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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전승은 알리칸테성이 1248년에 정복되었다고 전하지만,[22] 역사가들은 이를 역사적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본다.[23] 알폰소가 이 도시를 장악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1252년 알라칸트 시의회를 설치하는 특권장을 내린 때부터다. 얼마 뒤 비날로포의 도시와 요새들은 동생 마누엘 왕자의 영지로 편입되어 비예나 영주령이 형성되었다. 아라곤의 하이메 1세는 딸 비올란테와 콘스탄사의 혼인 지참금 명목으로 카스티야가 이 지역들을 보유할 권리를 인정했고, 알폰소는 우호의 표시로 아라곤 국왕이 언제든 알리칸테를 되찾을 권리를 인정했다.[24]
세비야 함락 2년 전 알폰소는 하이메 1세의 딸 비올란테와 약혼했으나, 결혼식은 1249년 1월 29일 바야돌리드에서 열렸다.[17] 왕비는 불임을 이유로 쫓겨날 뻔했지만, 1253년 알리칸테의 한 장소에서 휴양한 뒤 임신했다. 그곳은 이후 ‘좋은 휴식’(Buen Reposo)이라 불렸다.[25] 정략결혼이었기에 알폰소는 마요르 기옌 데 구스만과의 관계도 계속했고 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17]
1252년 5월 31일 페르난도 3세가 죽자, 다음 날인 6월 1일 알폰소 왕자가 카스티야·레온의 알폰소 10세로 즉위했다.[26]
국내 정치
알폰소 10세 때 라코루냐에서 주조된 빌론화 ‘노벤’. 라틴어 명문은 ‘카스티야와 레온의 화폐’라는 뜻이다.
알폰소 10세의 재위는 개혁의 시대였으며, 훗날 가톨릭 군주 시대의 근대국가로 이어지는 과정을 시작했다. 또한 왕관을 이루는 여러 왕국 가운데 카스티야가 우위를 차지할 토대를 마련했다.[27]
경제정책
1차 산업에서 가장 크게 발전한 부문은 이동식 양 목축업이었다. 이는 카스티야가 과달키비르 계곡을 병합하면서 촉진되었다.[28] 13세기 중엽 레온·세고비아·소리아·라만차의 주요 왕립 이동목축로가 확정되었다.[28] 가장 중요한 경제조치는 레온과 카스티야의 목자들을 통합한 ‘명예로운 메스타 목축업자 평의회’를 만든 일이었다. 목자들에게 병역 면제, 재판 증언권, 통행권과 방목권 등 중요한 특권을 부여했다.[29] 정확한 설립 연도는 알 수 없으나 1230~1263년 사이로 추정된다.[30]
왕의 반대에도 도시에서는 길드의 전신인 형제단이 성장했다.[31]
왕의 주요 경제목표는 무역 진흥과 통치 영역의 균질화였다.[32] 국내 거래세를 줄이는 한편 왕실 수입을 늘리기 위해 수출입 관세를 설치했으며, 대외무역이 통과할 도시도 지정했다. 공통 도량형 제도를 장려했고, 재위 중 종교 축일과 겹쳐 보통 일주일간 열리는 새로운 정기시장 스물다섯 곳을 설치했다.[33]
조세정책의 목표는 부왕 말기에 사실상 파산 상태였던 왕실 수입을 신속히 늘리는 것이었다.[34] 무역과 이동목축 같은 성장 산업에 새 세금을 부과하고, 특히 1264년 이후 ‘세르비시오스’(servicios)라는 특별기여금을 자주 요구했다.[35] 종전의 ‘페디도’와 달리 귀족과 성직자도 부담했으므로 큰 불만을 샀다.[36] 전반적인 조세 압력 증가는 도시 과두층의 반대까지 불러 1272년 귀족 반란의 한 원인이 되었다.[37]
법률 개혁
알폰소는 영지를 지배하던 다양한 푸에로(지역법)를 개정·통일하려 했다.[38] 첫 단계는 국내 도시들을 위한 《왕실법》(Fuero Real)의 편찬이었다. 법의 통일은 왕령 전체를 균질화하려는 정책의 일부였다.[39]
스페인 국립도서관의 호세 알코베로 작품 〈현왕 알폰소〉(1892).
