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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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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건호
990.6. 1 ~ 6. 11
현대미술관
精神과 物質, 思惟와 存在의 辨證論
질료에 의한 美意識의 表現運動에 부쳐
이재언(미술평론가)
. 道具性의 패러독스와 새로운 代案
오늘날 자동차를 공예품이라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그러나 전통적인 공예의 개념에 의하면 자동차를 공예품이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명의 利器를 대표하는 현대문명의 寵兒다운 道具的 實用과 所有欲을 자극할 만한 세련된디자인 등이 전통적 공예의 개념을 대단히 만족시켜 줄 것이기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예가들이 자동차를 공예품이라부르지 않고, 또 그것을 당연시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 이유는 많다. 엄밀히 말해 산업은 선사시대의 공예로부터파생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산업은 기술의 진보와 자본의축적에 의해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조직화되지 못한 모태와도 같은공예의 위상을 크게 위축시켰다, 따라서 개인으로서의 공예가는과연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또한 그 결과 공예라는 개념은 도구적 실용성에의해 규정되는 것보다는,오히려 수공적 이고 일품적 이며,그 규모가 대체로 왜소한 데서 오는 장식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왜곡되게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미술사에서는 탑을보통 공예로 보지 않고 건축으로 간주한다. 로것 자체는 문제가되지 않는다. 그러나 거대한 탑은 건축으로 보되 아주 조그만것은 공예로 보곤 하지 않는가.) 요컨대 문제는 예술의 개념을상정하는 데 있어서도 그러하지만, 공예의 개념에 있어서도 그것이 배타적이고 고정적으로 이루어지는 데도 있다. 오늘날의 공예가 대단히 분열적 이고 파행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거기에는 역사적 · 사회적 조건과 그 시대의 물적 토대에 의해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지극히 유기적이면서도 연동적인 실체로서의 공예가 감수해야 하는 변신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한펀 공예의 불확실한 위상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없는 것은아니다. 그것의 대표적인 경우를 우리는 소박한 삶 속에서의 수공예 운동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제작자 스스로 노동의 기쁨을 누리며 온갖 에너지와 혼을 쏟은 수공예 작품이 호응을 얻기는 한다.오늘날 공업 생산품의 범람 속에서 직접 만든 사람의 손길을 거쳐무언가 인간의 체취와 정감을 느낀 수 있는 생산품을 문명 속에서소외된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측면은 인정된다, 그러나 거기에는커다란 장애가 있다. 즉 취미와 소유는 별개라는 사실이다. 예를들면 귀금속을 가지고서 공예가가 수공예로 훌륭한 장신구를 만들었다고 할 때, 그것은 어느 누구든 만족을 시킬 수 있다. 그러나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인간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수공예 운동이 드러내는 단적인 허구가바로 여기에 도사리고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질도 좋고 재질과모양도 좋은,게다가 정성이 많이 들여진 수제품을 점유하는 층은결국 노동의 참된 의의와 숭고함도 모르는 부유층의 호사가들일것이 뻔하다. 이것이 어디 소외의 극복인가, 소외의 심화이지.물론 민중들 스스로 제작하여 스스로 소유하고 사용하는 원초적민중공예가 가능한 논의의 수준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장된공예의 측면에서 상정할 수 있는 부분적 대안일 뿐이다. 따라서이미 많은 분화 과정을 겪은 공예 전체를 원초적 상황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공예가들이 인식하는 공예작품의 보편적기능이란 도구적 차원의 것만이 아닌 또 다른 것을 내포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장식적 혹은 표현적 내지는 인식적 차원의 기능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으로 현대공예가들이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즉 공예작품이 반인습화 되어가는 것)은 현대미술의영향이기 이전에, 공예에 닥친 위기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적인心理機制의 작용 결과라 보아야 할 것이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얼마나 조형적으로, 그리고 가치면에서 성숙된 결과를 얻을 수있느냐 하는 것이다, 현대공예에 있어 도구로서의 가치와 조형으로서의 가치는 분명히 별개의 차원에서 실현된다. 그러나 도구성의 解除 그 자체가 곧 예술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말은 현대공예가 앞으로도 더욱 많은 分化를 필연적으로 수반하여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 도구성을 회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조형은 재료의 맹목적 소모도 아니며, 그것에 대한폭력도 아니다, 그렇다면 작품의 쓰임새가 없어진 그 빈자리에는무언가 가치있는 것이 채워져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어야 할까,
卞健齋의 選擇과 狀況 集積
작가에게는 1974년 『수지상감(樹脂象嵌) 제조 공예품』으로發明特許 제4272호를 취득하고, 1975년 『裝身具의 형상에 관한디자인』으로 意匠特許 제 1909호를 취득하는 등, 개인적으로 여러가지 유혹이
많았다. 特許를 이용한 사업이 그러하고 귀금속 분야에서의 권위와
아성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권을다 포기하고 제도권
속에서 외면 당하고 있는 소위 공예조형이라는 이름의 작업을 하게
된 이유가 자못 궁금한 것이다, 이유야간단히 말하자면 본인 스스로
고찰하고 인식한 공예의 본질과기능에 대한 학문적 소신과 작가적 입장에 기인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오늘날 공예가의 순수한 의지가
왜곡되고 매도되는상황에서 그러한 변신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렇다고 필자가 작가의 의지나 의도에 대한추측으로부터 작품의 이해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작년 『Korea To days} 7월호에 게재된 내용에 어느 정도 근거를두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거의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가 금속을주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물론 그 어떤 재료보다 자신이 있어서일 것이다.
