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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全州)지역 유적 답사 자료집
◎ 답사할 곳 : 출발(07:20) → 경기전과 조경묘(10:40∼11:20) → 풍남문(11:20∼11:30) → 전주객사(11:40∼12:00) → 전동성당(12:10∼12:30) → 점심(종로회관 전주비빔밥 12:30∼13:30)→ 전주향교(13:30∼14:00) → 강암서예관(14:00∼14:20) → 한벽당(14:20∼14:40)→ 학인당(14:40∼15:10)→송광사, 위봉사(15:30∼17:00)→대구도착(20:00)
1. 경기전(慶基殿)과 태조어진(太祖御眞)
임금의 초상화를 어진(御眞)이라 한다. 어용(御容), 수용(晬容), 어영(御影), 진용(眞容) 따위 말들도 같은 뜻으로 쓰였다. 어진은 멀리로는 삼국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제작되었다. 어진 제작은 소박하게는 조상에 대한 보은과 추모의 정에서 우러난 것이었겠지만 왕조시대였던 만큼 단순히 그런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조종 및 국가를 상징하는 의미가 담겨 그 제작은 국가적인 주요 행사가 되었다. 그래서 대신급의 당상관이 책임자가 되는 임시관청-어진도사도감(御眞圖寫都監) 또는 어진모사도감(御眞模寫都監)-이 설치되고 당대 최고의 화원들을 선발하여 주관화사(主管畵師), 동참화원(同參畵員), 수종화원(隨從畵員)이라는 이름아래 전신(傳神)의 막중한 소임을 맡겼다. 이렇게 완성한 어진은 매우 소중히 다루어 진전(眞殿)이라는 별도의 건물에 봉안하고 관리하였다.
역대 왕들의 어진이 이러하였으니 한 왕조의 창업자인 태조라면 더 이를 나위가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 태조의 경우 15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26폭의 어진이 전해지고 나라 안 곳곳에 진전이 마련되어 있었으니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그리고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등이 그 예가 되겠다.
경기전이 처음 세워진 것은 태종 10년(1410)이었으며, 애초에는 이름도 어용전(御容殿)이었다. 이태 뒤 이름을 진전으로 고쳤고, 다시 세종 24년(1442)에는 경기전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왕조가 끝날 때까지 사용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병화를 만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으니, 현재의 경기전은 전쟁이 끝난 뒤 광해군 6년(1614)에 중건한 것이다.
전주시의 중심을 형성하는 풍남동에 중앙공원이 있다. 수만 평에 달하는 녹지 공간으로서 전주시민들의 좋은 휴식처이다. 그러나 전주사람들은 여기를 중앙공원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냥 경기전이라고 부른다. 경기전이 공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일곽을 형성하고 있을뿐더러 공원을 대표할 만한 상징성을 지닌 때문일 것이다. 그 중앙공원의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경기전 일원이 눈에 잡힌다. 양쪽에 날개처럼 담장을 거느린 외삼문 안쪽으로 내삼문, 정전이 보인다. 여기에 내삼문과 정전을 연결하는 낭무(廊廡)와 담장이 장방형으로 이어져 경기전을 구성하고 있다. 정전은 다시 본전, 그 가운데에는 앞으로 달아낸 헌(軒), 본전 양 측면에서 낭무로 이어진 익랑(翼廊)으로 구분된다.
외삼문과 내삼문은 모두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보통 서원이나 향교에서 볼 수 있는 삼문보다 크기와 높이도 클뿐더러 포작도 더 화려한 편이다. 왕실건축으로서의 권위가 그렇게 표현되었다. 본전 또한 남향한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장대석을 다듬어 쌓은 두벌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세웠다. 본전에서 특이한 점은 앞으로 달아낸 헌의 존재이다. 본전의 정면 가운데 본전 기단보다 조금 낮은 두벌대 장대석 기단을 모두고 그 위에 본전 어간과 폭이 같도록 네 개의 기둥을 세운 다음 벽체 없이 박공지붕을 얹었다. 때문에 본전의 전체적인 모양은 왕릉에서 볼 수 있는 정자각(丁字閣)과 흡사하다. 본전 양옆으로 이어진 2칸의 익랑과 거기서 직각으로 꺾여 뻗은 4칸의 낭무는 회랑처럼 바깥벽에만 벽체를 하고 안쪽은 틔워두었다.
경기전 건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강력한 중심축의 형성과 철저한 대칭성의 고수이다. 주요 건물이 모두 일직선상에 위치하여 공원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열려 있는 외삼문, 내삼문을 통해 가장 깊숙한 정전까지 곧장 들여다보인다. 게다가 공원 정문에서 정전까지 전돌을 깐 복도가 한가운데로 곧게 이어져 중심축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이 중심축을 분리선으로 삼아 좌우를 나누어보면 경기전의 모든 건물이, 심지어 담장까지도 한치의 어긋남 없이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축에서 중심축과 대칭은 흔히 권위와 질서, 위계 엄숙성 따위를 유도하는 기법으로 구사되는 경우가 많다. 권위건축에서 중심축을 설정하고 건물을 대칭적으로 배치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다지 규모가 크다고 할 수 없는 경기전이 이런 장치를 통하여 왕실건축으로서의 권위와 엄숙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이에 버금가는 수법은 많다. 우선 본전을 정자각 형태로 꾸며 여타 건축과 구별을 분명히 한 점이 그런 수법이고, 기단을 잘 다듬은 두벌대 화강암으로 마감한 것도 그 예에 든다. 본전 지붕의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여느 건물처럼 적새를 쌓아 만든 것이 아니라 생석회를 두껍게 쌓아올린 양성마루인데, 궁궐건축에서 보듯 이 또한 왕실건축의 전용 기법이다.
회랑이 왕실과 관계 깊은 시설임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은 물론 삼국 이래의 절터, 궁궐터를 통해서 거듭 확인되는 바인데, 경기전의 익랑과 낭무를 회랑이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그것과 혹사하다. 경기전은 본전을 비롯한 일체 부속건물이 하나같이 맞배지붕을 이고 있다. 이 맞배지붕이 우리 고전건축에서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 연출이 필요한 건물에 종종 사용되어왔음은 두루 아는 바와 같다. 복도도 마찬가지다. 길게 이어져 본전에 닿아 있는 복도를 걸으며 누가 감히 마음을 가다듬고 매무새를 살피지 않을 수 있으랴. 중심에 펼쳐진 긴 직선 자체가 이미 긴장과 경건을 불러일으키는 장치인 것이다. 줄여 말하자면 경기전은 크지 않은 규모와 단순소박한 품새 속에서도 권위건축이 갖추어야할 분위기 창출을 위한 갖가지 건축적 배려가 베풀어졌고, 나름대로 이런 의도가 성공적으로 구현된 건축이라 하겠다. 사적 제339호이다.
경기전의 본전 안에 보물 제931호로 지정된 태조 이성계의 어진 봉안되어 있다. 조선왕조 전 시대를 통해 역대 왕들의 어진은 상당수 제작되었으며 그 제작 과정이나 봉안체제에 관한 세부적인 기록은 온전히 전해지지만, 막상 현존하는 유품은 아무 드물어 겨우 네 폭에 지나지 않는다. 영조·철종·익종 그리고 여기 경기전의 태조어진이 그것이다.
애초에 경기전에 안치되었던 어진이 지금까지 전해지지는 않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곳에 보존하고 있던 어진은 선조가 피난하던 의주의 행재소로 옮겨져 병화를 면했다. 그것이 그뒤 얼마나 오랫동안 전해졌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고종 9년(1872) 당시 경기전에서 받들던 어진이 오래되어 낡고 해짐에 따라 새로 제작하면서 초상화에서는 당대 가장 뛰어났던 박기준, 조중묵, 백은배 등으로 하여금 영희전(永禧殿)에 있던 태조 어진을 범본(範本)으로 하여 모사케 한 것이 지금의 어진이다. 어진 제작 방법에는 도사(圖寫), 추사(追寫), 모사(模寫)의 3가지가 있다. 도사는 군왕이 생존해 있을 때 직접 어전에서 사생하여 완성하는 방법이다. 추사란 왕이 살아 있을 때 그리지 못하고 승하한 뒤 생전 모습을 추상하여 제작하는 것을 말하며, 모사는 이미 완성되어 있던 어진을 모본으로 하여 옮겨 그리는 경우를 일컫는다. 경기전의 어진은 따라서 모사의 방법으로 이룩된 이모본(移模本)이다.
