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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세의 미인이 숨어 있는 설악산
육당 최남선은 『설악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설악산을 예찬하였다.
탄탄히 짜인 맛은 금강산이 더 낫다고 하겠지만 너그러이 펴인 맛은 설악산이 도리어 낫다. 금강산은 너무나 드러나서 마치 길가에서 술을 파는 색시같이 아무나 손을 잡게 된 한탄스러움이 있음에 견주어 설악산은 절세의 미인이 골짜기 속에 있되 고운 모습으로 물속의 고기를 놀라게 하는 듯 있어서 참으로 산수풍경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이라면 금강산이 아니라 설악산에서 그 구하는 바를 비로소 만족할 것이다. 설악산은 그 경치를 낱낱이 헤어보면 그 빼어남이 결코 금강산의 아래에 둘 것이 아니지만 원체 이름이 높은 금강산에 눌려서 세상에 알려지기는 금강산에 견주면 몇천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니, 이는 아는 이가 보면 도리어 우스운 일이다.
일찍이 매월당 김시습이 설악산에 들어와 오래 살았고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던 만해 한용운이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몸을 숨긴 곳이 설악산의 오세암(五歲庵)이었다. 한용운은 1896년 오세암으로 들어가 백담사를 오가며 10여 년을 살다가 백담사에서 머리를 깎았는데 그때가 1905년이었다. 내설악 백담사에서 마등령 사이에 있는 오세암은 다섯 살에 득도한 신동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이 암자에서 설정대사가 부모 잃은 조카를 기르고 있었는데 대사는 관음상을 가리켜 어머니라고 일러주었다. 조카가 다섯 살 되던 해에는 월동 준비가 늦어 늦가을에야 양식 마련에 나서게 되었다. 대사는 조카가 하루 동안 먹을 것을 마련해놓고, 다음 날 돌아올 작정을 하고 하산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큰 눈이 내려 계곡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대사는 속수무책으로 눈 녹기를 기다려 봄이 다 되어서야 암자로 돌아왔다. 그런데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그 어린 조카가 나와 반가이 맞으면서 말하기를 “어머니가 밥을 해주고 공부를 가르쳐주었습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때 흰옷을 입은 선녀가 나타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경전을 주고는 새가 되어 날아갔다. 그래서 아이는 득도를 했고, 그리하여 이 암자를 오세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 서응순은 다음과 같은 「오세암에서」라는 시를 지었다.
빈산 옛 절간에
목련이 혼자 피었네
동봉에 달 오르자니
열경(悅卿, 김시습의 자)이 와 섰는 듯이
내설악에 있는 영시암(永矢庵)은 조선 후기의 문장가인 김삼연이 세상에 뜻이 없어 찾아든 곳이다. 그는 『영시암기』에서 “다시는 인간 세상에 나가지 않기를 맹세하였다[인간출세위서(人間出世爲誓)]”라고 하였다. ‘영시’란 길이 맹세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그 당시 나라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살던 이곳 영시암을 찾았다고 한다. 그가 지은 기에 “혹 휴양하려는 사람이 먼 곳에서 다투어 몰려왔고, 혹 기(氣)를 기르려는 선비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라고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세태를 알 수 있다. 이곳에서 김삼연은 수많은 글을 남겼는데 다음의 시는 그중의 한 편이다.
