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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기와의 종류 우리 나라에서 알려진 기와 자료는 위만조선시대의 우거왕 3년에 중국 한나라의 무제와 인연을 맺은 후 낙랑군치로 알려진 평안남도 평양시토성리에서 1921년에 후한시대로부터 서진시대에 해당되는 시기에 유행하였던 기와가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로 발혀졌다.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의 종류는 지붕 끝에 장식하는 막새기와를 비롯하여 암키와 수키와 등이 밝혀졌다. 막새기와는 두 종류의 자료로 밝혀져 있는데 한 종류는 문자막새와 다른 종류는 무늬막새로 구분되어 있다.
기와(蓋瓦, Roof Tiles) 34×15×8~40×26×23cm 韓亨俊 ▶
문자막새로는 낙랑예관이란 명문을 둥근막새 표면에 양각, 또는 음각한 것이 알려졌다. 고구려 초기 도읍지였던 국내성에서는 초기부터 말기에 걸쳐 생산된 기와자료가 풍부하게 산재해 있다고 한다. 장군총에서 출토된 막새 무늬는 두툼한 테두리 중심부에 툭 튀어나온 능형 돌기가 자리잡은 곳을 중심으로 상하좌우에 두 줄의 구획선을 마련한 구획 된 공간에는 고사리 무늬나 연꽃잎을 부조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 초기의 기와 무늬는 한나라시대나 서진시대에 유행된 무늬를 답습하기도 하였으나, 고구려의 독특한 연꽃무늬막새는 고구려의 독창적인 무늬로 추정되며 이 무늬를 조형으로 삼아 발전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평양지방에서는 안학궁지는 물론, 이외 장안성 사이에 주암에서도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노매동에서도 밝혀지고 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집안현 지방에서 발견된 기와보다 평양지방에서 출토되는 기와가 더욱 발달되어 무늬의 종류도 증가되었고 인동무늬를 비롯하여 연꽃 귀면 등의 다양한 무늬가 쓰여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과 같은 유물자료 뿐만 아니라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의 기와]
고구려의 기와는 대체로 4세기경에 우수한 기와 생산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제법 권위건축 의 위용을 자랑하는 기와집이 권위의 상징으로 등장되었으리라 믿어진다. 고구려의 찬란한 기와문화는 곧 백제와 신라에까지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믿어진다. 백제는 대체로 전기는 한성시대, 중기는 공주시대, 후기는 부여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한성시대에 백제건축에 대한 문헌자료에 의하면 기원전 4년의 기록을 보면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았다."라는 자료를 통해 백제궁궐 건축의 위용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온조왕시대를 거쳐 진사왕대에 들어서면 궁궐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동시에 조경을 매우 잘 꾸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흔적을 찾을 길 없어 유감스러우나 백제의 유적으로 알려진 서울시 강동구 광장동에 풍납9리 토성을 비롯하여 몽촌토성지와 삼성동 등지에서 기와막새가 출토되고 있다. 이들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나 고구려적인 요소는 찾아볼 수 없는 백제 특유의 팔엽연화무늬막새기와를 개발 장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성시대의 자료는 풍부하지 못하나 공주시대에 들어서면 막새종류도 다양할 뿐 아니라 문자막새도 등장하고 있다. 무늬막새에 나타나는 무늬의 종류는 연화무늬를 비롯하여 당초 인동 위면 가릉빈가 도심원문 일휘문 고사리 무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여러 종류의 무늬 중에 불교의 상징적인 꽃인 연화 무늬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불교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믿어진다.
공주지방에서 기와가 발견되는 곳은 공산성을 비롯하여 서혈사지 대통사지 등의 백제시대의 건축물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한, 공주지방인 웅진에서 주목되는 바는 무녕왕릉의 발견으로서 건축연대가 명확하여 당시에 유행하였던 기와나 벽돌에 장식된 무늬의 양식을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백제 성와대에 도읍지가 부여인 사비로 옮겨진 후 주변에 산재해 있는 절터와 궁궐터 등에서 여러 종류의 지붕재료인 기와와 막새자료가 발견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백제의 왕흥사지 이웃인 청량군 왕진면 왕진의 백마강변에 산재해 있는 백제 기와터를 비롯하여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부여 가탑리 기와 가마터는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부여지방에서 발견되는 막새기와에 장식된 자료를 살펴보면 고구려 계통의 기법을 보여주는 증거와 중국 남조의 한 구성체였던 양나라 계통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고구려계의 백제기와는 쌍북리 등지에서 출토되는 막새로서 고구려의 숫막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막새인 드림새를 사분하여 두 줄의 선으로 구획한 속에 한 잎의 연꽃을 배치한 양식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의 남조영향을 많이 받은 백제 후기기와는 정림사지 가탑리사지 장하리사지 금강사지 성주사지 미륵사지 금마오금산성 왕궁평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들 유적에서 발견된 기와무늬는 일본에 영향을 주어 아쓰가 사천왕사 법흥사지 대관사지 등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전라북도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에 소재해 있는 미륵사지에서 종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녹유와당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이곳에서 발견된 막새기와의 연판 속에 장식무늬가 있는 자료를 살펴볼 것 같으면 판 내에 주문, 또는 동무늬 등을 장식하였다.
