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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장 주해와 적용]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유년시절
변종길 / 고신대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누가복음 2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유년시절을 다루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사는 마태복음 1, 2장과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데, 누가복음에 나오는 것이 마태복음의 것보다 대체로 더 자세하며 마태복음에 나오지 않는 것도 더러 있다. 그래서 해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누가복음 2장은 사랑받는 본문이 된다. 특히 베들레헴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 이야기는 어린아이들의 좋은 연극거리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기사를 한낱 재미있는 동화나 이야기거리로 생각하지 말고, 실제로 이 세상 역사 속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는 그렇게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죄악상을 그대로 드러낸 가슴 아픈 사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냉정하게, 하나님의 의도를 좇아서 바로 이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I. 예수그리스도의 생(1~7절)
1) 탄생 시기(1~3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가 통치하던 때였다.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1절)” 여기서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가리킨다. 그의 본명은 옥타비아누스(Otavianus)였으며, 원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누이동생(Julia)의 딸(Attia)의 아들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입장에서 보면 외할머니의 오빠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던 것이다. 그는 18세 되던 해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의해 그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래서 그는 ‘카이사르’라는 성을 물려받아 옥타비아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되었다.
그는 주전 31년에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후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로마 제국 전체에 대한 단독 통치권을 쥐게 되었으며, 주전 30년에는 로마의 ‘최고사령관(Imperator)’과 로마 원로원의 ‘수장(Princeps)’가 되었다. 그리고 주전 27년에는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 칭호는 ‘숭고한 자, 고귀한 자, 지고자(至高者)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거의 신적(神的)으로 들리는 묘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이 칭호를 부여받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았으며, 그가 죽고 난 후에 그는 실제로 ‘신격’으로 불리며 숭배받게 되었다.
그런데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실권을 잡은 지 얼마 후에 로마 제국의 통치 기반을 든든히 하기 위해,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국세조사 곧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그 목적은 세금 재원을 파악하고, 유사시의 군대 동원 능력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을 처음 실시한 해는 주전 28년이었으며, 그 다음에는 주전 8년에 실시되었다고 한다.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주후 6년에도 실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본문 2절에 보면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 처음 한 것이라’고 한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에 의하면 구레뇨 곧 퀴리니우스(Quirinius)는 주후 6년 부터 수리아의 ‘총독’을 맡았다고 한다(Ant. XVIII.1). 그렇지만 주후 6년은 예수님의 탄생 연도로는 너무 늦다. 그래서 누가의 이 기록과 예수님의 탄생 연대 사이에는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윌리엄 램지(W. Ramsey)에 의해 발견된 비문(碑文)들에 의하면, 구레뇨는 그 이전부터 수리아를 다스렸다고 한다. 곧 주전 12년부터 수리아의 ‘최고 사령관(commander-in-chief)’을 지냈던 것이다.
