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북알프스 기행
김 종 선
6월의 어느날, 아침 잠결에 전화를 받으니, 이번 시연맹에서 북알프스등반이 있으니, 같이 가자는 기활이의 전화였다. 며칠 후 여권수속에 필요한 서류를 전하면서 혹시 우리끼리만 가면 상엽이가 어떻게 각할 지 모르니 일단 의사타진을 해 보기로 한다. 물으니 "O.K" 말 안꺼냈으면 혼날뻔 했다. 여권과 비자를 받고, 시연맹 오리엔테이션과 준비물 분담등을 완전히 준비하고 컨디션 조절만 남았는데(나의 컨디션 조절은 잠을 푹 자는 것), 갑자기 뜻하지 않은 숙부의 부음을 받고 인천에 문상을 다녀와 한잠을 못자고 바로 세면만 하고 배낭을 들고 집을 나선다.
정능입구에서 기활이와 상엽이를 만나 공항으로 간다. 공항에 도착하니 국내선 비행기도 못타본 나는 출국수속을 대신 해 주건만, 뒤따라 다니는 것도 헤맨다. 10시에 공항에 도착하여 모든 출국절차를 마치고, 출국문을 나서 면세점 구경을 하고 11시 45분 탑승했다.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타 본 나는 경험자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슬금슬금 눈치껏 따라하니 원숭이가 된 기분이다. 이륙과 동시에 기체가 고도를 잡자 바로 식사를 하게 된다. 촌놈 더듬더듬 눈치껏 식사를 마치니 바로 착륙이란다. 그래도 이륙보다는 쉽게 착륙을 하건만 브레이크를 작동시킬 때는 기분이 묘하다.
나고야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할 땐, 나는 그래도 양호한 편이고 어느란에 어떤 글씨를 써야할지 몰라 헤매고 빠꾸 당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몇몇 해외여행 경험자들은 숙달된 장교모양 쉽게 통과한다. 공항을 빠져 나오니 상엽이는 겨우 두 시간 정도의 금연에 끽연장소를 찾아 공항 밖으로 나간다. 공항 밖에는 엄청난 더위가 있었다. 약 35도 - 36도 정도의 폭염에 습기까지 많아 찝찝한 날씨다. 바쁜 일정에 쫓기는 일행은 즉시 3대의 버스에 편승했다. A팀 (45명)에 속한 우리 셋은 제일 고물차에 탑승된다. 길에 다니는 차나 주차되어 있는 차나 모두 산뜻한데, 왜 하필 우리차만 고물일까? 하지만 투정할 여유도 없다. 그래도 고속도로를 달릴 때는 잘 달리니 좀 낫다. 나고야 외곽 공업지대를 지나 小牧에서 고속도로로 진입하여 松本市까지 고속도로를 달리며 몇 가지 느낀 점이 있었다. 왕복 4차선 고속도로의 최고속도가 80km/h였고, 오토바이의 운행도 허용된다. 중간 휴게소에 들르니 규모가 국내 휴게소의 1/3-1/4정도의 소규모였다. 휴게소에서 처음으로 일본의 물가를 접한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고, 아무리 더워도 음료수 한 잔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 국내 물가의 3~5배 정도이고 심한 것은 10배정도 되는 것도 있으니 이곳이 휴게소이기에 값이 비싼가 보다 하였다.
산악지대를 지날 때는 왠 터널이 그리도 많고 긴지 모르겠다. 하나의 예를 들면 8,490m의 터널이 있었고 내부에는 약 300m마다 비상전화가 설치되어 있고, 약 700-800m 정도의 고장차량 대피소가 있었으며, 노견은 없었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농촌의 풍경은 우리네와 흡사하나, 작은 논도 사각형으로 경지정리가 되어 있었고, 주택모양이 다르다는 것(거의가 2층)과 약 10~15%의 주택에 태양열 집열판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 중에서도 부러운 것은 논과 논사이, 밭과 밭사이(그들도 비닐하우스 영농이 많다.)의 폭이 2m도 안되는 농로까지도 전부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다는 점이였다. 어쨌든 고속도로를 벗어나 일반도로에 들어서 가미고지(上高地)로 가는 길에는 최고속도 40km/h에 노폭은 버스 한 대가 꽉 찰 정도여서 바퀴가 항상 백색선을 밟고 가는 느낌이며, 주택가의 정원수는 도로밖으로 못 나오게 가지를 쳐서 버스와 정원수 또는 전신주가 항상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간다. 아무리 작은 집에도 빈땅없이 정원을 꾸몄으며, 옥내 주차장 크기도 차량크기에 꽉 차도록 꾸몄다.