내 삶은 괴로워 즐거움이 없고
세상 모든 일이 견디기 어려워라
늙어 설악산 중에 들어와
여기 영시암을 지었네
부친인 김수항이 사사된 후 설악산에 들어왔던 그가 이곳을 떠난 것은 6년 뒤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수발을 들던 노비가 호랑이에게 물려가 더는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제에서 고성군 간성읍 진부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진부령이고, 조선 중기 양양과 간성의 중요한 관로가 미시령이었다. 미시령은 한계령과 함께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르는 고개로 조선시대에는 미시파령(彌矢坡嶺)으로 불렸고 조선 중기 양양과 간성의 중요한 교통로였는데, 그 미시령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을 서남쪽 80리쯤에 있다. 길이 있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성종 24년에 양양부의 소동라령이 험하고 좁다 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에서 인제군 북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대간령이고, 양양군 서면 오색리 관터에서 인제군 기림면 진동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박달령 또는 단목령으로 불리는 고개였다. 고려 고종 때 김취려 장군이 고려를 침입한 거란 군사들을 원주에서부터 추격하여 이곳에서 섬멸했다고 한다. 남설악은 한계령, 망대암산, 점봉산에 이르는 지역으로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피서지로 삼았다는 대승폭포가 있다. 개성의 박연폭포, 금강산의 구룡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 중의 하나인 이 폭포 근처에 장수대ㆍ오색약수ㆍ오색온천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에 일찍 부모를 여읜 대승이라는 총각이 이 폭포의 절벽에서 자라는 석이버섯을 따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석이버섯은 바위에서 자라는 버섯인데, 설악산의 특산물로 험한 낭떠러지에서 드물게 볼 수 있다). 어느 날 대승이 절벽에 동아줄을 매달고 내려가서 석이버섯을 따고 있는데, 갑자기 죽은 어머니가 “대승아, 대승아” 하고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대승이 버섯을 따다 말고 동아줄을 잡고 올라가니 어머니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그가 매달려 있던 동아줄을 신보다 더 큰 지네가 갉아먹고 있었다 한다. 어머니가 부르지 않았더라면 벼랑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던 대승이 목숨을 건진 후 이 폭포를 대승폭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한계령의 동쪽 골짜기에서 시작된 물은 오색약수터를 지나 양양의 남대천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개울가의 바위를 뚫고 세 군데에서 솟아나는 오색약수는 1500년쯤 오색석사(五色石寺)의 한 승려가 발견했다고 한다. 다섯 가지 꽃이 피어 오색석사라고 불렸던 이 절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시인 박두진은 설악산을 두고 「설악부」라는 시 한 편을 남겼다. 다음은 그 일부다.
왜 이렇게 나는 자꾸만 산만 찾아 나서는 걸까?-내 영원한 어머니-내가 죽으면 백골이 이런 양지쪽에 묻힌다. 외롭게 묻어라. 꽃이 피는 때, 내 푸른 무덤엔 한 포기 하늘빛 도라지꽃이 피고, 거기 하나 하얀 산 나비가 날아라. 한 마리 멧새도 와 울어라. 달밤에 두견도 와 울어라.
한편 인제군 인제읍 귀둔리와 기린면 진동리 및 양양군 서면 사이에 위치한 점봉산(1424미터)은 남한의 마지막 남은 처녀림으로 불리는 산이다. 특히 남설악이라고 불리는 점봉산, 가칠봉 그리고 단목령에 둘러싸인 진동계곡 일대는 몇백 년 동안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원시림으로 전나무와 신갈나무 등 고사목들이 울창하게 숲을 덮고 있다. 금강초롱꽃, 모데미풀, 진부애기나리 등 36종의 한국 특산종과 울릉도에서 주로 자라는 섬말나리, 주목, 등대시호, 한계령풀, 점봉산엉겅퀴 등 희귀식물이 자라는 점봉산은 세상에 살면서 지친 사람들이 노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산 중의 하나다.
남설악 삼형제봉대청봉의 동북쪽에 있는 호채봉과 서쪽에 있는
귀떼기청봉, 대승령 그리고 안산을 경계로 그 남쪽을 남설악이라 한다.
출처:(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신정일)
설악산에서 이인을 만난 김창흡
신흥사를 품에 안은 설악산에서 이인(異人)을 만난 사람이 조선 중기의 빼어난 문장가인 김창흡이다. 삼연 김창흡은 기사환국이 있은 뒤로 명산을 두루 유람하였다. 장사꾼들 틈에 섞여 설악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소나기를 만났다. 잠시 바위 아래에서 쉬는데, 한 노인이 먼저 와서 앉아 있고, 한 승려는 잠을 자고 있었다. 김창흡은 시상(詩想)이 떠올라 쉴 새 없이 조그만 소리로 읊조리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노인이 말하였다.
“선비께선 아주 좋은 구절을 떠올린 모양이오. 그래서 얼굴에 기쁜 빛이 도는 게 아니오?”
“노인장께서 시를 아신다면 내 마땅히 말씀드리리다.”
“말해보시오.”
김창흡은 다음과 같이 읊고 나서 말하였다.
선산(仙山)을 한 번 보고 연분 없다고 알았는데[지(知)]
가을비 쓸쓸히 내려 마(魔)가 든 것이었네
“좋지 않소이까?”
“시구가 제법 좋소이다. 하나 ‘알 지(知)’ 자는 온당치 않소.”
“이 구절이 이 시의 핵심인데, 어찌 더 나은 글자가 있겠소?”
“왜 다른 글자가 없겠소? 선비께서 미처 생각을 못했겠지요.”
