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동대구로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두산동 두산오거리~파티마병원
광역시도 77호선인 동대구로는 대구의 맨해튼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대구발전을 상징하는 길이 6.1km, 폭 70m의 넓은 도로로서 희말라야시다. 150여 그루 등 70여종 23천여 그루의 각종 수목류 및 가로수가 식재되어 있다.
중앙분리대에 심은 희말라야시다(개잎갈나무)는 도심의 청량제 역할을 하며, 겨울에는 눈꽃으로 뒤덮여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범어내 거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와 사시사철 꽃을 볼 수 있는 화목류 등이 식재되어 한 폭의 정원같이 가꾸어져 있어 30년이상 대구를 상징하는 도로로서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2.들안길 먹거리타운
소 재 지 상동전화국에서 수성못 방향 도로가
규 모 : 2.3km (T자형)
전문음식점 : 123개소(한식, 일식 등)
국제대회와 병행 특색음식 개발로 국내·외 방문객 에게 최고의 먹을거리 제공으로 관광 명소로서 각광을 받고 있으며,먹을거리가 많아 ‘먹자골목’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들안길 일대에는 뷔페, 한식, 일식, 갈비, 회 등
다양한 음식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으며 최고의 맛과 시설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국수, 해장국, 보쌈, 장어, 복어 등 한두 가지만을 취급하는 전문식당들도 고유의 비법으로 손님을 끌고 있다.
인근에 수성유원지가 자리잡고 있어, 식사 후 가볍게 들러 휴식을 취하기에 좋다.

3.영남제일관
소 재 지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산 90
우리민족은 고래로 구릉과 산성을 방수의 요충으로 중시하여 각종 성을 쌓았으나 평지에 성을 축조하는 것은 드물었다.
지방행정관서가 있는 곳의 평지에 축성된 대구 읍성은 1590년(선조23년)에 처음 만들 때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 나,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뒤 1736년(영조 12)에 돌로 다시 쌓아 석성을 만들었다. 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정문을 두었는데, 동문은 진동문, 서문은 달서문, 남문은 영남제일관, 북문은 공북문이라 하였다. 1906년 읍성이 철거될 때 성문들도 함께 철거되었다.
현재의 영남제일관은 1980년에 그 자리를 옮겨 새로 세웠으나 성루의 위치·규모·품격 면에서 원형과 동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지금 대구제일의 향토상징 관문으로서 금호강과 함께 대구시민들이 대자연의 운치를 마음껏 즐기는 곳이다.

4.사월동 지석묘군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9호
지 정 일 1992.09.08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사월동 469
시 대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대구시 수성구 사월동에 있는 이 고인돌은 바둑판식으로 4기가 무리지어 있다. 덮개돌의 길이는 1.7∼2.37m, 너비는 1.1∼1.6m이며 받침돌 높이는 0.7m∼1.27m 정도이다.
무리지어 있는 고인돌을 마을에서는 ‘칠성바위’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모두 7기의 고인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상동 지석묘군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2호
지 정 일 2006.04.20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상동 501
시 대 청동시대
수성구 상동 501번지 일대에 분포했던 지석묘군으로 현재는 상석 4개가 이동되어 임의로 배치되어 있다. 1998년 국립대구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바에 의하면 지상의 상석은 이동되어 원위치는 파악하기 어렵게 되어 있기는 하나 지하묘구는 15m×15m 구역내에서 30여기의 석관·석곽이 원상으로 분포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묘구는 평면 장방형이였고, 대개 길이는 2m, 폭은 40㎝, 벽고는 30㎝ 정도의 규모였다. 묘구의 유형은 석관형과 석곽형의 두 종류가 있고, 석관은 네 벽을 판석으로 세워 구축했고, 석곽형은 천석 또는 천석과 판상석을 혼용해서 구축했다. 바닥은 자갈 또는 잔 할석을 전면에 깐 것과 반듯하게 자른 판상석을 몇장 깐 것 또 시상 받침돌을 더문더문 놓아 둔 형식이 있다.
이 곳 좁은 구역에 밀집 분포하는 묘구는 배치와 사용 석재의 종류를 통해서 묘구간의 관계를 추측 가능케 하고 있어 주목된다. 또 매장방법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 준다고 한다.
묘구에서는 일단병식 석검과 유경식 석검, 석족이 출토되었으나 토기의 부장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들 석기는 대봉동, 이천동 지석묘의 출토품과 유형을 같이 하고 있다.
묘구형태에서 주목되는 현상은 종전까지 지석묘는 모두 수혈식 묘구로 보고되어 왔으나 여기서 수혈계 횡구식의 매장법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유구가 확인되었다.

