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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2장 1-10절
찬송가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1장에서 바울은 그레데의 교회들을 상대로 주제 넘게 권위를 행사하는 다른 모든 사람으로부터 젊은 사역자 디도를 구분해 줄 무엇인가가 필요했음을 인식하고 디도서를 썼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임들에서 필시 읽히게 될 디도서를 통하여 바울은 디도에게 권위를 위임하는 한편, 그 섬에 있는 신자 공동체들을 든든히 조직하는 임무를 그에게 맡겼습니다. 2장에서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공동체가 나이와 성별과 위치에 따라 어떻게 행동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세상에 나타낼 것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바울은 이미 앞선 1장 9절에서 장로는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라고 말한 바 있는데, 본 절에서는 디도에게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라’고 권면함으로써 다시 한번 바른 교훈을 전하고 가르칠 것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은 ‘그러나 너는’으로 번역될 수 있는 ‘쉬데’라는 헬라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데’는 ‘그러나’로 번역되는 역접 접속사로서 바로 앞의 1장 16절과 대조적인 내용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고 있으며, ‘너는’ 이라고 사용된 헬라어의 사용은 비록 그레데의 이단들은 온갖 부패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그러나 디도만큼은’ 그들과 다르게 행동하길 바란다는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바울은 디도에게 하나님의 바른 교훈에 부합한 것에 대하여 함구하거나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바 영혼을 관리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자로서 더욱 담대하게 선포하고 적극적으로 외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늙은 남자와 여자를 위한 교훈(2-5)
(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2절부터 10절까지는 바울이 디도에게 늙은 남자와 여자(2-5절), 젊은 남자(6-8절), 그리고 종(9-10절)의 순으로 각 부류에 대한 생활 지도 지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늙은 남자로 번역된 헬라어는 장로의 의미를 포함한 늙은 남자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늙은 남자란 대략 60세 정도의 남자로 몇 세대가 함께 사는 당시 가부장 사회에서 한 가정을 다스리는 가장 격에 있는 노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이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 절제와 경건과 신중 및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절제’로 번역된 헬라어의 어원은 ‘네포’라는 동사인데, 이 동사는 ‘술이 깨다, 정신을 차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어원을 근거로 절제라는 단어를 풀이해 보면, 술에 취하거나 기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맑은 정신을 지낸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로 볼 수 있습니다. 뒤에 이어나오는 ‘경건하며’로 번역된 헬라어는 ‘인격적으로 존경할 만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할 점은 2절에서 나온 ’경건한‘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심에 대한 경건이 아니라 예의범절이나 질서 정연함에 있어서의 윤리적인 자세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어 나오는 ‘신중하며’로 번역된 헬라어는 ‘마음이 건전한’이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것에 취하거나 정신이 혼미한 상태가 아닌 바른 태도를 가진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온전하게 하고‘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건강한'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있어서 골고루 성장치 못한 부분이 없는 상태를 이야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절을 정리해 보자면, 늙은 남자는 술에 취하여 방탕한 부분이 없어야 하며, 행실에 있어서 깨끗해야 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불균형적인 부분이 없어야 함을 2절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3)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이 절에서 ‘늙은 여자로는’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나이가 많은 여자’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늙은 남자들에 대하여 말한 덕목을 늙은 여자도 동일하게 갖추어 행실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늙은 여자들의 행실은 하나님께 합당한 무흠하고 거룩한 것이어야 한다는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를 언급한 것을 보아, 당시에 이런 일들이 늙은 여자들에게 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마귀, 악의 창시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이간질하며, 거짓으로 남을 헐뜯는 것을 조심해야 함을 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라는 의미는 즐거움과 쾌락을 위한 술이 오히려 그것을 마시는 사람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모습을 경계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늙은 여자들에게 술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한 교훈은 당시의 상황을 보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 후 1세기에는 거의 노예와도 같이 오랜 시간 동안 남자들에게 속박을 당하고 살던 여자들에게 자유의 물결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이 틈을 타서 여자들은 그 이전까지는 주로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술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고, ‘술의 종’이 될 정도로 심각하게 술에 취하는 일들이 발생하였으며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라는 의미는 대중들을 가르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늙은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의 생활을 지도 교훈하라는 것입니다. 그 가르칠 내용이 4절과 5절에 언급됩니다.
