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둔덕방의 남원양씨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는 조선시대에는 남원 48방중[1872년 남원부 지도]의 하나이었다.
남원부 지도에 의하면 둔덕[屯德]방은 우번(雨番), 동촌(東村), 신기(新基), 둔촌(屯村), 용정(龍井)등의 마을이 있었고 월곡(月谷)은 외진전[外眞田]방에 속한 마을이었다. 남원 외진전[外眞田]방은 장수군 산서면이 되었고 둔덕[屯德]방은 임실군 오수면이 되었다. 남원 둔덕방 우번촌에는 남원양씨 묵재공의 자손이 세거하였는데 우번촌 세거 자손들은 지역명을 따라서 남원양씨 우번파라고 불렀다. 남원양씨 우번파는 묵재공의 증손이신 군수공 양준(梁峻)의 자손인데 양준(梁峻) 선조님은 진보, 전주, 영광 등지에서 지방관을 지내셨고 사헌부에서 감찰과 지평을 지내신후 6조의 정랑을 지내셨다. 사헌부 지평(持平)의 청요직을 거쳤기 때문에 고관으로 승급할 수 있었겠지만 또 다른 청요직인 6조의 정랑(正郎)을 지내신 이후의 행적은 왕조실록에 등재되지 않았다. 정랑(正郎)으로 있을 때 세조께서 등극하시어 좌익원종공신에 책록되셨는데 그 이후의 행적이 보이지 않는다. 대사간의 청요직을 내려놓고 은거한 아버지 처럼,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며 권력을 내려 놓았던 할아버지들 처럼 양준(梁峻) 선조님 또한 세조가 등극할 때 현직에 계셨기 때문에 좌익원종공신에는 책록되었지만 청요직을 이어가지 않고 은거하셨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양준(梁峻) 선조님이 좌익원종공신에 책록되시고 자손의 문음(門蔭)이 허락됨으로 인해 양준(梁峻) 선조님의 자손은 남원 둔덕방 우번촌에 세거하는 인연이 주어졌다. |
조선왕조실록[1455년12월27일]에 의하면 양준(梁峻) 선조님은 좌익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셨는데 좌익원종공신 3등(三等)에게는 한 자급을 더해주고(加一資) 자손(子孫)은 음직을 받고(承蔭) 후세에 까지 유죄한다(宥及後世)고 하였다. |
용성지(龍城誌)의 오수찰방(獒樹察訪) 관안(官案)에 의하면 양준(梁峻)의 1子 양보(梁普) 선조님은 甲子(1504년)에 오수도 찰방에 부임하셔서 己巳(1509년)까지 근무하셨는데 용성지 음사(䕃仕)편에 양보(梁普)는 문음(門蔭)으로 찰방(察訪)이 되셨다고 등재되었다. 양준(梁峻) 선조님이 좌익원종공신에 책록되어서 문음(門蔭)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찰방은 조선시대 각 도의 역참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종6품의 외관직이며 수령감찰과 군기점검 등의 감찰 업무를 겸했다.
찰방은 수령의 탐학과 민심까지도 상세하게 살펴야하기 때문에 3사의 대간이나 6조의 정랑 등 청요직의 문신을 차출하여 지방으로 파견하였다. 찰방은 조선 후기에 등장하는 암행어사의 선구적 역할을 수행한 관직이었다.