서서히 산악지대로 들어서니 도로가 거의 터널로 이루어져 있으니 차내에서는 경치 구경하기가 힘들다. 너무나 길이 좁아 굴곡지점에서는 모든 차량이 서행을 하며 반사경을 보고 양보로서 교행을 하고, 한 대의 차량도 추월하는 법이 없다. (할래야 할 수도 없는 지역이지만....) 경음기도 사용치 않고 그져 앞의 차가 가기만을 줄지어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수력발전댐이 세 곳 있었는데, 댐의 규모는 작았으나(수량은 잘 모르겠다. 만수의 면적 약 20만평 정도) 낙차지점을 관을 통해 산 뒷편으로 수백미터씩 낙차시켜 큰 에너지를 얻고 있었다. (국내에는 직접 낙차시키는 댐이라 수직고도가 가장 높은 소양감댐도 100m가 못 되건만....) 화천의 파로호(구만리 발전소)가 관을 통해 낙차시키는 방법을 사용하나, 이것도 100m가 채 못 된다.
좀 더 가니 촌놈눈에 신기하게도 지면에서 새벽안개속의 시골집 굴뚝모양 증기가 솟아 오르고, 계곡 중간 중간에 더운 물이 솟는 온천장이 있었다. 차량의 통행은 많았으나, 이곳 부터는 단일도로에 터널의 높이가 낮아 높은 버스는 지나치지 못한다 하여 일행 3대의 차량중 한 대가 걸리니 우리가 탄 차는 가미고지에 도착한 후 다시 내려가 B조의 한팀을 다시 태우고 와야만 했다. 이렇게 하여 가미고지에 어둑어둑 해저서야 도착하니, 북알프스의 설악동이라 생각했던 우리의 상상은 여지없이 깨져 버리고.... 즐비한 상가, 여관촌에서 나오는 불빛을 상상하던 우리의 눈엔 넓은 주차장에 달랑 한 채의 상점과 버스 대합실만이 눈에 보이고... 숲속에선 숙박업소의 커다란 창을 통해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중에 하산하여 알았지만 꽤 많은 숙박업소가 각각 숲속에 자연과 어우러져(시멘트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목조건물)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설악동 단지와 인위적으로 만든 소공원은 인간이 개발을 목적으로 자연을 최대한 파괴시킨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저녁 8시경 도착한 우리는 방 배정을 받기 위해 B팀 후발대를 기다리다 9시경 방을 받았고, 우리가 배정받은 방은 8명이 사용한 방으로서 4명은 2층 침상을 사용하고 4명은 다다미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화장실과 세면장, 욕실이 완전히 구별되어 있었으며, 내.외부에서 청결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발에 묻는 것이 없으며 심지어는 창틀, 문틈에도 먼지가 없으니 아무리 닦는다 해도 주변의 먼지를 바람이 옮기겠건만 주변에 뎄겨 놓을 먼지 조차도 없었다.
해발 1500M의 가미고시는 흐리고 간혹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씨였다. 석식 후 내일의 산행을 위해 바로 잠자리에 들다. 다음날 7월 31일(수요일)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준비된 식사(주식은 밥이고 약간 달착지근한 된장국 그외에 몇가지 경양식 비슷한 반찬을 개인별로 놓여 있고 젓가락뿐이어서 국도 들도 마셔야 하는 철저한 개인 식사에 음료수는 녹차였다. 어제 저녁 처음 대하는 일본식 식사는 별식이었으나, 오늘 아침은 어제만 못한 것 같다.)를 마치고 06:30 하동교에 모여 도시락을 하나씩 받고 선두를 따라 06:45 출발한다. 아침을 가미고지는 물안개와 맑은 하늘, 맑은 물, 상쾌함 그 자체였다. 하동교위로도 숙박업소와 집단야영장이 있었다.