(4)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젊은 여자와 관련한 목회 지도지침에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남자와 같이 디도에게 직접적으로 가르치라고 말하지 않고, ‘젊은 여자’를 가르치는 일을 늙은 여자의 임무로 위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젊은 여자에 관한 덕목이 주로 ‘가정 주부’로서의 역할에 한정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볼 때 젊은 여자들은 사회보다는 가정 내에서의 활동으로 제약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바울은 이들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집안에서 어른이 되는 늙은 여자가 교육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바울이 젊은 여자들의 교육을 늙은 여자들에게 위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에서 ‘사랑하며’로 번역된 헬라어는 정서적인 면이나 친구 동료 간의 사랑을 나타내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5)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5절도 역시 계속해서 젊은 여자들이 따라야 하는 권면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젊은 여자들이 도덕적으로 흠이 없이 정결한 상태로 가사를 잘 돌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 여성들의 사회적 참여가 여러 측면에서 제약이 많았고,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였기에 바울은 시대적 상황 속에 젊은 여자에게 맡겨진 임무와 책임에 최선을 다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라는 의미는 약자로서의 굴욕적인 복종이 아니라 가정의 평화와 성경이 말하는 창조 질서에 따른 자발적 순복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복종은 일방적인 복종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바울은 젊은 여자들에게 남편의 리더십에 자신의 뜻을 복종할 것을 명했지만, 에베소서 5장 22-33절의 조건들이 여기도 적용이 됩니다. 남편은 사랑의 리더십으로 아내를 섬기기에 힘쓰고, 그러면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복종하게 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지, 어떤 관습적, 비인격적 명령 관계를 나타내는 뜻이 아닙니다. 즉, 이러한 상호보완적이며, 유기적 관계가 성립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고 5절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즉, 젊은 여자들의 행실과 가족 구성원 모두의 행실이 긴밀히 연결되지 않을 때,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 되지 못하게 될 것을 경계해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 남자를 위한 교훈(6-8)
(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6절부터 젊은 남자들에게로 관심을 돌리면서 바울은 또 다시 ‘이와 같이’라는 말과 ‘신중하도록’이라는 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젊은 남자들은 성급하고, 경솔하며, 행실을 삼가지 않고, 충동적이며, 쉽게 폭발하는 우를 범할 가능성이 많으므로 자기 다스림, 즉 신중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7)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바울은 젊은 남자를 훈계하는 데는 그들과 비슷한 연배에 있는 디도 자신이 본을 보임으로써 그들을 훈계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디도는 많은 사람이 주시하는 영적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에 그의 행동은 더욱더 중요하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7절에서 중요하게 묵상해볼 단어는 ‘선한 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입니다. 디도서에서 ‘선한’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두 단어가 등장합니다. ‘아가도스’라는 헬라어는 1장 16절에 사용된 ‘선한’이라는 의미의 단어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선함을 나타내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는 데 비해서, 본문에서 사용된 헬라어는 ‘칼로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칭찬할 만한’이라는 의미로 쓰여 주로 인간관계 속에서의 윤리적 측면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본절에서 디도에게 선한 일에 본을 보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 선함이라기보다는 타인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도덕적인 고상함의 측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눈여겨볼 문구는 ‘네 자신이.. 본을’이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헬라어가 ‘세우아돈’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네 자신이’라는 의미의 재귀 대명사로서 젊은이들에게 모범을 보이되, 먼 데 있는 다른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디도 자신을 본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8)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7절 하반절부터 8절 상반절까지 한글 개역 개정은 마치 디도가 젊은이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하라는 식으로 번역했으나, 원문상으로는 디도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런 교훈 안에서 젊은이들에게 본을 보이라는 의미가 원뜻에 가깝습니다. 즉, 교훈의 주체가 바로 ‘네 자신이’라고 표현된것처럼 디도라는 점에서 본문의 책망받을 것이 없는 건전한 말을 해야 하는 주체 역시 젊은이들이 아닌 디도라는 점이 8절 상반절에서 주목해 볼 점입니다. 8절 후반절을 통해 바울은 디도가 왜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적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기 위함이며 동시에 복음 사역자들이 악하다는 비방을 듣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은 적대자들이 처음에는 당당한 태도로 복음 사역자들에게 부끄러움을 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후에는 반대로 부끄러움을 받게 되는 자로 변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8절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겠습니다. 우리의 행실이 과연 우리의 대적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고 있는지, 아니면, 기독교인의 정체성과 삶의 정체성의 분리로 인하여 내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며 사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종을 위한 교훈(9-10)