《에스페쿨로》(Espéculo)는 《왕실법》과 같은 방향에서 작성된 최초의 통일 법전 초안으로, 참고용으로 도시들에 보내진 카스티야 법률 집성물이었다.[40] 1255년에 공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피사 사절단이 와서 알폰소의 제위 도전을 지지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왕은 법률가들에게 《에스페쿨로》와 로마·교회법을 토대로 더 확대된 법전을 만들게 했다. 이것이 1256~1265년에 편찬된 《칠부법전》(Siete Partidas)이다.[40] 그 질과 국내외 영향력 때문에, 법학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신학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저술이 차지하는 위상과 맞먹는다는 평가도 있다.[41] 1348년 알칼라 법령으로 현행법이 된 뒤 수세기 동안 카스티야 왕국과 스페인 군주국의 아메리카 영토에서 보충법으로 적용되었고, 19세기 민법전이 공포될 때까지 효력을 유지했다. 이런 경로로 코스타리카를 비롯한 여러 라틴아메리카 국가 민법의 역사적 선례가 되었다.[42]
알폰소는 새 법률뿐 아니라 아델란타도(국왕 대리 총독)와 제독 같은 관직도 만들었다. 이는 카스티야 함대의 중요성이 커졌음을 보여 준다.[43] 1253년 정복된 베티카 안달루시아를 위해 ‘안달루시아 대아델란타도’를 설치했고, 이어 무르시아에도 같은 직책을 두었다.[44] 이 직책은 카스티야와 레온의 메리노 마요르를 대신했다. 1260년대에는 안달루시아와 무르시아 관할을 합쳤다가 다음 10년대에 다시 분리했다. 알라바·기푸스코아 아델란타도도 두었다.[44] 이들은 본질적으로 관할지의 최고법관이자 항소심 법관이었고, 성 인수나 충성선서 같은 행사에서 왕을 대리했다.[45]
알폰소는 1188년 레온에서 처음 소집된 코르테스(신분제 의회)를 일상적인 통치 수단으로 활용한 최초의 카스티야 군주였다.[46] 재위 중 매우 자주 열린 회의에는 귀족·성직자·제3신분(도시 대표)의 세 신분이 참여했다. 제3신분이 배제되었던 종전의 왕실회의와 달랐다.[47] 코르테스 소집의 주된 목적은 특별 보조금을 얻는 데 있었으며, 왕은 새로운 재원 확보를 늘 걱정했다.[48]
알폰소의 관점에서 국왕은 ‘왕국의 머리’이자 ‘하느님의 대리자’였으나 세속권력에서는 교회로부터 독립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왕권을 최대한 강화하려 했다.[49] 왕은 입법자이자 최고재판관, 군 통수권자, 공공행정의 수장, 외교정책 결정자였다.[50] 알폰소는 옛 법과 전통적 특권을 집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법률을 혁신한 개혁군주였다.
그러나 국가가 개별 지역법에 점점 더 개입하면서 특권을 위협받은 시민층과 귀족층은 개혁에 반발했다.[38] 이 반발은 1272년 대규모 귀족 반란의 원인이 되었고, 왕은 양보하여 일부 지역이 《왕실법》을 버리고 옛 푸에로로 돌아가도록 허용했다.[38]
재식민·재정착 사업
이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은 옛 세비야 왕국의 재정착으로, 페르난도 3세의 정복을 공고히 했다.[51] 목표는 경제적 측면에서는 토지 이용을 개선하고, 군사적 측면에서는 취약 지점을 방어하는 것이었다.[51]
세비야가 항복하자 도심 주택과 주변 토지를 왕실군·귀족군 병사 및 카스티야 왕관령 각지 출신 사람들에게 분배했다. 무력으로 함락되거나 포위 끝에 항복한 도시에서 무슬림을 내보내는 방식은 일부 지역에서 토착 주민을 그대로 남겨 두는 방식과 병존했다. 하엔·코르도바의 산악 도시와 평야의 여러 마을은 협정으로 항복했다. 카스티야 측은 요새와 세금을 장악했지만 무데하르 주민은 일정한 정치·종교 자치를 유지했다.
이 체제는 1264년 무데하르 반란 뒤 유지될 수 없었다. 안달루시아에서 무슬림이 추방되고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인구 여력마저 고갈되면서 남부는 극도로 희박한 인구밀도를 보였다. 과달레테와 카디스만의 왕실 재정착 및 그라나다 국경 영주들의 사업도 이를 해결하지 못했고, 재정착민들은 결국 과달키비르 계곡의 대도시에 집중되었다.
