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 에스라는 유대역사 중 포로 이후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벨론 제국으로부터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는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는 시기 동안 스룹바벨의 지도하에서, 그리고 후에는 에스라 자신의 지도하에서 주목할만한 종교 개혁의 큰 역사를 이룬 시기의 일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탈 후기 포로시대의 예언서들로는 느헤미야와 에스더가 있는데 이것들은 그 당시의 역사를 취급하고 있고, 학개나 스가랴 및 말라기는 이 시대에 활동한 사역을 다루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들 모두가 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그리고 새 언약의 물결이 넘실대기 전에 계시된 모든 마지막 예언서들입니다. 앞으로 에스라를 묵상하면서 주님의 깊은 은혜의 바다로 여러분을 안내하겠습니다.
에스라 1:1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
에스라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먼저 1-6장까지는 바사왕 고레스의 통치 기간 중에 세스바살의 주관 하에서 이루어진 주전 538년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스룹바벨이나 예수아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7-10장은 주전 458년에 추가의 귀환과 더불어 에스라 자신의 귀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단락만이 서기관인 에스라 자신과 관련한 자서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일대기는 느헤미야서에서도 일부 계속 언급되고 있습니다.
다음의 기록은 그 당시의 일반적인 연대기를 말해주는 것들이며 연대는 대략적인 것입니다.
위대한 고레스 왕 주전 539-529 성전 재건축의 첫 번째 시도(537)
캄비세스 주전 529-522
가짜 스메르디스 주전 522
다리우스 1세 히스타스페스 주전 521-485 성전 재건축
크세르크세스 1세 아하스에로수 주전 485-464
아닥사스다 1 롱기마누스 주전 464-424 아닥사스다가 에스라를 예루살렘으로 보냄
다리우스 2세 노투스 주전 423-404
아닥사스다 2세 므네몬 주전 404-358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기록되어 있는 날짜들에 관하여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묵상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받아드려지고 있는 것을 토대로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정확하게 만족스러운 견해로 믿습니다. 즉 고레스왕, 다리우스, 크세르크세스 1세 및 아닥사스다 왕의 통치기간 중에 본 성경의 역사가 기록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에스라 1:1
다음의 구분은 G. 아담 스미스 박사가 설명한 것입니다.
1. 고레스왕에 의하여 명령되어 바벨론 포로들의 귀환과 다리우스 1세의 통치 제 6년에 성전 완성이 이루어진 그 시기 동안에 예언한 선지자들은 학개와 스가랴였다.
2. 성전 완성으로부터 아닥사스다 1세 통치 제 7년에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까지의 기간을 에스라는 다루고 있다. 이 기간은 때로 침묵의 시기라고도 한다. 이 기간 동안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했을 것으로 본다.
3. 아닥사스다 1세의 통치하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아의 활동을 언급하고 있다. 에스라는 458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으며 느헤미아는 445년에 도착하였다. 에스라서는 이러한 구분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레스왕이 주전 537년에 유대인들이 스룹바벨의 지도하에 귀환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과 에스라의 도착으로 인한 주 활동을 다루고 있는 이 성경을 통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귀한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에스라 1:1
에스라의 주제를 먼저 개괄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말씀 묵상에 도움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교훈하는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파악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제 일장은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하는 고레스 왕의 칙령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그 일을 위하여 헌금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 기구들을 고레스가 복귀하는 것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2장에서는 스룹바벨의 지도하에 귀환한 자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3:1-7) 번제단이 복구되었고, 제물이 붕헌되었으며 장막절 절기가 지켜졌습니다. 그 이듬해 두 번째 달에 성전 복구의 일이 시작되었습니다(3:8-23). 대적자들이 일어나 방해하였고(4:1-5), 그들은 성전 복구의 일을 망쳐놓았습니다. 성전 복구에 대한 반대는 수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결과 성전 건축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현상은 다리우스 1세의 통치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 답보 상태였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완전히 상실되었으나 학개와 스가랴는 무관심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워 다시 성전 건축에 박차를 가하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반대하는 무리들이 일어났고 급기야 다리오 왕에게 상소하기까지 되었습니다(5:1-17). 다리오 왕은 고레스 왕의 칙령을 살펴보고 다리오 왕도 그 일을 계속하도록 하락하였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전 516-15년에 성전은 완성되었고 봉헌되었으며 유월절과 무교절 절기가 지켜졌습니다(6:1-22).