이렇게 하여 경기전에 갈무리된 태조 어진은 불과 십수년 뒤 한 차례 곤욕을 치른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피신’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판관 민영승은 태조 어진을 이안(移安)한다는 핑계로 어진을 가지고 성을 넘어 도망하여 위봉산성에 몸을 숨겼다. 구차한 피난이었다. 하여간 그 덕택에 어진은 무사할 수 있었다.
어진은 양 어깨와 앞가슴에 황룡을 수놓은 청포 차림에 익선관(翼蟬冠)을 쓰고 용상에 정좌한 정면교의좌상(正面交椅坐像)이다. 곤룡포와 너른 품새에 비해 얼굴이 작은 편이다. 입과 눈 또한 작고 수염도 성글지만 눈동자는 또렷하고 입매무새가 단단하여 매우 야무진 인상이긴 하나 우리가 흔히 머릿속에 그리는 난세를 헤쳐간 풍운아나 호걸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청포의 짙은 남색과 용무늬의 금빛, 그리고 옷자락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붉은빛이 화려하고 고귀한 느낌을 주면서 동시에 엄숙하고 위엄에 찬 분위기를 자아낸다.
양식적으로는 관모와 얼굴 부위에서 가볍게나마 음영법이 보이는 등 이모 당시의 화풍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더 많은 부분에서 조선 초기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특히 선묘 위주로 처리된 옷주름과 각이 진 윤곽선, 옷자락의 양쪽 틈새로 보이는 안감의 표현기법을 비롯하여 무릎 위로 높게 깔린 무늬 있는 돗자리라든가 용상의 형태 묘사 등이 원본에 충실한 이모 상태를 말해준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이 태조 어진은 비록 이모본이기는 하지만, 몇 점 남아 있지 않은 조선시대 어진의 하나라는 의의를 지니고 있으며 그와 함께 조선 초기 초상화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경기전에는 예전에 사고(史庫)도 설치된 적이 있었다. 이른바 조선전기 4대 사고의 하나인 전주사고가 그것이다. 아마도 이곳이 조선 왕실의 본관지이며 또 태조의 어진이 봉안된 탓에 사고가 마련되었던 듯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사고가 완비된 형태로 출발하지는 못했다. 세종 27년(1445) 처음 전주에 왕조실록을 안치할 때는 성안의 승의사(僧義寺)라는 절에 두었다가 세조 10년(1464) 가을에는 객사안의 진남루로 옮겨 보관했다. 그때 세조는 전라도에 명하여 실록각(實錄閣)을 짓도록 하였으나 흉년이 겹쳐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말았다. 성종 3년(1472) 봄 세조·예종 양조의 실록이 완성되자 성종은 양성지(梁誠之)를 봉안사(奉安使)로 임명하여 이를 전주사고에 보관케 하였는데, 이때 그는 관찰사 김지경(金之慶)과 함께 경기전 동편에 터를 잡고 인근의 선군(船軍) 300여명을 역군(役軍)으로 동원하여 일을 시작한 뒤 이듬해인 1473년 5월 완공을 보았다. 이렇게 실록각이 건립되자 그해 6월 진남루에 있던 실록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 뒤 120여 년간 잘 보존되던 실록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읍 내장산 은봉암과 비래암, 영변 묘향산 보현사 등지를 전전하며 난을 피한 다음, 왜란이 끝나고나서 다시 영변의 객사와 강화도로 차례로 옮겨졌다. 이후 어렵게 병화를 면한 전주사고본 실록과 이를 바탕으로 재인쇄된 4질을 합한 5질의 실록을 보존하기 위하여 다섯 곳의 사고가 정비되지만 전주사고는 끝내 계승, 복구되지 못하고 말았다. 현재 옛 사고터가 경기전 오른쪽 담장 밖에 남아 있고 그 한켠에 복원된 실록각이 서 있다. 건물은 2층의 다락집인데, 서책을 보존하기 알맞은 옛 실록각의 구조를 음미할 수 있고 실록각의 역사를 반추하는 빌미를 제공할 뿐 옛맛은 없다.
사고터를 에워싼 사고석 담장의 동편에 난 일각문을 나와 공원 뒤편을 바라보면 멀찍이 흙돌담 너머로 몇 채의 골기와집이 보인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6호로 지정된 조경묘(肇慶廟)이다. 이곳은 조선 왕실 전주 이씨의 시조인 신라(新羅) 사공(司空) 이한(李翰)의 위판을 안치한 사묘(祀廟)이다. 영조 47년(1771) 전국 유생의 상소에 의하여 창건되어 경기전의 예에 따라 제사를 받들던 곳이다. 외삼문, 내삼문, 본전을 비롯한 몇몇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돌담장 위로 발돋움하며 넘겨다볼 수 있을 뿐 자세한 구조나 형태를 살피기는 어렵다. 또 굳이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일지도 않는다. 긴 흙돌담의 붉은 황토색, 윗부분만 드러난 하얀 회벽과 강회로 마무리한 처마끝의 가지런한 하얀 선, 담장의 지붕을 포함하여 군집한 건물 지붕들의 차분한 암회색과 그들이 그리는 높고 낮은 변화, 그리고 이 모든 요소가 서로 어우러지며 보여주는 대조와 조화는 차라리 먼 발치에서 볼 때나 눈과 마음에 안길 듯하기 때문이다.
공원의 남동쪽 담장 부근에는 예종의 태실 및 태실비가 얌전한 자태로 자리잡고 있다. 태실은 사각의 두툼한 하대석 위에 항아리 모양의 몸돌을 놓고 그 위에 평면 팔각의 살찐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주위로는 여덟 개의 각기둥을 모지게 세우고, 그 사이마다 아래위로 연잎을 돋을 새김한 동자주를 놓고 그 위에 팔모의 난간석을 연결하여 장식과 보호를 겸한 난간을 둘렀다. 작고 아담한 크기에 형태조차 조선 초기 고승들의 부도와 흡사하다. 태실 옆에 있는 태실비는 목과 다리를 한껏 웅크린 화강암 거북받침 위에 통돌 하나로 이수와 몸돌을 깍은 대리석 비를 올려놓은 모습이다. 무른 대리석이라 그런지 이수의 용조각이 자못 정교하고 세련되었다. 몸돌 앞면에는 ‘睿宗大王胎室’이란 여섯 글자를 세로로 새겨 태실의 주인공을 밝혔고, 뒷면에는 비를 세운 때를 적었다. 그에 따르면 이태실과 비는 1578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뒷면에는 이때로부터 156년이 지난 1794년 ‘개석(改石)’했다는 내용이 덧붙여져 있는데, 과연 돌을 교체했다는 사실이 태실비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태실을 말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태실과 태실비는 원래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태봉산에 있던 것을 197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으로,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 26호이다.
경기전을 한바퀴 돌아나온 사람이라면 이제 공원 정문 앞마당, 인파속에서도 아무 주의를 끌지 못하고 서 있는 하마비에 주목해도 좋다. 전체적인 형태는 지대석 위에 쭈그려 앉은 두 마리 사자가 받침돌을 등 위에 받치고 있고, 받침돌의 윗면에 홈을 파서 위를 공글린 장방형 빗돌을 꽂은 모양새다. 사자와 받침대, 빗돌을 모두 대리석으로 다듬었다. 정성은 물론 하마비 하나 세우는 데도 적잖은 재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두 마리 사지가 떠받치고 있는 하마비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니, 상당한 격식을 차린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비의 앞면에는 “여기에 이르렀거든 누구든 말에서 내리라. 잡인은 들어오지말라[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는 글귀가 두 줄로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1614년에 세웠다는 내용의 글이 한 줄로 씌어 있다. 또 오른쪽 옆면에는 1856년 중각(重刻)했다는 말이 있는데, 무엇을 다시 새겼다는 뜻인지 석연찮다. 아무튼 돌사자가 삽살강아지처럼 귀여운 구석이 있는 이 유물은 나름대로 격조를 갖춘 보기 드문 하마비이다.
2. 풍남문(豐南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秦)은 불과 2대를 넘기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진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 천하를 재통일한 인물이 한고조 유방(劉邦)이다. 그는 시골 소읍 풍패(豊沛) 출신이었다.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관향이다. 그래서 유방의 고향 풍패에 빗대어 지난날 전주를 흔히 ‘풍패향(豊沛鄕)’,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풍남문이란 이름에는 풍패향 전주의 남문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곧 전주성의 남문이 풍남문(보물 제308호)이다.