등산로는 좁고 깨끗하였고 明神(묘신)에 도착하니 숙박업소 몇곳과 매점이 있었다. 계속 평지길을 걸어 德澤(도꾸사와)산장에 도착하니 집단 야영장과 옥외화장실이 있었고, 야영장 사용료를 받고 사용료는 텐트지참시 1인당 300엔이었다.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으나, 수도를 설치하여 취사를 하게 하였고, 이곳에 누구의 짓인지는 모르나, 먹고 남은 라면이 한 귀퉁이에 버려져 있고 씻다 흘린 쌀이 한줌 물에 잠겨 있었다. 쓰레기장은 휴지(소각가능), 소각불능 휴지, 빈병과 캔과 같은 재활용 쓰레기로 구분하여 버리고 쓰레기장엔 항상 날로와 같은 소각장이 있어 무언가를 태우고 있었다. 그 곳에서는 계곡에 비누와 같은 세제를 사용하는 것이 엄격히 규제된다 하니, 설겆이는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가미고지에서 橫尾(요꼬) 산장까지 약 2시간반 가량 거의 평지길을 올라왔다. 그 시간에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를 하는데 답례하기가 귀찮을 정도다. 더운 날씨인데도 계곡에 내려가 쉬는 사람도 한 명 없고 일행까지도 목의 뒷모습만 보고, 소리만 듣고 이야기를 주고 받으니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라도 넓은 등산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꼬산장에서 B팀과 헤어져 창악(槍岳:야리께다께)을 향하여 오른다. 맑게 미소띤 인사를 받으며, 10시 25분경 槍澤口 (야리사와롯지)에 도착하여 도시락을 열 때 또 한번 놀랬다. 음식이 흐르면 어쩌나 하던 걱정이 역시 그렇구나! 하는 생각으로 바뀌고 도시락 문화가 발달된 국가라서 인지는 모르나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도시락을 만들었다. 먹기 좋고, 모양 좋고, 찌꺼기가 남지 않게 포장되어 있으니, 음식맛만 우리의 구미에 맞으면 금상 첨화건만 역시 입맛은 안 되겠다.
많은 사람들이 산장 주변에서 식사를 하다 수도꼭지의 규정된 식수를 사용하고 계곡물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 아무리 좋은 장소가 있어도 지정된 장소에서만 식사를 한다. 그리고 일반등산객의 식사를 유심히 살펴보니 (거의가 도시락이지만) 세명의 등산객이 버너위에 후라이팬을 올려 놓고 소세지와 라면을 섞어 볶아 먹더니 농협제품의 인스탄트밥(끊는 물에 봉지채 넣어 덥힘)을 데워서 완전 포장된 양념불고기와 함께 먹으니 쓰레기가 비닐 봉지(소각 가능한) 4장으로 끝나 버린다. 식사를 마치고 산장 내부를 구경하니, 바닥과 계단에 카페트가 깔려 있고, 청결은 표현하기가 어렵다. 산장매점 가격표에는 1인 1박 2식 6,800엔, 1박 4,500엔, 刊當 이란 이름의 주먹밥(?) 1,000엔, 방 1칸 대여 8,000엔에 1인당 2,500엔이었으니, 둘이서 방 한칸을 따로 사용한다면 13,000엔이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엔화의 환율이 5.3:1 정도이니 가히 물가가 알프스 만큼이난 높다. 영수증을 만들고(사진촬영), 다시 출발한다.
