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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벽있는 곳이면 지옥도 간다. (월간 사람과 산 90. 1호게재)
정해선 기자
겨울이 되어 신나는 청악
청악산우회는 85년부터 본격적인 빙벽트레이닝을 쌓았다. 그후 86년 구곡폭포드반, 그해 2월 토왕폭을 처음 등반했다. 그리고 최근 3년간 빙벽등반에서는 내노라 하는, 이제 더 오를 곳이 없다며 기염을 토하고 있다.
지난 겨울에는 설악산소승폭포와 소토왕폭포를 초등했다. 대승폭, 그리고 토왕폭은 트레이닝 삼아 수시로 오르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빙벽등반을 리드하는 세력이 바뀌어 버렸고 이제 겨울철 빙벽은 '청악'을 빼고는 얘기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저희는 산우회입니다. 책에서나 다른 클라이머들이 차꾸 정악산악회라고 하는데요. 먹고 놀기 좋아하고 등반보다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더 우선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산우회가 좋아요. 꼭 그렇게 불러주십시오."
8년째 회장을 맡고 있는 장기활씨(38세)의 말이다. 이에 원종민회원이 혹시 노는(?) 산악회로 받아들이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인지, 청악산우회의 세가지 특징을 이렇게 덧 붙였다. 첫째 금욕이라는점, 둘째 학구적인 태도, 셋째 화기애애한 분위기.
8년 전 입회했다는 원씨는 처음 겨울산행을 따라나섰다가 '저녁 7시 취침, 새벽 2시 기상'에 놀랐다고 했다. 저녁에 전혀 술은 오가지 않았고, 한 밤중에 기상해서 고생스럽기는 했어도 그리하면 등반을 그만큼 단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몇 년 전부터는 술이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초창기 맴버들은 아직도 산행을 앞두고 술먹는 일에 대해 썩 마땅치 않은 눈치다. 금욕적인 알피니즘의 추구라고나 할까.
학구적인 태도, 단지 빙벽만 잘하는 이들이 아니다. 한때 반짝하고 마는 명 짧은 클라이머가 되지 않기 위해 체계적인 훈련은 물론, 이론공부까지 열심이다.
올해 처음 시도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들은 회원들에게 분기별로 필기시험을 실시하고 있다. 이미 2번을 치루었는데 문제가 상당히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낙제생은 별로 없다.
이들 회원명단 아래에는 시험점수, 산행성적, 집회참석 상황 등이 기록되어 점수가 매겨지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이 '분위기'라고, 거의 매일 만나는데 뭐가 그리 '화기애애' 할까? 1주일에 한번 집회, 토.일요일 산행, 요사이 훈련까지 하고 있으니 매일 만나는 셈인데도 어쩌다 며칠 빠지면 보고싶어 못견딘다고 한다.
후배들에게는 아낌없는 지원을, 선배에게는 신뢰를, 동기에게는 깊은우정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10주년 맞아 새롭게 활동
청악산우회는 1971년 12월 박상국, 박문열, 이건한씨 등 5명으로 창립되었다. '알피니즘의 추구'라는 가치 아래 등반활동을 시작한 후 현재의 장기활, 김종선씨 등이 73년 가입하면서 산행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이후 주요 맴버의 군입대, 사회진출 등으로 구심점을 잃으며 존폐의 위기에까지 처하게 되었다. 70년 말, 군복무를 마치고 속속 청악으로 복귀했지만 오랜 격리 뒤에 오는 갈등과 대립으로 쉽게 화합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한때는 주요 맴버가 빠져나가 다른 산악회를 창립하기도 하는 분열을 겪기도 했다.
그러던 1981년 12월, 청악산우회는 창립 10주년 기념제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를 맞는다. 그간의 소강과 분열에서 벗어나 재건을 다짐한 것이다. 오늘날 청악의 구심점은 바로 이때의 추축멤버였다.
이후 청악은 후배들의 등반역량을 키우는데 주력했다. 기초에 중심을 둔 다양한 등반행위를 이론과 더불어 가르쳤다.
현명시, 원종민. 남동건 회원의 입회로 산행은 활력을 되찾게 되었고 체계가 정립도기 시작했다. 그러나 빙벽등반은 가르쳐줄 선배가 없었다. 고작 무지개폭포나 삼불사폭포에서 연습등반을 할 정도였다.
83년 초까지만 해도 구곡폭포를 못오른 이들이었다. 그나마 빙벽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황인규회원의 무지개폭포 추락사고로 팀은 더 한층 침체에 빠졌던 것이다.