조선왕조가 서자 전주는 풍패지향으로 중시되어 태조 원년(1392)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되면서 호남지역을 관할하는 전라도의 수부(首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초에 관찰사 최유경(崔有慶)의 주도로 전주성이 축성된 바 있다. 이때 쌓은 성이 오랜 시일이 지남에 따라 심하게 훼손되어, 영조 9년(1733) 관찰사로 부임한 조현명(趙顯命)이 대대적으로 개축을 시도하게 된다. 당시 그는 전주를 호남의 수도이자 호서(湖西) 출입의 인후(咽喉)로 생각하고 있었고, 따라서 전주는 비상시에 반드시 사수하여야 할 전략적 요충으로 보았다. 이런 판단을 배경으로 국가 유사시 전투성으로 이용하고자 옛성을 헐어버리고 견고한 석성을 새로 쌓아 완공을 보았다. 영조 10년(1734) 8월의 일이었다.
성의 동서남북 네 곳에 문루가 세워졌음은 물론이다. 그 가운데 남문은 안팎으로 홍예(虹霓)를 틀어올리고 그 위에 2층 문루를 올린 모습이었다. 이름은 명견루(明見樓), 풍남문의 전신이 된다. 하지만 이 건물은 얼마 지나지 않은 영조 43년(1767)년 공공건물 백여채, 일반민가 수천 채를 태워버린 대화재로 말미암아 불타버리고 만다. 이것이 다시 복구된 것이 이듬해 영서 44년(1768), 관찰사 홍낙인(洪樂仁)에 의해서였다. 문루를 옛모습대로 회복한 홍낙인은 전주가 “왕실이 발원한 곳이자 옛부터 풍패라고 일컬어 온 연고로[璿潢發源之地 古有豊沛之稱故]” 명견루를 풍남문이라 고쳐 부른다. 우리가 부르는 명칭이 여기서 비롯된다.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오백년간 호남 수부의 성곽으로 군림하던 전주성은 순종 원년(1907)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성곽과 성문이 모두 철거되는 비운을 맞는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와중에도 풍남문만은 화를 면하고 잔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세월과 더불어 종각과 포루(砲樓)등 부속시설이 차례로 헐리거나 지면이 묻히는 등 옛모습을 크게 잃었다. 이것을 1978년부터 3년에 걸친 보수공사로 복원한 것이 지금의 풍남문이다.
복원된 풍남문은 남쪽 앞면을 U자형으로 두르고 있는 옹성(甕城), 좌우에 날개처럼 덧댄 종각과 포루, 그리고 이들이 모이는 자리에 우뚝 솟은 문루로 이루어져 있다. 문루는 중앙에 홍예문을 낸 높직한 화강암 기단부 위에 중층 누각을 올려 세운 형식으로, 누각의 1층은 정면 3칸 측면 3칸, 2층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축이다. 1층 누각 주위로 벽돌로 마무리한 성가퀴를 둘렀으며, 그 양쪽 옆면에 일각문인 협문을 두어서 아래쪽으로 이어진 계단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1층은 주심포계 공포를 짜올렸다. 어간 기둥 위에 용머리를 초각한 초공이 외부로 뻗었으며, 귀공포의 귀한대에도 용머리가 조각되어있다. 창방 위에는 칸마다 귀면, 꽃이 꽂힌 꽃병, 코끼리, 사자 등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진 화반이 놓여 이채롭다. 내부에는 앞뒤 두 줄로 각각 4개씩 내진기둥을 세웠는데, 이것이 그대로 연장되어 위층의 기둥이 된다. 이러한 수법은 다른 문루건축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방식이다. 아래층 한켠에 놓은 목조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오를 수 있다.
2층은 기둥 사이를 널벽으로 막고, 그것을 다시 칸을 질러 나눈 다음 칸마다 열쇠구멍처럼 총안(銃眼)을 내었다. 성문으로서의 기능을 상기시키는 장치다. 천장은 서까래가 훤히 드러나는 연등청장으로 처리하였다. 2층 남면과 북면 어간 상단에 각각 ‘남문(南門)’,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고 씌어진 편액과 현판이 걸려 있는데, 편액은 1842년에 부임한 감사 서기순(徐箕淳)이 쓴 것이라 전한다.
풍남문은 우리 근대사의 굵은 매듭, 갑오농민전쟁의 현장이기도 한다. 1894년 1월 고부 관아의 점령을 시발로 봉기한 농민군은 4월 7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다시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한 뒤 곧바로 갈재를 넘어 정읍, 태인, 금구를 거쳐 26일에는 전주성의 턱밑인 삼천에 이르렀다. 여기서 전주성까지는 불과 4km, 용머리 고개를 넘으면 코앞이 전주였다. 이튿날 용머리고개에 올라 전주성을 굽어본 농민군은 성난 파도처럼 전주성을 덮쳤다. 이에 전 감사 김문현은 네 곳의 성문을 닫고 서문 밖 민가 수천 채를 불태워 농민군의 공격을 차단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한낮이 되자 서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농민군은 남문과 서문을 통하여 물밀듯이 성안으로 밀려들었다. 그러자 감영군은 겨우 포 한 발을 응사하고는 패주하고 말았다. 호남의 심장부이자 최대의 관문이던 전주성은 이렇게 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갑오농민전쟁 전 과정 가운데 최대의 승리였다. 이후 농민군은 5월 7일 유명한 전주화약(全州和約)이 맺어질 때까지 풍남문과 마주보이는 완산 칠봉에 주둔한 경군(京軍)과 대치하며 공방을 거듭했다.
그날 성안으로 밀려들던 농민군의 함성과 환희, 숨가쁘게 전개되던 관군과의 공방전, 그 거친 숨결과 비탄을 모두 지켜보았을 풍남문은 예나 이제나 말이 없다. 다만 주위로 형성된 남문시장 골목골목에서 이루어지는 농민군 후예들의 고단하고 산산스런, 잘해야 대수로울 것 없는 삶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3. 전주객사(豊沛之館)
왕유(王維)의 객사청청유색신(客舍靑靑柳色新)이란 시구가 오래도록 우리네 입에 오르내린 데서 알 수 있듯이, ‘객사’하면 외로운 서정이 흐르고, 만나고 헤어짐이 이루어지며, 때로는 가연이 맺어지기도 하는 낭만적인 장소를 연상하게 된다. 그 말만으로도 길손의 가슴속에 따뜻한 등불이 커지는 공간이 예전의 객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전통건축에서 말하는 객사란 이렇게 여염의 누구라도 나그네가 되어 묵을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 좀더 딱딱하고 근엄한 곳이다. 여기서의 그것은 객관(客館)이라고도 불리던, 고려·조선 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를 일컫는다. 고려조까지만 해도 외국 사신이 내왕할 때 묵거나 연회를 갖는 것이 객사의 주된 기능이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그 기능이 차츰 넓어져 사신의 영접은 물론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소 관리들이 국왕에 대한 예를 행하는 장소였고, 나라에 경사나 국상이 있을 때는 관민이 모여 의식을 거행하는 곳이었으며, 새로 도임한 관리가 가장 먼저 배례(拜禮)하는 데가 여기였고, 왕명을 받은 신하가 머물면서 교지(敎旨)를 전하던 자리 또한 객사였다.
객사는 보통 몇 채의 건물로 구성되었다. 객사의 중심건물이 되는 주관(主館)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두 날개처럼 익실(翼室)을 두고, 앞쪽으로는 중문, 외문이 들어선다. 그밖에 옆면으로 회랑 비슷한 낭무를 덧대거나 관리를 위한 수직사(守直舍) 따위가 부속되기도 한다. 이때 주관 바닥에는 전돌이나 돌을 깔고, 익실에는 온돌을 놓는 것이 흔한 형태였다.
객사는 그 기능상 중앙에서 파견한 관료가 주재하는 곳이면 거의 빠짐없이 지어진 전국적으로 상당수에 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아주 적고, 그나마 본래의 모습을 제대로 지닌 안변객사, 성천객사 등은 북한에 위치하여 가볼 수 없는 실정이다. 2000년 현재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객사로는 부산의 다대포, 전북의 흥덕·순창, 경북 안동의 선성현, 경남의 장목진 객사 등을 비롯하여 여럿이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것으로는 전주객사(보물 제583호)와 여수 진남관(보물 제324호)이 있다. 객사의 부속건물로서는 강릉객사의 정문이던 강릉객사문(국보 제51호), 밀양객사에 딸린 누각이었던 영남루(보물 제147호) 정도가 두루 알려진 것이라 하겠다.
전주객사가 언제쯤 창건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성종 2년(1471) 전주부윤이던 조근(趙瑾), 판관 김신(金信)이 주동하여 전주사고(全州史庫)를 창건하고 남은 재목으로 서익헌을 동익헌과 같은 규모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앞서 이미 객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는 주관과 양 익헌은 물론 매월당(梅月堂), 청연당(淸燕堂) 등 부속건물이 들어서고 뒤뜰에는 진남루(鎭南樓)라는 누각이 있었으며 삼문 형식의 정문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주관과 서익헌, 1999년 말 다시 복원한 동익헌, 그리고 수직사만 보일 뿐이다.