자신이 있다는 것은 금속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다른재료에보다는 더
깊다는 것을 의미하며, 요컨대 조형에 있어서의지배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를 경청할만하다. 그것은 금속이 자신의 미의식 및 표현의도를 전달하는데 있어, 그리고 표현의 문맥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言語素의 기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표현하지 않으면 안될 미의식의 내용이란 과연무엇인가? 이에의 접근을 위해 작가 메모를 인용할 필요가
있을것 같다.
"나는 인지하는 사실을 통해 인지되지 않는 절대적 생명의 실마라를 찾아내고자 한다‥‥생명이란 무엇일까? 어두운 밤하늘가득히 빛나는 별은 새벽 여명에 죽은 듯이 사라진다. 그래도그 자체의 존재는 영원하지 않은가? 생명이란 별과 같은 것이아닐까? 영원한 비밀로 남겨둘 수밖에 없는 것 인가? 나는진정 이 廣大無限한 우주와 하나가 되고자 한다. "
이 인용문에는 존재에 대한 작가의 깊은 의식이 서려 있음을알 수 있다. 작가는 생명체 그 자체를 살아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또한 죽음 그 자체를 죽음으로 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고대희랍 엘레아 학파의 것과 같은 虛無主義的 存在論은 결코 아니다.왜냐하면 생명의 신비는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곳에 무한히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곧 물질이 항상 물질 그 자체로만 있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사유도 또한 사유로 끝나는 것이아니라 물질로 환원되어야 하는
것임을 믿고 있는 것이다. 이는분명히 汎神論的 物活論(animism)의
태도이다. 다소 불교적 윤회설이 용해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헤겔의 원환적 변증법과도 궤를 같이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같이 만물의 생성원리를 원환적인 윤회설에 두고 있는 점은 작가의
선친-故 卞鶴圭先生-께서 남기신 時調詩 작품들에서도 자주 발견되고 있는데,이런 점에서 본다면 작가 세계관으로서의 미의식은 결코
우발적인것이 아닌, 성장과정에서 부터 集積된 무의식의 결과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
작가의 선택은 분명하고 단호하다. 예술은 틀림없이 정신활동의생성물임을 믿는다. 그런 즉 그가 기대하는 예술은 가능한 수단을매개로
하여 자연의 보편적 진리에 접근하고자 하는 충동으로부터시작하고,
최소한 문제의 제기만이라도 실천해야 하는 활동이라보는 것이다. 스스로 공예가로서의 작업 또한 물질을 다루되,그것으로 하여금 곧 세계에 대한 의식과 사유가 고도로 精製된 정신의생성물이 되게 하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자신의 공예작업에 대해
"質料에 의한 美意識의 表現運動"이라규정하고 있다.