그리고 개역판 성경에는 ‘수리아의 총독 되었을 때’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총독’이란 말이 없고 ‘구레뇨가 수리아를 다스릴 때’로 되어 있다. 곧 ‘구레뇨가 수리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을 때’라고 되어 있 다. 이것은 구레뇨가 수리아를 사실상 통치하고 있을 때를 말한다. 따라서 구레뇨가 수리아를 다스리고 있을 때 시행된 두 번의 인구조사 중 첫 번째 것, 곧 주전 8년에 시행된 국세 조사(호적)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연도는 도대체 몇 년인가? 성경의 기록과 아우구스투스의 호적 명령과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실제로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는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 여사이다. 그는 일본인 여자로서 로마 제국의 역사를 아주 재미있고 깊이 있게 쓰고 있다. 헬라어와 라틴어 원전을 섭렵하여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재미있게 풀어쓰는 그의 지식과 솜씨는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상숭배의 나라 일본 출신으로서 일신교보다는 다신교를 칭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책 곳곳에 은근히 반기독교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심지어 그의 여성 편력까지도 아름답게 미화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비기독교적인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은 역시 별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는 그의 책 제6권에서 예수님의 탄생 연대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p.322). 곧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계산하는 ‘서력’으로 기원 1년에는 국세 조사가 실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의 이런 의문에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해준 연구자는 지금까지는 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의문은 사실 기독교계에서는 논란거리도 되지 않는 초보적인 상식에 불과하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있는 서력(西曆)은 주후 525년에 수도승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가 도입한 것인데,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연도를 새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 때 그가 계산을 잘못해서 약 4~5년 정도의 오차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래서 후대에 와서 다시 정밀하게 계산해 보니 예수님의 탄생 연대는 주전 4~5년경이라는 이상한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탄생연도를 기원 1년으로 보고 있다고 (자기 혼자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기독교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확실한 것은 헤롯 대왕이 주전 4년 유월절 직전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헤롯 대왕이 죽기 얼마 전에 탄생하셨다는 것이다(마2장).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 시기를 대개 주전 4년 1, 2월 또는 주전 5년 12월경으로 잡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전 6년, 드물게는 주전 7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호적 명령 연도인 주전 8년과는 2-4년의 차이가 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옛날에 국세 조사라는 것은 대단히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단 며칠 사이에 해치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교통 통신의 미비, 행정 체제의 미비 등으로 인해 국세 조사에 수년이 걸리는 것은 예사였다.
이 점은 이방인 역사가 시오노 나나미도 스스로 말하고 있다. “로마인들은 이런 종류의 조사에 익숙해져 있었고, 지방자치단체(무니키아를 중심으로 이런 조사에 필요한 조직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속주에서는 본국과 같은 효율성을 요구할 수 없고, 따라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몇 년이 걸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로마인 이야기.제6권. p.18).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옛날부터 인구 조사라 하면 기겁을 하였다. 왜냐하면 옛날에 다윗 왕이 인구조사를 하다가 하나님께 호되게 벌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때 3일 동안 유대 전역에 ‘온역(전염병)’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죽은 자가 7만 명이었다고 한다(삼하24). 그 후로 유대인들은 인구 조사라 하면 극구 반대하였으며,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행5:37 참조). 그래서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헤롯 대왕은 유대 지역에서의 국세 조사를 연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결코 서두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실시하더라도 지파별로, 가문별로 조금씩, 조금씩 시행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다 지파 다윗 가문이 호적할 때인 주전 4, 5년 경에 탄생하시게 된 것이다.