주관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단층건물이다. 주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편액이다.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고 쓴 글씨가 보통 큰 게 아니어서 한 글자의 키가 1m를 넘으니, 옆으로는 칸살 하나를 다 차지하고 위로는 창방에서 서까래 끝동까지를 가득 메웠다. 담긴 뜻은 이미 풍남문에서 보았듯이 ‘풍패향 전주의 객관’이 되겠다. 편액이 이정도니 집 또한 거기에 걸맞게 높직하고 큼지막하다.
장대석으로 두른 외벌대 기단이 야트막하다. 그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이 훤칠하게 길뿐더러 칸살 또한 아주 넓어 비록 3칸집이지만 풍패향의 객사답게 당당함을 자랑한다. 기둥 위로는 창방을 건너지르고 주심(柱心)에만 공포를 짜올렸다. 주심포집이다. 주두 위에 짜맞춘 공포는 도리 방향으로는 주심도리를 받는 첨차와 외목도리를 받는 행공첨차에 모두 소첨차와 대첨차를 겹쳐 올렸으며, 보방향으로는 쇠서가 날카로운 살미첨차를 3단으로 두었다. 첨차 아랫부분이 모두 굴곡이 많게 초각되어 꽤나 장식적인 모습이다. 주심포 양식의 말기적인 수법으로 보인다. 정면에는 칸마다 사분합문을 달았으며, 그 위로는 흡사 홍살문처럼 살대를 촘촘히 꽂아 독특한 모양새를 보인다. 분합문은 띠살문인데, 기둥이 높다보니 문짝 또한 길쭉하여 시원스러우면서도 은근한 권위가 느껴진다.
서익헌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 건물이다. 지붕은 독특하여 주관과 맞닿은 동쪽은 맞배, 반대쪽 서편은 팔작지붕이다. 두 건물을 바짝 붙여 지을 때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인 동시에 동익헌도 같은 구조로 되어 있어 주관과 연결된 전체가 팔작지붕의 장중한 단일건물로 인식되는 효과가 있다. 부분부분을 구성하는 수법은 대개 주관과 흡사하다. 하지만 공포의 짜임은 약간 달라서 주두 위의 첨차나 행공첨차 모두 첨차를 하나씩만 쓰고 있으며, 살미첨차 역시 2단으로 정리하여 주관보다 격을 낮추고 있다. 평면은 중앙의 3칸에 넓은 대청이 있고, 그 양쪽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방을 배치한 다음 앞쪽으로는 전체에 툇마루를 깐 형식이다. 가운데 대청을 툇마루보다 한 단 높게 만들 것이 눈에 띈다.
서익헌의 앞쪽에 있는 수직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동쪽 2칸이 온돌방, 서쪽 1칸이 마루이며, 앞쪽 반 칸은 툇마루를 낸 구조이다. 측면에서 보면 도리가 다섯 줄 걸린 5량가(五樑架)임을 알 수 있다. 도리는 단면이 네모진 납도리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납도리를 받치는 부재로 장여만을 썼을 뿐 다른 어떠한 부재도 첨가하지 않은 이른바 민도리집이다. 박공판은 폭이 좁아 서까래를 채 가리지 못하고 있으며, 종보나 들보는 휘어지는 비틀린 나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필요한 최소한의 부재를 사용하여 집을 얽고 있음이 한눈에 드러난다. 어찌 보면 너무 궁색스럽지만 달리 생각하면 천연덕스럽다. 그래 그런지 수직사의 옆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도 마음도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진다.
4. 전동성당
1914년에 지어진 천주교 성당으로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전주는 전라감영이 있었으므로 천주교회사에서 전동은 자연 순교지의 하나가 되었으며, 이 성당은 바로 천주교인들이 처형되었던 풍남문(豊南門)이 있던 곳에 있다. 1891년(고종 28)에 보드네(Baudenet)신부가 성당의 대지를 매입하고, 그 뒤 1908년 프와넬(Poisnel)신부의 설계로 착공하여 1914년에 준공을 보았다. 벽돌로 된 완전한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양식의 성당 건물은 서울의 명동성당과 외양상 유사한 점이 많으나 건축양식상으로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회색과 적색의 이형(異形) 벽돌을 사용하여 섬세한 모양을 꾸며낸 점은 같으나 반면에 아치의 모양이나 종탑의 양식은 전혀 다르다. 내부 열주(列柱)는 8각의 석주(石柱)로 되어 있으며, 정면 중앙의 종탑부는 12개의 채광창을 돌린 12각형 고상부(鼓狀部) 위에 12각의 총화형(葱花形)으로 된 둥근 지붕을 얹었고, 좌우에는 그보다 약간 작은 8각형의 고상부 위에 8각의 지붕을 얹었다.
두툼한 외부 벽체와 반원아치의 깊숙한 창이 로마네스크양식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고딕양식의 명동성당이 내부 열주 사이를 뾰족한 아치로 연결한 아케이드인 데 반하여, 이 성당은 8각 석주 사이가 반원아치로 연결되어 있다. 초기 천주교 성당 중에서 그 규모가 크고 외관이 뛰어나게 아름답다. 이 성당은 건평 189평에 대지 4,000평이며, 전주 중앙본당이 1956년에 준공되기 전까지는 전주교구 주교좌성당이었다.
5. 전주향교(全州鄕校)
전주시 완산구 교동에 위치하고 있다. 전주향교는 고려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당시의 위치는 현재 경기전(慶基殿) 근처였다. 조선시대에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경기전이 세워지자 1410년(태종 10) 향교에서 경기전에 들려오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하여 전주성의 서쪽 6·7리 되는 황화대 아래 현재의 화산동으로 이전하였다. 전주시 교동 한옥보존지구와 접해 있는 전주향교는 제향공간인 문묘가 앞쪽에, 강학공간이 뒤쪽에 위치한 전묘후학의 배치를 하였다.
그 뒤 1603년(선조 36)에 부성(府城)과 너무 떨어져 있고 객사를 기준으로 하여 왼쪽에 문묘(文廟), 오른쪽에 사직단(社稷壇)을 두도록 한 좌사우묘(左社右廟) 제도에 어긋난다 하여 순찰사 장만(張晩)과 유림들이 힘을 합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향교 앞 교동 일대는 현재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이 때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1654년(효종 5), 1832년(순조 32), 1879년(고종 16), 1902년(고종 39), 1904년(고종 41)에 중수하였다.
조선 후기까지 전주향교는 경내에 대성전, 동무와 서무, 신문(神門), 외문(外門), 만화루(萬化樓), 명륜당, 동재와 서재, 계성사(啓聖祠), 입덕문(入德門), 사마재(司馬齋), 양사재(養士齋), 책판고(冊板庫), 제기고(祭器庫), 수복실 등 총 99칸 건물로 구성된 규모가 큰 향교로 서울의 성균관을 모방하였다고 하여 수도향교(首都鄕校)라고도 칭하였다.
전주향교는 홍살문과 하마비를 지나면서 향교의 영역이 전개된다. 전주향교는 나주향교와 마찬가지로 만화루, 일월문, 대성전, 명륜당이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는 전묘후학의 배치를 하고 있으며, 계성사가 서북쪽 뒤에 위치하고 있다. 향교의 입구인 만화루를 들어서서 그 앞의 솟을대문으로 조영된 일월문을 지나면 제향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전주향교 배치도는 일월문과 만화루 사이의 마당에는 담장 주위로 은행나무와 작은 나무를 심었다. 이 마당은 향교의 외부공간과 제향공간을 연결시키면서 차단시키는 매개공간의 역할을 한다. 만화루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이고, 일월문은 정면 3칸에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제향공간은 중앙의 대성전과 대성전 앞뜰 좌우의 동무와 서무로 구성되어 있고, 동재와 서재 앞에는 수령이 4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각각 한 그루씩 심어져 있다. 대성전은 1653년(효종 4)에 고쳐 세웠는데, 이기발이 쓴 중건기가 있다. 이후 1907년(융희 1)에 군수 이중익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4성인, 10철학자, 송나라 6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동무와 서무는 각각 정면 9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건물로 전면에 퇴칸을 구성하여 뜰 쪽으로 트이도록 하였다. 동무와 서무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으며, 유약(有若)·복부제(宓不齊)·복승(伏勝)·동중서(董仲舒)·한유(韓愈) 이통(李侗)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대성전 뒤에 조성된 강학공간은 대성전 서북쪽 뒤에 낸 일각문을 통해 출입할 수도 있지만, 향교 좌측의 골목길을 지나 입덕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다. 강학공간의 중심을 이루는 명륜당은 1904년(광무 8)에 군수 권직상이 고쳐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마루를 깐 대청이고 좌우 협칸은 실(室)로 구성되어 있는 평면을 하였다. 명륜당은 좌우 1칸씩에 도리를 뺄목으로 길게 뽑아내어 눈썹지붕을 이어 단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명륜당 앞뜰 좌우에는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고 그 뒤로 동재와 서재가 서로 마주보며 있다. 동재는 정면 6칸, 측면 1칸에 반 칸의 퇴를 두었는데 6칸 모두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면의 가운데 4칸 앞에는 툇마루가 시설되어 있으며 양 측면의 방에는 툇마루가 없다. 서재의 평면은 동재와 같으나 실의 구성이 다르다. 평면은 5칸의 방과 1칸의 대청으로 이루어지며 방 앞에는 모두 툇마루를 시설하였다. 서재의 북쪽 뒤로는 장판각이 있고, 내부에는 9,600여장의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강학공간 서쪽에는 계성사가 있는데 주위를 담으로 둘러 별도의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계성사는 원래 명륜당의 동쪽에 있었으나 1929년 철도 부설로 인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계성사 앞쪽에는 신삼문(神三門)이 자리하고 있다.