김창흡이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말하였다.
“무슨 글자로 고치면 되겠소?”
“‘아닐 비(非)’ 자로 한번 고쳐보시오. ‘알 지’ 자는 이 구절에서 말이 얕고, ‘아닐 비’ 자는 운이 길고 뜻 또한 심후하지요.”
김창흡은 깜짝 놀라 말하였다.
“노인장께서 시를 알고 계시니 틀림없이 좋은 시를 지으셨을 것이오. 외워서 들려주실 수 있겠소이까?”
“비가 벌써 갰소이다. 갈 길이 바쁜데 어찌 시나 읊고 있겠소? 저 스님이 시를 잘 지으니 이야기를 나눌 만할 게요.”
그러고는 마침내 옷을 떨치고 가버렸다.
김창흡이 잠자는 승려를 불러 깨우고는 말하였다.
“듣자니 스님은 시에 능하여 읊조릴 수 있다던데······ 좀 들려주시오.”
그 승려는 천천히 일어나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뜬구름같이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다니는 사람에게 무슨 전할 만한 시가 있겠소?”
“그러면 이 자리에서 한 편 지어보시구려.”
“선비께서 억지로라도 시킬 듯하니 한번 읊어보리다.”
승려는 즉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늙은 스님 바랑 베고 자면서
꿈에 금강산 길 가고 있는데
우수수 낙엽 지는 소리에
놀라 깨니 가을 하늘이 저물었네
승려는 읊기를 마치고 바로 가버렸다. 김창흡은 쉴 새 없이 그 시를 외웠다.
들은 이야기를 엮은 책이라는 조선 후기의 야담집인 『기문총화(記聞叢話)』 「김동욱 편」에 실려 있다.
출처:(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2012. 10. 5., 신정일)
‘국민 관광지’ 설악산
1억 년 세월이 조각한 대자연의 걸작
얼어붙은 눈 위를 매서운 바람이 할퀴듯이 지나갔다. 1월 20일 화요일. 한겨울의 평일이라 관광지의 썰렁한 겨울 정취를 느껴보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지만 설악산은 기대(?)를 배반했다. 외설악 소공원은 한산하지 않았다. 권금성에 오르는 설악케이블카는 여름처럼 몇 시간씩 기다리지는 않지만 정원을 꽉 채운 채 출발했다. 서서히 발밑으로 가라앉은 소공원과 신흥사, 그 위로 차례로 떠오르는 울산바위와 달마봉 등 기기묘묘한 암봉과 암릉…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탄성. 한국어·중국어·일본어의 ‘3색 감탄사’였다.
“설악이 아니라 벼락, 구경이 아니라 고경”
남한 제1명산으로 꼽히는 설악산은 말 그대로 ‘국민 관광지’라고 할 만하다. 주봉인 대청봉(1708m)이나 공룡능선 등정까지는 아니더라도 흔들바위나 권금성 정도는 누구나 한번쯤 가봤음직한 곳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북한의 금강산에 비유한 ‘남한 제일 명산’ ‘제2의 금강산’ 등의 수사는 설악산으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표현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금강산의 수려함에다 지리산의 웅장함을 함께 갖춘 설악산에 더 높은 점수를 주기도 한다. 소공원·신흥사·권금성 등 외설악 입구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영어·중국어·일본어 등은 그 명성이 남한을 넘어 이미 세계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설악산이 국민 관광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매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우선 입구부터 사람의 눈을 압도하는 경관이 자리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설악산은 굳이 그 비경을 감추지 않는다. 달마봉과 울산바위의 진기한 경관은 속초 시내에서도 보인다. 케이블카가 닿는 권금성에서는 집선봉, 노적봉, 만물상, 장군봉 등이 코앞에 펼쳐지고 멀리 공룡능선과 마등령, 세존봉, 황철봉까지 조망된다. 1971년 케이블카가 운행되면서 이런 장관을 남녀노소 누구나가 쉽게 즐길 수 있게 됐다. 계조암 흔들바위와 울산바위에 이르는 길도 등산 코스라기보다는 관광 코스라고 해야 할 정도로 짧다. 소공원에서 약 4km, 2시간이면 갈 수 있다.
