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기로가 송 선희와 이혼을 한 뒤, 이미 계약이 돼 있던 첫 번째 개인전도 끝내고 마음 정리도 할 겸해서 통나무집에 내려와 한 일주일 정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상범이,
"야, 기로. 저 집이 매물로 나왔는데(몇 년 뒤의 몽상을 가리키며), 그 집 땅과 함께... 너무나 좋은 가격이니, 니가 사면 되겠다." 고 하기에,
"넌, 불난 집에 부채질하냐? 내가 무슨 돈이 있다고! 더구나 이혼한 놈이 전시도 실패해서 빚더미에 앉았는데, 무슨 집?" 하고 약간 짜증스런 반응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그 말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그 전부터 기로는 통나무집 커다란 유리를 통해 보이던 그 집을 보면서는,
'아, 저 방에서 한 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통나무집 쪽으로 난 대나뭇살로 만든 봉창이 있는 방이 그에겐 아주 마음에 들었는데,
(물론 그 당시엔 다른 주민이 살고 있어서 기로가 그 방에 직접 들어가 본 건 아니었고, 그저 통나무집에서 보이는 외양만을 보고 느낀 것에 불과하지만)
어쩐지 그 안에선 화려할 수는 없겠지만 뭔가 고결하고도 가난한 한 선비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곤 했는데, 기로 자신은 그런 선비의 모습으로 재탄생해보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그 집을 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나는 돈 때문에 저 집을 살 처지가 못 되니, 가능하다면 상범이 니가 꼭 사놓아라. 그렇게 되면, 나중에 이 통나무 집과 어우러진 멋진 호숫가의 한 명당이 될 테니까." 하고 충동질까지 했는데,
그 말이 씨가 되었던 것일까?
그 얼마 뒤에 상범이 그 집을 사 놓았다는 연락을 해 와서, 기로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서 축하의 의미로 다시 둔터니 마을에 내려와 보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물론 그 때까지만 해도 이 집은 썩 괜찮은 상태였다.
게다가 그 때도 상범은, 더구나 기로가 이혼을 하고 서울에서 원룸을 세내어 혼자 살고 있었기에,
"그래, 이, 니가 좋아하는 집까지 사놓았는데... 어차피 이혼도 한 마당에 혼자 사는 몸이 되었으니, 이제 기로 니가 와서 살기만 하면 되겠네!" 하고 아주 자신있게 말을 했는데,
사실 기로의 입장에서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때 역시 기로는 서울 생활을 포기할 순 없었고 또,
'아직은 젊은 나이에 벌써 은퇴를 해?' 하면서,
상범에겐,
"집을 잘 보존하라."고만 했을 뿐 선뜻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 때 기로가 통나무집에 일주일 정도를 머물면서, 물론 둔터니에 오자마자 산장 집에 인사를 하러 갔는데도,
"또 내려왔군요." 한다던지, "다시 만나 반가워요." 라는 말이 나올 법도 했는데(그런 건 기본이니까.),
박 만석의 태도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기로도 이젠 슬그머니 부아가 나서,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할 수밖에 없었고, 이젠 점점 짜증까지 났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이 기로가 이곳에 내려와 보면, 그 아까운 집인 '몽상'은 꼼꼼하지 못하면서 대충대충으로 살아가는 상범의 특성 상, 그 아까운 집이 창고로 쓰이고 있는 등, 거의 방치해 두고 있어 조금씩 폐허로 변해가는 모습이었다. 그러니 마치 자신의 집처럼 안타까웠는데,
물론 기로는 내심, 혹시라도 자신이 이곳에 내려와 살 가능성에 대해, 항상 한 쪽으론 마음을 열어두고 있었기 때문에,
더구나 작년에 와서 보니, 이 집은 점점 폐가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 급기야,
'이러다 영영 이런 곳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겠구나......' 하는 한탄까지 하게 되었다.
