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리[新里]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합덕읍 남동쪽 최남단에 있으며, 삽교천 연변에 펼쳐진 대평야 지대에서 벼농사 중심의 전형적인 수전 농업을 하는 마을이다. 평야 지대에 위치하여 대부분 농경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 남동쪽으로 삽교천이 맞닿아 있다.
명칭 유래
신리는 간석지를 인위적으로 개답하여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말, 신리(新里)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신리는 원래 홍주군 합남면 지역으로서,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하여 면천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합남면(合南面) 하개리(下介里)와 합북면(合北面) 도촌리(島村里), 하신리(下新里)를 병합하여 그대로 신리(新里)라 해서 당진군 합덕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 합덕면이 합덕읍(合德邑)으로 승격되었다. 2012년 1월 1일 당진군이 당진시로 승격되어 당진시 합덕읍 신리로 개편되었다.
자연환경
신리는 삽교천 서쪽에 연접한 지역으로 10m 내외의 저평한 해성 퇴적 간석지를 간척하여 만든 대평야 지대이다. 야산이 거의 없는 저평지이다. 대전리 쪽에서 남동류하는 대전천이 평야 가운데를 직선으로 흘러서 삽교천에 유입되며 예당평야의 일부이다.
자연 마을
신리는 원신리, 서뜸, 동뜸, 윗뜸, 신촌, 말바탱이, 상리반, 도촌, 신포장, 하개, 강개의 11개 자연 마을이 있다.
원신리(元新里)는 옛 면천군 합남면 신리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이전의 '원 신리' 지역을 말한다. 현재의 신리는 여러 부락이 합쳐져서 이룩된 마을이다. 원부락이라고도 부른다. 원신리에 서뜸, 동뜸, 윗뜸의 소부락이 있다. 신리는 원래 조선에서 가장 큰 천주교 교우촌이었으나, 1868년 오페르트의 덕산 남원군 묘 도굴 사건으로, 배가 지나간 삽교천 변의 신리 교우촌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피난하여 한 명의 신자도 살지 않는 마을로 변해 버렸다. 서뜸은 원신리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동뜸은 원신리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천주교 공소가 이곳에 있었으며, '순교 복자 기념비(殉敎福者紀念碑)'가 있다. 천주교 신리 공소가 있어 우강면 솔뫼 김대건 신부 탄생지와 함께 천주교인들의 성지 순례지가 되고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76호인 당진 신리 다블뤼 주교 유적지가 있다. 윗뜸은 원신리 위쪽에 있다. 신촌(新村)은 신리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약 60여 년 전 신촌 초등학교가 설립됨에 따라 새로 생겼다. 말바탱이와 상리반 등의 소부락이 있다. 말바탱이는 신촌 초등학교 근처 마을로 옛날에 말 매는 언덕이 있었다. 상리반은 신리의 서쪽 끝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와의 경계에 있다. 도촌(島村)은 옛 면천군 합북면 도촌리 지역으로, 원신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부락 지형이 섬처럼 생겼다. 섬말이라고도 한다. 신포장(新浦場)은 신리 위쪽에 있는 마을로 약 70여 년 전 삽교천 연안을 간척하여 새로 논을 만들었다. 상신(上新)이라고도 말한다. 현재는 가옥이 이주해서 없다. 하개(下介)는 옛 면천군 합남면 하개리 지역으로 대전리의 개안 아래 쪽이 된다. 신리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하신(下新), 하포(下浦), 아랫개안 등으로도 불린다. 가옥은 현재 이주해서 없고 전부 논으로 되어 있다. 강개(江介)는 섬말 동쪽에 있는 마을로 삽교천 변이 된다.
현황
2016년 현재 면적은 2.483㎢이며 인구는 83세대에 총 170명[남자 80명, 여자 90명]이다. 북쪽은 대합덕리, 동쪽은 삽교천 건너 예산군 신암면, 남쪽과 서쪽은 고덕면 상궁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76호인 당진 신리 다블뤼 주교 유적지와 나주 임씨 효열비가 있다.
오치 다다시치[越智唯七], 『신구 대조 조선 전도 부군면리동 명칭 일람』(중앙 시장, 1917)
당진군지 편찬 위원회, 『당진군지』(당진군, 1997)
『합덕읍지』(합덕읍지 편찬 위원회, 1997)
김추윤, 『당진의 지명 유래』(당진 문화원, 2012)
『1:25,000 지형도』(국토 지리 정보원, 2016)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당진신리다블뤼주교유적지[唐津新里-主敎遺蹟址]
정의
조선 후기 가장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던 교우촌이며 현재는 천주교 성지로 지정되어 있는 마을.
개설
신리 다블뤼 주교 유적지는 ‘신리 성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비록 정치적 상황이나 특정한 사건에 의해 신리 신자들이 박해를 받았을지라도 그들은 신앙 안에서 순교의 길을 갔다.
신리의 지리적 환경
신리는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에 속한 삽교천 상류에 위치한 마을이다. 지금은 평야 한가운데에 있지만 조선 시대에는 밀물 때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 신리는 인접한 거더리와 구분하지 않고 통칭하여 ‘신리’라 불리는데, 거더리에는 나루터가 있어 배로 외부와 왕래하기가 쉬웠다. 1860년대의 기록에 따르면 신리 일대는 온통 습지였으며, 우물이 없어 주변에 흐르는 소금기 섞인 물을 마셨다고 한다. 신리 앞을 지나는 삽교천의 상류로 조금만 올라가면 ‘고덕’이 나온다. 고덕에는 별암, 높은뫼, 한내 등 초기 교회 신자들이 거주하던 마을이 분포한다. 더 상류로 올라가면 덕산이 나오는데 그곳에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가 있다.
