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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의 여정 스크랩 드와이트 무디의 생애 D. L. Moody
kojaikook 추천 0 조회 47 14.06.08 15: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위대한 복음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의 생애            출처


※한국에서 '무디 선생님 스타일'에 가장 가까운 분은, '낙타 무릎'의 저자라고

   평소에 늘 생각해 오고 있었습니다./편.

 

 

▲1837. 2. 5.

미국 매사추세츠 주 노스필드에서 벽돌 쌓는 일을 하는 아버지 에드윈과

어머니 벳시 사이의 6째 아들로 태어나다.


아버지 무디가 4살 때 사망하였다.

과부가 된 그의 어머니 벳시 홀튼Betsey Holton은 9남매를

다른 집을 보낼 것에 대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야.”란 말로

9남매를 신앙 안에서 엄격하게 키운다.


매일 아침 성서와 경건 서적을 읽어주고 기도를 가르치며 주일에는 반드시 예베를 드리게 했다.

이와 같이 무디는 청교도의 신앙을 지닌 그의 어머니에 의해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한편 그는 어려운 형편에서 자랐기 때문에

공식 교육을 13세 되던 해에 중단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1853. 16세.

집을 떠나 매사추세츠 클린턴 시에 있는 신문사에서 일하다가

보스턴으로 가서 사무엘 아저씨의 홀톤 양화점에서 일하다.


▲1855. 18세

홀톤 양화점 뒷방에서 킴볼 선생의 전도로 중생되다.


그는 거기서 1855년 4월 21일에 중생하는 체험을 한다.

그때 그는 보스턴에 있는 외삼촌댁에서 양화점 일을 거들어 주고 있었다.


그 곳에서 그는 베르논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 교회에서 그는 주일학교에서 킴볼(Edward Kimball)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킴볼은 무디의 성서지식이 형편없는 것을 알고는 그가 일하고 있는 홀튼 양화점

(Holton's Shoestore)에 찾아와, 그리스도의 사랑과 보혈에 관하여 전해주었다.


이것이 그에게 결정적 중생의 계기가 되었는데,

‘순간 하늘의 빛이 그에게 비추는 것 같았고, 그 빛은 그 이후로 결코 어두워지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어머니에게 그의 거듭남의 체험을 편지로 보낸다.

“어머니! 1837년 2월 5일은 제가 어머니로부터 처음 태어난 생일이지요?

18년이 지난 오늘 4월 21일은 제가 성령으로 거듭난 참 생일입니다.

어머니, 기뻐해 주세요. 주일이면 하얀 칼라의 깨끗한 옷을 입혀 주시면서

칼라를 더럽히지 않게 입으라고 타일러 주시던 어머니의 가르침이

이제는 하얀 제 마음을 더럽히지 않게 신앙생활하라는 뜻인 걸 깨달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더 열심히 성경 공부도 하고 예수님을 항상 마음에 모시고 일하겠어요...”


잠들기 전 무디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잠겨 있었고,

그로부터 그는 하나님이 주신 자연이 더없이 아름답고 평화롭고 장엄한 것들을 체험한다.

이와 같이 그의 중생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주었고, 주게 된다.


▲1856. 9. 13.  19세

시카고로 가서 위스월 제화점 영업부에서 일하다.

이곳 제일침례교회에서 엠마 샤롯데 레벨 양을 소개받아, 6년 후에 결혼하다.

지역 YMCA 회원에 가입하다.


1857년부터 1858년까지 부흥운동의 결과로 YMCA가 시카고에 조직되어

홀튼 거리기도모임에 참석하였다.

그는 이 기도모임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보였다고 고백한다.


▲1859  22세

상업을 버리고, 전도 사업에 전념하다.

1859년부터는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기 위해서 하던 사업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그는 연봉 300불을 받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나선다.


무디의 사역은 처음에 부흥운동가로서보다

교사로서 새로운 학생을 전도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는 노스마켓주일학교의 책임자로서 헌신을 다하면서

1500명이 되도록 부흥을 시켰다.


이것으로부터 1864년 초교파적인 교회인 일리노이스가 시카고교회

(Illinois Street Chicago Church)가 세워졌다.


이 교회에서 무디는 교인들을 모두 전도자로 훈련 시켰고

주일학교, 학생회, 청년회, 부인회, 집회 등을 열었다.


수천 권의 성서, 쪽 복음, 전도지가 온 지역으로 배포되었고, 인근 지역까지 전도운동이 퍼졌다.

그는 매일 밤 한 두 개의 거리집회를 열었고

기도회, 야외집회, 천막집회 등을 그치지 않고 부흥회를 열었다.


▲1861.~1865.   24~28세

남북전쟁과 스페인전쟁 동안, 기독청년회 간부로 군대 전도를 하다.

1861년 미국에 남북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러한 전쟁 상황은 무디에게 또 다른 선교활동을 가지고 왔다.


그는 북군 부대가 주둔해 있던 더글라스에 조그만 교회를 세우고

75명의 군에 자원입대한 청년들을 위해서 첫 집회를 열었다.