가장 위험한 지점은 기사수도회에 맡겼다. 산티아고 기사단은 세구라 데 라 시에라·에스테파·메디나시도니아를, 칼라트라바 기사단은 마르토스·알카우데테를, 알칸타라 기사단은 모론을 받았다.[52] 왕은 지방자치단체도 강화했으며 이 지역의 중심은 세비야였다.[53]
무르시아도 비슷했으나 1264년 반란 뒤 무데하르 추방은 없었다.[54] 카스티야인·아라곤인(일부 지역에서는 45%)·피레네산맥 이북 출신자(주로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무데하르·유대인 공동체가 공존했다. 빈곤 지역은 거의 무인지경이 되었고 무데하르와 그리스도교도 일부가 떠났다.
알폰소는 북부와 반도 내륙에 새로운 도시와 ‘폴라/푸에블라’를 세우는 ‘내부 재정착’도 추진했다.[55] 여러 유형의 영주권이 우세했던 지역에서 왕실 직할 사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56]
무데하르 반란
세고비아 알카사르에 전시된 알폰소 10세의 상상 초상화.
재위 초인 1253년부터 새로 편입된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58] 세비야 근처 테하다와 레브리하·아르코스·메디나시도니아·헤레스가 봉기했고, 헤레스는 1261년까지 저항했다.[59]
니에블라와 헤레스 데 라 프론테라는 페르난도 3세에게 복속한 지 몇 해 만에 알폰소 10세가 남은 자치권마저 무력으로 빼앗는 것을 보았다.[60] 헤레스는 한 달간 포위된 뒤 1260년 말이나 이듬해 초 정복되었다. 니에블라는 1262년 2월 쉽게 함락되었고, 영주는 세비야로 가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61] 무슬림 주민들은 추방되었으며 세비야와 같은 재정착 사업이 시행되었다. 같은 해 푸에르토 데 산타마리아와 카디스의 재정착도 시작됐다.[62]
이 정복과 더불어, 페르난도 3세의 원정 때 저항 없이 항복한 안달루시아·무르시아 무슬림들과 맺은 협정을 위반한 일들이 겹쳐 1264년 그라나다 왕의 지원을 받은 남부 무데하르 주민들의 공동봉기가 일어났다.[62] 5월 헤레스에서 시작된 반란은 아르코스·레브리하·메디나시도니아로 퍼졌고, 무르시아에서는 로르카에서 시작됐다.[63] 안달루시아에서는 6개월 만에 거의 진압됐지만, 고립된 무르시아에서는 아라곤의 하이메 1세가 직접 지휘한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의 개입이 필요했다.[64] 하이메 1세는 1266년 1월 무르시아를 항복시켰고, 알폰소는 10월 다른 소도시들을 되찾은 뒤 반란의 중심 헤레스를 수복했다. 이 봉기로 많은 안달루시아 무데하르가 추방되거나 달아났고 과달키비르 농촌의 광대한 지역이 공동화되었다.[65]
교회와의 관계
알폰소는 교회를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다.[66] 고위 성직자 일부에게 주요 관직을 주고 교황청과 다른 궁정에 왕실 사절로 파견했다.[67] 세비야 대주교 라이문도 데 로사나는 왕의 핵심 협력자였다.
한편 교회 수입 일부를 차지하려 해 고위 성직자들의 불만을 샀고, 그들은 왕실 조세정책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과 가까워졌다.[67] 그러나 아버지 페르난도가 무슬림 전쟁 비용을 위해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서 받은 ‘왕실 3분의 1세’를 유지하는 데는 성공했다.[68] 이는 왕실 재정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독일 황위 주장을 최종 포기하자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보상으로 6년간 왕국 교회 수입의 10분의 1을 주었다.[69] 하지만 어느 교황도 독일 왕위 요구를 단호하게 지지하지 않았다.
귀족과의 관계
왕과 귀족의 관계는 여러 단계를 거쳤지만, 전체적으로 귀족 세력은 알폰소 시대에 더 강해졌다.[70] 정복된 안달루시아와 무르시아의 토지분배에서 대귀족 ‘리코스옴브레스’가 넓은 영지를 얻었고, 대지주들이 점점 더 많은 사법권을 장악하면서 영주제도 확대되었다.[71]
주요 가문은 서로 경쟁하던 라라와 아로였고, 그 밖에 카스트로·구스만·만사네도·메네세스·프로일라스·살다냐·카메로스·히론·트라스타마라·리미아 가문이 있었다.[72] 모두 광대한 영지와 많은 수입, 궁정의 핵심 직책, 폭넓은 혼인관계를 누렸다.[73] 대귀족 일부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경제·정치 조치에 반대했다.
첫 충돌은 1255년 하이메 1세와 알폰소의 동생 엔리케가 지원한 디에고 로페스 3세 데 아로의 반란이었다.[74] 비스카야와 안달루시아를 중심으로 한 반란은 진압되었다.[75] 다음 주요 귀족 반란은 왕과 귀족의 화해기가 끝난 1270년에 일어났다.