6. 오목대(梧木臺)와 이목대(梨木臺)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 1-3에 있으며 전라북도기념물 제16호이다. 오목대는 1380년(우왕 6)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으로 1900년(고종 37) 고종이 친필로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가 새겨진 비가 세워졌다. 경기전(慶基殿)의 남동쪽 500m쯤 떨어진 곳,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하는데, 옛날에는 동쪽의 승암산에서 오목대까지 산이 이어져 있었으나 전라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맥이 끊겼다. 오목대에서 육교 건너편으로 70m쯤 위쪽으로 가면 승암산 발치에 이목대가 자리잡고 있다.
이목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조 목조 이안사(李安社)의 유허(遺墟)로서 시조 이한(李翰) 때부터 누대에 걸쳐 살던 곳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용비어천가》에도 묘사되어 있다. 이목대에도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가 새겨진 비가 오목대와 동시에 세워졌다. 오목대와 이목대는 모두 오래전부터 전주 시민의 휴식 공간이 되어 왔다.
7. 강암서예관
강암 서예관은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서예 관련 전시관이다. 1990년 전주를 대표하는 서예가 강암(剛岩) 송성용(宋成鏞, 1913∼1999) 선생이 자신의 작품과 땅을 전주시에 기부할 의사를 밝히면서 서예관 설립이 추진됐다. 이후 전주시는 송선생이 기증한 완산구 교동 땅에 건물을 짓고 5년의 준비 기간을 거친 뒤 1995년 강암 서예관을 개관했다. 송선생은 시대를 대표하는 명필로 많은 존경을 받았지만 스스로를 “시골 구석에 사는 까닭에 견문이 매우 좁아 글씨가 먹으로 장난치는 수준”이라고 평할 정도로 겸손한 인물이었다. 국전 초대 작가를 지냈으며 대한민국 미술대전, 전라북도 미술대전, 동아 미술대전 등의 심사 위원을 역임했다. 주요 전시물은 송선생의 작품을 비롯해 추사 김정희 등의 서예 작품과 동양화 및 고서적 등이다. 매 분기마다 전시 작품을 교체한다. 여기서는 해마다 강암서예대전을 연다.
8. 한벽당(寒碧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흔히 한벽루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한벽청연(寒碧晴讌)이라 하여 전주8경의 하나로 손꼽혔다. 조선 태종 때 월당(月塘) 최담(崔霮)이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세웠다고 전하며, 처음의 이름도 ‘월당루(月塘樓)’였다고도 한다. 그 뒤 사람들이 깎아 세운 듯한 암벽과 누정 밑을 흐르는 물을 묘사한 ‘벽옥한류(碧玉寒流)’라는 글귀에서 한벽당이라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도 1683년(숙종 9)과 1733년(영조 9) 등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828년(순조 28)에 크게 중수한 것이다. 불규칙한 암반에 맞추어 높낮이가 다른 돌기둥으로 전면 기둥을 세우고, 뒤쪽은 마루 밑까지 축대를 쌓아 누각을 조성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배면을 제외하고 삼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마루 주위에는 머름과 계자난간(鷄子欄干)만이 둘려져 있어 자연과 일체를 이루려는 누정건축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 공포는 2익공식의 구조이다. 쇠서[牛舌]에는 당초문을 초각(草刻)하였으며 연꽃모양의 주두가 특이하다.
전주천을 따라 시내로 진입하는 한벽교 주변으로 자리하는 정자는 그 모습이 운치가 있다. 발산이라 불리는 작은 언덕 위 절벽을 깎아 만든 자리에 기둥을 세우고 물결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세워진 정자는 남원의 광한루, 무주의 한풍루와 함께 호남삼한으로 불렸다.
지금의 모습은 한벽교에 가려 옛 멋을 제대로 느끼기 힘들지만 정자에 앉아 마음의 눈으로 다리를 지우고 주변 경관을 살펴본다면 가히 천하의 절경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한벽교 아래 어두운 터널을 지나 그 입구를 맞닿는 지금의 모습은 옛 모습을 잃은 안타까움이 더욱 크다. 월담 유허비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한벽당과 작은 별채처럼 자리하는 정자 1986년에 복원된 요월대(邀月臺)가 있다. 바위에 부서지는 하얀 물결의 포말을 보며 전국의 수많은 음유시인들이 이곳을 찾아 자연과 어울리며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다 한다. 콘크리트 어두운 빛의 다리와 줄어든 수량으로 개울이 되어버린 전주천의 모습이 못내 아쉽다.
9. 전주한옥마을
을사조약(1905년)이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가도(全郡街道)가 개설(1907년)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되었고, 1911년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인 것이다.
10. 학인당(學忍堂)
전주에는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선생이 사셨던 양사재를 비롯해 풍남헌, 동락원 등 한옥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품격 있는 한옥 민박이 여러 곳 있다. 그 가운데 한옥마을 내에 자리한 학인당(學忍堂)은 전주한옥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이자 민가 중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백범 김구 등 정부요인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원래는 99칸이었지만 지금은 본채인 학인당과 별당채인 진수헌, 사랑채인 예지헌만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전국 국악 명인 명창들의 무대였던 전주대사습놀이가 강제로 폐지되자, 인재 백낙중 선생은 판소리 명창들을 위한 무대로 1908년 학인당을 건립했다. 그후 100여 년의 세월 동안 임방울, 김소희 등 판소리 대가들이 이곳에서 공연을 펼치며 판소리의 맥을 이어 왔다.
평상시 응접실인 본채의 대청은 공연 때는 공간을 합쳐 1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하는 공간이 된다. 마룻바닥의 널판은 폭이 좁아 소리가 빠져나갈 틈을 줄이고, 두께는 10cm 이상 두꺼워 소리의 진동으로 인한 떨림을 줄인다. 한지 또한 4겹을 발라 소리의 울림을 극대화했다. 학인당의 아름다운 정원과 연못도 빼놓을 수 없다. 연못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있는데, 끝에는 한여름 냉장고 대용으로 쓰였던 땅샘이 있다.
11. 송광사
‘송광사’하면 누구나 얼른 전남 순천에 있는 조계산 송광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찾아가고 있는 곳은 전북 완주군의 종남산(終南山) 송광사이다. 물론 두 절은 전혀 별개의 사찰이다. 하지만 아무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글은 물론 한자로도 ‘松廣寺’라고 같게 표기하고 있으니 필시 무슨 연유가 있으리라는 짐작쯤은 아무라도 해봄직하다. 송광사의 역사를 기록한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創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옛날 고려의 보조국사가 전주의 종남산을 지나다가 한 신령스런 샘물을 마시고는 기이하게 여기어 장차 절을 경영하고자 했다. 마침내 사방에 돌을 쌓아 메워두고 승평부(昇平府 : 지금의 순천시)의 조계산 골짜기로 옮겨가 송광사를 짓고 머물렀다. 뒷날 의발(衣鉢)을 전하면서 그 문도들에게 이르길 “종남산의 돌을 메워둔 곳은 후일 반드시 덕이 높은 스님이 도량을 열어 길이 번창하는 터전이 되리라” 했다. 그런데 수백년이 지나도록 도량이 열리지 못했으니 실로 기다리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응호, 승명, 운정, 덕림, 득순, 홍신 스님 등이 서로 마음으로 맹세하되 보조스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여 정성을 다해 모연(募緣)하니 뭇 사람들이 그림자 좇듯 하였다. 이에 천계(天啓) 임술년(1622) 터를 보고 방위를 가려 땅을 고르고 풀과 나무를 베어내며 산과 바위를 깎아 가람을 이룩하였다.