남원도호부의 찰방은 오수역에 주둔하였기 때문에 오수도 찰방이라 불렀고 오수도 찰방은 오수역을 비롯하여 남원, 곡성, 순천, 여수, 구례, 광양 등 11개 역을 관할하였다. 오수(獒樹)라는 지명은 불이 난 것도 모르고 잠든 주인을 구한 충견을 기억하기 위해 개오(獒)자와 나무수(樹)를 합하여 불리게 된 지명이다. 불을 끄려고 근처 개울에 뛰어들어 몸을 적신 다음 들불위를 반복적으로 뒹굴어서 끝내 주인은 구했으나 개는 죽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나 개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음을 알고 몹시 슬퍼하며 개의 주검을 묻어주고 자신의 지팡이를 꽂았다고 한다. 나중에 이 지팡이가 실제 나무로 자라나서 개 오(獒)자와 나무 수(樹)를 합하여 이 고장의 이름을 오수(獒樹)라고 부르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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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둔덕방에 묵재공의 자손이 언제부터 세거하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1623년 이전에 양사준(梁士俊)과 양사의(梁士義) 형제가 세거한 사실은 둔덕방의 향약 계안(稧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둔덕방의 사대부들은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모방하여 마을을 안정시키려고 향약을 실시하였는데 둔덕방의 향약은 진주하씨, 순천김씨, 삭령최씨, 전주이씨, 흥성장씨, 남원양씨, 청주한씨 등 둔덕방에 세거한 일곱 성씨들이 모여 1621년에 결성하였다.
현존하는 계안(稧案)은 1623년에 작성한 것이 가장 오래되었고 36명의 명단이 실려있다. 남원 둔덕방의 자연 지리적 특성은 둔남천, 오수천, 율천 등 세 개의 하천이 합류되기 때문에 지리적 특성을 반영하여 삼계(三溪)가 둔덕방의 별칭이 되었고 둔덕방에서 작성한 계안(稧案)의 명칭은 삼계계안(三溪稧案)이라고 하였다.
둔덕방의 일곱 성씨들은 삼계강사(三溪講舍)에 모여서 향약을 실시하고 계안(稧案)을 작성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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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삼계계안(三溪稧案)에 참여한 둔덕방 일곱 성씨의 36명 혼맥도는 아래와 같다. 둔덕방에는 진주하씨가 가장 먼저 입향하였고 진주하씨의 사위인 삭령최씨와 진주하씨의 외예인 순천김씨가 입향하였고 순천김씨의 사위인 전주이씨가 입향 하였다. 처향으로 입향한 것이다. 청주한씨는 일곱 성씨와 가장 많은 혼맥이 연결되었고 남원양씨는 흥성장씨와 혼맥이 깊었다. 1623년 삼계계안(三溪稧案)에 참여한 명단 중에 전주이씨는 이대윤의 손자와 종손자이며 아래 한자로 표기하였고 남원양씨와 남원양씨의 외조부가 되시는 흥성장씨 입단 명단 또한 아래에 한자로 표기하였다.
삼계강사(三溪講舍)에 참여한 사대부들은 임진왜란 때 창의한 남원출신 의병장의 후예들이었고 명망을 들어낸 의병은 이대윤(李大胤)과 양호(梁浩)이었다. 이대윤(李大胤)은 둔덕방 입향조인 이담손(李聃孫)의 손자이었고 이대윤(李大胤)과 함께 창의한 양대박(梁大撲)은 이담손(李聃孫) 누이의 손자 이었다. 양대박(梁大撲)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양경로(梁敬老)의 현손(玄孫)이며 양주(梁澍)와 양호(梁浩) 형제는 양경로(梁敬老)의 외손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 21읍의 사림이 규합하여 6000여명의 호남의병이 결성되었는데 고경명이 의병장에 추대되고 우부장 양대박(梁大撲)과 이종사촌인 좌부장 유팽로(柳彭老)가 지휘부를 구성하였고 이대윤(李大胤)은 의병소의 도유사가 되어서 군량과 군마를 모았고 병기를 제작하였다. 