그들에게 용기를 주자 그들은 사기가 충천했다.

이와 같은 반응으로 수천 명의 훈련병과

1만여 명의 수용된 수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부대 안의 군인 교회에서만도 1천 5백여 차례의 집회를 가졌고

참석한 군인과 죄수들은 1만 2천명이 넘었다.

집회는 언제나 교회 밖의 연병장까지 꽉 들어차는 대규모 집회였다.


이렇게 하여 군에 입대한 청년들에게 신앙을 계속유지하게 하고,

서로 친교를 가지게 하여 ‘형제의 띠’라는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들은 어느 부대에 배치되든지, 거기서 신앙을 간증하고 복음을 전하게 된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후, 무디는 각 교회들을 찾아가

젊은 집사들에게 주일학교를 하라고 권유하여

일리노이주 주일학교가 설립되어, 짧은 기간에 놀랄만한 성장이 있었다.


여러 곳에서 주일학교가 설립되어 발전되자

무디는 전국 주일학교 연합회를 만들어 회장이 되었고

매월 교육회를 개최하여 운영문제와 성서공과 문제를 두고 토의를 하였다.


▲1862. 8. 28.   25세

엠마 샤롯데 레벨 양과 결혼하다,


▲1864.  27세

시카고 교회를 헌당하다.


▲1865.  28세

남북전쟁 후 다시 시카고로 돌아와 주일학교를 재건하다.


▲1867.  30세  <1st. 영국 방문>

심한 기침을 하는 부인의 건강을 위해 부부가 영국으로 여행하다.

이때 스펄전과, 조지 뮬러와 무어하우스를 만나다.


무디는 전도자로서의 명성을 영국에서부터 얻기 시작했고,

영국 전도의 발단이 된 계기는 1867년 2월 22일 부인의 건강을 위한 요양여행과

평소 그가 존경하던 설교자 스펄전과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를 만나고자 영국을 여행하게 된 때부터이다.


그는 영국에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으나,

미국을 방문하여 그의 설교를 들은 하트리(F. J. Hartley)로부터 초청을 받아

이그젝터 홀의 기념회합에서

YMCA와 시카고에 있는 복음적 일에 대한 그이 경험을 청중들에게 소개함으로

감명을 주었다.


또한, 어느 주일 브리텐에 있는 한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설교를 마치자

학생들 15명이 무디에게 특별 기도를 받으러 앞 자리에 나왔고

그는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었는데

그들 중 매켄지(McKenzie)는 후에 중국에 의대를 세웠다.


▲1867. 9. 26.  30세

시카고 YMCA 회관인 파웰 홀이 봉헌되다.


무디는 YMCA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기독청년 운동과 초교파 평신도 운동을 일으키는데,

1857년 YMCA가 설립되자 무디는 회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로인해서 그는 위에서 말했듯이 남북전쟁에서 육해군 YMCA를 조직하여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전쟁 후에도 YMCA 운동에 솔선수범 하였다.


시카고에 YMCA에 등록하는 회원이 날로 늘어나자

1867년 9월 26일 맥코믹(Cyrus Mccormick)의 1만불의 헌금과 기타 모금한 돈으로

파웰 홀(Farwell Hall)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한다.


이것은 시카고 YMCA 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그는 수십 개의 교회당, 선교회를

그리고 영국과 미국에 YMCA빌딩 건립을 위하여

여러 번에 걸쳐 모금 운동을 하였고,


피츠버그 지방에 YMCA를 결성하였는데,

이곳에 모인 부녀자들이 감동을 받아 여자기독청년회(YWCA)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그 외 미국 전역에 YMCA운동을 펼쳤다.


▲1868. 1월  31세

파웰 홀이 화재를 당하자 3개월 후 제 2파웰 홀이 봉헌되다. (1차 화재)


▲1868. 31세

영국의 청년 설교가 무어하우스가 시카고에 와서

그와 함께 72차례 순회 집회를 하다.


▲1869. 32세

뉴욕에서 전 미국 주일하교 연합회를 창립하고 통일공과를 만들다.


1869년 뉴욕시에서 전국 주일학교 연합회를 소집하고

주일하교 모범 공과를 만들어 통일시킨다.

훗날 이것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이를 채택하여

주일학교 공과로 쓰게 되는 공헌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무디는 부흥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무디가 세운 주일학교 여교사가 심각한 불치병선고를 받자

그녀는 주일학교의 자기 학생들을 무디와 함께 심방을 다니면서 전도하는 일을 하였다.


이 일로 무디는 이전까지 많은 어린이들을 모으는데 전력했던 일에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헨리 버레이의 설교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신다.”

는 말에 감동이 된 무디는,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일로부터 무디는 부흥운동을 하게 되었다.

무디는 열심을 다해 성서를 연구했고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1870. 33세

유명한 찬양사역자 생키를 만나 그와 전도 사업에 합류하다.


1870년 무디는 인디아나 폴리스에서 열린 YMCA국제 집회에서

그의 평생의 동역자 가수 생키(Ira David Sankey, 1849~1908)를 만났다.