83년 2월, 선배만 믿고 따라나섰던 구곡폭포, 다른 산악회 회원들이 자유롭게 오르내리는 이곳에서 청악은 중단부를 넘지 못한 채 후퇴하고 말았다. 그때 느꼈던 자존심의 상처, 하지만 선등을 한다고 나섰던 선배조차도 구곡은 첫등반이었다. 그만큼 청악은 기술등반, 적어도 빙벽에서는 뒤쳐져 있었다.
85/86년 겨울, 청악의 몇몇 회원들은 국내 최대의 빙벽인 토왕폭포를 오르고자 강촌 구곡폭포에서 한 달 여동안 집중 훈련을 했다. 팀의 풍부한 지원과 현명식, 원종민, 김운회, 김석근 회원의 불타는 정열로 한 맺힌 구곡을 총 187회에 걸쳐 10,000여 미터를 오르는 강훈련을 했다. 비로소 빙벽등반의 기초르 마스터함과 동시에 비약적이 실력으로 향상된 것이다.
그렇게 쌓인 자신감으로 토왕폭포앞에 선 청악회의 86년 2월 2일 현명식, 원종민 조가 6시간 27분이라는 기록으로 바라고 그리던 토왕폭포를 올랐다. 이어 또 한 차례의 시도로 김운회 현명식 조가 1차의 기록을 40여 분 단축시키며 올랐다.
이때 장기활 회장과 김종선 회원 등은 울어버리고 말았다. 너무 감격스러웠던 탓이다. 후배들이 그렇게 잘 해내준 데에 대해 뭐라고 고마워 헤야할 지 몰랐다. 자신들은 변변한 등반 한 번 못한 채 후배들을 맞지 않았던가. 그간 팀의 분열, 존폐위기등을 생각하면 더욱 더 값진 등반이라 아니할 수 엇ㆆ다.
소승폭, 소토왕폭 초등
84년 청악에는 순하디 순한 산사람 하나가 들어왔다. 청악을 빙벽등반의 선두주자로 내세워 준 장본인, 바로 김운회씨다. 이미 설악에서 단독으로 많은 산행을 했던 김운회씨는 청악의 눈에 띄어 입회했다. 그후 빙벽기술 훈련을 받자마자 천부적인 소질을 발휘하여 어디든 얼음있는 곳은 쉽게 올라버렸다.
86년 토왕폭을 경험한 후 자신을 얻은 그는 그후 겨울에는 내내 설악에 박혀 곳곳을 등반했다. 2달이건 3달이건, 얼음이 붙어 있을 때까지.
그리하여 토왕폭을 십수번, 대승폭은 두 번 올랐고, 지난 겨울 시즌에는 소토왕폭포와 소승폭포를 초등한 것이다.
88년 입회하여, 89년 김운회씨의 리드로 처음 토왕폭을 올랐던 조금석 회원이 김운회씨와 파터너를 이루어 지난 겨울 약 70여일 동안 서악산의 개토왕폭 7미터를 비롯, 곳곳의 폭포를 순례등반했다. 그 역시 타고난 빙벽선수였다.
청악은 89년 7월 대승폭 좌우벽에 코스를 개척하기도 했다. 빙벽 뿐 아니라 산행의 모든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자 하는 회원들의 욕심은 항상 새로운 것을 갈구하게 했다.
이외에도 팀은 직선종주등반을 자주 시도하고 있다. 이는 독도법과 지형을 익힐 수 있다는 것, 또 등반의 창조성이라는 견지에서 할만한 등비나이다.
초기 맴버가 73년 5월 마등령에서 귀때기청봉까지를 직선으로 연결하고, '귀마길'이라 이름지은 바 있으며, 88년 9월에는 화채봉에서 마등령까지를 김운회, 김선호, 김석근 회원이 역시 직선으로 연결하고 '화마길'이라 이름했다. 화채봉→칠선계곡→천불동계곡→칠형제릉→잦은 바위골→천화대→설악우골→마등령에 이르는 이 길은 2박 3일동안 주파 되었다. 이들 회원은 지난 동계에 이 코스를 1박 2일로 등반하기도 했다.
3년 영에 걸친 빙벽의 집중등반으로 수준 이상에 오른 몇 명의 회원들에게는 새로운 등반무대 혹은 샐운 시도가 불가피할 것이다. 특히 겨울등반에 강한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빙벽등반 시즌이란 길어야 2달 정도인데다 그 대상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귀결지어지는 것은 해외원정에의 욕구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입 열기를 꺼리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돈이 없기 때문이다.