호남의병의 일부는 광주목사 권율(權慄)과 함께 북상하여 금산의 이치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으나 주력부대는 금산전투에서 무너졌다[양대박(梁大撲)과 양호(梁浩)의 妻叔父 황진(黃進)이 이치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권율(權慄) 장군은 호남지역 관군을 이끌고 한양성을 수복하기 위해 서울 근교에 있는 수원의 독산성으로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때에 남원지역에서는 전 목사 정염(丁焰)과 유학(幼學) 양주(梁澍) 등이 고을의 가장 연장이었던 변사정(邊士貞)을 도장(徒長)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창의 하였다. 권율(權慄) 장군이 전라도 체찰사 정철(鄭澈)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체찰사 정철(鄭澈)은 호남 의병에게 독산성을 구하라고 하였다. 체찰사의 명을 받은 변사정(邊士貞)과 남원 의병은 북상하여 공주에 까지 이르렀으나 군량이 너무 멀리 있고 안전하게 군량을 운반하기가 쉽지 않아서 정철(鄭澈)에게 이러한 사정을 보고하니 호남과 영남의 경계에 있으면서 후방의 적을 방어하라는 명을 내렸다. 변사정(邊士貞)과 남원 의병은 충청도 옥천에 본대의 진영을 꾸렸고 영남으로 왕래하는 왜적을 차단하였다. 남원 의병은 정철(鄭澈)이 지원한 부장(副將) 이잠(李潛)과 함께 정예병 300명이 황간(黃澗)에 들어갔는데 23세의 젊은 의병장 양호(梁浩) 또한 이잠(李潛)과 함께 황간의 요해지에서 매복하였다. 강화 협상으로 왜적이 한양성을 떠나고 남쪽으로 내려갈 때까지 6개월(1592년12월~1593년5월) 동안 매복하면서 많은 적을 물리쳤고 상주, 선산, 개령, 금산을 왕래하는 적을 막았다. 이 때 상주전투에서 왜군을 대파한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양호(梁浩)의 妻叔父 황진(黃進)이었다. 체찰사 정철이 상주(上奏)하여 석계공은 사옹원(司饔院) 참봉(叅奉)에 양호(梁浩)는 사재감(司宰監) 첨정(僉正)에 임명되었다. 진주성이 위급해지자 남원 의병은 진주성에 입성하려고 하였으나 이잠(李潛)이 모두 한 성으로 들어가면 군량의 운반이 어렵다고 만류하여 남원 의병 300명은 진주성으로 입성하고 본대는 군량을 운반하였다. 이 때 이대윤(李大胤)이 진주 의병소로 군량을 보급하였다. 이잠(李潛)과 이대윤(李大胤)은 효령대군의 후손이었고 이대윤(李大胤)과 양호(梁浩)는 둔덕방 출신이었다. 양호(梁浩)는 1627년에 돌아가셨는데 1623년 둔덕방 계안(稧案)에 양호(梁浩)의 아들인 양사준(梁士俊)과 양사의(梁士義) 형제가 참여하였기 때문에 양호(梁浩)는 둔덕방 출신이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양호(梁浩)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으로 입성한 것으로 보여지고 형님이신 석계공은 군량을 운반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자세한 내력이 전승되지 않았지만 당시 진주성은 양호(梁浩)의 妻叔父 황진(黃進)과 이잠(李潛)이 나누어 지켰는데 양호(梁浩)는 충청도에서 이잠(李潛)과 함께 매복하였고 妻叔父와 함께 상주전투에서 왜군을 격파하였기 때문에 진주성에 함께 입성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진주성은 무너졌고 이잠(李潛)과 황진(黃進)은 순절하셨다. 진주성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전쟁의 상황을 변사정(邊士貞)에게 이야기 하였고 변사정(邊士貞)이 전말을 조정에 알리었다. 이 때 황진이 살아 있었다면 진주성은 반드시 함락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변사정(邊士貞)에게 알린 사람은 양호(梁浩)이었을 것이다. |
둔덕방의 남원양씨 입향조 양호(梁浩)
장수황씨(長水黃氏) 족보에 의하면 황적(黃迪)의 따님이 양호(梁浩)의 배위(配位)가 되셨는데 양호(梁浩)는 사재감(司宰監)에서 정(正)을 지내신 것으로 장수황씨(長水黃氏) 족보에 등재하였다. 정(正)은 관청의 수장이었고 정3품이었는데 조선 초기에는 관청의 수장을 판사(判事)라고 불렀고 판사(判事)는 관청에 따라서 종1품에서 정3품이었는데 사재감(司宰監)의 판사(判事)는 정3품이었다. 사재감판사(司宰監判事)와 사재감정(司宰監正)은 같은 관직이다. 초기에는 사재감판사(司宰監判事)라고 불렀고 후기에는 사재감정(司宰監正)이라고 불렀다.