신리 신앙의 역사
신리에 천주교가 전해진 시기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세례를 받은 1784년보다 약간 늦은 시기였다. 신앙이 전파되자 신리에 정착해 살던 밀양 손씨 집안을 중심으로 교우촌이 형성되어 1866년 무렵에는 마을 사람 400여 명 전체가 신자인 교우촌으로 성장하였다. 신리는 해로를 통해 외부와 접촉하기 쉬운 조건, 그리고 내포의 여러 교우촌들과 쉽게 연결되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조선 천주교회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1865년부터 신리에는 제5대 조선 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거주하였으며, 프랑스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입국하는 거점이 되었다.
기록상 신리의 첫 순교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손경서[안드레아]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손자선[토마스] 성인이 공주에서 순교한 이후 서울, 수원, 홍주, 해미, 보령 갈매못 등에서 40명이 순교하였다. 이는 이름이 밝혀진 내포 지역 순교자들 중 10%에 해당하는 인원이다. 신리는 규모가 컸던 만큼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무명 순교자들도 많았는데, 인근 대전리 공동묘지에 있는 46기의 무명 순교자 묘소가 이를 말해 준다. 병인박해의 영향으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후에도 오랫동안 신리에는 신자들이 살지 못했다. 오랜 박해를 기억하는 주민들은 신자들이 신리에 들어와 사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 내포 교회의 중심이었고, 수많은 순교자들의 땅인 신리는 신자들 사이에서 회복해야 할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신리와 병인박해
병인박해는 흥선 대원군의 명령으로 1866년 시작되어, 흥선 대원군이 실각하는 1873년까지 계속된 박해를 말한다. 흥선 대원군은 서양 세력이 확장해 오자 위기의식을 느꼈고, 자신의 정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천주교 박해를 결정하였다. 비록 정치적 상황 속에서 박해가 시작되었을지라도 신자들은 신앙 안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신리에는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고 있었기에 관련 인물들이 먼저 체포되었다. 이웃 교우촌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가 자수하여 다블뤼와 함께 순교의 길을 갔다. 또한 다블뤼가 거처하던 집주인 손자선[토마스]과 사목 활동을 돕던 황석두[루카]도 체포되었다. 이들 중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복사는 1866년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였고, 같은 날 손자선은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이어 4명의 신자가 더 1866년에 순교하였고, 이듬해 1867년에는 6명이 순교록에 이름을 올렸다. 더 큰 박해는 1868년 무진년에 발생하여 신리 신자 19명이 순교하였다. 그해 4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원군 묘를 도굴하기 위해 덕산에 침입한 사건이 있었다. 오페르트 일행은 몇몇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신리 앞을 흐르는 삽교천을 이용하여 남원군 묘에 이르렀다. 도굴 작업이 실패하고 오페르트가 도망하면서 신리를 포함한 내포 지역 교우촌 전체가 붕괴될 만큼 피해를 입었다. 신리 성지와 관련한 무명 순교자들 대부분은 1868년 오페르트 사건 이후 생겼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듬해 1869년에 3명, 1870년에 1명, 연도 미상 1명이 추가로 순교록에 기록되었으나 더 이상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신리를 떠나 뿔뿔이 흩어진 신자들은 순교자들에 관해 증언할 형편이 못 될 정도로 어려운 삶을 살았다. 결국 이 박해로 신리 교우촌은 완전히 붕괴되어 한 사람의 신자도 살지 않는 비신자 마을이 되었다.
건립 경위
1890년대 들어 내포 지역에 성당을 설립할 여건이 갖추어지자 신리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1892년 프랑스 선교사 퀴를리에 신부는 신리에서 서쪽으로 2㎞ 떨어진 양촌[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성당을 세웠다. 양촌은 언덕에 있어서 신리가 내려다보이는 마을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신리에도 신자들이 생겨나 1923년 거더리[신리 포함]에 공소가 설립되었다. 1927년에 이르러서는 신자들이 다블뤼 주교가 기거하던 손자선 성인의 집을 매입하여 공소로 사용하였다. 현재 신리 성지 내 '주교관'이 그 자리이며, 주교관 내 천정의 대들보는 그 옛날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68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이 시복되자 신리에는 순교 복자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1984년 한국 천주교 설립 200주년을 맞으면서 천주교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신리의 중요성도 점차 부각되었다. 이에 따라 천주교 대전 교구에서는 2006년부터 신리 성지 전담 신부를 파견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으며, 2008년 12월 22일에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당진신리다블뤼주교유적지는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평야6로 135[신리 62-3]에 있다.
형태
당진신리다블뤼주교유적지는 평야 한가운데에 있는 마을로 성당과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현황
당진신리다블뤼주교유적지는 성당, 다블뤼 주교 기념관, 손자선 생가가 모여 있으며 전담 신부가 파견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당진신리다블뤼주교유적지는 조선 후기 천주교가 박해를 받을 때 가장 큰 교우촌을 형성하고 있으면서 선교사들을 도와 신앙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지금은 성지로 지정되어 순례하는 신자들에게는 신앙 성숙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일반 방문자들에게는 광활한 평야에서 느낄 수 있는 내면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김성태, 『당진 신리 교유촌의 교회사적 성격』(공주 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10)
김정환 엮음, 『내포 천주교의 역사와 문화』(당진시·내포 교회사 연구소, 2012)
『내포의 천주교와 성지』(충청남도 역사 문화 연구원, 2015)
출러:(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4-10-2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