등산로의 경사가 점점 가파라지면 또 하나의 질서를 느끼게 된다. 등산로의 폭은 단일로이고 오르내림이 만나면 항상 내려오는 사람이 길을 비켜주며 오르는 사람은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하고, 내려오는 사람은 답례를 한다. 뒤에서 바짝 따라오는 사람이 있으면, 길 옆으로 서서 양보를 하고 서로 고마움과 미안함을 교환한다. 이것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한결같다. 야리사와롯지를 출발하여 바로 20여명의 고등학생들이 길을 비켜서 있어 미안한 마음에 급히 뛰어 간 것이 점심도시락이 소화를 거부하는 빌미가 되어 약간의 두통과 속이 미슥거리는 상태가 계속되었으나, 좋은 경치와 알맞은 온도에 별 어려움은 없었다. 해발 약 2,500m 에 이르자 때아닌 설원이 나타나고 눈 쌓인 밑으로는 냉각된 계곡물이 흐르니, 손을 담글 수 없이 차고 계곡바람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춥다. 설원위로는 꽃이 만발하고 눈이 녹은지 얼마 안되는 부분은 누런 풀사이로 새삭이 파릇파릇 돗고 있으니 사계절이 공존한다. 설원을 지나니 경사가 급해지고 너덜지대가 나타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머리가 "띵"하고 뒤로 쳐지기 시작한다. 아무곳에서나 눈이 감기고 졸립기만 하니 목적지를 확실히 알면 한잠 자고 가고 싶다.
카메라백은 상엽이가 들고 결국 막판에는 기활이에게 배낭까지 빼았기는(?) 상황에서 약 1시간 정도를 오르고 도저히 참기 어려워 약간 넓은 바위덩이에 누워 잠시 눈을 부쳐보니 기력이 조금 회복되는 것 같다. 계속되는 너덜지대에서 또하나 느낀점은 넓은 너덜바위 지대이니, 아무곳으로나 가면 될 터인데, 꼭 之자로 난 길을 우직스럽게 고집하며 오르는 사람들이 미련스러워 보였으나, 몇걸음 직선으로 가던 나는 길지 않은 시간에 그 뜻을 알았고, 부끄러워졌다. 절대로 필요이상의 등산로를 확장하지 않는 자연보호 정신 그 자체였다.
고도가 높아지니 비가 내리고 우리는 신선이 되어 구름속으로 사라진다. 앞뒤간격이 넓어지고 우리의 목적지인 산장이 눈에 보여 그곳에 도착하니 (15:20), 그곳은 우리의 목적인 槍岳(야리게다께) 山莊이 아닌 殺生휴테였으니, 殺生휴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올라야 했던 우리는 돌아가는 꼴이 되었고, 우리 앞뒤의 일행도 동지가 되어 8명의 미로동지들은 능선에 올라서서야 잘못 된 것을 알았고, 우리는 안내 푯말을 보고 이길도 야리다께산장으로 가는 길임을 확신하고 가려는데, 예정에 없던 능선길을 만난 동지(?)들은 길이네! 아니네! 하며 헤매고 있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이길도 확실하다고 설명하고 남보다 조금더 걸어 산장에 도착하니 (16:30) 그래도 꼴지는 아니었다.
여기서 한가지 참고할 사항은 이곳의 산장은 규모면에서 명칭과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山莊"은 규모면에서 가장 크고 시설이 잘 되어 있다. (시설의 내용은 뒤에서 설명) 예를 들면 야리게다께산장은 650명의 숙식이 가능하다. "小屋"은 작은 산장이고 "롯지"는 영어의 Lodge로서 오두막 산막이란 뜻이고, "휴테" 역시 독일어의 Hutte로서 산막이란 뜻인데 "소옥"이나 "롯지"는 규모면에서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였고,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작은 산장들도 노고단산장이나 어리목 산장보다 규모가 크며 한계령휴게소보다도 크다. 해발 2,900m정도에 있는 야리게다께산장의 규모는 컷으나, 비가 오는 구질구질한 날씨탓인지 조금은 지저분 하였고 침상도 좁고 침구도 눅눅하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양폭. 수렴동 산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청결하다. 지친 몸을 뉘어 휴식을 취하려 하니 너무나 이른 시간이라 "槍노岳"이란 산막술을 한병 사서 마셔 보았으나 8명의 입실동기생들이 한잔씩 하면 끝이고, 약 500cc의 술이 850엔 이었으니 소주의 약 10배 금액이었고 저지대에서 먹었다 해도 5배의 금액일 것이다. 이술은 머루와 포도 2종류가 있었다. 18:30경 석식을 하는데 머리도 아프고 속도 미슥거려 소식을 하고 바깥바람도 안 쐐고 먼저 들어가 잠을 잤다.
