 들어선 이후 그의 인생은 달라지고 있다. 100kg이 넘는 몸무게를 등반을 위해 80kg 밑으로 줄이고, 좋은 등반을 위해서라며 73kg까지 떨어뜨린다. 그리고 보면 그의 생활을, 인생을 180도로 바꿔어 놓은 게 산이다. “벽 하나, 빙폭 하나를 오를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무한한 생동감도 느껴지고요. 그래서 새로운 곳을 찾아 여러 해 동안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도 돌아다니다 보니 언제 어디를 갔다 왔는지도 헷갈립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제겐 큰 즐거움입니다. 어떤 지역에서 인연 맺은 친구를 새로운 지역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죠. 처음 만나 애기하고 먹을 때는 힘이 들기도 하지만 일단 등반을 하면 곧 친해진답니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을 때마다 새로운 흥분이 일고 말입니다. 오히려 산에 대한 욕구가 점점 더 강해지니 큰 일입니다. 어쩌면 그게 제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것을 만나기 위해 떠도는 것 말입니다.” 문철한씨는 프라낭에서 3월말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웨스트웨이 클라이밍월에 인스트럭터로 복귀한다. 그리고 중간 중간 짬을 이용해 유럽암장을 순례한다. 내년에 귀국하면 소토왕골에 루트를 더 만들 계획도 가지고 있다. “5월에는 스페인, 7월에는 노르웨이를 찾을 계획입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암장위조로요. 두 달 열심히 일하고 2주간 암장 순례하는 게 제 스케줄이랍니다. 올해는 그렇게 런던을 베이스캠프 삼아 지낼까 합니다. 서른까지만 돌아다닐 생각이었는데, 벌써 서른다섯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외국 다니면 제 흔적을 남기고 싶습니다. 제가 만든 루트를 환갑 나이에 오르는 게 최종 목표라면 좀 지나친 욕심일까요?”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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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그후 ................
단 하루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꽤나 긴 인연처럼 느껴지네. 무엇보다 모닥불 냄새 같은 산내음이 좋았다네.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네. 나 역시 한때 스스로 산꾼이었다고 생가했던 시절이 있었다네. 하지만, 문철한씨처럼 외국 산, 외국을 마음껏 돌아다닌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네. 내 대학시절엔 여권 하나 만들기 어려웠고, 졸업 후 군복무 마치고 먹고사는 일에 몰입하며 지내다 보니 흐지부지 젊은 날을 보낸 것 같아 요즈음 아쉬움이 많다네. 물론 山잡지 기자 생활하다 보니 매달 한 차례 이상 국내산에 들어서고, 또 한 해 한 차례 외국산을 다녀올 기회가 있으니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나은 편이지만…
수백명의 산꾼을 취재하면서 흥분도 많이 해 보았고, 또 아쉬울 적도 많았다네. 특히 어중간하게 산에 젖어 있는 친구들 보면 흥분이 일기보다는 걱정될 적이 많다네. 저러다 훗날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걱정 때문이라네.
철한이에겐 그런 걱정이 전혀 생기지 않더구만. 내가 만난 산꾼 중 몇 안되는 완벽한 산꾼이었다네. 철저하게 산에 빠져 있으면서도, 세상사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하고픈 산을 찾고 있으니 이보다 더 멋진 산쟁이가 또 어디 있겠나 싶더군. 그래서 더 친근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네.
계속 멋진 꿈을 꾸기 바라겠네. 늘 건강하시고.
2006. 3월의 어느날 한필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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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가 끝나고 철한선배님은 본인의 취재기사가 실린 잡지도 읽어보지 못한채 또 다른 여정을 위해 길을 떠났고, 기사가 실린 잡지책 한권과 취재를 맡은 한필석기자님의 편지 한장이 함께 언제 다시 돌아올줄 모르는 그 주인을 위해 곱게 포장되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많은 취재를 다니고 글을 써 보았지만 이렇게 멋진 후배와 그 후배를 생각하는 선배들의 산꾼다운 산정은 정말 오래만에 느껴 본다는 한설필 기자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