결국 보조스님과 인연이 닿아 있어 그 뜻을 받들다보니 절 이름까지도 같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아울러 우리는 이 비문 내용을 통해서 송광사가 조선후기에 창건되었음도 알 수 있다. 비의 이름 자체가 ‘개창비’인데다 그것을 건립한 해도 창건불사가 마무리된 1636년이니 이 사실에 착오가 있을 리는 별로 없어 보인다. 한데 절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전혀 엉뚱하다.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 가지산문의 제3조 보조체징(普照體澄, 804∼880)선사가 송광사를 창건했다는 애기다. 심지어 어떤 기록에는 체징스님의 할아버지뻘 되는 가지산문 개창자 도의선사를 창건주로 꼽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통일신라시대 창건설은 아무런 문헌적 근거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그를 뒷받침하는 유물이나 유적 또한 현재로선 전혀 알려진 바 없다. 아마 체징스님과 지눌스님의 호가 같고, 여기에 자기 절의 역사를 가능한 한 올려보려는 생각이 더해져 이와 같은 주장이 제기된 것이 아닌가 한다.
송광사는 종남산 아래 널찍하게 펼쳐진 수만 평 대지 위에 터를 잡고 있다. 이른바 평지사찰이다. 평지사찰로서의 특징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일주문 앞에 서기만 해도 금세 눈에 들어온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의 중심축이 일직선상에 있어 이들 각 건물의 문들이 틀을 만들며 점차 작아지다가 열어놓은 대웅전 어간문 안의 어둠 속으로 수렴된다.(다만 현재 1988년 완공한 대웅전 앞 석탑이 대웅전 어간 일부를 가리고 있다). 엄정성을 읽을 수 있는 정연한 구조이다. 산지사찰과는 판이하게 다른 진입방식이요, 가람배치이다. 당연히 평지라는 지형적 특성이 십분 고려된 것이겠지만, 옛 백제지역 사찰들이 보여주는 평기성의 면면한 전통을 여기서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다. 천왕문을 넘어서는 순간 어딘가 휑뎅그렁한 분위기가 우리를 덮친다. 날이 선 엄정성이 절 전체로 파급, 확장되는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대웅전의 앞뒤로 흩어져 잇는 전각들 - 십자각, 지장전, 관음전, 첨성각, 오백나한전, 약사전, 삼성각 등 - 은 너른 대지위에 띄엄띄엄 떨어져 있다. 말 그대로 ‘흩어져’있는 모양새이고, 하나의 점 혹은 파편으로 존재한 뿐이다. 그저 낱낱의 건물이 고립분산적으로 독립해 있을 뿐 건물들 상호간에 어떠한 유기적 연관성도 발견하기 어렵다. 건축이 생활을 담는 그릇일진대 과연 이런 건축 구조와 수행공동체를 지향하는 불가의 생활방식이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적이 의심스럽다.
송광사 건축의 이러한 분산성은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조선 후기에 창건된 탓인지 유감스럽게도 송광사의 건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십자각을 제외하곤 사람의 눈과 마음을 강하게 비끄러맬 만한 것이 없다. 말하자면 어느 건물도 이렇다 할 구조의 미 또는 공예적 장식미를 보여주지 못하는 셈이다. 이럴 경우 그 약점을 보완, 수정하여 강점으로 환치시키는 방법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집합성이다. 별볼일 없는 것들이 기능적으로 결합될 때 생겨나는 힘, 그것은 이를테면 군집의 미, 집체의 미, 그리고 조화의 미일 텐데, 송광사 건축은 애석하게도 이런 미덕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산지가람이라면 덜 드러났을 고립성, 분산성이라는 구조적 결함이 평지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훨씬 강하게 노출되어 그 황량함이 두드러진다.
그러면 송광사의 가람배치가 창건 때부터 지금과 같았을까? 그랬을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일주문에서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중심축을 설정하고 그 선 위에 가지런하게 건물들을 배치한 점을 본다면 그밖의 건물들도 어떤 원칙과 조형 원리에 입각해서 위치가 정해졌을 법하다. 물론 추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야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아무튼 지금의 송광사는 건물군이 보여주는 짜임새에서 많은 허점을 드러내고 있음에 틀림없고, 최근에는 이런 바람직스럽지 못한 현상이 가속화되는 느낌이다. 예들 들면 창암 이삼만이 글씨를 쓴 편액이 인상적이던 명부전을 헐고 지장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더 크게 새로 지으면서 집을 오른쪽 뒤편으로 훨씬 물려 앉히는 바람에 다른 건물과의 연계성을 더 떨어뜨린 점이라든지, 건축적 고려없이 마당 가운데 세우면서 중심축을 벗어난 석탑이라든지, 국적 불명의 쌍석등을 난립시키는 따위가 모두 그런 경우이다. 요즘 사람들의 즉흥성과 안목 없음을 탓할밖에 별 도리가 없으니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대개 이상과 같은 점을 미리 염두에 두고 송광사를 돌아본다면 공연한 실망을 덜 수 있음은 물론 소소한 재미와 소득이 없지는 않을 터이다. 절로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 일주문은 다포계 맞배지붕양식이다. 조선시대 다포계 건물의 경우 대체로 시대가 내려올수록 공포의 생김새가 나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송광사 일주문은 그 정도가 조금 심하여 공포뿐만 아니라 서까래와 덧서까래, 창방 뺄목 대신 고개를 내민 용머리, 문의 앞뒤로 덧댄 보조기둥 따위들이 모두 유난히 가늘어 일주문의 인상을 섬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런 섬약함 때문인지 일주문의 또 다른 인상은 일종의 가벼움이다. 어딘가 모르게 진득하게 땅에 몸 붙이고 있는 자세가 아니라 쉽게 하늘로 날아오를 듯하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는 기둥이 의식되지 않고 포작에 받쳐진 지붕만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 묘한 착각을 일으키곤 한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이다.
금강문을 지나 사천왕문 안으로 들어서면 여느 절집처럼 사천왕이 지키고 있다. 여기 사천왕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이다. 흔히 이곳 사천왕상을 소개하면서 뛰어난 사실성과 세부 묘사의 성실성을 언급하지만, 글쎄 그게 다른 천왕상들과 뚜렷이 드러날 만큼 차이가 큰지는 모르겠다. 흙을 이겨서 4m가 넘는 신상을 조성하면서 이 정도 성실성을 보여준다는 점은 평가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하다. 오히려 이 사천왕상에 주목하는 이유는 제작연대가 분명하다는 점 때문이라 해야 솔직하리라. 오른손으로는 당(幢)을 잡고 왼손 위에는 보탑(寶塔)을 올려놓은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쓰고 있는 보관의 뒷면 끝자락에 ‘順治己丑六年七月日畢’이라는 먹글씨가 남아 있어 1649년에 이들 사천왕상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조선시대 소조 사천왕상의 기준작을 얻게 된 셈이고, 이 점이 송광사 사천왕상이 갖는 의의라 하겠다. 1997년 보물 제1255호로 지정되었다.
천왕문을 넘어서면 중정이고 그 너머 정면으로 대웅전이 우람하다. 대웅전은 송광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이다. 절이 창건될 무렵 처음 지어졌고, 1857년 중건되었다. 꽤 큰 건물이다. 외관에 걸맞게 기둥이 튼실하고 훤칠하다. 그런데 어쩐지 처마가 깊지 않아 집 전체의 조화가 썩 훌륭한 편은 아니다. 제대로 조화가 맞았더라면 장중한 맛을 한껏 드러냈으련만 도리어 점잖은 도포 차림에 양태 좁은 갓을 쓴 것마냥 어딘지 어색하다. 처음 세울 때는 2층이었으나 중건하면서 단층으로 고쳐 지었다고 하는데, 그런 연유로 건물 각 부분의 비례가 적정치 않은 것인지 모르겠다. 기둥머리에는 창방과 평방을 물리고 그 위로 공포를 올려 다포집 전형의 모습을 보이는 데, 이 집의 특색은 그 아래에 있다. 즉 정면의 창방과 상방 사이 공간을 벽면으로 처리하고 각각의 칸을 균등하게 셋으로 나눈 다음 칸칸이 벽화를 채운 것은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다. 보통은 여기에 빗살무늬 교창을 둔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천장의 꾸밈새가 다채롭다. 천장은 가운데 3칸은 우물반자를 치고 나머지 외진부는 경사진 빗천장을 꾸몄다. 불상 위 천장에는 간단한 운궁형 보개를 씌웠으며, 우물천장에는 칸마다 돌출된 용, 하늘을 나는 동자, 반자틀에 붙인 갖은 물고기·게·거북 혹은 자라 따위 바다짐승 등 온갖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개중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디론가 바삐 줄지어 가는 자라, 새끼를 등에 업고 네 활개를 젓는 거북도 눈에 띈다. 빗천장에는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추는 모습의 비천도 20여 장면이 천장화(天障畵)로 그려져 있다. 19세기 중건 당시에 완성된 것들로 생각되는데, 비교적 색채도 선명하고 활달한 동세가 구김살없이 표현되어 눈을 즐겁게 한다.