<설악산>(대원사, 1993년)의 저자 손경석씨는 설악산이 금강산의 그늘에 가려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로 교통 불편으로 꼽았다. 금강산은 교통이 편리해 삼국시대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설악산은 그렇지 않았다. 첩첩이 이어지는 산길을 타고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한계령과 미시령을 지나는 지금의 도로가 열린 것은 각각 1971년과 1989년으로 아주 가까운 과거의 일이다. 44번 국도의 확장과 미시령 터널 관통으로 지금은 가기가 더욱 수월해졌지만. 교통뿐만 아니라 산세도 접근을 까다롭게 했다. 잦은 입산 통제와 조난 사고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설악산은 전문 산악인도 혀를 내두르는 산이다. 이중환은 “돌산과 돌샘으로 이루어져 깊은 골짜기와 위태로운 봉우리가 겹쳐진 묏부리”라고 묘사했다. 정철은 ‘설악이 아니라 벼락이요, 구경이 아니라 고경(苦境)이요, 봉정이 아니라 난정(難頂)이구나’라고 익살스럽게 꼬집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옛 사람들이 겪었던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권금성에 오르는 케이블카 말고도 4개가 더 설치될지도 모르니까.
바위에 새겨진 한반도 지형 형성의 드라마
설악산국립공원은 그 영역이 4개 시·군에 걸쳐 있다. 그 가운데 양양군은 대청봉, 속초시는 화채봉, 인제군은 대승령, 고성군은 울산바위에 이르는 케이블카(로프웨이)를 건설할 계획 또는 구상을 각각 갖고 있다. 10년마다 시행하는 공원구역 재조정 작업과 규제 완화 정책에 힘입어 각 시·군은 각종 개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금도 매년 300만 명이 찾는 ‘국민 관광지’에 사방으로 케이블카와 대규모 위락시설이 들어서면 설악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라 ‘유원지’나 ‘놀이동산’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신체적 조건이나 시간의 제약 때문에 깊숙한 곳의 절경을 접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반가운 일이지만 설악산은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우리의 자연 자원 가운데 하나다. 1970년 5번째 국립공원이 되기에 5년이나 앞서 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제171호)으로 지정되었고 1982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생물권보전지역으로 선정된 곳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따르면 공원구역에는 3489종의 동·식물이 분포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멸종위기종이 10종, 보호야생종이 29종, 천연기념물이 23종에 이른다. 고산식물 군락지인 대청봉 일원, 야생동물 서식지인 흑선동 계곡, 야생식물 군락지인 점봉산과 화채능선, 마등령~미시령 일원을 특별보호구로 지정해 2026년까지 출입을 제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생물자원뿐 아니라 독특한 지형과 지질 등도 명산다운 내력을 지니고 있다. 수많은 암석군과 폭포, 소 등으로 이루어진 변화무쌍하고 장쾌한 경관은 사람들의 기를 질리게 할 정도인데, 이는 화강암이 오랜 세월 풍화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화강암은 한반도에 가장 많이 분포하는 우리 국토의 ‘대표 암석’이다. 그런데 ‘신의 조각품’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암괴석과 암릉의 장관을 이루는 설악산과 그 가까이 있는 금강산의 화강암은 똑같은 게 아니다. 또 같은 설악산의 화강암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하면 설악산에는 한반도 지형 형성의 드라마틱한 과정과 비밀이 숨어 있다.
울산바위 전설의 기막힌 진실
속초시와 고성군의 경계를 이루는 둘레 4km, 높이 873m의 거대한 암체인 울산바위는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재미나는 얘깃거리를 갖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울타리 리’자를 쓴 이산(籬山, 울산이라고 읽기도 한다), 또는 지명을 따서 울산(蔚山)으로 적고 있고 <속초시지>에서는 이와 더불어 ‘막힐 울’자를 써서 울산(鬱山)이라고 쓰기도 한다. 비바람이 불 때 산이 울고 하늘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다고 해서 일명 천후산(天吼山)이라고 소개한 자료는 정확한 고증이 필요할 것 같다. 고성군 향토사가 김광섭씨에 따르면 천후산은 울산바위 북쪽에 있는 신선봉(1212m)의 옛 지명이다.
설악루에서 바라본 남설악의 암봉군 <신동호기자>
울산바위가 금강산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지금의 설악산 자락에 자리 잡았다는 전설은 공교롭게 두 산의 형성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은 1억5000년 전 중생대 쥐라기, 설악산 암석군은 1억 년 전 전후인 중생대 백악기에 만들어진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지질학에서는 이를 대보화강암과 불국사화강암이라고 각각 부르는데, 태어난 순서로 보면 금강산이 형이고 설악산은 아우인 셈이다. 이 가운데서도 울산바위는 설악산의 여러 화강암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인 7000만 년 전에 관입한 이른바 울산화강암으로 이루어졌으니, 전설 그대로 형 집에 자리가 없어 동생 집에 눌러앉은 손님격이다.