왕실 가족과의 관계
국왕의 형제들은 대체로 그에게 해를 끼쳤다.[76] 엔리케와 파드리케는 반란을 일으켰고 파드리케는 왕명으로 처형되었다. 펠리페도 1272년 반란에 가담했다. 산초는 톨레도 대주교가 되었으나 곧 죽었다. 막내 남동생 마누엘은 오랫동안 충실한 동반자였지만 재위 말년에는 조카 산초를 지지하며 반란에 가담했다.[77] 페르난도 3세의 두 번째 아내에게서 태어난 이복형제들 중에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 에드워드 플랜태저넷과 결혼한 레오노르만 왕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외정책알가르브 문제
알폰소 10세는 재위 내내 ‘알가르브의 왕’을 자칭했다. 그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몬데하르 후작 등은 포르투갈 산초 2세가 1246년 동생 알폰소 3세에게 맞서 자신을 도운 대가로 알가르브를 주었다고 본다. 조제 마토주 등은 리스본 남쪽 땅에 대한 주장이 포르투갈 군주보다 봉건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반영한다고 본다.[78] 니에블라 왕에게서 얻은 권리에서 유래했다는 견해도 있다.
알폰소가 즉위한 뒤 두 왕은 알가르브 지배권을 놓고 전쟁했다. 1253년 포르투갈 왕이 알폰소의 사생녀 베아트리스와 결혼하고, 그 사이의 아들이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알폰소가 알가르브의 용익권을 갖기로 합의하면서 분쟁이 끝났다.[79][80] 알폰소는 이 지역 기사 50명의 종신 봉사와 토지 수여권도 얻었다.[21]
1260년 ‘알가르브 왕’을 공식 칭호에 더했으나, 1263년 4월 조약(1264년 비준)을 맺어 군사적 봉신 의무를 받는 조건으로 용익권을 외손자이자 포르투갈 후계자인 디니스에게 넘겼다.[81~84] 1267년 바다호스 조약은 이 군사 의무를 폐지하고 국경을 과디아나강으로 정했다.[84] 이후에도 알폰소는 옛 니에블라 타이파 영토를 가리키는 의미에서만 알가르브 왕 칭호를 썼다.[80] 포르투갈의 알폰소 3세는 1268년 3월부터 ‘포르투갈과 알가르브의 왕’을 자칭했다.[85] 알폰소의 양보는 이웃 왕국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것이었다.[86]
나바라와의 관계
재위 초기 나바라와의 관계는 긴장되어 있었다.[87] 프랑스계 군주 테오발도 1세가 왕국을 프랑스 쪽으로 기울게 했고, 카스티야의 공격을 우려한 나바라는 아라곤과 동맹했다. 알폰소는 1254년 봄 잉글랜드와 협약을 맺었다. 잉글랜드가 노리던 가스코뉴에 대한 잠재적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잉글랜드는 나바라 문제에서 협력하기로 했다.[87] 동맹을 강화하려고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 에드워드는 같은 해 부르고스에서 알폰소의 누이 레오노르와 결혼했다. 카스티야·나바라 관계는 나바라를 사실상 카스티야의 보호국으로 만든 테오발도 2세 때 개선되었다.[88] 아라곤과도 관계가 나아져 1256년 정복왕 하이메 1세와 우호조약을 맺었다.
프랑스와의 접근
1266년 알폰소는 아들이자 후계자인 페르난도를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딸과 결혼시켜 프랑스와의 관계를 강화하기로 했다.[86] 페르난도와 프랑스의 블랑슈는 1269년 11월 말 부르고스에서 결혼했다.
그라나다와의 경쟁 및 마린 왕조와의 전쟁
남부 이슬람 세력과 마그레브를 겨냥한 첫 조치는 1260년 여름 알카나테에 해군기지를 세운 일이었다.[89] 이어 그해 9월 카스티야군은 살레항을 점령해 며칠간 약탈했다.[90]
그라나다와의 관계는 불안정한 협정과 거의 끊이지 않는 충돌로 긴장되어 있었다.[91] 알폰소가 일부 지역 수령을 지원해 나스르 왕조를 약화시키려 하자, 그라나다의 에미르는 카스티야 반항 귀족들을 선동했다. 1264년에는 반란 세력을 지원했다.[63] 1265년 잠정 합의가 있었으나 긴장은 끝나지 않았다. 무함마드 이븐 나스르가 죽자 아들 무함마드 2세는 매년 30만 마라베디를 바치기로 했지만 적대관계는 계속되었다.
