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대성당 (사진출처- http://info.catholic.or.kr)
명동성당 건립은 1883년 무렵 김 가밀로의 명의로 종현(鍾峴) 일대의
대지를 구입하며 시작된다. 당시의 교구장 블랑(Blanc) 주교는 우선
신학생 교육을 위한 종현서당을 설립, 운영하였으며,이후 풍수지리설
과 관련하여 한국 정부와 토지 분쟁이 있었으나, 1890년 이를 마무리
지었다.
블랑 주교의 뒤를 이은 뮈텔(Mutel) 주교는 1892년 8월 5일 기공식을
갖고 한국 교회를 위해 일했던 주교와 선교사, 은인들의 명단을 머릿
돌 밑에 묻고 머릿돌을 축성하여 고정시켰다.
성당의 설계와 공사의 감독은 코스트(Eugene Coste) 신부가 맡아 진행
하였다. 그러나 1896년 2월 코스트 신부가 선종함에 따라 프와넬
(Poisnel) 신부가 업무를 이어받아 성당 건축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1898년 5월 29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당 축성식을 갖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봉헌하였다.
역사적으로는 한국 근대 건축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첫 고딕 양식
건축물(사적 제258호)로 기록되어 있다. 성당의 건축 과정에서
많은 신자가 무료로 노력 봉사를 하였으며, 성당의 건축에 쓰인
벽돌은 청나라의 벽돌공을 데려다가 만들었다. 1945년 광복을
기점으로 하여 성당 명칭은 종현성당에서 명동성당으로 바뀌었다.
명동 대성당
명동 대성당
야 경
옛날사진 (성당홈피 http://www.mdsd.or.kr/)
옛날사진 (성당홈피 http://www.mdsd.or.kr/)
옛날사진 (성당홈피 http://www.mdsd.or.kr/)
1898년 성당
옛날사진 (성당홈피 http://www.mdsd.or.kr/)
명동 대성당
예수님 상
성당 내부
성당 내부
제대
제대
제대
내부 오른쪽에 있는 제대와 성 베네딕토상
오른쪽 벽에 있는 명례방 공동체 그림 (출처- http://info.catholic.or.kr)
1785년초 서울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의 집 사랑 대청에서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형제와 이벽, 권일신, 이승훈 등이 모여 주일
집회를 갖고 있다. 경상 위에는 '천주실의'나 '칠극' 같은 천주교
교리서가 펼쳐져 있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수난상도 눈에 띈다.
왼쪽 벽에 있는 79위 복자화
그림속에 등장하는 79위 복자들은 모두 1984년에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하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 광장
에서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그때 성인품에 오르신 분들은
모두 103위입니다.
79위 복자들을 기념해 만든 제대
성세대
성체대
감실 등
강론대
성가대석과 파이프오르간
지하 성당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지하 성당 유해실
명동 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역에는 기해·병인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1900년 9월 5일에는, 1899년에
왜고개(瓦峴,현 용산 군종 교구청 인근)에서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에 안치되어 있던 베르뇌(Berneux, 張) 주교 등 7명의 순교자
유해와, 1882년에 남포 서들골(현 충남 보령군 미산면 평라리의 서짓골)
에서 발굴되어 일본으로 보내졌다가 1894년에 용산 신학교로 옮겨진
성 다블뤼(Daveluy, 安) 주교 등 4명의 순교?유해를 대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어 1901년 11월 2일에는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첫
입국해 기해년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의 형을 받은 후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된것을 순교한지 약 20일 후 칠팔 명의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세 분의 유해를 거두어 지금의 서강대학교가 소재한 노고산에 4년간
매장했다가 그 후 유해는 1843년에 삼성산으로 이장됐다가 다시 1901년
에 이곳 명동성당 지하 묘지로 모셔졌다.
1909년 5월 28일에는 남종삼(요한)과 최형(베드로)의 시신을 왜고개에서
발굴하여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들 중 훗날 복자, 성인품에
오른 이들의 유해는 1967년에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다시 옮겨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성당 지하 묘지는 성인들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성스러운 곳
이다.또 지금까지 지하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의 순교자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의 유해가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성모동산
성 모 상
종, 1967년에 제작된 것 (출처- http://info.catholic.or.kr)
2001년 부활절에 새로 제작해서 교체한 종
주교좌성당과 사제관 사이에 있는
한국 최초의 사제 순교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이 벽(세자 요한)
이승훈(베드로)
성 바오로
성 베드로
성 요한
성 야고보
사형선고 조각
성수대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sunghwa/11942532 [성화사랑]
명례방 공동체와 명동 대성당
100년 전인 1898년 5월29일.서울 남부 명례방(지금의 명동) 언덕
위에 세워진 명동 대성당(사적 제 258호)이 축성된 날이다. 당시
대성당의 건립은 지난 1세기 동안 박해를 받아 온 한국 천주교가
완전히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뿐만 아니라 '뾰족집'의 상징인 종탑은 이후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인들에게 평화의 의미로 이해되어 왔으며, 근래에
들어서는 민주화의 요람이요 억압받는 민중들이 해탈을 염원하는
장소로 여겨져 왔다.
