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목동아’와 보이코트
민요란 그 민족의 애환을 담은 특색이 있는데, 이 곡은 너무도 아일랜드적인 슬픈 노래다. 이곡이 생긴 배경을 보면 더욱 공감이 가는 노래이다. 영국은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스코틀랜드 및 웨일즈와 북아일랜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실은 잉글랜드가 나머지 3국을 병합 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생산물과 소출은 영국의 본토인 잉글랜드에게 강탈 당하고 썩은 감자만으로 연명해야하는 비참한 상황을 그들은 감내하여야 했다. 아일랜드 슬픈 역사는 800년이 넘는 긴 영국의 통치와 19세기 대기근이라는 비극적인 아일랜드의 빈곤의 역사에 기인하는 것이다. 12 세기 후반부터 영국의 침입이 시작되면서 아일랜드 민중의 저항은 시작됐다. 영국 왕실은 무력으로 아일랜드 북부 지방의 토지를 몰수하여. 영국인에게 분배하면서 영국인의 이주와 정책을 강행하였고, 영국인 지주 아래 아일랜드 농민들은 비참한 소장농으로 전락하면서 아일랜드의 빈곤이 시작되었다.
지주들이 등장하였고, 환금성 작물과 수출용 가축 생산의 증가가 이루어졌다. 영국은 인구 팽창으로 농산물 수입을 늘려야 했으므로 아일랜드의 농업은 한때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섬유 산업의 발달로 아일랜드의 목화 산업과 가내 수공업이 도산하게 되자 대부분의 아일랜드 인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감자 재배면적을 늘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감자의 소출감소와 질병을 막기 위해 대부분의 씨감자를 외국에서 들여왔고, 그 경로를 통해 감자 마름병이 북아일랜드에 급속히 퍼지는 재앙을 동반하게 되었다. 이 병은 매우 빠른 속도로 퍼졌는데, 1845년에는 유럽을 거쳐 그 해 10월 중순경 불과 2, 3개월만에 전 아일랜드에 퍼지는 엄청난 재앙을 안겨주었다. 그 결과 아일랜드는 대 기아와 영양 실조로 인한 각종 질병과 흉작으로 많은 인구가 죽거나 행방불명되는 참사를 겪게 되었다. 그 피해는 1920년대까지 이어져 인구는 기근이 발생했던 1845년의 절반 수준까지 감소하는 악 순환을 겪게 되었다. 아일랜드 경제가 감자 마름병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근대에 들어 아일랜드에는 1740~1741년, 1845~1852년, 1879년, 총 세 차례의 기근이있었다. 그 중 가장 참혹했던 두 번째 기근을 가리켜 대기근이라고 부른다. 기근 직전 800만 명을 상회하던 아일랜드의 인구는 100만여 명이 아사했고, 또 다른 100만 명이 기근을 피해 이민길에 올라 대기근이 끝날 시점에는 총 인구의 25%가 없어졌다. 백만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굶주림이 죽어 갔으며 많은 아일랜드인들은 배고픔을 견딜 수 없어 미국으로 떠나는 배에 아무런 기약 없이 몸을 실었다. 이때 아일랜드 인구가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당시 감자기근을 피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떠난 사람은 240만 명에 육박했다. 이 수치는 200년 가까이 지난 21세기에도 인구절벽이 회복되지 않아 아일랜드의 주민 수는 겨우 700만 명 정도 이었다.
더군다나 안타까운 것은 엄청난 기근임에도 불구하고 감자는 비싼 값으로 영국으로 수출되었고 아일랜드의 가난한 민주들은 너무 비싼 감자를 사먹을 수 없어 더더욱 굶주리게 되었다. 그 시절을 떠나거나 그들의 귀환을 바라는 여인들의 한을 부른 노래가 ‘아 목동아’이다. 북아일랜드의 항구도시 런던데리에서 정처 없이 배에 오른 이들은 멍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부르는 ‘데니 보이’는 고향을 떠나며 부른 송별곡이나 망향가 이었다. 살아서는 다시 돌아 올수 없는 곳을 예감하는 구슬픈 노래였다.