황적(黃迪)은 양호(梁浩)를 아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사위를 아무리 아껴도 양호(梁浩)의 형님인 양발(梁潑)의 딸을 셋째 아들 황연언(黃延彦)의 배위(配位)로 삼은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양호(梁浩) 형제와 충정도 병마절도사 황진(黃進)의 관계도 깊다. 양호(梁浩)는 재산 분정을 통해 처가(妻家)의 재산도 배위(配位)와 공통으로 소유하였을 것인데 양호(梁浩)는 사재를 털어서 군량을 마련하였다. 황진(黃進)의 아버지 황윤공(黃允恭)의 재산이 맏손녀인 양호(梁浩)의 배위(配位)에게도 상속되었을 것인데 양호(梁浩)는 그 재산도 털어서 의병을 조직하고 충청도에서 병마절도사 황진(黃進)을 만났던 것이다.그리고 게릴라 전투를 함께 수행 하였다. 妻叔父 황진(黃進)과의 인연도 예사롭지는 않았다. |
청주한씨(淸州韓氏) 족보에 의하면 한극침(韓克沈)의 배위(配位)는 남원양씨(南原梁氏) 양호(梁浩)의 따님이신데 양호(梁浩)는 사재감(司宰監)에서 정(正)을 지내신 것으로 청주한씨(淸州韓氏) 족보에 등재하였다.
현존하는 한국양씨 최고보는 병인보(1686년)인데 병인보에는 양호(梁浩)의 관직를 판사(判事)로 등재하였다.
사재감판사(司宰監判事)를 말하는 것이고 사재감정(司宰監正)과 같은 관직이니 양호(梁浩)는 판사(判事)를 지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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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보(1686년)와 인근 시대인 1673년에서 1690년 사이에 편찬한 삼계계안((三溪稧案)에 참여한 남원양씨(南原梁氏)는 양할(梁劼), 양세추(梁世樞), 양세항(梁世亢), 양세현(梁世顯), 양세장(梁世章), 양세모(梁世模), 양응래(梁應萊)등이다. 둔덕방 입향조인 양호(梁浩)의 손(孫)과 증손(曾孫)이다. 비록 병인보(1686년)에서 병부공파 상위 계보는 고증에 문제가 발생했지만 양호(梁浩)의 손(孫)과 증손(曾孫)이 수단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양호(梁浩)의 행적은 비교적 정확할 것이라고 판단되며 교차하여 장인과 사위에 족보까지 모두 일치하니 후대의 족보에서 양호(梁浩) 선조님의 최종 관직을 첨정(僉正)으로 등재한 것은 전승 과정에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양호(梁浩) 선조님이 사재감(司宰監) 첨정(僉正)에 오른 것만으로도 위대한 공적(功績)이었다. 임난 공신들의 대부분은 후대에 추증하였고 당대에 창의한 공적(功績)으로 첨정(僉正)에 오른 것은 최고의 예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무공신에 책록되지 않았고 선무원종 공신에도 책록되지 않았다. 변사정(邊士貞)이 선무공신에 책록 되었는데 함께 창의한 종사관(從事官) 양주(梁澍)는 선무원종공신에도 책록되지 않았다. 이는 공적(功績)을 알려줄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며 양호(梁浩) 선조님께서도 공적(功績)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양호(梁浩) 선조님이 첨정(僉正)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변사정(邊士貞)의 공적(功績) 자료를 받아서 체찰사 정철(鄭澈)이 상주(上奏)했기 때문이었다. 정철(鄭澈)의 영향력이 작용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정철(鄭澈)은 자신의 휘하 장수 이잠(李潛)을 남원 의병의 종사관으로 내어 줄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남원 의병의 공적(功績)은 자신의 공적(功績)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철(鄭澈)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하더라도 남원 의병이 참여하였던 게릴라 전투의 의미가 작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 양호(梁浩)의 妻叔父 황진(黃進)이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있으면서 천 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왜군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충청지역에서 왜군을 몰아냈고 마침내 보급로를 끊어 버렸다. 