잠결에서 기활이와 상엽이가 온 소리를 듣고 비좁아 바로 누울 수도 없는 상황에서 뒤척이다 선잠을 자다, 새벽에 두통이 심해 깨어 기활이에게 약을 청해 먹고 다시 잠들려 하나 마음뿐이고 결국 새벽 2시경 화장실에 가서 모두 토하고 양치하여 조금은 안정된 육체를 다시 비좁은 곳에 넣는다. 약 3,000m의 고도에서도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고소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오늘의 산행은 계속되는 연봉에 3,000미터 내외의 종주등반이니 걱정이 태산이다. 아침식사도 제대로 못하고(이럴 때 고추장 한숟가락만 있으면 신으로 모시겠다) 점점 느끼하게 느껴지는 음식은 서서히 식욕을 떨어뜨리고.... 출발 준비를 한다. 밤새 내린 비는 그치지 않고 이 구름속에 야리게다께정상에 올라 봐야 시야가 막혀 별 볼일 없을 것이란 판단에 생략하기로 했건만 갑자기 기활이가 흥사단 국장님께서 간다하니 자기가 모시고 다녀와야겠다며 나가니 졸지에 할 일이 없어진 상엽이와 나는 반바지에 티셔츠차림으로 있다가 뒤따라 가니 좁은 바위길에 길게 늘어 선 사람들 뒤에서 기다리다 오락가락하는 비에 흠뻑 젖어 강풍에 덜덜 떨며 정상에서 기활이를 만나고 바로 하산하여 산장에 오니 옷을 다시 갈아 입어야 했다.
쟈켓과 트라우져를 입고 07:10경 다시 출발한다. 처음부터 우산까지 준비했으나 얼마안가 강풍에 무용지물이 되고 시야가 30-50m 정도 밖에 안 되는 신선놀음(?)이 시작된다. 신선은 구름을 타고 노니 우리는 신선 딱갈이가 되어 구름속에서 옷 적셔가며 간다. 간혹 국내산행을 생각하며 가다 길을 잃기도 한다. 그곳은 약 10여m 정도마다 페인트로 "↑" "O" "X"를 확실히 표시했기에 10여m이상 헤맬 이유가 없건만 아무 생각없이 길 잘난 곳만 따라 가다간 뒤돌아 와야 하는 비극이 연출되기도 한다. 우리의 비극은 작은 봉우리를 지나 곧장 초원지대의 길을 따라 갔고, 실제의 길은 봉우리에서 90도 꺽어 너덜지대 사이로 길이 있으니, 좁은 시야에 무심코 가다보면 헤맬 수 밖에....