(9)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바울이 바른 교훈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마지막 대상으로 종들을 언급했습니다. 다른 편지들에서도 그랬듯이 바울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이 노예 제도라는 관습을 종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유 중에, 바울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으면 언젠가는 문화가 변혁되어 노예 제도가 완전히 사멸될 것으로 내다보았다는 의견이 가장 타당성이 있다고 보입니다. 그 당시의 상황 속에 그리스도인이 된 종들 가운데 주 안에서는 모든 형제 자매가 하나라는 생각으로 주인의 휘하에서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대등하게 여기려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 바울은 디도를 통해 현재 자신들이 섬기고 있는 주인 밑에 들어가 ‘범사에’ 복종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더 나아가 순종할 뿐만 아니라 상전들을 기쁘게 할 것을 권면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10)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당시 종들에게 일어나는 문제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바로 도벽의 문제였습니다. ‘훔치다’로 번역된 단어는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과 이곳에만 사용되었는데, 주로 좀도둑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남의 지배하에서 종살이를 하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자들에게 훔치는 일은 쉽게 유혹받을 수 있는 것 중의 하나임은 틀림없습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횡령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옳지 않은 일임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종들이 주인의 돈을 횡령하지 않고 정직하며 충성을 다해야 하는 목적은 10절 하반절에서는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모든 내용을 정리해 보면, 바른 교훈을 따라가는 삶은 결코 가볍거나 쉬운일이 아님을 본문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은 세상의 방향을 거스르며,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람들보다 수고하며, 고생하는 일이 많기에 때로는 불편하며, 성가신 일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디도를 통해 기독교 공동체에게 종들로부터 늙은 남자까지 그 행실에 대한 지침을 본문을 통해 말해 주었습니다. 혹자는, 이 시대와 너무도 대비되는 상황과 교훈이기에, 적당히 재해석해서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내 상황에 억지로 오늘의 지침들을 끼워 맞춰 남을 가르치는 도구로 말씀을 이용할 수 있는 위험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이 디도에게 부탁했듯, 말씀은 내 자신을 향하여 적용하며, 그 본을 먼저 내 자신이 보여야 함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대적자들과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를 통해 바라보며 알아간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손해보는 것 같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보호하시는 그 은혜를 느끼며, 감사하는 하루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을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점검하게 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에서 너무 편해지고 싶은 나머지, 주님께서 우리의 삶과 행실에서 빛을 발하라는 그 간절한 부탁을 외면하고 살진 않았는지, 돌이켜보며 점검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주님, 세상의 소리와 주님의 말씀으로 주시는 주의 음성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하며 살고 있는 저희들의 연약한 모습을 주님께서 알고 계심을 믿습니다. 주님, 나의 생각과 판단이 아닌, 말씀의 기준과 요청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참된 은혜를 저희의 심령에 부어주시길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썩어져가고, 잠깐 있다가 없어질 안개 같은 세상 속에서 영원한 가치가 무엇인지 발견하고 붙잡는 주의 자녀로 살아가는 복된 인생 되게 하옵소서. 오늘을 살아가지만, 주님께서 머리털 하나까지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영원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한날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주님께서 말씀으로 주신 바른 교훈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상황과 환경에 맞춰 말씀을 가감하고 있는 것은 않은지 생각해봅시다.
2.나는 나에게 먼저 말씀을 적용하고 나를 되돌아보고 살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로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봅시다.
3.나의 삶에서, 나의 행실이 주님의 복음을 부끄럽게 하는 부분은 없는지 되돌아보며, 점검해 봅시다.
4.말씀이 이야기하는 나의 위치와 행실과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기준이 다를 때, 나는 어떻게 그 갈등을 해결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 봅시다.(세상과 타협 또는 말씀과 씨름)
(작성:황동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