결국 군량미에 대한 보급이 끊긴 왜군은 한양성을 퇴각하고 말았는데 게릴라 전투에 참여하였던 천 여명의 병력 중의 300여명이 남원의 의병이었고 양호(梁浩)는 이잠(李潛)과 함께 남원 의병을 이끌었다. 비록 정철(鄭澈)이 실각하고 동인 정권이 수립됨으로 인해 정철(鄭澈)의 과오가 들어났지만 그로인해 정철(鄭澈)의 공적(功績) 마저도 부각되지 못 했다. 양호(梁浩) 선조님이 사재감(司宰監) 판사(判事)에 오른 것도 임진왜란 때의 일일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전란을 수습하는 과정에 사재감(司宰監) 판사(判事)에 올랐다면 선무공신에도 책록 되어야 하기 때문에 전란 중에 책록 되었을 것이다. 전쟁 중에 판사(判事)에 올랐다면 2차 진주성 전투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사정(邊士貞)은 진주성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구제하지 않았던 의병 장수들을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진주성 전투에 대한 공로를 등급별로 나누어서 장계를 올렸다. 선조는 의병장의 위세가 높아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변사정(邊士貞)의 장계는 반가웠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변사정(邊士貞)의 장계는 살아 돌아온 남원 의병의 이야기를 듣고 작성하였는데 양호(梁浩) 선조님은 생사를 같이 나누었던 혈맹의 순절을 지켜보면서 살아남은 자의 공적(功績)이 자랑스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양호(梁浩) 선조님은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형님 양주(梁澍)와 전 목사 정염(丁焰)과 함께 창의하였지만 양주(梁澍) 선조님은 순절하셨고 남원성은 왜적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정유재란 때에 남원에서 창의한 의병은 살아남은 자의 공적(功績)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세월이 흐른 이후에도 선대의 혈맹관계를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각조각 남겨진 기록을 통해서 사실의 역사는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삼계강사(三溪講舍)는 임진왜란 때 창의한 이대윤(李大胤)의 손자와 양호(梁浩)의 아들 등 7부락의 7성(최·이·한·김·하·장·양씨)이 창립한 강사이며 어린 학동을 교육하는 서재로 운영하였고 향약을 실시하기 위해 삼계강사(三溪講舍)에서 동계(洞契)를 조직하여 주민을 교화시키고 마을의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둔덕방의 사대부들은 삼계강사(三溪講舍)를 통하여 남원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통하여 정조임금의 하교(下敎)를 듣게 되었다. 정조임금은 비변사의 당상관들에게 양성지(梁誠之)는 남원 사람이라서 양성지(梁誠之)의 집터와 산소 및 배향하는 서원이 반드시 남원에 있을 것이니 상세하게 조사하고 누구와 함께 배향하였는지 자세히 적어 올리라고 하명(下命)하셨다. 정조임금의 하교(下敎)를 전라도관찰사가 받들어 시행하였고 둔덕방의 사대부들은 전라도관찰사를 통하여 정조임금의 하교(下敎)를 알게 되었다. 