또한, 부여의 부소산 남면 향교밭에서 출토된 소형의 막새기와에는 복판팔엽연화문을 장식한 것이 있다. 이와 같은 양식은 5세기 중엽에 나타나기 시작한 고구려의 청암리사지 에서 발견된 양식을 계승한 계통이라고 하겠다.
신라는 전기와 후기로 대별되는데 전기는 삼국시대에 속하는 시기이며 후기는 통일 후 신라시대의 문화라고 하겠다. 삼국신라시대에 해당되는 시기의 기와에 관한 문헌자료는『삼국사기』 신라본기 지마니사금 11년조에 "큰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와 나무가 부러지고 기와가 날랐다"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신라 초기에 권위건축이 존재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신라 초기 기와자료는 충분하게 출토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지역에 있어 고신라시대에 해당되는 시기의 유적에서 주목되는 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즉, 아쓰가시대의 아쓰가지, 호루지에서 발견된 기와류가 중국의 남북조식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다. 막새기와를 구분해 보면 넓고 높은 주연이 둘러 있는 중앙에는 좁은 자방과 연꽃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자방 속에는 6∼7과의 연자가 장식되어 있는 주위에 부여 군수리폐사지, 부여 금강사지에서 발견되는 숫막새기와의 연판 무늬와 같은 계통의 것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으로 연판은 세장하고 단순하면서 웅장한 맛을 지니고 있다. 이들과 유사한 막새기와가 탑리와 임해전지, 배리 등에서 출토되고 있다. 즉, 탑리와 창림사지에서 발견된 숫막새의 모습은 부여 구위리에서 출토되는 막새와 비슷한 육엽으로 판단이 뾰족한 선이 있고 판단측이 넓어지고 있는 특징을 보이는 것들에서 전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제계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고구려계 기와는 탑리와 인왕리, 경주부근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외래적인 특징을 가미한 신라시대의 기와는 마침내 통일 신라시대를 전후하는 월성 황룡사지 분황사 사천왕사지 홍륜사지 임해전지 탑리 등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 기와]
고려시대 기와는 사치스러운 기와인구의 증가는 마침내 고려의 청자기와와 같은 특이한 기와를 개발하게끔 촉진시켰다. 즉, 고려 충렬왕 때 승 육연으로 하여금 강화에서 황단으로서 유리와를 제조하였다는 사실이『고려사』에서 보인다.
이 유리와는 감람색 유리피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백제, 신라시대의 녹유계 청자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점토질, 즉 산화철이 함유된 점토와 표면에 입혀진 유리피와는 연유계, 혹은 녹유계의 것임을 짐작하게 된다. 이들의 발색은 바닥흙의 바닥색의 관계로 탁한 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하나의 결점이라 하겠다.
이곳에서 이미 한 대 말에 발생하기 시작한 청자 제조는 장강하류에 월주를 중심으로 성숙하기에 이르렀다. 3세기경에 시작하여 당송대에 이르러 급성장한 월주의 청자기술을 도입한 고려가 마침내 유명한 청자기와를 제조하였다는 사실을 문헌과 이를 생산하였던 가마터에서 밝힐 수 있게 되었다.
문제의 청기와에 대한 문헌자료는『고려사』세가 18권 의종 11년조에 의할 것 같으면 수덕궁을 세운 궁전 안에 양이정을 짓고 지붕에 청자기와를 이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가 있다.
[조선시대의 기와]
조선시대의 기와는 일반적인 흑색이나 흑회색 계통의 것으로 당시의 도읍지와 관아와를 만든 후 기름가마 시설로 구워 만드는 최신형 기계시설을 갖추어 있는 중소기업 형태의 기와공장이다.
조선시대에 법정공장으로서 건축 분야 종사직으로『경국대전』공장 조에는 개장 전장 와장 등이 나타나고 있다. 기와 만드는 공인은 와서 소속으로 40여명의 정원을 책정하고 있다. 특히, 이 가운데 와장에 관한 기록을 보면 당시 도성의 거주민이라도 일반 민가는 대체로 기와를 이용하지 못했는데 세종 8년에 일어난 대화재 후 민수영의 제와를 위해 별요를 설치하고 일년에 수십만장의 기와를 구워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제조〔옛 제도에 각 사, 또는 각 청의 관제상의 우두머리가 아닌 사람이 그 관아의 일을 다스리게 하는 벼슬로서 종일품, 또는 이품인 사람〕과 감역관을 차정하고, 와장 40명은 승려를 우선적으로 초정하며, 조역인 3백명은 자원인과 지방의 승려로서 충당하되 그들에게 의복과 양식을 지급하는데 승려는 그 부역일수와 근무성적을 보아 상직하게하였다고 한다.
근세에 신건축으로 대체됨에 따라 점차 전통가옥이 줄어들자 자연히 와장의 기능이 소멸될 지경이 되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로 전남 장흥군 안양면 모령리의 한형준을 중요무형문화재 제91호 제와장으로 지정하였다. 이 글은 한국의 전통공예(한국문화재보호재단 간)에서 발췌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