南岳(미나미다께)은 그런데로 잘 지나 갔으나 험로라는 北穗高岳(기다호다까다께)를 오를 때 부턴 우리에겐 험로는 아니지만 칼로리가 모두 소진되고, 아침에 보충을 못한 체력은 급히 떨어지니, 기다호다까다께 소옥에 도착했을 때는 넉다운 상태가 되었다. 刊當이란 도시락을 펴보니, 약실과 오곡밥의 중간쯤 되는 밥을 넣어 잎사귀로 싼 음식인데 약식, 오곡밥 다 싫어 하는 이 몸은 우유와 위스키 한 잔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기활이는 2개를 다 먹어 치우니 식성좋고, 기운넘치고.... 기다호다까다께 정상에 서서(12:20) 내리막길이라 예상했던 것은 한없는 오름길이고, 그래도 간혹 클라이밍을 겸한 곳이라 그나마 체력이 덜 소모되었다. 가다 가다 보니 상엽이는 앞의 일행과 함께 멀리 가고 기활이는 나를 버리고 갈 수 없어 보조를 맞추니 답답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기활이와 나 사이에 전형적인 일제 "꼴통"이 하나 끼어 들어 내가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헥헥"거리니, 지금의 나의 상태는 망각되어 버린다. 험한 길 잡아 주고 이끌어 주며 固澤岳(가리사와다께)에 도착하니 사진도 같이 찍자하고 돈 안드는 친절은 다 베풀더라. 쟈식! 사탕하나 주고 우리는 껍질을 주머니에 넣는데 저는 버리고, 이 자식들도 힘드니까 정신없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두 번째 사진을 찍을 때 기활이가 떠 보려고 오이를 슬쩍 떨어 뜨리니 줍어가라 했다니 웃기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내가 힘겨워 하여 기활이 배낭에 내 짐을 최대한 넘기고 배낭 무게를 최소한으로 줄였으나 20여m도 못 올라 숨이 차 오르니... 아무리 못 먹어도 그렇치 이렇게까지야.... 고도와 칼로리는 속일 수 없고 기활이는 배낭을 2개 매고 싶었겠지만 간혹 암벽등반 지대가 나타나니 그럴수도 없을 것이다.(14:30~14:40) 가리사와다께에서 영수증 만들고, 산장으로 내려 가는 길은 그래도 누구보다도 빠르게 내려갈 수 있으니 나는 역시 하산 체질이댜. (별명 : 산토끼-편집자주) 이곳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산장주변에서는 "Count Down"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멀리는 1,500m부터 가깝게는 300m전부터 100m간격으로 바위에 표시되어 있다. 15:00경 穗高岳(호다까다께)산장에 도착하니 일행은 두 개의 커다란 방에 나뉘어 짐을 푼다. 우리는 먼저 도착한 일행으로부터 자리를 안내받고 젖은 짐을 정리하는데, 상엽이의 행방이 묘연하다. 이 성질 급한 애는 어디로 갔는지? 상엽이와 같이 온 이륙회의 자섭이는 약 40분전에 도착했는데, 산장에 도착 전부터 못 봤다니 아찔한 순간이다. 이 빗속을 어디서 헤매는 것일까? 성격상 절대로 5-10분 이상 헤매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는데(나 같으면 잘못 내려간 길이 아까워서 직선으로 원래의 길을 찾아 헤매지만, 상엽이는 확실한 곳까지 되돌아와 길을 찾는 성격이다.) 어디서 새옷 입고 나타나, 저는 벌써 건조실에서 모든 옷과 신발을 넣어 놓고 말리는 중인데, 지금은 자리가 없다고 한다. 그래도 어떻게 널어 보라고 하고 젖은 옷을 넘겨주고, 나는 잠을 청해 본다.
이번 산행에서는 민폐만 끼치고 끌려 간다. 이곳 산장들은 건조실이 있어 젖은 물건을 빨리 말릴 수 있는 시설이 되어 있다. 커다란 휀을 이용한 열풍으로 젖은 물건을 말리는 곳이다. 이외에도 특징이 있다면, 물가는 우리와 같이 고도가 높을수록 비싸고 (심지어는 전화 카드까지 한통화에 10엔씩 50통화짜리가 이곳은 1,000엔이다. 그러니 공중전화에 동전을 사용할 수밖에...) 자가발전기를 이용한 전력이기에 소등시간이 철저하다. 시간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곳 기다호다까다께 산장은 21:00 소등이다. 가까운 계곡의 물을 모아 끌어 올려 사용하므로 일반인에게 물값을 받는다. 무인수금통을 설치하고, 단 숙박손님은 무료사용이다. 식수와 식수불용을 구별 사용하여 손만 씻는 곳, 세면, 양치하는 곳이 구별되어 있다. 또한 독서실이 있어 많은 산악서적이 비치되어 있어 언제라도 읽을 수 있게 했고, V.T.R을 설치하여 산악비디오와 T.V시청을 한다.