2) 탄생 장소(4~7절)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 시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장소이다. 4절에 보면 요셉은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의 베들레헴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유다 지파 중 다윗의 집 족속이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비록 가난했지만, 혈통으로 따지면 유다 지파 중 다윗 가문에 속했었다. 그래서 ‘다윗의 동리’라 불리는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정혼(定婚)한 마리아도 데리고 갔다. 원래 여자는 호적할 때 같이 갈 필요는 없었지만, 잉태한 마리아를 따로 혼자 버려두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처녀로 임신했다고 놀림받는 처지에 그를 홀로 버려두고 떠나간다는 것은 요셉의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그래서 사려 깊고 친절한 요셉은 배가 부른 마리아를 데리고 함께 베들레헴으로 갔다(5절). 그래서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마리아가 맏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기의 이름이 곧 예수였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를 낳아서 구유에 뉘었다. 7절에 보면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한다. 구유란 소나 말 또는 나귀가 죽을 먹는 그릇, 곧 여물통을 말한다. 성탄절이 되면 주일학교 아이들이 성극을 한다. 마리아가 아기를 낳아 구유에 뉘는데,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다 재미있어 한다. 그래서 구유는 매우 낭만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유’는 결코 낭만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 슬프고 비참한 이야기였다. 마구간의 여물통은 춥고 냄새나고 더러운 곳이었다. 예수님은 이처럼 춥고 더럽고 냄새나는 구유에 뉘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런 비천한 구유에 뉘었을까? 왜 하나님의 아들이 소나 말이 죽을 먹는 통에 누워 있어야만 했을까? 그 이유를 누가는 짤막하게 한 문장으로 말하고 있다.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7절 하)”
여기서 ‘사관’이란 옛날 말인데, 오늘날 말로 하면 여관이다. 그러나 여기에 ‘사관’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카타뤼마(kataluma)는 오히려 ‘객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가진 곳도 객실 곧 다락방이었다(막14:14). 옛날 우리나라의 사랑방과 비슷한 것으로 친척이나 손님들이 잠시 묵고 가는 방이다. 그러나 ‘여관’이든 ‘객실’이든 중요한 것은 그 당시에 다윗 집 가문에 속한 사람들 이 베들레헴에 많이 몰려 왔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머물 방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방이 동이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지금 만삭이 되어 몸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겨우 베들레헴에 도착했는데, 먼저 온 유대인들이 방을 양보해 주지 않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아무리 먼저 와서 방을 잡았다 할지라도, 배부른 여인네가 와서 곧 해산을 하려고 하면 자기가 빌린 방이라 할지라도 얼른 비켜 주고 양보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닌가? 옛날에 우리나라 시골에서는 거지들이 오면 꼭 밥을 퍼주었다. 밥과 반찬을 깡통에 퍼주면 거지들이 대문 밖에서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길 가던 손님이 와서 ‘하룻밤 자고 갑시다’고 하면 반갑게 맞이해서 사랑방을 내어 주었다. 그리고는 얼른 저녁을 지어서 대접했다. 그리고 나무를 가져다가 군불을 때어 주었다. 이것이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심이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었지만 이 정도의 인심은 있었다.
그런데 옛날의 유대인들은 어떠했는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이, 그것도 다윗 왕의 집 족속들이, 자기 가문에 속한 배부른 여인이 왔는데도 방을 비워주기는커녕 도로 내어쫓아 버렸다. “이 방은 내가 먼저 와서 계약했으니까 당연히 내가 사용할 권리가 있어. 선계약 우선의 원칙도 몰라?” 이처럼 그들은 각각 저마다 자기의 기득권(旣得權)을 주장하면서 방을 양보하지 않았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그 결과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는데도 누울 곳이 없었다. 예수님은 저 높고 영화로운 하늘나라를 떠나 불쌍한 인생을 구하시려고 하늘나라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셨전만(빌26:7), 세상 사람들은 그를 환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무시하고 천대했다. 그것도 자기 백성 유대인들한테서, 그것도 다윗 집 가문 사람들에게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았다. 각자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거할 곳이 없있던 것이다. 이것이 구유에 뉘인 예수님의 실상이었다.
II. 천군천사들의 합창(8~14절)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모른 채하지 않으시고 축하하셨다. 이 축하는 세상의 권세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힘없고 멸시받는 목자들과 하늘의 천사들을 통해 하셨다. 유대 사회에서 목자 곧 목동들은 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자로 분류되었다(Jeremias).