. 對立과 蘿解의 二元膽
결국 생성과 소멸은 상이한 조건에서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며, 그 배후에 내재된 운동원리의 다른 지각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작가가 작품의 재료를 금속으로 한정한 데는 생명 그 자체의 운동을 현상적으로 가장 잘 표상시킬 수 있는 그 자체의 특성 때문이다. ) 바로 이러한 세계관의 전형을 우리는 고대 희랍의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의 유명한 명제("만물 은 流轉한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만물의 생성원리는 그것 의 운동과 변화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사물의 운동과 변화가 야기 될 수 있는 조건은 모름지기 대립물,
혹은 대립적 상황의 소여에준거한다, 그리하여 혼돈과 질서, 순간과
영원, 관념과 물질,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 정지와 운동, 희열과 고뇌, 존재와 無 등의원환적 동일성을 밝혀 보이기 위해, 작가는 각진 것과 등근 것, 긴 것과 짧은 것, 큰 것과 작은 것, 많은 것과 적은 것, 안과 밖, 직선과 곡선,가상과 실상,긍정공간과 부정공간 등의 대립적 요소들을 이원구조 속에 병치 적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증론적 존재론은 어느 정도의 화해의 인식론을배후에 두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작가는 자연과학이나 자연철학이
규명할 수 없는 생명의 신비에 대해, 오히려 예술이어떤 실마리를 가져다 줄 것으로 믿고 있다. 달리 말하면 오성의 한계는 상상력으로 극복될 수 있고, 상식의 한계는 비상식으로,논리는 비논리의 것으로 접근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그것은 배타적 관계가 아닌 상호의존적, 혹은 상호보완적 관계속에서 가능함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그리하여 작가는 인지되지않는 혹은 근원이 밝혀지지 않은 존재의 본질을 밝히기 위해 현존하는 사물을 매개로 삼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조형적 태도를 입증할 만한 작품이 비교적 초기에속하는
『촉대』이다. 이 작품은 파이프 라인의 연결상태를 樹脂와재구성하여 촛대를 표상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의 작품규모는초를 꽃을 만한
크기보다 훨씬 크게 제작되어 있다. 그렇다고그것이 공예작품 일반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 기능을 수행하도록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여기서 전하고 있는 바는 바로 초의 물리적 특성-자기를 소멸시키면서 빛을 생성시키는, 곧 생명을 촉진시키는-에 의해 생명과 존재의 근원에
대한 관념과 사유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작가는 우리의
지각에 주어지는 대상의 현존이야말로 비록 허상과도 같은 것일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이 실체적 진리를 열어 보이는 단서로서 작용하도록 기획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이렇듯 작가는 대립적 요소들간의 긴장 속에서도 화해를 자아낼 수 있는 여지를 간명한 구조위에 항상 마련해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작품들 가운데 鑄造形象이 상당히 많다, 그것은 만물의생성원리를 운동에서 찾고 있음을 표상하기 위한 선택이다. 또어떤 작품들은
銅線이나 銅파이프들이 헝클어진 상태로 부분 혹은전체로 구성되고
있다. 이것의 표상은 육중한 量塊에 대해 물리적인 양감과 질감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것으로부터, 소멸의 상황을서술한파거나 혹은 새로운 生態의 가능성을 가진 상황을 서술한다거나 하는 다의적 문맥의
기호이기도 한데, 이러한 표현은 작가가오래전부터 독창적으로 구사해 온 造形語法이다.
. 眺望
변건호의 작품세계를 통해 우리는 다시금 공예가 무엇인지를생각치
않을 수 없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논의되는 문제이지만, 누구 한사람 시원한 대답을 해 줄 사람이 없다.하지만 이 문제를
우회한 상태에서의 공예창작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개념이 없는 직관"만의 맹목적인 생산(사실은 재료의 맹목적소모일지도 모를)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기피할수도, 또한 기피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공예는 발생론적으로 보아 산업과 예술의 중간자로 생성된 도착점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생성된 가장 근원적인출발점이다. 왜냐하면 공예란 도구제작으로부터 시작되어 삶의질을 높이고자
하는 지극히 인간에 의한 인간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부분이다. 그런데계몽주의 시대부터
"Beaux Arts"라는 개념의 출현으로부터 시작되는 "순수"와 "응용"이라는 二分圖式에 의해 공예를 저급한 예술로축출한 모더니즘의 역사를
바로 직시해야 할 부분에서는 아무도나서지 않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나 문화 · 교육적으로 공예는"실용"(가장 명료한 듯하면서도 가장 모호한)이라는 관형사의 한정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렇다면 역으로 "순수성"이라는 개념은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얼마나 정당한 것인가?
그렇다면 묻겠다. 도대체 순수하지 않은 것이 이 지구상에 어디 있다는 말인가 ? 혹자는 입버릇처럼 "모름지기 공예작품이 란 쓰임새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공예의 본질을 호도한다. 도대체 그쓰임새의 수준이 어느 정도의 것인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삶의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 공예의 발생론적 동기이거늘, 삶의 질을고양한다고 하는
명제 앞에서의 순수는 무엇이고 실용이란 또무엇 이 라는 말인가?
참된 공예의 의미 앞에서 우리는 정말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작가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바로 이러한 "공예"라는 본질 안에서 그리고 그
앞에서 자유롭고 싶은 사람이며, 또한 물질을 통해서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이다. 요컨대 이번 개인전의 작품들이드러내는 문맥 밖의 메시지가 있다면, 그 것은 바로 진정한 공예가도대체 무엇이냐는 물음과 함께 보내는 자유의 권고라 해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