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스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을 보는데 허락된 시간이 한 시간으로 보석을 본 뒤에 공룡등의 전시된 1층을 대충 둘러보고 맞은 편
에 있는 스미스 소니언으로 가서 둘러보면서 사진을 찍고 박물관 관람 시간이 끝나고 버스에 내렸던 곳으로 모이기로 한 장소로
간다.
1층에 있는 공룡화석 전시장
여러 종류의 공룡 뼈들의 화석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아마도 세계에서 제일 전시가 잘 되어진 것 같다.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 읽어볼 수는 없고 사진만 열심히 찍는다....설명서에 공룡의 이름과 공룡이 살았던 연대 표시가 있지만
읽어볼 시간이 없다.
공룡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파충류 화석(도마뱀)과 물고기 화석판
아이들도 많이 온다고...스미스소니언 여러 박물관 중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다는데 아마도 아이들 때문인 듯
거북이 화석도
바다에 살던 생물들의 화석이다.
익룡들도
스테고 사우르스와 스피노사우르스...위가 스테고 사우르스인데...아마도 같이 발굴이 된 듯
박물관을 나오는 길에...아르마딜로 화석도 보인다.
1층의 다른 공간의 전시된 아메리카 인디언.....공룡관만 보고 밖으로 나간다.
정면에서 본 자연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맞은 편에 있는 스미스 소니언 Castle...스미스소니언 협회 건물이기도 하다. 앞에 있는 동상은 스미스소니언 협회
초대 비서를 한 죠셉 헨리 교수(Professor Joseph Henry)의 동상이다.
스미스소니언 성으로 가면서 ...위싱턴 모뉴먼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고 다른 구경을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워싱턴 모뉴먼트(Washington Monument) ...워싱턴 국립추모협회(1838 창립)가 건립을 추진한 이 기념비는 1848~84년에 국민들
의 기부금과 연방 예산으로 세워져서 1885년에 준공했다. 로버트 밀스의 설계를 토대로 하여 메릴랜드산(産) 대리석으로 표면을
입힌 이 구조물은 16.8㎡의 바닥 넓이와 높이 169.3m, 무게 약 9만 1,000t에 이르는 화강암 오벨리스크이다.
이 기념비는 몰(Mall)의 서쪽, 링컨 기념관의 리플렉팅 풀 정동쪽에 위치한 43㏊에 이르는 대지 위에 세워져 있다. 남쪽으로는 타이
들베이슨이 있고 북쪽으로는 엘립스콘스티튜션가(街)를 사이에 두고 백악관과 떨어져 있다. 국립수도공원의 일부분으로 보호되
고 있는 이 기념비의 내부 벽에는 개인·도시·주(州), 그리고 외국에서 증정한 190개의 조각한 돌이 박혀 있다.
50개의 층계참과 898개의 발판으로 된 실내 철계단이 내부 꼭대기까지 설치되어 있으며, 엘리베이터를 타면 약 70초 내에 올라갈
수 있다.(백과사전)...우리는 사진만 찍는다.
자연사 박물관 주변 내셔널 몰....워싱턴 관광을 오는 사람들은 이 주변을 구경하게 된다.
스미스 소니언 협회 안의 공원
스미스소니언 성
정원에 놀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
정원이 여러개 있는데...시간이 없어서
정원에서 본 협회 건물
스미스소니언 협회 건물
참고로..
세계에서 가장 큰 박물관을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을 있게 한 사람은 영국사람으로 사생아로 태어난 설움 때문에 미국에다 자신의
재산을 기증하게 하여 그 돈으로 박물관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스미스소니언은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스미스슨(James Smithson)의 유산 50만 달러를 모태로 1846년 설립됐다. 당시 이 엄청난
기금을 기증받은 미국 의회는 약 10여 년간 논의한 끝에 스미스소니언을 발족했다. 사실 스미스슨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에 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는 노트와 일기 그리고 서신들이 1865년 스미스소니언 건물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애장했던 213권의 도서와 약간의 서신들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스미스슨은 1765년 영국의 대지주였던 휴 스미스슨(Hugh Smithson)과 그의 정부 엘리자베스 키트 매키(Elizabeth Keate Macie)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훗날 아버지 휴 스미스슨은 자신의 성(姓)을 퍼시(Percy)로 바꾸었지만 정작 아들인 제임스 스미스
슨의 성은 바꾸지 않았다. 엘리자베스와의 사생활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달갑지 않게 여겼던 부모 때
문에 제임스 스미스슨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성을 따라 자크 루이스 매키(Jacques Louis Macie)로 불렸다. 이 같은 출생 비밀은 스
미스슨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고, 훗날 스미스소니언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786년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스미스슨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해인 1800년 최연소 로열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발되었다. 어머니에게서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은 그는 1802
년 자신의 성을 매키에서 친부의 성인 스미스슨으로 바꿨다.
스미스슨은 평생을 이탈리아 플로렌스, 프랑스 파리, 스위스 알프스 등을 찾아다니며 자연 세계를 탐구하는 데 보냈다. 특히 그는
탄산아염의 실체를 규명하는 등 유럽 과학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사생아라는 그의 출생 비밀은 당시 보수적인 영국 사
회에서 ‘주홍글씨’나 다름없었다. 유무형의 냉대와 편견으로 스미스슨은 적잖은 마음고생을 했다. 그는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
인지 결혼에 회의를 품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스미스슨은 말년에 자신의 재산을 영국에 기증하려고 했지만, 영국 사회는 그가
사생아라는 이유로 호의를 거절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동생의 아들인 헨리 제임스 디킨슨에게 재산을 넘기면서 “만약 네가 자
손이 없을 경우 이 재산은 모두 미국에 보내라”라고 유언을 했다. 1820년 헨리 제임스 디킨슨이 후손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
나는 바람에 스미스슨의 전재산 50만 달러가 미국으로 보내졌다.
살아생전 한 번도 미국에 가본 적이 없던 스미스슨이 이 같은 유언을 한 이유는 사생아로서 영국 사회로부터 차별을 받은 데 대해
반감이 컸기 때문이다. 스미스슨은 유언에서 “내 재산은 대중의 지식을 발전시키는 기관을 설립하는 데 쓰여야 한다”고 못을 박았
을 뿐 아니라, “그 이름은 ‘스미스소니언’으로 해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아버지의 개명 전 성(스미스슨)에 ‘아들’을 뜻하는 ‘-
ian’을 붙인 것이다. 아무리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자신이 아들이라는 점을 알리고 싶어서였다. 유언 당시 스미스슨은 자신의 재산
이 오늘날 19곳의 미술관과 연구기관 등을 거느린 세계 최대의 박물관단지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스미스슨은 스미스소니언을 통해 ‘제임스 스미스슨이 휴 스미스슨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지구상에 공표하게 되었다. 생전 그
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질까 봐 노심초사했던 아버지에게 보기 좋게 복수를 한 셈이다.(사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