화강암은 풍화에 약해 오랜 세월 절리, 침식, 서릿발 작용, 쐐기 작용 등을 통해 갖가지 모양을 만들어낸다. 울산화강암은 특히 풍화에 약하다. 그래서 표면이 매우 거칠고 다양한 풍화 지형을 보여준다. 최근 울산바위 150톤 가량이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미시령 도로 쪽으로 붕괴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이처럼 설악산의 여러 화강암은 오랜 세월 절리와 침식 등을 거쳐 수직 암봉과 암릉, 흔들바위와 같은 둥근 핵석, 넓은 너럭바위 등 각양각색의 모양을 빚어놓았다. 이러한 다양한 풍화 지형들은 지형학·지질학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자 교육장이라고 할 만하다.
권력·계절 따라 천 가지 모습 보여준다
설악산의 백두대간 북단은 대간령이고 남단은 가칠봉이다. 그 사이를 신선봉, 상봉, 미시령, 황철봉, 저항령, 마등령, 나한봉, 대청봉, 중청봉, 끝청, 한계령, 망대암산, 점봉산, 단목령 등 고봉준령이 연결하고 있다. 백두대간을 경계로 서쪽 인제군에 속하는 지역은 내설악이고, 동쪽은 대청봉에서 화채봉으로 뻗은 화채능선을 경계로 북쪽이 외설악, 남쪽이 남설악이다. 외설악은 설악동지구, 남설악은 오색지구에 속한다. 내설악은 대청봉에서 대승령에 이르는 서북능선을 경계로 북쪽이 백담지구, 남쪽이 장수대지구로 나뉜다. 이 가운데 집단시설 지구나 주거지역, 고성군 신선봉 일대, 속초시 청대산과 가마소골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연보호지구와 경계를 같이한다.
내설악 백담지구의 고찰 백담사 <이다일기자>
설악산의 또 다른 묘미는 계절은 물론 각 권역이나 지구마다 지형 경관, 기후, 문화가 다르다는 점이다. 골산인 외설악은 천불동 계곡 양쪽에 솟은 기암절벽이 어우러진 남성적인 근육질, 육산인 내설악은 백담·수렴·백운·가야 등 여러 계곡의 여성적 그윽함이 느껴진다. 남설악에서는 대청봉의 웅장함과 오색약수·온천·주전골의 아기자기한 멋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 백두대간을 경계로 기후도 서쪽은 내륙성, 동쪽은 해양성이다. 서쪽은 전통적 산촌이고 동쪽은 해안과 산촌, 토착민과 실향민의 문화가 융합된 양상을 띠는 것도 다르다. 설악동지구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와 계조암·금강굴, 백담지구에는 만해 한용운이 기거했던 백담사와 오세암·봉정암, 오색지구 인근에는 조계종의 발상지인 진선사 등 유서 깊은 고찰이 있다. 전국에서 제일 높은 해발 1224m에 위치한 암자인 봉정암은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서 석가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석가사리탑으로 유명하다. 오세암은 ‘5세 신동’ 매월당 김시습, 그리고 신라 매월대사의 5세 조카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천의 옷’과 ‘천의 얼굴’, ‘천의 이야기’를 가졌다는 설악산은 1000번을 가 보아도 질리지 않을 산이다.
출처:1억 년 세월이 조각한 대자연의 걸작 (신택리지, 신동호, 경향신문)
영원히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설악산
한편 속초시 도문동(道門洞)에 신라 때의 고승 원효와 의상에 대한 이야기가 서려 있다. 원효와 의상 두 대사가 양양군 강선면 강선리에서 신선의 안내를 받아 설악산으로 가는데, 이곳에 이르자 갑자기 숲 속에서 맑은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 노래가 무상무아(無常無我)의 법을 아뢰는 듯하여 법장(法杖)을 멈추고 서 있다가 홀연히 크게 깨달았기 때문에 도통의 문이 열린 곳이라고 한다. 또 하나 속초시 설악동의 장항리와 신흥사 사이에 있는 고개에 의상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의상대사가 설악산으로 가다가 이곳에 이르러 산이 겹겹이 둘러싸고 숲이 우거져 길을 잃었는데, 문득 흰 노루 한 마리가 나타나 고개와 몸짓으로 길을 인도하였다. 그리하여 의상대사가 이 고개 이름을 노루묵고개라고 지었다 한다. 달마봉 서쪽 기슭에 있는 소림암 터는 신라 문무왕 2년에 창건되었던 절이 있었던 곳이다. 어느 대사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를 만난 뒤 「포도전법(布道傳法)」의 부족을 깨닫고 9년 동안 도를 닦은 곳이라고 한다.