야외에서 양을 치고 있는 목자들에게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탄생 사실을 알려주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 게 전하노라(10절).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전한 소식은 우선 ‘온 백성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다. 원문에 의하면 ‘좋은 소식 을 전하다’는 하나의 동사로 되어 있고, 따라서 그 전하는 내용은 곧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무엇보다도 온 인류에게 ‘큰 기쁨’이다. 따라서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그 표정이 밝고 기뻐야 할 것이다. ‘얼굴을 찡그린 그리스도인’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천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즉, 우리를 위해 ‘구주’가 탄생하셨다는 것이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이다. 구유에 뉘인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救主)가 되신다. 따라서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구유에 누워 잠든 아기 예수를 쳐다보고 마냥 재미있어 하고만 있으면 안 된 다. 그 분은 비록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누워 있지만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주실 ‘구주’이시다. 따라서 항상 마리아의 품안에 안겨 있는 아기 예수의 모습만을 생각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나 러시아 정교는 이 점에 있어서 중대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구주가 되시며 또한 마리아의 구주가 되신다. 따라서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고 성극을 하면서도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때 홀연히 허다한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절)” 예수님의 탄생은 먼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인간의 구원과 운명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구원을 계획하시고 준비하셨다가, 때가 차매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내려보내신 것이다. 따라서 수천 년 간에 걸친 이러한 구원 계획이 드디어 결실을 맺기 시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맞이하여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만족해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천사들은 먼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땅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선포하고 있다. 여기서 ‘평화’란 인간이 누리는 건강과 평안, 번영과 복지를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의 평강이다. 구약에서는 샬롬(Shalom)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것 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누리는 행복이며 하나님의 상급이다(시37:37, 119:165; cf. 사48:22, 57:21).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복의 대표가 곧 평강이다(롬5:1). 이것은 하 나님과의 적대 관계가 해소될 때에 비로소 누리는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평화와, 그로부터 나오는 마음의 평안과, 실제 생활 가운데서의 화평함과 번성함을 다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그런데 이러한 평화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여기서 기뻐하심이란 단어의 원어는 ‘유도키아(εὐδοκία)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원의 은혜 곧 평화의 은혜를 받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임을 말한다. 곧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희망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 베풀어주심을 의미한다.
III. 목자들의 경배 (15~21절)
천사들로부터 메시아 탄생 사실을 통고받은 목자들은 이 사실을 보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서둘러서 빨리 달려갔다(16절). 목자들은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아기 예수님을 보러 가는 데 방해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양들과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속히 달려갔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속히 반응하는 사람,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재빨리 반응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복을 주신다.
목자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다 말해 주었다(16-17절), 이로써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였으며. 천사의 고지 내용과 천군 천사들의 찬송 내용이 마리아에게 전달되게 되었다(19절). 이것은 나중에 다시 사도들에게 전달되어 누가가 이 사실을 기록하게 되었을 것이다.
21절에는 예수님의 할례와 작명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은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율법 아래’ 나신 것을 의미한다(갈4:4).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율법 아래’ 나셨으며, 율법에 복종하셨다. 그리고 이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는데, 이것은 수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이름이다(눅1:31, 마1:21). ‘예수’라는 이름은 원래 구약의 여호수아에서 온 이름이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나중에 예수아, ‘예수’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이 이름은 ‘여호아는 구원’이란 뜻이며, 그래서 마태는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고 풀이하고 있다(마1:21).
IV. 시므온의 예언(22~35절)
예수님의 부모는 얼마 후에 모세의 법을 따라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그것은 결례를 행하기 위해서였다. 모세가 명 한 올법에 의하면 남자아이는 난 지 40일이 지나면 예루살렘 성전에 데리고 가서 제사를 드려야만 했다(레12장), 따라서 경전한 예수님의 부모는 율법의 명령을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그들은 비둘기 한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었다고 하는데(24절), 이것은 그들이 가난하였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보통 번제로는 1년 된 어린양을 취하여 드리고, 속죄제로는 집비둘기나 산비둘기를 취하여 드려야만 했기 때문이다(레12:6). 그러나 경제적 형편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면 어린양 대신에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로 대신할 수 있도록 했다(레12:8). 따라서 예수님의 부모가 어린 양 을 번제로 드리지 못하고 ‘비둘기’를 드린 것은 그들이 매우 가난하였음을 반증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때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므온이라고 하는 한 경건한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시므온은 예루살렘 사람으로서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25절). 