1275년 나스르 군주의 사주를 받은 마린 왕조군이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했다.[91] 타리파와 알헤시라스를 점령하고 에시하 전투에서 카스티야군을 격파한 뒤 하엔·세비야 지방을 휩쓸고 해협 남쪽으로 철수했다.[92] 휴전은 1277년에 끝났고, 마린군은 알하라페를 황폐화하고 코르도바를 포위했다. 안달루시아 도시들이 요청한 평화를 술탄이 받아들였다.[93] 1278년 알폰소는 적의 도하를 막으려고 알헤시라스를 정복하려 했으나 함대가 패하고 포위전도 실패했다.[93] 알폰소와 산초는 계속 그라나다를 압박하여 공물 납부를 재개시켰지만 문제는 재위 말년에 다시 불거졌다.[94]
제국 사업(Fecho del Imperio)
1256년 알폰소 10세는 소리아에서 피사 공화국 사절단을 맞았다.[95] 그들은 홀란트의 빌럼 사후 공석이 된 ‘황제’와 ‘로마인의 왕’ 후보로 그를 지지하겠다고 제안했다.[96] 어머니를 통해 호엔슈타우펜 가문 혈통을 이은 알폰소는 제국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97] 그는 제안을 받아들여 외교관·자금·심지어 병력을 이탈리아의 기벨린 도시들에 보내 지지를 모았다.[98]
그러나 카스티야에서는 귀족들이 막대한 돈과 병력 요구에 반대했고 소리아 귀족들은 ‘소리아 음모’라 불리는 폭동까지 일으켰다. 대외적으로는 제국을 약화시키려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반대했다. 황제는 일곱 선제후가 뽑았다.[99] 1257년 1월에는 잉글랜드 후보를, 4월에는 카스티야 후보를 뽑는 두 차례 선거가 있었다. 세 명은 잉글랜드 헨리 3세의 동생 리처드에게, 네 명은 알폰소에게 표를 던졌다. 리처드는 곧 아헨으로 가 5월 카롤루스 대제의 무덤 곁에서 대관했지만 교황 승인은 받지 못했다. 반면 알폰소는 자기 왕국에 머물러 선출의 효력을 주장할 기회를 잃었으며 독일 땅을 밟지 못했다.
이후 그는 교황에게 황제 대관을 받기 위한 교섭과 이탈리아·독일 지지자들에 대한 군사·재정 지원에 막대한 돈을 썼다. 1271년에는 이탈리아로 가려 했고 이듬해 경쟁자 리처드가 죽었다.[100] 그러나 1271년 그레고리오 10세의 선출로 제위의 꿈은 결정적으로 좌절되었다. 교황청이 결정을 미루는 가운데 1275년 보케르에서 교황과 회담한 뒤 결국 포기했다.[101] 교황은 이미 1272년 알폰소의 선출을 무효라고 했고 1274년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를 황제로 인정했다.[102]
이 시도에는 조상 ‘황제’ 알폰소 7세가 누렸던 옛 이론적 우위를 되찾아 반도의 다른 왕들 위에 서려는 뜻이 있었을 수 있다.[103] 다른 학자들은 십자군과 성지 정복으로 이어질 지중해 제국을 만들려는 구상이었다고 본다.[104]
해협 너머의 사업(Fecho de Allende)
재위 초 알폰소는 지브롤터 해협 너머까지 레콘키스타를 계속하려던 아버지의 계획을 되살렸다. 아프리카 침공용 함대를 만들기 위해 세비야 대조선소를 완공하고 해군 최고제독을 임명했다.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카스티야에서 십자군을 설교해 영적 혜택의 대가로 자금을 모을 허가도 받았다. 미래 마그레브 교구의 주교직까지 미리 정하고 북아프리카 여러 왕과 외교 접촉을 시작했다.
하지만 대규모 마그레브 침공은 실행되지 않았다. 몇 차례 약탈 원정과 고립된 해안 거점 점령에 그쳤다. 가장 유명한 작전은 1260년 여름 후안 가르시아 데 비야마요르 제독의 함대가 북아프리카 살레항을 약탈한 일이었다. 십자군의 주목표 세우타는 계속 이슬람 세력의 수중에 남았다.
어려웠던 말년
말년에 알폰소는 후계자의 죽음(1275), 귀족과 가족의 반란, 알헤시라스 정복 실패(1278), 마린 왕조의 침입 등 여러 실패와 불행을 겪었다.