그 당시 영국은 그 대기아 사태를 위해 식민지인 아일랜드에 아무 지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일랜드와 영국은 영원한 갈등과 대립 관계가 고착되고 말았다. 그들의 앙숙과 앙금이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축구이다. 축구의 종주국 영국은 올림픽 축구에서도 아일랜드는 영국 (잉글랜드)과 단일팀으로 참가하길 거부하고 있다. 20세기초 영국 축구협회는 4개로 나누어진 대외적 위상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및 북아일랜드의 국민정서를 감안하여 올림픽 축구에 영국의 영구 불참을 선언하였고, 현재도 영국은 올림픽에 축구팀을 파견치 않고 있다. 월드컵은 각 나라의 축구협회(FA)가 회원으로 가입하는 FIFA 대회이다. 따라서 영국에는 독립된 4개외 대회가 존재하므로 독립적으로 FAFA에 출전한다.
이에 못지 않게 새롭게 등장한것이 불매운동이라는 신조어 보이콧 이다(은하정보부/브로거 https://blog.naver.com/jasonk2016/220952554113) 영국인 찰스 보이코트(Charles Boycott)는 1874년 영국의 정치인이며 부재지주인 Erne 경으로부터 아일랜드 서부지역의 농장관리인 직을 제안 받았다. 아일랜드는 1740-1741년과 1847-1852년에 걸친 대기근으로 대부분의 아일랜드 소작인이 빈곤으로 고통 받고 있었고 살아남은 아일랜드 지주들도 상당 수는 영국인과 북아일랜드 지주들에게 농장을 매각하고 몰락해가는 중이었다. 1870년경 지주계급이 전체 토지의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고 이들 중에서도 50%는 15에이커(1에이커는 약 1200평) 미만을 가진 소규모 지주였고 75%가 소작인으로 머물렀다.
아일랜드인들은 지주계급과 영국인들에 대해 반감은 높았다. 그런데 1879년 또다시 기근이 찾아왔고 찰스 보이코트의 주인은 소작료 10% 인하를 제안했지만 소작인들은 25% 인하를 요청했다. 찰스 보이코트는 소작료를 내지 못한 11가구에 대한 강제 퇴거조치에 들어갔고 소작인들이 주도하는 토지연맹(Land League)은 찰스 보이코트를 상대로 최초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시작했다. 찰스 보이코트 농장 일꾼들은 철수했고 상점들은 거래를 끊었고 심지어 우편배달부도 우편물을 전달하지 않았다. 급해진 찰스 보이코트는 새벽 4시부터 가족들을 이끌고 농사에 나섰지만 밤이 되면 소작인들은 농장 울타리를 망가뜨리고 농작물들을 밟아 버리곤 했다.
찰스 보이코트는 결국 정부의 지원을 요청했고 1880년 11월 2주간 5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900명의 군인의 호위 하에 농장에 도착, 감자 수확을 지원했다. 수확물의 가치는 350파운드였고 군인과 자원봉사자들의 경비로 사용된 자금은 1만파운드였다. 찰스 보이코트는 저택과 농장을 놓아둔 채 더블린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보이코트'가 성공한 최초의 순간이었다. 1879년도 흉작이 있었다. 그런데 예비역 대위이자 지주인 찰스 보이코트는 소작료를 감해 달라는 농민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다른 농민에게 경작권을 넘겼다. 농민은 토지연맹을 결성하여 소작거부운동을 전개했고 결국 소작료 인하요구를 관철시켰다. Boycott란 단어가 바로 이 사건에서 생겨나게 되었다.[2026.08.10]
첫댓글 아일랜드의 슬픈 역사 속에서 피어난 두 단어 {아목동아 보이코트}는, 부당한 현실에 맞서는 **정의로운 거절(보이코트)**과 상처 입은 이들을 품어 안는 **애틋한 사랑(아 목동아)**이 결국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함께 품어야 할 두 가지 태도임을 보여주는글 잘보고 감니다. 보이콧이 이노래외 연관된것인줄은 정말 몰랐어요 꺠우처 주시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