법당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불상이 되겠다. 중앙에 석가, 동쪽에 약사, 서쪽에 아미타여래가 삼존불로 모셔져 있는데, 흙으로 만든 이 불상들은 각각의 높이가 5.5, 5.2, 5.2m나 되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소조상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이분들은 그 크기가 어찌나 대단한지 법당 안이 그들먹하다. 때문에 불상과 천장 사이의 공간은 여유롭지 못하고, 수미단과 앞면 기둥열의 간격이 좁아 예배 공간은 옹색하며, 수미단조차 3단이 아닌 2단으로 낮추어 만드는 편법을 구사하고 있다. 공간 활용이 이렇게 비합리적임을 무릅써가며 이만큼 불상을 크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지 의아스럽다. 혹 법당이 2층이었을 때에는 그런대로 집과 어울렸을까? 모를 일이다.
근년 도난사건이 빌미가 되어 삼존불의 복장유물(腹藏遺物)이 수습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세 불상에 똑같은 내용으로 납입된 「불상조성기(佛像造成記)」이다. 그 가운데 “이 불상을 만드는 공덕으로 주상전하는 목숨이 만세토록 이어지고 왕비전하도 목숨을 그와 같이 누리시며, 세자저하의 목숨은 천년토록 다함없고 속히 본국으로 돌아오시며, 봉림대군께서는 복과 수명이 늘어나고 또한 환국하시기를······원하옵니다[以此造像功德奉爲主上殿下壽萬歲 王妃殿下壽齊年 世子邸下壽千秋 速還本國 鳳林大君增福壽 亦爲換局……之願]”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로써 우리는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함도 이들 불상 제작 배경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사의 서글픈 장면 하나가 일견 세상과 무관한 듯한 불상에조차 화인(火印)처럼 남은 것이다. 또 조성기 첫머리에 불상을 만든 때를 밝히면서 ‘崇禎十四年’과 ‘崇德六年’(1641)이라고 명(明)과 청(淸)의 연호를 나란히 기록하고 있음도 눈에 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동아시아 질서가 재편되는 혼란기에 명, 청 양국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약소국 조선의 딱한 처지도 손금보듯 읽어낼 수 있다. 대웅전 삼존불은 우리 역사의 한 폐이지를 가감없이 고스란히 간직한 불상이라 하겠다.
대웅전 수미단 위에는 전패(殿牌) 또는 원패(願牌)라고 불리는, 조각이 아름다운 목패(木牌) 세 개가 서 있다. 왕, 왕비, 왕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축원패이다. 셋 모두 크기가 2m가 넘어 전패치고는 가장 큰 편에 속한다. 화염을 날리며 구름속에서 꿈틀대는 용무늬가 복잡하게 전체를 뒤덮고 있는 양면은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인다. 뒷면에는 인조때 만들었다는 것과 정조 때인 1792년 수리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먹글씨가 남아 있다. 크기로나 새긴 솜씨로나 또 만들어진 연대가 드러난 점으로나 눈여겨봄직한 유물이다. 그동안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던 대웅전은 1996년 보물 제1243호로 등급이 승격되었고, 삼존불상과 그 복장유물은 1997년 보물 제1274호로 새롭게 지정되었다
절 건물 가운데 범종, 목어, 운판 법고의 네 가지 법구, 곧 사물(四物)이 비치된 곳이 범종각 혹은 범종루이다. 엄격히 구분한다면 종각은 단층, 종루는 누각 형태의 2층을 가리킨다. 송광사에는 대웅전의 남서쪽, 현재는 요사채로 쓰이는 관음전의 비스듬한 앞쪽에 범종루가 있다. 우리 전통 건축에서는 아주 드문 십자형 평면을 채택하여, 누마루를 경계로 아래위 동일선상에 12개씩의 누하주와 누상주를 세우고, 그 위에 다포계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짜올린 대단히 독특한 외관을 뽐내는 건물이다.
바닥이 지면과 별 차이가 없는 누각 아래층은 주춧돌과 기둥을 제외하면 거칠 것 없이 열린 구조이고, 그 서북쪽 귀가 만나는 곳에 누마루로 오르는 계단이 걸렸다. 사물이 걸려 있는 누각은 면마다 돌아가며 간결한 계자난간을 돌렸다. 누마루의 중심을 이루는 4개의 기둥에는 기둥을 휘감고 솟아오르는 용을 그려넣어 돋보이게 장식을 하였다. 기둥 위로는 창방을 건너질렀는데, 대들보 없는 이 건물에서 그 구실을 겸하고 있다. 평방 위로 짜올린 공포는 가냘프게 휘어올라간 양서형의 살미, 두께가 얄팍한 첨차 등 하나하나 뜯어보면 매우 섬약하다. 또 서까래와 덧서까래도 가늘고 길어 연약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울림은 전혀 다르다. 기둥 사이의 간격이 2.5m 따라서 한 면의 길이가 7.5m에 지나지 않는 작은 규모의 집에 귀공포가 여덟 군데나 놓이고 기둥 사이마다 주간포를 짜올렸으니 처마밑은 공포로 빼곡하여 섬세하고 현란하며 화사하다. 공포를 구성하는 낱낱부재가 가볍다보니 그것들이 모여서 이루는 느낌도 가뿐하고, 산뜻하고, 날렵하다. 마치 범상한 목소리를 가진 한 사람 한사람이 모여 고된 훈련 끝에 부르는 화려한 합창 같고, 보잘것없는 풀꽃들이 가득 모여 이룬 커다란 군락 같다. 밀집한 공포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한 본보기를 여기서 만날 수 있다. 종루는 1857년 대웅전을 중건할 때 함께 중창된 것으로 전해온다. 종전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1996년 ‘완주 송광사 종루’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1244호로 승격되었다. 십자형 평면으로 말미암아 십자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대웅전을 옆으로 비껴 절의 동북쪽 귀퉁이로 빠져나가면 절의 내력이 적힌 ‘송광사개창비’를 만날 수 있고, 거기서 내쳐 걸으면 긴 돌각담에 둘러싸인 이 절의 부도밭이 나온다. 송광사개창비는 절의 창건불사가 마무리된 1636년 세웠다. 거북받침,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졌는데 거북받침은 화강암, 몸돌과 지붕돌은 대리석 통돌이다. 비머리의 앞면에는 ‘全州府松廣寺開創之碑’, 뒷면에는 ‘賜號禪宗大伽藍寺’라고 전서(篆書)로 제액하였고, 그 아래로 앞뒷면에 글씨가 빽빽하다. 글을 짓고 전서를 쓴 사람은 선조의 부마였던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고, 글씨는 선조의 여덟째 아들 의창군(義昌君) 광(珖)이 썼다. 이미 대웅전 삼존불의 조성 경위에서 우리는 송광사와 왕실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음을 짐작한 바 있지만, 국가에서 ’선종대가람‘이란 이름을 내리고 왕실과 가까운 사람들이 비의 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사실에서 그런 점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고려 보조스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사찰 건립의 배경과 과정, 둘째는 벽암(碧巖) 각성(覺性, 1575∼1660)스님이 창건에 깊이 관여한 사실과 그분의 면모 및 고려 말의 태고(太古) 보우(普愚) 스님으로부터 스님에게까지 이어지는 법맥의 상세한 계통, 그리고 셋째는 벽암스님의 문도, 창건에 동참한 사주자와 기술자, 비석 제작에 참여한 장인의 명단이 그것이다. 특히 벽암스님의 존재가 주목된다. 그는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임진왜란때에는 해전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1624년 남한산성을 쌓을 때는 팔도도총섭에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면서 3년 만에 공사를 마무리한 승병장이기도하다. 스님은 송광사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서, 무주 적상산성에서 사고(史庫)를 지키던 중 대중들의 요청이 계기가 되어 대웅전 삼존불의 조성을 비롯한 갖가지 송광사 불사에 참여한다. 그의 지위나 직책으로 보아 송광사와 왕실을 연결하는 매개자였으며 불사의 주도자 또는 후견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또 비문속의 스님에게까지 이어지는 전법의 계보는 불교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돌각담이 정겨운 부도밭은 너무 넓은 탓인지 아늑한 맛은 없다. 뒷줄에 열둘, 가운데 둘, 그리고 앞줄에 둘 해서 모두 열여섯 기의 부도와 두 개의 비가 세줄로 나란히 서있다. 부도들은 모두 석종형으로 별다른 특징은 없고, 다만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이 여러 점 눈에 띈다. 푸근한 맛은 없지만 세월을 벗하며 서 있는 부도들이 맑은 바람 속에서 해바라기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송광사는 진입부의 정연함과 중심부의 산만함의 기묘한 대비를 이루는 사찰이다. 진입부에서 가졌던 기대와 긴장이 중심부에서 여지없이 풀려버리는 그런 곳이다. 건물과 건물이 짜임새 있게 맞물려 돌아가야 거기에 생활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음을 교훈적으로 보여주는 절이다. 설사 여러 점의 유물이나 유적이 가치있고 볼 만하더라도 그것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못하면 그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없음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 송광사이다.