1272년 귀족 반란
1272년 대귀족 반란은 1271년 초 레르마에서 열린 왕국 유력자 회합에서 모의되었다.[105] 국왕의 동생 펠리페 왕자와 여러 도시 대표도 참여했다.[106]
1272년 펠리페와 누뇨 곤살레스 데 라라가 이끄는 귀족 다수는 국왕에게 요구사항을 제시했다.[107] 핵심은 왕의 조세조치를 폐지하고, 주민과 봉신의 의무가 더 느슨했던 전통 푸에로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108] 왕의 관리들이 권력을 남용한다고 보았고, 왕령지에 새 도시를 세우지 말며 특별기여금도 줄이라고 요구했다.[106] 조세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부 성직자와 도시 과두층도 가담했다.[109] 비올란테 왕비의 중재와 왕의 양보로 화해가 이루어졌다.[110]
알폰소가 처음에는 요구를 외면하자 귀족들은 국왕과의 봉신관계를 끊고 봉건 군대를 거느린 채 그라나다로 망명하며 큰 피해를 일으켰다. 1272~1273년 후계자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는 나스르·마린 왕조와 전쟁 중인 어려운 상황에서 반란자들과 협상했고, 마침내 그들 및 그라나다와 평화를 이루었다.
1277년 음모
1272년 반란을 겨우 수습한 알폰소는 1277년 동생 파드리케 왕자와 유력 귀족 시몬 루이스 데 로스 카메로스의 음모에 직면했다.[110] 원인은 분명하지 않으나, 당시 왕의 병과 후계자의 어린 나이가 파드리케에게 왕위 찬탈을 꾀하게 했을 수 있다.[111] 회복한 왕은 주모자들을 처형했다.
왕위 계승 문제
장남이자 후계자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는 1275년 안달루시아의 새 북아프리카 침공군을 막으러 가던 중 비야 레알에서 죽었다.[112]
카스티야 관습법에 따르면 장자가 먼저 죽을 경우 왕위 계승권은 차남 산초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칠부법전》에 도입된 로마 사법 원칙으로는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의 자녀들이 상속해야 했다.[113]
왕은 처음에는 죽은 형을 대신해 이슬람 침입자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산초의 요구를 받아들이려 했다.[114] 그러나 아내 비올란테와 페르난도의 아이들, 이른바 ‘라 세르다 왕자들’의 외숙부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의 압력으로 그들에게 보상해야 했다.[115] 강한 성격 때문에 후대에 ‘용맹왕’이라 불린 산초는, 왕이 옛 후계자의 장남 알폰소 데 라 세르다를 위해 하엔에 별도 왕국을 만들어 프랑스 왕을 달래려 하자 아버지와 맞섰다.[116]
결국 산초와 귀족 다수는 1282년 반란을 일으켰다.[109] 산초는 바야돌리드에 코르테스를 소집해 아버지를 폐위하고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게 했다.[117] 왕비 비올란테와 마누엘 왕자, 귀족·성직자·도시 의회의 다수가 산초 편에 섰고, 병든 알폰소는 세비야로 피신했다. 반란자들은 다시 조세·법률 혁신을 문제 삼으며 옛 관습으로 돌아가자고 했다.[118] 반란은 알폰소의 재정·화폐정책을 무너뜨렸다.[119]
그럼에도 교황 마르티노 4세와 프랑스 왕은 알폰소를 지지했다.[117] 1282년 말 병에서 회복한 왕은 아들을 저주하고 유언으로 폐적했으며, 옛 적 마린 왕조의 도움을 받아 세력을 되찾기 시작했다.[120] 반란 귀족과 도시들이 산초 진영을 떠나기 시작하던 1284년 4월 4일, 현왕은 세비야에서 사망했다.[121] 폐적되었음에도 산초는 1284년 4월 30일 톨레도에서 왕위에 올랐다.
혼인과 자녀
아라곤의 비올란테와 결혼하기 전 두 차례 혼담이 있었다. 1234년 나바라의 테오발도 1세의 딸 블랑카 데 샹파뉴와, 뒤에는 계모 후아나 왕비의 동생 펠리파 데 퐁티외와 약혼했다. 두 번째 혼인을 위해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1237년 8월 31일 관면장까지 내렸지만 두 약혼 모두 무산되었다. 1240년에는 비올란테와의 혼인이 합의되었으며, 1241년 1월 1일 아라곤의 하이메 1세 유언장에도 딸을 ‘카스티야의 저명한 왕의 장남 알폰소의 배우자’라고 적었다.