"말이 앞서는 것은 질색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다소 폐쇄적이고 고집스러워 보일 것입니다만, 우리는 일단 뭔가 이루고 나서 그 다음에 알려졌으면 합니다. 알리고 나서 행동하는 것은 부담스러우니까요. 우리는 프로도 아니고 그저 산을 순수하게 사랑하고픈 아마츄어예요. 그냥 상황에 맞춰 그안에서 열심히 뛸겁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단계까지는 아니더라도 해외원정계획을 회에서 오르내리는 심상치 않은 문제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알파인 벽등반쪽이 그 대상지가 될 것이다.
솔로등반은 금기로
또 하나의 새로운 시도란, 등반스타일을 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솔로등반이라든가 겨울철 베르글라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벽등반 같은 것이다. 솔로는 역량있는 클라이머들에게는 상당히 모험적이고 매력적인 요소이며 후자의 경우 다양한 묘미를 맛볼 수 있는 등반형태이다. 청악팀은 후자의 등반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솔로등반은 철저하게 규율로 금지시키고 있다. 역량도 충분하고, 또 이미 몇 번의 솔로등반이 통왕폭에서 이루어진 바 있다. 하지만 청악은 그것을 말리는 것이다.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다. " 너무 위험합니다. 자신의 등반능력에 상관없이 외부적 가해요인, 즉 많은 팀이 함께 붙게 되는 경우 낙빙의 위험성이 너무 큽니다."
토왕폭의 겨울은 몇 년 전의 구곡만큼이나 클라이머들이 몰려 몇 팀씩 함께 등반을 하고 있다. 아무도 붙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붙겠다면 말릴 이유가없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조건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말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운회 회원은 '처음엔 하고 싶은 욕망이 강했지만 팀의 만류와 또 선배들의 말씀이 올은 것 같아 포기했다'고 했다.
올 겨울등반 계획은 묻는 기자에게 집히에 나와있던 회원들은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별 계획없는 건가'하는데 장회장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토왕폭에 10명이 동시에 붙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차를 약간씩 두고, 2인 1조가 되어 말입니다."
이계획은 청악의 빙벽등반 실력을 대외적으로 알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적어도 국내 최고의 빙벽클라이머가 청악에 10명 이상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될 것이므로, 그래서 그들은 계획 자체의 매력보다는 우수한 클라이머들이 많다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결과를 중요시 하고 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자랑
현재 청악의 회원은 29명이다. 여자 회원이 6명, 특히 김혜영씨는 자신의 표현대로 '얼떨결'에 피켈을 쥐어들고 토왕에 붙었고, 내려오느니 올라가는 게 쉬어서 하단을 끝내버린 맹렬 여성이다.
현재 회장을 지내고 있는 장기활 씨는 청악의 초창기 맴버로 장기집권으로 회장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일에 '의연하고 사려깊은 선비타입의 선배'라는 게 후배들의 평이다. 그리고 거의 같이 입회했고 대학 동기이며 청악의 우여곡절을 함께 겪은 김종선씨. 한때 팀을 이탈한 적도 있지만 영원한 청악의 사람이다. 독도와 지형에 능하며 뛰어난 지도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 아래로 현명식, 원종민, 남동건, 김석근씨가 중견 고참으로 열심히 조언하며 팀을 이끌로 있다. 이합승, 김우회, 조금석 회원은 실직적인 리더급으로 가장 황성하게 활동하는 회원들이다.
단시간에 톱클라스의 기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된 요인을 묻자 이?게 대답했다.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만, 그 용인은 선배들의 건전한 등반자세에서 나오는 자상한 지도와 보살핌, 첫 국곡폭포에서의 참담한 후퇴로 인한 쓰라린 상처, 현명식 회원이 집념, 김운회씨의 노력, 그리고 그외 청악의 모든 회원들의 따뜻한 팀웍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청악산악회는 12월 3일 창립 제 18주년 기념 산제를 가졌다. 일년 전에 지낸 산제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었다. '그동안 남에게 내세울 만한 등반 한번 한 적이 없고 그 흔한 해왜원정을 한 번 다녀오지 못했다. 그러나 또한 부끄러운 등반을 한 적도 없다. 그래서 아쉬움은 남지만후회는 결코 없다"라고.
그 얼마후 그들은 소승폭과 소토왕폭을 초등함으로써 '내세울만한' 등반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클라이머의 등반욕이란 한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청악의 몇몇 의욕적인 맴버들은 지금의 등반을 뛰어넘는 등반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만족할만한 가치란 어디에도 엇는 것이라면, 어디에서 등반을 하더라도, 또는 썩 훌륭하다는 등반을 했다고 해도 해위자체로는 만족될 수는 없는 것이다. 등반보다는 회원간의 돈독한 정,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우선 강조하는 이들 산우회가 시시하는 바는 크다 하겠다.
올 겨울 청악의 피켈과 함성이 어디서 울려퍼질지 기대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