양성지(梁誠之)를 배향하는 서원(書院)은 남원에 없었지만 둔덕방의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이대윤(李大胤)을 서원(書院)에 배향하고 싶었고 둔덕방의 남원양씨(南原梁氏)는 양우(梁祐)를 서원(書院)에 배향하고 싶었기 때문에 양우(梁祐), 양성지(梁誠之) 이대윤(李大胤)을 함께 배향하는 서원(書院)을 창건할 계획을 세웠다. 삼계강사(三溪講舍)에서 동계(洞契)를 조직한 사대부들이 협력하고 남원의 사대부들과 함께 청원하여 삼현(양우, 양성지, 이대윤)을 배향하는 서원을 월곡 지역에 창건하였는데 삼현을 배향하는 서원이 월곡지역에 창건한 인연도 깊었다. |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 서원마을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에는 서원마을이 있다. 예전에는 상월로 불렀고 하월과 합쳐서 월곡이라고 불렀던 고을이었다. 월곡서원이 있었던 곳이다. 월곡서원이 훼철된 이후 그 마을은 월곡서원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서원촌(서원마을)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서원마을에는 창원정씨 종가와 정상윤 고택이 있다. 월곡서원이 복설된다면 문화적 연계성이 확보되기 때문에 문화재 답사와 관광의 활로가 열려서 오랫도록 문화의 전승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
창원정씨 종가 |
정상윤 고택 |
월곡마을과 월곡서원의 인연은 임란 의병으로 창의한 목사 정염(丁焰)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양주(梁澍), 양호(梁浩) 형제와 임진년에 함께 창의 하였고 전장에서도 함께 하였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도 함께 창의 하였다. 정염(丁焰)은 월곡 마을에서 태어났고 고향에서 그의 6촌 형님이신 정황(丁熿)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정황(丁熿)이 을사사화의 화를 입어 거제도에 이배되었을 때에는 거제도를 직접 찾아가 학문을 강마하기도 하였다. 정환(丁煥)과 정황(丁熿) 형제는 효행이 깊어 온 마을이 탄미하였고 한 자급을 올려서 뒷 사람을 권면하게 하라고 조선왕조실록에 등재될 만큼 존중 받는 인물이었고 사화의 화까지 입게 됨으로 인해 형제가 함께 영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이러한 충효가 깊은 월곡마을에서 정염(丁焰)이 태어났고 둔덕방의 남원양씨 입향조인 양호(梁浩)와 정염(丁焰)은 혈맹이었다. 정황(丁熿)의 후손인 정달천(丁達天), 정달지(丁達智)와 정염(丁焰)의 후손인 정남거(丁南擧)가 남원 유생들과 연명하여 예조(禮曹)에 월곡서원의 건립을 청원하였고 정황(丁熿)의 후손인 정달순(丁達舜)이 월곡서원 예성통문을 쓰고 각 향교에 통고한 것도 선대로부터 내려온 깊은 인연 때문이었다. 월곡 마을에 월곡서원이 건립되고 월곡 마을이 서원 마을이 된 것은 창원정씨의 깊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월곡서원 창건을 청원한 둔덕방 남원양씨 양보구(梁寶龜)의 누이가 정남거(丁南擧)의 동생이신 정남현(丁南鉉)의 배위이시고 양처진(梁處晉)의 배위는 정황(丁熿)의 후손이셨다. |
月谷書院(월곡서원) 禮成通文(예성통문)
위 글을 알려드리는 일(右文爲通諭事)은 다음과 같습니다.
묵재선생(默齋先生) 눌재선생(訥齋先生) 금헌선생(琴軒先生) 삼현을 배향하는 것을(三賢以爲) 주상께 아뢰고(上言) 재가를 받았으며(啓下) 또(又) 춘조[예조]의 허락을 득하여(有春曹許題)
이제(今方) 사우[서원]를 세우게 되었으니(營建祠宇) 사문의 기쁨이(斯文之辛) 어떠하겠습니까(何如哉)
돌아오는 달 11일에(將以來月十一日) 신위를 봉안하며 예성하려는 일을(奉安禮成知事)
통고하오니(如是通告)
바라옵건대(伏願僉尊) (以) 이 뜻을(此意) 각원과 더불어 각방(各院及各坊)에 알려 주시면(諭告) 천만다행이겠습니다(千萬辛甚)
위와 같이 공경스럽게 각 향교에 통문하옵니다 (右敬通于各鄕校)
發文 張慶煥, 盧仲燮, 丁達舜, 金讓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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