혼인 전 얻은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123]
1249년 1월 29일 바야돌리드 참사회성당에서 하이메 1세의 딸 비올란테 왕비와 결혼하여 열한 자녀를 두었다.[129]
결혼 뒤에도 어머니를 알 수 없는 두 자녀를 두었고, 1284년 1월 왕이 유언을 작성할 때 둘 다 미성년이었다.
조상
레온의 알폰소 10세이자 카스티야의 알폰소 2세의 계보.
문화 활동
알폰소는 세심한 교육을 받았고 지식욕과 문화에 대한 존중이 컸다. 어머니 슈바벤의 베아트릭스는 일찍 양친을 잃고, 아홉 언어를 구사하며 과학·문화를 보호하고 1224년 나폴리대학교를 세운 장차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 호엔슈타우펜의 교양 높은 시칠리아 궁정에서 교육받았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알폰소의 지식 열정을 《판단의 책》(Libro de los judizios, 3부 1~22)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리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정의와 온갖 선을 알고, 진실을 사랑하며, 학문을 탐구하고 가르침을 구하는 군주를 이 땅에 내려 주셨다. 그는 현자와 학문에 종사하는 이들을 사랑하여 곁에 모으고 은혜와 보상을 베풀었다. 각자가 익힌 지식을 분명히 밝히고 카스티야어로 옮겨 하느님의 이름에 찬미와 영광을 돌리고, 앞서 말한 군주 곧 고귀한 돈 알폰소 왕의 명예와 명성을 드높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세상에 태어난 이래 늘 학문과 학자들을 사랑하여 곁에 모았고, 훌륭하고 검증된 철학자들의 책이 부족해 라틴 학계에 생긴 큰 결핍을 밝혔다가 채워 주었다.
왕으로 즉위한 1252년 이전부터 알폰소 왕자는 갈리시아·포르투갈어로 풍자·악담 가요와 세속시를 지었다. 그중 44편이 전하며,[135] 성모 찬미가 일부도 그가 쓴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교훈적 우화집 《칼릴라와 딤나》를 카스티야어로 번역하도록 후원했다. 훗날 제노바 출신 보니파치 칼보, 카탈루냐의 아르나우 카탈란과 세르베리 데 지로나, 프랑스의 기라우트 리케르와 페이레 카르데날, 갈리시아의 아이라스 누네스·페로 다 폰테·알폰소 에아네스 두 코톤 같은 음유시인을 궁정으로 불렀다. 톨레도의 토드로스 아불라피아처럼 그에게 찬시를 바친 저명한 히스파노·히브리 시인도 있었다. 보카치오는 《데카메론》 마지막 날 첫 이야기의 중심인물로 그를 등장시켜 관대함을 칭송했다.[136]
알폰소 시대의 방대한 저술 가운데 법률서로는 《카스티야 왕실법》·《에스페쿨로》·《칠부법전》, 천문서로는 《알폰소 천문표》, 역사서로는 《에스파냐의 역사》와 보편사 《대(大) 일반사》 또는 《일반사》가 특히 중요하다. 《성모 마리아 찬가집》은 갈리시아·포르투갈어로 쓴 서정가요집으로, 악보와 당대 회화의 최고 수준에 속하는 화려한 삽화를 갖추었다. 《보석지》(Lapidario)는 광물의 성질을, 《놀이의 책》(Libro de los juegos)은 당시 귀족의 놀이인 체스·주사위·테이블 게임을 다룬다. 왕의 개입은 직접적이기도 간접적이기도 했지만, 그가 이 작품들의 설계자였음은 의심할 수 없다.
왕이 책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자기 손으로 직접 쓰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내용을 구성하고 고치며 다듬고 바로잡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방식을 보여 준 뒤 자신이 명한 사람에게 쓰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이 그 책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 현왕 알폰소 10세, 《일반사》 I, fol. 216r
즉 그는 저술 계획을 세우고 필요한 수단을 제공하며 구조와 내용에 관한 정확한 지침을 내렸고, 본문을 장식할 그림과 삽화까지 구체적으로 지정했다. 완성도 높은 저술을 향한 관심은 《점성술 지식의 책들》의 첫 논고인 《제8천구에 있는 고정된 별들의 형상에 관한 책》 서문에도 나타난다. 이는 1256년의 첫 번역을 1276년에 개정한 판본이다. 왕은 1256년 예후다 벤 모셰와 기옌 아레몬 데 아스파에게 번역을 명했다.