여기서 ‘이스라엘의 위로’란 메시아의 오심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로마의 압제로부터의 해방과 같은 정치적인 독립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시므온에게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위에는 ‘성령’이 계셨다는 기록에 미루어 볼 때, 그에게는 오히려 메시아의 등장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영적 구원 곧 죄와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어쨌든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이 시므온은 그가 ‘주의 그리스도(기름 부 음 받은 자)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26절). 경건한 사람들이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일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행8:29, 11:28, 21:11, 엡2:20 등). 시므온이 성령에 의해 계시를 받은 것은 메시아를 증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을 위해 필요한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이 시므온은 결례를 행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는 예수님의 부모를 성전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시므온은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이 시므온의 찬송은 ‘이제는 놓아 주시는도다(Nunc dimitis)’로 잘 알려진 메시아 찬송이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9~32절)” 이 찬송을 보면 시므온이 얼마나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하고 사모하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늙고 고달픈 몸을 이끌고 살아가는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눈으로 보고 증거하는 것이었다. 이 사명 때문에 그는 죽지도 못하고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나, 이제는 메시아를 보았으니 평안히 죽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한 경건한 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에 대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말한다(30절). 예수님은 비록 아기의 모습으로 계시지만 만민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셨다. 이어서 시므온은 이 예수님에 대해 설명한다.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이다(31, 32절).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예비하신 것이며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것이다(롬1:2). 구약 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요5:39). 그는 이방인의 ‘빛’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흑암 가운데 거하던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다(마4:15,16, 요8:12). 그리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란 말은 단지 유대 민족 이스라엘 백성의 영광이란 뜻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 곧 새 이스라엘의 영광이란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장 10절에서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이라고 하였고, 그리고 바로 앞 절에서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한 마당에 특별히 유대인들만의 영광으로 제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특히 본절에서 ‘당신의 백성’이란 말을 덧붙여서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이 육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 곧 모든 성도들의 영광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시므온은 이 아이의 장래에 대해 예언을 하였다. 그 예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홍합을 위하여 비방을 받은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34-35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중적 사역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오심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다 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를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는 구원이요. 영생이 되지만, 그렇지 않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낭패가 되고 심판이 된다(요3:18, 고후2:16.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그것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는 ‘축복’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저주가 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수8:34, 신28장). 실제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반대하였으며, 심지어 그를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시므온은 마리아를 향하여 ‘같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또는 결과)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결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연히 드러내는 것이 되었다.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었지만, 그렇지 않고 교만하고 악한 생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하고 모욕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악한 사람은 더욱 악하게 되고 그들의 근본이 마귀에게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말았다(요8:44).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긍휼을 입은 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선과 악, 택함 받은 자와 택함 받지 못한 자 사이의 구분이 확연하게 되었으며, 사람의 속에 있는 생각이 악함을 드러내게 되었다(막7:21~23, 요2:24).
V. 여선지자 안니의 예언 (36~39절)
이어서 누가는 경건한 여선지자 안나의 기사를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안나는 아셀 지파에 속한 바누엘의 딸로서 나이가 많아 매우 늙었다고 한다(36절). 그는 일곱 해 동안 남편과 같이 살다가 과부가 되었는데, 37절에 보면 ‘과부된 지 84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의 원어 문장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우리 개역판 성경이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과부된 지 84년이 지났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안나는 이 때 나이가 100살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가능한데, 곧 ‘84세에 이르기까지 과부로 있었다’는 것이다. 곧 과부 안나의 나이가 이 때 84세였다는 말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며 각각 논거를 가지고 있으며, 어느 경우이든 ‘나이 많아 매우 늙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참고로 위 두 해석 중 필자가 선호하는 해석을 말한다면 두 번째 해석이다. 그러나 확실치는 않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W. Hendriksen, The Gaspel of Luke, Edinburgh: Banner of Truth, 1984, 172f.을 보라).