에스라서 두 번째 단락에 해당하는 부분은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오는 것을 먼저 다루고 있습니다(7-8장). 9장에서는 백성들이 초창기에 가졌던 꿈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과 그 지역 주민들과 국제 결혼을 통해서 순수성을 상실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에스라의 슬픔과 탄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10장에서는 에스라의 개혁을 읽을 수 있으며 새롭게 하는 영이 역사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이번 주부터 살펴보는 에스라서입니다.
에스라 1:1-11
"2,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4,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5,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건축코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6,그 사면 사람들이 은그릇과 황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즐거이 드렸더라 7,고레스왕이 또 여호와의 전 기명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것이라 8,바사 왕 고레스가 고지기 미드르닷을 명하여 그 그릇을 꺼내어 계수하여 유다 목백 세스바살에게 붙이니 9,그 수효는 금반이 삼십이요 은반이 일천이요 칼이 이십 구요 10,금대접이 삼십이요 그보다 차한 은대접이 사백 열이요 기타 기명이 일천이니 11,금 은기명의 도합이 오천 사백이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 때에 세스바살이 그 기명들을 다 가지고 왔더라"
본문에서 우리가 먼저 배우는 명백한 교훈은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한 고레스 왕의 칙령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것입니다. 주전 586년에 유다가 포로로 잡혀가게 된 비극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들이 해방을 받아 귀환하는 그 사건의 배후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알아야 할 최선의 것은 이것입니다. 즉, 우리가 시련 중에 있을지라도 여전히 우리들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호 11:8-9)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벌하거나 멸망당하도록 버리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때가 되었을 때 주님은 이 세상의 일들을 발전 시켜서 자기 백성들에게 알맞은 상황을 만들어 가십니다. 주님은 고레스의 마음에 유대인들을 해방시켜줄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일으켜 이 목적을 이루도록 바벨론을 꺾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일으키기도 하시며 폐하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오늘날 국제관계 문제에 있어서 우리들이 바로 깨달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남북정상이 만나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인간사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임을 고백하시며 찬송하십시오.
하나님의 주권은 영적인 주도권이 항상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한번도 어둠의 세력에게 주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본 에스라서를 공부하면서 또 보고 또 볼 차원에서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대적자들을 만나게 되는 상황에서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혹자는 다니엘서 10장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의혹스럽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즉 다니엘의 기도가 상달되었음을 다니엘은 확신하였는데 어둠의 세력이 그 기도의 응답이 다니엘에게 오는 것을 제지하며 방해하는 것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사국(페르시아)군이 나를 막았다"(단 10:13)고 다니엘은 천사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페르시아군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드셨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며 온 천하를 그의 손안에 쥐고 운행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의 주권적 뜻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스라 1:1-11
어제 살펴본 말씀은 다른 차원에서도 적용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본 성경을 읽을 때갈수록 태산인 경우를 목도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이 침체의 나락에 빠지게 하며 큰 실망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그러한 상황이 어떻게 진전되기를 바라고 또 어떤 결과가 나오기를 열망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나타날 때 그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시편 126편에 흐르고 있는 정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사야 40-49장의 그 환희는 어디에서 찾아집니까?(사 41:10-19, 44:23-28, 49:18이하를 보라) 이 모든 약속들은 다 무엇입니까? 그 약속들이 실지로는 다 정반대의 현실로 나타날 때 성도들이 겪는 고통과 풍랑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여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항상 순조롭게 진행되어진다는 것 또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도들의 자유와 평안의 실제는 성도들이 경험하는 필수 불가결한 진리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나라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따라서 본국으로 돌아온 그들에게는 그들을 가로막는 모든 대적들과 장애물들을 맞서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그 자유를 자기들의 것으로 소유해야만 합니다. 힘을 다해서 쟁취해야만 합니다. 오래 참고 힘을 다하고 일편단심으로 주어진 자유를 간직하고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 일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그들을 오랫동안 영적인 비극의 처지로 전락시켜버린 상황을 개선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마치 지금 예수를 믿었다고 할 때 그는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죄와 싸워야 할 자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할 자입니다. 