설악산을 한 번이라도 찾은 사람은 영원히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말이 있는데, 설악산의 대청봉을 가는 사람들이 꼭 거쳐가야 하는 길목에 자리한 절이 신흥사다. 신흥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 652년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구층탑을 만들어 불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하지만, 그 탑이 어느 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편 외설악 입구에 신라 진덕여왕 7년에 자장율사가 지었다가 폐사가 된 향성사(香城寺) 터가 있다. 진덕여왕 6년(652)에 계조암 능인암(能仁庵)과 함께 지은 향성사는 현재 신흥사로부터 쌍천계곡을 따라 1킬로미터쯤 내려온 곳인 뉴설악호텔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향성사는 그 뒤 698년(효소왕 7)에 능인암과 함께 불타버린 뒤 3년 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었다.
그 절을 다시 중건한 사람이 바로 의상이었다. 701년에 의상대사가 절을 능인암 터로 옮긴 뒤 향성사를 중건하였고, 그 뒤 절 이름을 선정사(禪定寺)라고 바꿨다. 향성사가 있던 절터에 그 당시에 세워진 탑이라고 전해지는 향성사지 삼층석탑(보물 제443호)이 남아 있다. 1000여 년에 걸쳐 번성했던 선정사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구층탑이 파괴되었고, 1642년(인조 20)에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다. 2년 뒤인 1644년에 이 절에 있던 운서, 연옥, 혜원의 세 스님의 꿈에 소림암으로부터 나타난 신인(神人)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달마다. 저 건너편에 절을 지으면 수만 년이 지나도 삼재(三災)가 범하지 못하리라.” 그 신인의 가르침을 받아서 지은 절이 오늘날의 신흥사인데 그 뒤 신흥사에는 수많은 불사가 이루어졌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재앙과 복록이란 따로 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이라는 글이 있는데, 그 말처럼 세상의 모든 이치도, 사람의 일생도 그와 다르지 않다. 설악산 일대뿐만 아니라 여러 절을 관장하고 있는 신흥사는 현재 가장 번성하고 있는 절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도 역시 시대나 사람들이 타고난 운명에 의해서 번성하고 있는 것이리라. 한편 선정사를 지금의 이름인 신흥사라고 고친 내력이 영조 37년(1761)에 국일도대선사 용암 체조가 지은 『설악산 신흥사 대법당 석체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흥이 신흥이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세존 당시에는 설산에서 도를 얻으셨는데 하물며 신흥사의 섭리쯤 위에 홀로 빼어난 천척고봉이 있으니 곧 미륵봉이고, 만길 층진 바위 위 아래 사람이 올라가지 못하는 곳을 돌아보면 한 굴이 있어 금강굴이라 하며 또한 피팔라굴이라 함에서랴! 화엄경 중에서 이르기를 가섭존자가 금란가사와 벽옥기발을 가지고 미륵보살이 피팔라굴에서 출현하심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또한 이 굴의 형세를 살펴보건대 양식을 구할 수 없으니 승려가 주석한 형태이고, 정에 들어 말이 없는 듯하니 승려가 계율을 지키는 모습이며, 고요히 앉아 벽을 쳐다보는 듯하니 승려가 소림사에 있는 모습이라. 제불조사들이 심인을 주고받던 아름다운 곳이다. 이 절이 이미 설산의 미륵봉 피팔라굴 아래에 있으니 이런 까닭으로 신흥사가 되는 것이다.
신흥사는 훗날에 미륵이 출현하여 성불하는 신비로움이 일어날 곳이며 이미 석가세존께서 성불하신 신비로움이 일어났던 곳이기 때문에 신흥사라 하였다는 내용이다. 신흥사에는 인조 때 지어진 극락보전과 효종이 하사했다는 향로와 추사 김정희의 진필(眞筆)과 순조가 하사한 청동 시루가 있다. 조선시대에 이 절에서 임금의 제사를 지낼 때에는 이 청동 시루에 떡을 쪘다고 한다.
출처:(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2012. 10. 5., 신정일)
2025-12-08 작성자 명사십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