더구나 기로 본인도 이제는 서울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그렇다고 계속 서울에 눌러 살아봤자 뭐 특별할 것도 없을 것이란 걸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이곳에 많은 관심을 갖고도 있던 시점이기도 해서,
"상범아, 사실... 나는 여기에 내려올 수도 있는 사람인데, 근데, 이 집이... 이제... 이 상태로는 사람이 들어와서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보인다." 하고 한숨까지 쉬면서, "니가 여태까지 노래를 불렀 듯, 나도 한 번 내려와 살 생각도 있으니... 사람이 살 수 있게끔 만들어 놓아라. 그러면 나도 내려오겠다." 하고, 언지를 주긴 했었다.
좋은 상태였을 땐 그저 무덤덤하게 보내더니, 막상 집이 폐허로 되려고 해서야 그런 말을 했던 자신에게도 약간 화를 내면서......
그러던 차, 그 얼마 뒤의 작년 가을 어느 맑고 아름다운 날, 상범은 이 곳에서 기로에게 전화를 걸어 와,
“야, 지금 여기가 얼마나 좋은지 아냐? 지금 당장 내려와. 그냥 이렇게 내버려두기엔 너무 아까워서 하는 말이니, 어서 와서 살아라. 이 좋고 아름다운 집을 왜 내버려두는 거야?” 하고, 마치 남 얘기하듯 상범이, 그러면서도 다그쳤던 적이 있는데,
기로는 이미 내려올 마음을 먹어둔 상태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당시에는 책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쓴 편지’ 출판 문제로 너무도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장 실행에 옮길 수는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 결정적으로 내려가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되는데,
서울에서 허덕이며 사는 생활도 싫었지만, 이래저래 삶에 지쳐있었던 기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에 뭔가 변화를 주어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던 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습잖은 대학의 시간강사 자리도 나가고 있었고, 책 출판 문제도 여전히 마무리가 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어쨌거나 이 일이 마무리가 되면... 이제는 떠나야지!' 하고 최종 결정을 하게 된다.
송 선희의 불륜 때문에 이혼을 한 뒤부터, 서울을 떠나고 싶었지만, 일단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을 갔다 온 이래, 뭔가 생활의 탈출을 위한 시도를 한답시고 도전했던 책 출간 문제로 1 년 여를 미적대는 바람에, 기로는 정말 피가 말라가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작년 말, 군산에 모친의 기일(12 월 중순)에 내려왔을 때,
“상범아, 집 좀 수리를 해 놔! 그러면, 내년에는 내가 와서 살 게.” 하고 최종적인 통보를 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공교롭게도 그런 일이 벌어지던 그 몇 년 사이에, 기로는 인터넷에 ‘화가의 일기’라는 제목의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둔터니에 내려가 살겠다'는 얘기는, 자신의 홈페이지 중의 한 핵심적인 창인(자신의 독백이기도 한)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쓰는 편지’ 창에도,
단 한 번 자신의 의향을 밝히지 않은 상태였다.
그건, 일을 진행하다 보면 혹시 어긋날지도 모르는 변수를 예방하려는 의도였는데(미리부터 동네방네 떠들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기로는, 그 일이 현실화가 돼서야 겨우,
'어쩌면, 내년 상반기엔 제가 어느 산골에 가서 살지 모릅니다.' 하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알릴 정도로,
그는 조심스럽게 그 일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기로는 서서히 서울을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시간강사를 때려 치우는 일이었다.
2002년 11월 중순 쯤 되자 2학기 수업도 마무리가 되었고,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대학을 나오면서 조교실에 들러,
"내년엔... 제가 수업을 하지 못할 겁니다." 하고 통보도 했다.
어차피 연말로 되면서 책도 마무리가 될 흐름이어서, 하나씩 서울 생활을 마무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학의 시간 강사를 때려친 것은 별 미련도 없었다. 게다가 책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쓴 편지'가 마무리된 것은, 정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이제 기로에겐 설사 시골에 가서 굶어 죽는다 해도(?) 아무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서울을 떠나기만 하면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이 세상에 있는 자유를 다 얻은 기분이었고, 그거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기로가 '둔터니'로 옮길 실행에 들어가자, 뭔가 이상이 감지되고도 있었다.
어째, 상범의 대답이 이 전과는 달리 명확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벌써 몇 년 동안이나 기로에게 '내려와 살라'는 말을 밥 먹듯 해왔던 상범이, 말만 했을 뿐... 정작 집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상태로 또 몇 달을 보내고 있었던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