그 뒤 앞서 말한 왕이 이를 바로잡고 편집하도록 명하였다. 지나치거나 중복되고 올바른 카스티야어가 아니라고 판단한 내용을 덜어 내고, 필요하다고 여긴 내용을 넣었다. 언어에 관해서는 왕이 직접 바로잡았다. 다른 학문에는 메시나의 후안 스승, 크레모나의 후안 스승, 앞서 말한 예후다와 사무엘을 편찬자로 두었다. 이는 왕의 재위 25년에 이루어졌다.
알폰소는 히브리어·아랍어·라틴어 학자들을 모아 왕실 필사실을 만들었다. 이는 ‘톨레도 번역가 학교’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스도교도·유대인·무슬림이 협력하여 고대 문헌을 되살리고 아랍어·히브리어 문헌을 라틴어와 카스티야어로 번역하는 중요한 과학 사업을 수행했다. 이 작업으로 카스티야어는 과학과 문학 양쪽에서 확고한 교양어가 되었다. 또한 그의 재위부터 카스티야·레온 왕실 외교에서 상용되던 라틴어 대신 왕실 문서국 언어로 쓰이게 되었다.
세비야에는 라틴어와 아랍어를 가르치는 ‘스투디이’ 또는 일반학교를 세웠고, 1269년에는 수학자 알리코티가 이끄는 무르시아 학교를 창설했다. 살라망카(1254)와 팔렌시아(1263)의 일반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켰으며, 살라망카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대학교’라는 칭호를 지닌 학교가 되었다.
전설
국왕이 카스티야의 모든 여관에서 술과 함께 대개 말린 고기나 치즈 같은 적은 양의 음식을 내도록 명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세르반테스는 이를 ‘갈증을 부르는 것들’, 케베도는 ‘작은 경고들’이라 불렀고, 20세기에는 ‘타파스’라 불리게 되었다. 취기를 늦추고 선술집과 여관을 나선 뒤 벌어지는 싸움과 소동을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여러 기원 전설 가운데 이것이 가장 오래되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여겨지는 까닭은 알폰소가 미식가이자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식탁을 차리는 왕임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세속 가요 제44편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복하고 땅을 얻는 데 더 큰 힘을 지닌 왕들은 이곳에 있었지만, 좋은 음식을 내올 때 먹는 즐거움을 나보다 더 크게 누린 이는 없었으니…… 나는 훌륭한 음식을 먹는 데서 참으로 큰 기쁨을 누렸노라.[137]
이 전설은 왕의 헤레스 데 라 프론테라 여행과 연결되기도 한다. 세고비아 알카사르를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전설은, 왕이 오만하여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내가 곁에 있었다면 다르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신성모독을 했다고 전한다. 그 벌로 1258년 알카사르에 큰불이 나 궁정의 중요 인물들이 죽었으며, 다른 판본에서는 아들 산초 4세에게 왕국 대부분을 빼앗기고 세비야에서 소외된 채 말년을 보낸 것이 천벌이라고 한다.[138]
현재는 사라진 이 전설의 첫 판본은 13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272년 레르마 음모, 장차 산초 4세가 될 왕자의 반란, 후계자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의 죽음과 그에 따른 왕위 계승의 정통성 논쟁이 전설을 부추겼을 수 있다. 《알렉산드레의 책》 등 당대 문학은 자연을 알고 지배하려는 군주의 욕망이나 귀족에게 무모하고 값비싼 사업을 강요하는 일을 오만으로 비난하곤 했다. 알폰소의 제위 추구와 옛 ‘좋은 푸에로’를 억누른 《왕실법》·《칠부법전》도 그런 사례였다. 반항적인 중세 귀족은 왕권을 제약하고, 강한 국가제도를 세우려 한 재판관 같은 군주가 도리어 심판받고 논쟁거리가 되는 모습을 즐겼다. 이후 가톨릭 군주 시대부터 절대왕정의 왕들이 비로소 강력한 제도를 확립하게 된다.[139]
이 이야기는 구전으로 널리 퍼졌으며, 갓 태어난 왕자에 관한 예언을 어머니 베아트릭스에게 전하는 이야기로도 변형되었다. 문자 기록은 14세기에 나타난다. 《1344년 연대기》, 산토도밍고 데 실로스 수도원의 다른 연대기, 법률 문헌 사본(BNE 431)에 수록되었다. 포르투갈·아라곤·나바라·카탈루냐에도 기록이 있으며, 때로는 동명이거나 혼동된 페르난도 4세 ‘소환왕’의 일화로 돌려졌다.[140] 후기 사례 가운데 하나는 《현자 메를린의 외침》(세비야, 1535)이다.[141][142][143]
재위 계승
같이 보기
주
참고문헌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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