12. 위봉사(威鳳寺)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예전 위봉산성 안에는 열네 곳의 절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오래 전 모두 스러지고 지금은 단지 위봉사만 남아있다. 산성이 건재했을 때 성을 지키는 역할도 담당했던 위봉사는 오히려 성보다 그 역사가 훨씬 거슬러 오른다. 일설에는 위봉사를 백제 무왕 5년(604) 서암대사(瑞巖大師) 혹은 서응대사(瑞應大師)가 창건했다는 말이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물증이나 문헌이 남아 있지 않다. 좀더 믿을 만한 사실은 고려 말부터 나타난다. 1868년 포련화상(布蓮和尙)이 쓴 「위봉사극락전중수기」에 따르면, 신라 말기 최용각이라는 사람이 산천을 주유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옛 절터를 찾아 절을 지은바 있고, 그 뒤 공민왕의 왕사였던 보제존자(普濟尊者), 곧 나옹스님이 1359년 가람을 이룩하였는데 건물이 모두 스물여덟 동, 암자가 십여군데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도 대규모 불사가 한 차례 있었던 듯하다. 위 중수기에는 나옹스님의 유적을 찾아 이곳에 왔던 포련스님이 화주가 되어 60여 칸을 중수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아마도 이때의 중수는 사세를 탄탄하게 했던 듯, 대략 반세기 뒤인 일제강점기엔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본말사법에 의해 위봉사는 전북 일원의 46개 사찰을 관할하는 본사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세도 잠깐, 1970년대에는 무너지기 직전의 건물 두세 채만 남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가 1990년대 이후 몇몇 건물을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른다.
1990년대에 진행된 불사는 그다지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려울 듯싶다. 다른 것은 접어두더라도 왜 앞마당이 이리 넓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스님네들이 매일 공을 차는 것도 아닐진대, 사정이 이쯤되면 우리의 눈은 자연히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은 한두 건물에 쏠릴 수밖에 없다.
보광명전(普光明殿)은 위봉사의 주불전이다. 1977년 보물 제608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이다.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7세기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보광명전의 암막새 가운데 ‘康熙十二年癸丑五月日’ 운운하는 글자가 새겨진 것이 있었다. 강희 12년은 1673년에 해당한다. 만일 이것이 예전에도 지금의 법당에 사용된 것이라면 보광명전은 늦어도 1673년에는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건물을 찬찬히 살펴보아도 조선중기 이전으로 소급되는 건축 수법과 의장이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기둥은 배흘림기둥과 민흘림기둥이 뒤섞여 있는데, 기둥의 굵기가 적당하여 안정감이 느껴진다. 귀기둥에는 우리네 건축의 특색이자 고급한 건축 수법인 안쏠림과 귀솟음이 모두 적용되고 있어 시대가 올라감을 읽을 수 있다. 공포는 안팎이 3출목으로 같아, 안쪽이 바깥쪽보다 출목수가 하나 더 많은 일반적 수법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공포에서는 살미첨차가 주목에 값한다. 특히 세 줄로 나란히 뻗은 쇠서는 내리뻗는 각도나, 굵직하여 중후하면서 강경한 맛을 풍기는 점 등이 조선초기 공포의 여운을 간직하고 있다. 이웃한 화암사 극락전이나 우화루의 쇠서와 닮은 느낌도 든다. 귀공포의 정리 역시 놀랍도록 간결하여 조선 중기 이후의 번잡한 구성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인다.
내부의 측면에서 휘어져 올라와 대들보에 걸린 충량(衝樑)은 중기 이후처럼 그 끝을 용머리로 다듬지 않고 민틋하게 잘라 중대공과 맞닿게 하였다. 역시 조선 초기의 유풍이다. 단청, 벽화, 별기화(別伎畵) 등 또한 고색이 완연하다. 우선 색조가 차분하고 아늑하여 고풍스럽다. 천장의 우물반자틀이 교차되는 부분의 단청, 곧 종다라니의 가운데는 연꽃을 그리고 꽃술로는 구리로 만든 반구형 장식물을 박았다. 꽃술이 돋아나 보이도록 하던 신라 이래의 수법인데, 조선 중기 이후 건물에서는 좀체 보기 힘들다. 벽화와 별기화로는 나한상, 석가설법도, 주악비천상 따위가 다양하게 펼쳐진다. 특히 주악비천상에서 격조 있는 색감과 고식의 화풍이 느껴진다.
그러나 보광명전 벽화의 압권은 아무래도 후불벽의 뒷면을 꽉채운 백의관음보살입상이다. 후불벽 상단까지 차지하도록 큰 벽화라서 제대로 살피자면 꽤 먼 거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로선 후불벽과 건물 뒷벽사이에 생긴 좁은 통로에서 비스듬히 올려다볼 도리밖에 없고, 게다가 그곳이 늘 어둠침침해서 그림을 골고루 뜯어보는 일은 아예 단념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도 견실한 화풍을 엿볼 수 있고, 먹선과 옷자락의 엷은 흰빛, 두관과 오른쪽 팔 아래로 늘어진 옷자락의 흰빛 도는 하늘색이 액센트처럼 강조되었으며, 두 손과 얼굴과 가슴의 살빛은 은은한 온기를 머금었다. 퍽 크면서도 엷은 톤의 색채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깨끗하고 순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림이다.
보물로 지정될 당시 워낙 건물 곳곳이 낡아 1979년에 수리를 하였다. 그때 천장과 공포의 부재를 군데군데 새로 갈았으며, 그 뒤에도 외부의 단청을 완전히 새로 올리고 지붕의 기와마저 남김없이 갈아 덮었다. 때문에 예스런 분위기가 많이 손상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해도 좀 더 세심한 배려가 있었으면 더 나아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적지 않다.
보광명전 왼편의 건물이 관음전이다. 평면이 매우 드문 工자형이다. 그에 따라 지붕도 여섯 군데나 박공면이 생겨나 재미있는 구성을 보인다. 법당을 바라보는 쪽에 편액이 하나 걸려있다. 보통 글씨만 있는 것과 달리 가운데 ‘威鳳寺’라 횡서하고 그 양옆으로 대나무와 난초를 한폭씩 친 편액이다. 일제강점기 각기 글씨와 그림으로 꽤나 이름을 날리던 해강(海岡) 김규진(金奎鎭)과 죽농(竹儂) 안순환(安淳煥)은 서로 짝을 이루어 팔도를 돌며 그림과 글씨가 함께 하는 편액을 31본산에 모두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그 가운데 하나인 모양이다. 글씨나 그림은 모르겠으되, 괴짜들이 사라져 맹탕 같은 요즈음엔 차라리 그 치기만만한 호기가 그립고 즐겁다. 관음전은 평면이나 지붕, 혹은 벽면을 따라 다기롭게 변화하는 창호의 모양새 등이 재밌는 건물이며, 보광명전에 버금가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집이다. 하지만 이 또한 머리에서 발끝까지 너무 말끔히 보수를 한 탓에 고즈넉한 맛을 몽땅 잃어버린 채, ‘립스틱 짙게 바르고’ 외출한 촌색시마냥 생뚱스런 낯빛으로 어설피 서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이다.
위봉사는 오랜 세월에 닦인 고상한 품위가 없다. 보광명전이 볼 만하지만 그것으로 나머지 졸렬함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어쩌면 20세기 후반을 앞만 보며 달려온 우리들의 뒷모습 같은 절이 위봉사인지도 모른다.
송희준(觀善書堂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