일기예보는 T.V.를 통해 보고 그 외에도 FAX를 통하여 수시로 기상도가 접수되고 있다. 산장주변에는 야영장이 있고 야영장을 관리. 허가하는데 1인당 요금이 300~700엔까지 야영료를 징수한다. 야영비도 높은 곳일수록 장소는 나쁘고 요금은 비싸다. 야영허가를 받으면 텐트에 프라스틱으로(15cm x 20cm정도) "야영허가" "XX-00"이라고 써서 달아 놓는다. 그 외에도 의무실이 있어 환자를 보호하는데 진료비 명세서를 자세히 알려준다. 시중에서 얼마짜리 인데 이곳 운임(주로 헬기)으로 얼마를 받으며, 다음 진료소 위치와 치료방법등을 알려준다. 이곳 기다호다께 산장에는 동경 모대학 의과생들이 봉사 의료활동을 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등반중의 흡연을 위하여 간이 재털이(산장에서 무료배포)를 사용하며 사진과 같다.(실제크기)
한잠 자다 잠결에 체한데 침 놓는다 하여 일어나니 문리대팀의 한분이 침을 놔준다 하여 밑져야 본전이니 알콜을 얻어다 소독을 하고, 침을 6군데 맞았다. 그래서 그런지 머리가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한데? 져녁식사를 마치고 이틀간의 동숙으로 안면이 익어 자연스럽게 숨겨 놓은 술들을 꺼내 한 잔씩하며 산행소감들을 이야기할 때 B조에서 미아(?)가 되어 가리사와휴테에서부터 길을 잘못들어 기다호다께소옥으로 하여 험하다는 길로 헤매다 A조에 합류케된 82세의 조선배님(?)의 미아가 된 동기와 역경의 순간을 들을 땐 젊은 우리는 쇼크 상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우리가 저 나이까지 생존하느냐가 문제이지만, 저 나이에 저 건강을 어떻게 유지하느냐?는 젊은 것들의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간 A조의 최연장자 68세의 정선배님은 간혹 엄살도 통하는 노인네 였건만 갑자기 젊은이로 전락하게 되었다.
내일의 코스는 북알프스의 최고봉으로 야리까다께(3,180m)보다 10m 더 높은 오꾸호다까다께 3,190m를 올라 끝없이 하산길에 들어서 다께사와 휴태를 지나 가미고지에 도착한다. 그러나 지금도 기상도는 내일도 구름과 비는 계속이라 하니, 우리의 목적은 북알프스를 좀더 넓게 알아야겠다는 것이였기에 나는 내 한몸 희생(?)하여 가리사와휴테쪽으로 혼자 하산하며 길도 익히고 병풍암도 자세히 살펴 보려고 한다. 그런대로 편안한 잠을 자고 식사후 쏟아지는 빗속에 완전무장을 하고 모인다. 나는 팀장에게 어제 미리 이탈경위를 알렸기에 하동교에서 만나기로 하고 06:35 하산길에 들어선다. 가파른 돌무더기 하산길에 추월도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일반등산객들의 뒤를 일부러 기척을 많이 내며(인기척이 나면 즉시 비켜줌), 추월아닌 추월을 하며 약 20여분 내려오니 시야가 트이고 07:10경엔 가리사와소옥과 휴테 그리고 야영장의 텐트들, 넓은 설원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락가락하는 비구름에 일기가 불안하여 눈에 뛸때마다 사진을 찍어 대니 사진찍는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되었다. 아직도 주능선에는 개스가 꽉 차 있다. 아래로는 간혹 햇살도 비치고 푸른 하늘도 보인다. 07:30 경 가리사와소옥에 도착하여 사진촬영을 하고 산장주변을 살펴 보았다. 이곳에는 북알프스 구조대도 있었다. 08:10경 가리사와소옥을 출발하여 마주보고 있는 가리사와휴테를 거쳐 가는 길에 넓은 설원에서 픽켈을 들고 아이젠웍을 하며 오르는 등산객과 뚜렸한 "S"자형의 스키활강자욱을 보았다. 하산 길에 혼자 내려오니 외모가 비슷한 한국인도 구별이 안되니 자꾸 말을 걸어올땐 아득하고 한국인이라고 설명하면 "아하!" 하며 고개를 끄떡인다. 우리의 티셔츠의 "淸岳"을 보고 한국에 있는 산 이름이냐고 묻고, 나는 산악회 이름이라고 대답하며 심심치 않게 내려온다. 능선은 가파르고 너덜 지대라 가파른 귀청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으나, 양쪽이 심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곡은 설악과 같은 험로는 아니고 오대산의 계곡과 비슷한 모습이다.