어쨌든 이 여선지자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로 하나님을 섬겼다(37절).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모가 결례를 행하기 위해 성전에 왔을 때 마침 성전에서 그들을 만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아기 예수에 대하여 말하였다고 한다(38절). 아마 안나도 시므온의 찬송과 예언을 듣고서 이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수님의 부모는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다 마치고 나서 갈릴리로 돌아가서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렀다고 한다(39절). 예루살렘에서 나사렛에 이르기까지의 정확한 경로와 그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이 어간에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가서 쉬고 있을 때 동방박사들의 방문이 있었을지도 모르며(마2:1~12), 애굽으로 피난 간 사건이 있었을 수도 있으며(마2:13~15), 그 후에 다시 애굽에서 나와서 처음에는 유대 땅으로 가려 하였으나 헤롯 대왕의 아들 아르켈라우스(Archelaus)를 두려워하여 본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마2:19~23). 누가는 이 어간에 있었던 여러 사건들을 다 기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간단하게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서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렀다’고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복잡한 과정을 알지 못한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VI. 아기 예수님의 성장과정(40,52절)
이어서 40절에서는 예수님의 성장 과정에 대해 간단히 기록해 주고 있다. “아기가 자라가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성장의 세 측면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신체적 성장’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육체가 자라 고 강하여지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신체적 성장 발육 과정을 거치셨다. 둘째로 ‘지적 성장’이다. ‘지혜가 충만하며’는 분사구문으로서 신체적 성장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린이의 성장에는 신체적 성장과 아울러 지적 성장이 함께 병행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영적 성장’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님의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성장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은혜가 있어야만 아이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온전하게 자라게 된다.
그런데 요즈음 부모들을 보면 자녀 교육에 있어서 이 세 번째 요소를 망각하고 그저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소를 위해서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좋은 음식을 먹이고 돈을 많이 들여 과외공부를 시키기에 열심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란 아이는 몸은 튼튼하고 공부는 잘할지 모르나 영적으로 은혜가 없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방황하게 된다. 마음에 참된 평안과 기쁨이 없으며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다. 그래서 컴퓨터 게임이나 인터넷에 빠지고 육적 쾌락에 탐닉하다가 인생을 망치기도 한다. 그 근본 이유는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서 그렇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몸이 튼튼하게 자라게 하려면 잘 먹이고 운동시키면 된다. 지혜가 있도록 하려면 과외를 시키고 공부를 많이 시키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일까? 이것은 돈으로도 되지 않으며 힘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가능하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고, 또 그들을 위해 힘써 기도하면 아이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라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얼굴이 순화되고 빛이 나며, 마음에 평안이 있고 즐거움이 있게 되며, 무슨 일이든지 조급하지 않고 느긋하며,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며 착한 일을 찾아서 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52절에도 같은 내용의 말씀이 나온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여기서 마지막에 나오는 ‘사랑스러워’는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이것은 ‘은혜에 있어서’로 번역해야 옳다. 즉, 예수님은 1)지혜에 있어서, 2)키에 있어서, 3)은혜에 있어서 자라갔다는 말이다. 여기서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적 성장, 신체적 성장, 영적 성장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다만 앞 둘의 순서만 바뀌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지적 성장이 신체적 성장보다 좀더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성장은 하나님 앞에서의 성장과 사람들 앞에서의 성장, 이 둘을 다 갖춘 균형 잡힌 성장이었다. 사람들과의 인간 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로 되어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는 것이 더 중요하며 기본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된 사람은 또한 사람들과의 관계도 바로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두셨으며(마5:14),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나기를 원하셨다(빌2:15).
VII. 예수님의 유년 시절(41~51절)
다음으로 누가는 예수님의 유년 시절 중에 있었던 사건 하나를 기록해 준다. 그것은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의 일이다. 유월절 절기를 맞이하여 예수님의 부모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예수님도 함께 동행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절기를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발생하였다. 열 두 살의 아이 예수는 아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데, 요셉과 마리아는 그것도 모르고 그냥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 길을 가다가 아이가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허겁지겁 아이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사흘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이 예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때 예수님은 성전에서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다(46절). 이것은 유대인의 교육 방식을 말한다. 유대 랍비들은 학생들에게 주입식으로 가르치지 아니하고 문답식으로 가르쳤다. 그런데 열 두 살의 아이 예수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랍비들(선생들)은 아이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다고 한다(47절). 여기서 기이히 여겼다는 것은 ‘놀랐다, 깜짝 놀랐다’는 말이다.
