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과 名妓 두향은 진짜 '연인'?
러브스토리 널리 알려져… 두향은 실존인물이지만 '사랑' 확인할 문헌 없어
"인간미 보여주려 창작" "퇴계 실제 얘기" 엇갈려
조선시대 단양군수를 지낸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관기(官妓) 두향(杜香)의 러브스토리를 주제로 한 뮤지컬이 무대에 오른다.
철인(哲人)의 사랑은 어땠을까? 충북 단양군청 홈페이지 '고을 설화'난에 퇴계가 단양군수로 있을 때 기생 두향과 사랑을 나눈 얘기가 있다. 퇴계는 거문고와 난초 그림에 능한 두향을 묵객처럼 대했다고 한다.
퇴계가 단양을 떠난 뒤 기적(妓籍)에서 빠진 두향은 퇴계와 함께 노닐던 강선대(降仙臺) 아래 초막을 짓고 홀로 살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내가 죽거든 그분이 즐겨 찾던 이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더 살이 붙은 스토리도 있다. 18세 두향이 48세 퇴계에 반했지만 풀 먹인 안동포 같은 님 앞에서 애간장만 탔다. 그러나 상처(喪妻)의 아픔을 지녔던 퇴계는 한 떨기 설중매(雪中梅) 같았던 두향을 마침내 받아들인다.
퇴계가 단양의 절경들을 '단양팔경'으로 지정했을 때 기지를 발휘한 사람도 두향이었다. 옥순봉은 당시 청풍 땅이었는데 두향은 '청풍군수 이지번(李之藩)을 찾아가 옥순봉의 관할을 단양으로 바꾸도록 타협하라'고 권했다.
이별할 때 두향은 눈물과 함께 매화꽃을 선물했다. 퇴계는 평생 이 꽃을 두향 보듯 했다. 그 후로 20년 넘게 퇴계를 그리워하던 두향은 그의 부음을 듣고 통곡한 뒤 강선대에서 남한강 푸른 물로 꽃다운 몸을 던졌다는 얘기다.
단양 장회나루 건너편에 두향의 무덤이 남아 있다. 충주댐 건설로 강선대는 물에 잠겼지만 두향묘는 그를 기리는 사람들에 의해 1984년 위쪽으로 이장(移葬)됐다. 단양 단성면에서는 1979년부터 매년 두향제(杜香祭)를 열고 있다.
이 스토리는 진짜일까? '두향'은 실존인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임방·이광려 등이 옛 관도(官道) 근처에 있었던 두향묘의 정경을 읊은 시(詩)가 남아 있다. 하지만 '퇴계와 두향의 관계'를 밝힌 조선시대 문헌은 확인되는 것이 없다.
1977년 단양군이 출간한 '단양군지(丹陽郡誌)'는 강선대를 소개하면서 '명기(名妓) 두향의 묘가 있다'고 했을 뿐이다. 퇴계·두향의 관계가 처음 언급된 것은 1970년대 후반 정비석(鄭飛石)씨의 소설 '명기열전(名妓列傳)'이었다.
▲두향이 10대 후반의 나이로 퇴계의 인품을 흠모했고 ▲거문고를 잘 탔으며 ▲단양팔경을 정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고 ▲퇴계의 사후 자결했다는 등의 주요 요소들이 이 소설에 들어 있다.
정씨는 퇴계 문중의 인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명기열전'의 두향편을 엮었다고 했다. 퇴계·두향의 이야기는 이후 퇴계학연구원이 1980년에 낸 '퇴계일화선(退溪逸話選)'에 실렸다. 책의 저자는 다름 아닌 정비석씨였다.
정석태(鄭錫胎) 부산대 점필재연구소 연구교수는 "퇴계가 두향과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사실(史實)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퇴계의 70년 생애를 날짜별로 고증한 '퇴계선생 연표 월일조록(月日條錄)'의 저자다.
정 교수는 "단양군수로 갔던 1548년(명종 3)은 퇴계 생애 중 정치적으로 위험했던 시기"라고 말했다. 그보다 3년 전 일어난 을사사화에서 간신히 죽음을 면한 뒤 낙향했다가 다시 서울로 온 퇴계를 정적(政敵)들이 호시탐탐 노렸던 것이다.
홍문관 응교가 된 퇴계는 병을 사유로 휴가를 얻거나 청송부사 등의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했다. 정 교수는 "퇴계는 중앙으로부터 달아날 생각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단양은 매우 피폐한 지역이었고 퇴계의 일정은 촉박했다.
퇴계가 단양에 있었던 기간은 9개월 정도다. 기민(飢民) 구제로 눈코 뜰 새 없었는 데다 단양에 도착한 다음 달인 2월에는 차남 채(寀)가 죽었다. 이런 처절한 상황에서 조금만 약점을 잡혀도 서울에선 탄핵 사유가 될 수 있었다.
넷째 형 해(瀣)가 충청도 관찰사가 됐기 때문에 친족이 같은 곳에서 벼슬하는 것을 피하는 상피(相避)의 차원에서 10월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됐다. 이 때문에 9월부터는 이미 짐을 싸야 했다.
'퇴계가 단양팔경을 정했다'는 얘기도 나중에 지어낸 것이라고 정 교수는 말했다. 퇴계의 시에 나오는 선암(仙岩)은 지금의 하선암인데, 현재 단양팔경으로 돼 있는 중선암과 상선암에 대해서 퇴계는 몰랐다는 것이다.
이지번이 청풍군수를 지낸 것도 21년 뒤인 1569년의 일이니 연대가 맞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지방관들이 국가의 승인 없이 마음대로 군계(郡界)를 수정했다는 것도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두향은 누구의 여인이었을까? 정 교수는 "조선 말까지 두향의 무덤에서 제사를 지낸 집안이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 가문이란 기록이 있다"고 했다. 이산해의 아버지는 이지번이다. 그는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의 형이다.
이지번은 1556년 퇴계의 권유로 단양 구담봉 밑에 은거할 때 강 양쪽에 칡넝쿨 줄을 묶어놓고 학 모양의 배인 듯한 비학(飛鶴)을 매달아 타고 다녀 신선이라 불렸다. 구담봉 건너편은 바로 두향이 살았다는 강선대다.
'퇴계의 제자인 이산해가 스승을 기려 제사를 지내 준 것'이란 말도 있지만 정 교수는 "이산해는 퇴계 제자도 아니었고 스승의 여자를 대대로 챙긴다는 게 이치에 맞느냐"고 했다.
퇴계가 여색(女色)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1541년 관서 지방에 출장을 갔다 오는 길에 평양에 머물렀는데 평안도 관찰사가 유명한 기생을 치장시켜 접대하려 했는데도 끝내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퇴계·두향의 러브스토리는 왜 생겼을까? 정 교수는 "퇴계는 조선 후기엔 성인(聖人)의 반열에 들 정도로 추앙됐다"며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역사적 위인에 대해 인간미와 일상적인 체취를 가미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두향제를 주관하는 단양 단성면 발전협의회의 장신일 회장은 "전해지는 이야기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퇴계와 두향의 이야기는 단양에서 있었던 실제 역사가 분명하다"며 "이를 입증할 옛 기록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2009. 11. 07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