가나안 땅에 주어졌지만 그것을 자기들의 것으로 삼기 위하여 가나안 족속들과 싸워야 했던 것과 같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사 시대에 잃어버린 황폐한 것들을 다시 개선하는데 사무엘은 그의 전 생애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포로들은 바벨론 땅에서 안주하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땅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매우 낙관적으로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땅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가는 일은 타향살이하는 자들에게 엄청난 기쁨이었지만 그 일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현실은 심한 고통과 아픔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주저앉고 싶은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할 것은 영적 갱신은 대가를 치루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개혁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가능합니다. 반대하는 자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난제에 휩싸이며, 곤란한 일을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개혁이 성공을 거두려면, 변화가 일어나려면, 고통은 감내해야 할 일입니다. 후손들에게 좋은 것을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은 우리의 희생을 감수해야 하며, 반대자들이 있을지라도 전진해야 합니다.
에스라 1:1-11
위기와 기회의 시간에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은 그 시기에 적합한 인물들을 일으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인물들은 스룹바벨과 예수아, 학개, 스가랴 및 말라기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말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을 인도할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어려운 일들을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일을 하도록 격려하였고 도전하였으며 앞에서 이끌었습니다.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학개 2:2-9을 보면 다른 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들은 첫 번째 성전에 대한 기억을 살렸습니다. 그 옛날의 좋은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지은 이 성전은 그 당시의 성전하고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비교하는 곳에는 항상 위험이 따릅니다.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하나의 좋은 습관만 강조하다보면 도리어 그것이 부패의 요인이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이사야 40-49장에서도 하나님은 "내가 새 일을 이루리라"는 말씀이 반복되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전의 영광에 대하여 잘못된 것을 너무나 많이 생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성전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은 그들을 잘못되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옛날 것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새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위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옛날 것이 좋다고 옛날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새 것입니다. 새로운 갱신이 필요합니다. 어떤 특별한 양상의 갱신만이 아닙니다. 16세기나 17세기 또는 18세기의 부흥의 방식이나 교회의 영광이 21세기의 필요에도 매우 적합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크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으로도 우리에게는 충분한 것은 아닙니까?
에스라 1:1-11
우리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주권적인 행사는 자연적인 수단을 통하여 실시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고레스 왕이 포로로 잡힌 유대인들을 기꺼이 놓아주려고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하사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고 하였다고 고레스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레스는 과연 여호와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 자였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답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다니엘 5장에 나타나 있는 벽에 쓴 글씨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의 증언은 강력한 증거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 하에서 바벨론이 멸망당하게 되었고 다니엘을 통하여 하나님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계시하셨습니다. 본문과 다니엘 5장에 등장하는 벨사살에 의하여 성전 기명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점이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다니엘을 통해서 페르시아 제국 궁정에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간 한 시편 기자는 낯 설은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르랴?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고레스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들의 생각하고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방법으로 일하시며 우리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장차 이루어질 계획들에 적합한 것들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다니엘이 그의 서신 첫 장에서 자신이 받은 깊은 영향이 무엇이었는지를 더듬을 수 있습니다. 그는 초기부터 확고부동한 믿음의 자세를 흩트려 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와 그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진미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헌신과 결단이 때가 되어 일어난 귀환의 과정에서 나타난 회복의 단면이었습니다.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우리들의 영적 결단은 교회와 가정과 국가를 새롭게 하는 기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