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복락의 종교-정의도 외곬 고집하면 병이 될 수 있어
기독교는 신의 말 기준으로 선악 구분
정의도 외곬 고집하면 병이 될 수 있어
기독교가 최후의 심판을 종장으로 생각하지만,
불교에는 그런 심판의식이 없다. 불교는 해탈하거나 윤회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말하기에 최후의 심판과 같은
선악의 영원한 양분을 말할 리가 없다.
기독교에서 선과 정의가 동의어인 만큼, 악과 불의도 동의어로 취급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정의의 종교겠다.
즉 기독교는 도덕주의적 종교다. 그 정의와 도덕의 기준은
신의 말씀으로서 늘 이분법적인 도식으로 제시된다.
선/악, 정의/불의, 진리/반진리의 이항대립에서
전자를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 곧 선이고 정의고 진리다.
그래서 기독교는 단정적이고 투쟁적이며 행동적이다.
선과 정의의 종교가 절대주의화 하면,
절대적인 것은 하나주의로 표변하면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광기로 탈바꿈한다. 이것이 종교전쟁을 낳는다.
서양은 예나 이제나 정의와 선의 이름으로 종교전쟁을 자주 일으켰다.
불교는 하나주의의 독성을 가장 철저히 중화시켜주는 종교다.
정의와 선도 외곬으로 고집하면 그것이 납덩어리가 되어
병이 된다는 것을 불교는 설파한다.
그래서 진리도 진리라고 내세우지 말 것을 『금강경』은 가르친다.
그것이 진리라고 남들 앞에서 주장을 하면,
이미 자기 자존심 때문에 남을 이기려는 아상이 일어나 아집이 생기고,
또 자기 말이 유일한 진리임을 설파해야 하기에
자기 말을 남에게 강요하는 법집도 함께 움튼다.
원효대사는 이런 아집과 법집을 다시 의식으로 자각되는 것과
자각되지 않는 것으로 나누었다.
진리와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얼마나 인간의 마음이
무의식적인 차원까지 돌보다 더 단단하고 무거운
집착의 응어리를 만들고 있는가를 원효 대사는 보여주고 있다.
불교는 사람들이 진리와 선이라고 여기는 집착마저 용해시킨다.
불교는 진리와 선과 정의를 광적으로 외쳐 세상의 불의를
뜯어고치겠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불교는 선악의 대결로서 우리의 마음이 요동치지 말 것을 가르친다.
선의 집착은 악의 집착처럼 우리를 미치게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래서 비선비악(非善非惡)을 가장 자유스런 마음이라고 말한다.
자유스런 마음은 깊고 고요하고 해맑은 마음과 다르지 않다.
그런 마음은 세상과 대결하지 않고 세상에 관여하는 마음이다.
관여하는 마음은
심색불이(心色不二=마음과 세상경계가 둘이 아님)라는
마명 보살의 말처럼 마음이 이미 세상경계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경지를 말한다.
관여하는 마음은 도덕주의적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의식이 아니고,
예술미학적으로 세상과 함께 존재하는 기쁨을 느끼는 복락의 마음이다.
일체가 함께 있다고 느끼는 마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원융하게 아름다운 교향곡처럼 듣는 마음과 다르지 않겠다.
중생의 눈으로는 세상사가 갈등과 모순에 가득찬 부조리이지만,
부처의 눈에서는 일체가 다 아름답고 찬란하고 원융하게 나타난다.
일체가 다 비로자나불의 아름다운 현신이다.
정의의 종교에서는 바깥 세상사를 뜯어고쳐야 하지만,
복락의 종교에서는 세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병이 세상의 병이 된다고 보므로 내 마음을 바꿔야 한다고 여긴다.
중생의 마음이 중생들에게 선과 정의를 외쳐본들
그것은 도토리 키 맞추기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세상의 불의를 심판하기보다 세상의 숨은 아름다움을 찾자.
불의의 심판보다 아름다움의 발견이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더 깊게 감동시키리라.
2007. 1. 24.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