6.야수정
종 목 문화재자료 제14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상동 139-1
시 대 대한제국시대
1900년경 진씨 가문의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재실)으로 한·일 절충식 건물이다.
지을 당시에는 앞면 5칸·옆면 1칸 반의 규모였으나, 나중에 뒤쪽 부분 전체를 반칸씩 늘려 겹집처럼 되어 있다. 마루는 장마루를 깔고 마루 밑에 붉은 벽돌을 쌓았으며 유리창문을 사용했다. 천장도 일본식에 가까운 우물반자로 꾸며 놓았다.
20세기 초 건축 양식의 새로운 경향을 보이는 건물로, 전통 양식이 일본 건축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여 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7.고산서당
종 목 문화재자료 제15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성동 산22
시 대 조선시대
퇴계 이황(1501∼1570)과 우복 정경세(1563∼1633)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처음 지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서 이황 선생과 정경세 선생이 강의하였던 곳이라하여 150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숙종 16년(1690)에는 서당 뒤편에 사당을 지어 서원이라 하였다. 고종 5년(1868)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고종 16년(1879)에 서원 옛터에 강당만을 다시 지어 고산서당이라 하였다. 그 뒤 1964년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현재 사당 자리에는 이황·정경세 선생의 강학유허비가 서 있다.

8.독무재
종 목 문화재자료 제17호
지 정 일 1989.06.15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만촌동 188-1
시 대 조선시대
19세기 중엽의 하시찬 선생을 모신 재실로 그의 제자들이 세웠다.
하시찬 선생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대구시 수성구에서 태어났으며 예학에 밝아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는 지금의 독무재가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50m 떨어진 독무암루에서 살았으며, 순조 28년(1828)에 돌아가셨는데 명성이 높아 제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독무재 안은 재실인 독무재가 있고 그 왼쪽 뒤로는 별도의 담장을 두고 사당인 경덕사가 자리잡고 있다.
앞면 3칸·옆면 1칸 반 규모이며 중앙에 마루를 두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9.하효자 정려각
종 목 문화재자료 제18호
지 정 일 1989.06.15
소 재 지 대구 수성구 만촌동 389-9
시 대 조선시대
고려 때 이부시랑을 지낸 하광신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조정에서 세운 비와 각이다.
하광신은 원래 중국 송나라의 대도독으로서,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정착하면서 살게된 하흠의 아들 하용의 손자이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하는데, 매서운 찬바람이 불어치는 겨울에 복숭아를 구해다준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한다. 하광신의 효성이 지극하다는 소식을 들은 충숙왕(1327)은 하광신이 살던 마을에 효자를 표창하기 위해 세우는 붉은문<정문>을 세우고 그의 자손들에게 대대로 부역을 면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으며, 조선 고종 6년(1896) 그의 자손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모두 면제시키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그 공문 원본은 후손인 하재형 씨가 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정려각은 정조 5년 (1781년) 다시 지었으나, 일제시대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왔다.
비문은 이조판서겸 홍문관 대제학이던 황경원이 지었고, 글씨는 통훈대부 사헌부지평 이약채가 썼다.
현재 만촌동에 살고 있는 달성 하씨들이 해마다 돌아가며 관리하고 있다.
건물은 앞면 1칸·옆면 1칸 규모이며, 중앙에 정려비가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조선 후기 정려각의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다.
10.고모령비
소 재 지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57
고모령에 얽힌 전설
옛날 고모령에는 남편 없이 어린 남매를 키우는 홀어머니가 있었는데 하루는 스님 한 분이 와서 이 집은 전생에 덕을 쌓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가난하다고 하여 어머니와 어린남매는 덕을 쌓기 위해 흙으로 산을 쌓게 되었는데 현재의 모봉,형봉,제봉 이라는 3개의 산봉우리가 되었는데 동생과 형이 서로 높이 쌓고자 시샘을 하여 싸우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크게 실망하여 자식들을 잘못 키웠다는 죄스러움으로 집을 나와 버렸다. 집을 나와 하염없이 걷던 길이 지금의 고모령, 정상에 와서 집을 향해 뒤돌아 봤는데 그 이름이 뒤돌아 볼 고(顧) 어미 모(母)를 합쳐 고모라는 마을 이름도 이곳에서 나왔다.
지금은 경부선 때문에 산은 잘렸고 망우공원에서 파크호텔 팔현부락을 거쳐 고모역으로 이어지는 옛 고갯길이 이어져 있다.
첫댓글 이건 학교숙제라서 올린것 ㅋ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