이 때 예수님의 부모가 와서 예수님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절)” 이 말에는 아이에 대한 책망과 원망이 함께 들어 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가?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이다. 원어로 보면 집이라는 단어는 없고 관사만 있어서 그 뜻이 모호하다(억지로 우리말로 직역해 본다면 내 아버지의 것들에 있어야 할 줄을 정도가 된다). 그래서 이 표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들이 있다.
첫째는 ‘아버지의 일들에 종사해야 한다’는 해석이다. 이것은 영국의 흠정역(KJM)이 취하고 있는 번역이다(“… wist ye not that I must be about my Father's business”). 그러나 이것은 언어학적으로 근거가 약하다. 둘째는 여기의 불분명한 관사를 ‘집’으로 이해하는 해석이다. 그래서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로 이해한다. 요세푸스의 책에 이런 식의 표현이 나온다고 한다(Contra Apionem, I, 118). 셋째는 여기 이 문장에의 도적인 모호성이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곧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 편이 아니라 아버지 편에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본다.
이러한 해석들에 대해 야콥 판 브루헌(Jakob van Bruggen) 교수는 본문은 어디에서 예수를 찾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문맥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Lucas. Kampen: Kok. 1993, p.101). 그래서 49절의 이 표현은 장소를 가리킨다고 본다. 곧 예수님은 나사렛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예루살렘 성전에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본다. 이보다 한 세대 전의 주석가인 그레이디누스(S. Greidanus)는 장소적 의미와 영적 의미 둘 다 있다고 본다. 예수님은 성전에 있어야 했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종사 했어야 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계시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성전 곧 교사들에게 있어야 했다는 의미로 본다(Lucas, I.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40, p.143).
물론 49절의 이 표현이 일차적으로 장소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님은 다른 곳에 계시지 않고 예루살렘의 성전에 계셨다. 그러나 단지 그런 장소적인 의미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예수님은 여기서 그 이상의 의미를 암시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신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하나님이 바로 자기 아버지이심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내 아버지의 집’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구약성경 이사야 56장 7절에서 하나님은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심으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와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여기서 육신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영적인 아버지 곧 ‘하늘의 아버지’가 계심을 말씀하셨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예수님 자신은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곧 예수님은 여기서 열두 살의 나이에 이미 부드러운 표현 가운데 자신의 신성(神性)을 드러내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어서 나오는 50절에서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도 바로 이러한 의미로 이해된다. 곧 예수님의 ‘하나님의 이들 되심(Sonship)’을 깨닫지 못했다는 뜻으로 봐야 할 것이다(cf. Greijdanus, Lucas, I. p.144).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예수님은 그 부모와 같이 내려가서 ‘나사렛에 이를 순종하여 받 드시더라’고 한다(51절). 여기서 ‘순종하여 반드시더라’는 표현은 헬라어 원어로 보면 ‘에이미 동사’와 ‘현재 분사’의 결합으로 되어 있다. 이런 것을 ‘우설적 구조(periphrastic construction)’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지속적인 순종을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cf. Zervick, Biblical Greek, Rome, Editrice Pontificio Istituto Biblico, 1990, par. 360).
이것을 억지로 우리말로 직역해 본다면 ‘계속 순종하면서 계셨다’로 할 수 있다. 이것은 혹시라도 바로 앞에 나온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사건이 부모에 대한 반항이나 불순종으로 비춰질까 염려하여 예수님은 부모님께 잘 순종한 모범적인 아들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부모에 대한 불순종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오직 그의 하나님 아들 되심 곧 그의 신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에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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