자연보호도 잘 했지만 엄청나게 큰 아름들이 주목과 전나무 군락지역을 지날 때는 "나쁜놈들 저희들 것 놔두고 설악. 오대. 태백의 주목을 베어 냈으니..."하는 욕이 저절로 나온다. 지금 이길이 북알프스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등산로인 것 같고 가족단위 등산객도 상당히 많이 있다. 09:10경 병풍암에 도착하여 오락가락 하는 구름사이로 사진을 찍고 유일한 간식인 오이를 입에 물고 땅에 털썩 주저 앉아, 카메라를 만지는 나의 모습은 나이좀 들은 사람들에게 신선히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10:00 요꼬산장에 도착하여 몇몇 한국 등산객을 만난 벙어리 말문도 티어보고 식사하는 여유도 가져 본다. 지금부터는 평지길이고 이틀전에 지나간 길이다. 10:10경 산장을 출발하여 하동교를 항하며, 슬라이드 필름소모에 열중한다. 풀과 꽃도 대상에 넣어 찍어 대며 편한 마음으로 하산한다. 13:00에 하동교에서 만나기로 하였으니 빨리 갈일도 없었다. 평지길에선 새로 구입한 등산화의 발목 뒷꿈치가 쓰려 온다. 비탈길에선 발목 뒤가 닿치 않더니 평지에선 앞이 안 닿고 뒤가 닿는다.
도꾸사와산장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고 시간을 보니, 결코 여유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11시가 지났는데 앞으로 남은 거리는 8km 정도 다리는 점점 뻐근해져 오고 속도는 점점 빨라져야 할 판이다. 묘신에선 자판기 음료라도 사고 싶었으나 시간도 없고 결정적인 것은 동전이 없다. 부지런히 걸어 하동교에 도착하니 13:00. 주말(금요일 오후) 이라서인지 휴가철이라서인지 많은 인파가 자연을 즐기고 있다. 빈 의자에 앉아 신을 벗고 발목을 주무르며 하동교만 바라보며 남은 간식을 먹는데, 13:30경 건너편에서 기활, 상엽이가 나타나 이름을 부르니 주변 인파에 못 듣는다. "C.A."하니 금방 알아듣고 이산가족 상봉. 상엽, 기활이는 82세의 조선배님을 모시고 오느라 고생아닌 고생을 하여 캔맥주를 한잔씩 돌리는데, 나도 덩달아 한잔.... 바로 주차장으로 가 사진 한 장 찍고 여유도 없이 일정에 슛겨 14:00경 가미고지를 출발하여 동경으로 향한다.
동경에서도 2박을 하였으나 일정에 슛겨 구경도 못했으나 시내에선 우리가 배울 점은 별로 없고 좋치 못한 점은 많았다. 밤거리에는 술에 취했는지 약에 취했는지 모를 불량청소년들이 괴성을 지르고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며 윤락여성들은 곳곳에서 진을 치고 있었으며 심지어 전화박스에 콜걸상업점의 전화번호가 소개되어 있으니... 술 한잔 마셔 보려고 생맥주집에 갔을 때에도 말이 안 통해 안주를 못시켰건만 지랄하는 폼새가 안주 덜 시켰다고(인원수에 비해) 손님에게 성질까지 내니 그놈들도 별놈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 산에서는 많은 점을 느끼고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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