바로 이곳의 복음사는 200여 년 전에 형성된 신앙 공동체로부터
시작된다. 1784년 봄 이승훈(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그 해 겨울,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세례자 요한)의 집
에서 형성된 신앙 공동체가 곧 명례방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성당 서쪽에 자리잡고 있던 명례방 마을에는 당시
김범우(토마스)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이벽의 집이 비좁아
집회 장소로 적당하지 않자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1784년 늦게 형성된 '명례방 공동체'는 이듬해 봄까지
유지되었으나, 형조의 아전들에게 공동체의 집회가 발각됨으로써
김범우가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를 당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을사년(1785)의 사건으로, 갓 태어난 한국 천주교회가
얻은 최초의 시련이었다. 명례방 공동체는 이렇게 하여 와해되고
말았다. 이어 김범우는 유배된 지 얼마 안되어 형벌로 인한 상처가
덧나 배소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요한 12,24-25).
김범우의 죽음은 앞으로 한국 교회가 얻게 될 수많은 혈세(血洗)
곧 '피의 세례'를 예견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한국
교회의 주춧돌이 순교자들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가장 아래
에 있는 주춧돌은 바로 김범우와 같은 초기 희생자들이었다.
을사년 사건 이후 명례방 공동체의 역사는 오랫동안 한국 교회사
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어느 기록에서도
명례방이란 이름 석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결코 그것을 영원한 역사의 단절로 남겨
두지 않았으니, 박해가 끝나 갈 무렵인 1882년부터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로 다시 터전을 잡게 되었다.
당시 한국 교회를 책임지고 입국한 제 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白)
주교는 명례방 언덕에 대성당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1882년부터 일대의
부지를 매입하는 한편 그 중 한 한옥에 종현 학당(鐘峴學堂)을 설립하
고 신학생들을 모아 기초 학문을 가르쳤다.
블랑 주교는 이 때부터 20여 차례에 걸쳐 부지를 매입하였다. 조선
정부의 방해, 일본인과 개신교인들의 질투도 이를 막지는 못하였다.
1887년 겨울에 부지 정지 작업이 시작되면서 신자들은 차츰 신앙의
자유를 찾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어 1892년 5월 8일에 제 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 주교는
대성당 정초식을 거행하는 기쁨을 맞이하였고,1898년 5월에 마침내
한국 교회는 40m가 넘는 종탑을 갖춘 길이 65m의 고딕식 건물을
갖게 되었다.
1900년 9월 5일에는, 1899년에 왜고개(瓦峴, 현 용산 군종 교구청
인근)에서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에 안치되어 있던 베르뇌
(Berneux, 張) 주교 등 7명의 순교자 유해와, 1882년에 남포 서들골
(현 충남 보령군 미산면 평라리의 서짓골)에서 발굴되어 일본으로
보내졌다가 1894년에 용산 신학교로 옮겨진 성 다블뤼(Daveluy, 安)
주교 등 4명의 순교자 유해를 대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어 1901년 11월 2일에는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신림동 소재)
에서 용산 신학교로 옮겨져 안치되어 있던 성 앵베르(Imbert, 范)
주교 등 3명의 유해를 지하 묘지로 옮겼으며, 1909년 5월 28일에는
남종삼(요한)과 최형(베드로)의 시신을 왜고개에서 발굴하여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들 중 훗날 복자, 성인품에 오른 이들의 유해는 1967년에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다시 옮겨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성당 지하 묘지
는 성인들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성스러운 곳이다. 또 지금까지 지하
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순교자 푸르티에
(Pourthie, 申) 신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의 유해가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2호(1999년 3월), pp.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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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곡
Antonio Vivaldi(1678-1741) - Magnificat Gloria RV589 중에서
Gloria in Excelsis Deo / New Philharmonia Chorus & Orches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