▲1871. 10.  34세

제2 파웰 홀이 화재를 당하다. 이 화재로 구 일리노이즈 교회도 전소되다.

무디의 사택도 잿더미로 변하다.


▲1871. 34세.

무디는 뉴욕의 길거리에서 성령세례를 체험한다.


“나는 온 종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내 영혼을 채워달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뉴욕시에 있을 때, 오! 그 날은 놀라운 날이었다.

나는 그 날에 일어난 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너무나 거룩한 광경이었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게 나타내셨다는 사실과

내가 그분이 손길을 거두어 가지 말라고 간구해야 했던 사랑의 체험을 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이후 수 백 명의 사람들이 나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때로부터 무디가 인도하는 대부분의 집회가 (성령)부흥회로 바뀌었다.


▲1871. 12. 24.

구 일리노이즈 위치에 노스사이드 장막교회가 봉헌되다.


▲1872. 35세      <2nd 영국 방문>

무디의 두 번째 영국 방문은 복음전도사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국 성경학자들 밑에서 성경을 더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1872년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때 그는 북부의 목사 레시(Lessey)의 초청으로 주일 저녁 설교를 하였다.

설교 후 무디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일어설 것을 부탁했다.


그때 200명중 100명이 일어섰고,

무디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각자 죄를 회개하는 통성기도가 있었다.

초대교회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화요일에 다시 초청을 받고

10일 동안 집회를 열었는데 그 결과로 400명이 교회에 신입케 되었다.


▲1873~1875. 36~38세      <3rd 영국 방문>

세 번째 영국 방문에서는 생키가 1873년부터 1875년까지 함께 사역했다.

처음집회는 요크 지방에서 YMCA를 통하여 부흥 집회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대접을 잘 받지 못하였으나, 나중에 성공적인 집회로

요크지방 목사들의 결의로 5주간이나 집회를 연장 시켰다.


선더랜드 집회는 6주간을 연장하였고, 뉴카슬, 에딘버러,

1875년 런던 집회는 치밀한 준비와 대규모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런던 집회는 오전에는 기도회로 모이고, 오후에는 성경 강의 시간을 갖고,

저녁에는 부흥집회로 모였다.


런던 집회수는 285차에 달했으며, 동원된 연인원은 259만 명이었고

운용된 재정도 거액이었다. 매일의 신문들은 확장된 부흥의 소식을 실었고,

부흥의 불길은 런던 자체만 감동시킨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놀라움이 되었다.

무디의 사위인 피트(A.P. Fitt)는 무디의 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을 불신하였던 수 천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고,

죄에 다시 빠졌던 수천의 그리스도인들 이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로 나아왔다.

복음주의가 일깨워졌고 도시선교를 위한 커다란 화합과

또 다른 긍정적이고 활동적인 조직들이 설립되었다.


교파적 차이는 없어졌다. 모든 교파들의 성직지들 은 영혼구원이라는

공통된 의견 하에서 서로 협력하게 되었다. 성서는 다시 읽혀지기 시작했으며

성서연구는 놀라운 힘을 나타냈다. 오랫동안 유지된 편견들은 일소되었다.”

                   1873. 6. 17.~ 1875. 8. 3.

 

무디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지만 교육가였다.

무디가 가사를 만들고 생키가 작곡하여 만든 새로운 찬송가는

집회에서만이 아니고 영국 전역에서 주문이 쇄도하여,

거액의 찬송가 판매금이 들어오게 되었고,

그 이익금으로 노트필드 무디 학원 재단을 만들어

소년, 소녀들의 교육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1875.~1877.   38~40세    <미국의 3차영적대각성 운동> 

미국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턴 등지에서 사상 최대의 부흥집회를 개회.


1879.  42세

순전히 여자들만을 위한 <노스필드 여자신학교>를 건립하고,


▲1880.

여름 수련회 등을 위한 <수양관>을 건립하다.


1881. 44세

남자들을 위한 <마운트 헐먼 학교>를 설립하였다.


▲1881.~1884.

영국 교회들의 초청으로 <4th 영국방문/전도여행>을 가다.

 

▲1882. 캠브리지 7인을 탄생시킴       55세

1892년 무디는 캠브리지 상호 대학생 연합회에 초청을 받았다.

그건 거기에서 캠페인을 지도하였다.

처음에는 적지 않은 편견과 난폭한 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캠페인은 성공하였고,

많은 대학생들이 개심하였다.


각성의 결과로 2년 후에는 사회와 스포츠계에 잘 알려진,

타고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인, ‘캠브리지 세븐(Cambridge Seven)이

중국에 선교사로써 나가기 위하여 자원한 일로 대학생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1886. 49세

자국과 외지 선교를 위하여

그 유명한 무디 성서학교의 전신인 ‘시카고 성서 연구원’이 설립되었다.


▲1886. 49세 <학생자발운동>의 근거가 된 헐먼산 집회

1886년 여름, 매사추세츠 헐먼산에서 학생자발운동의 근원을 갖게 되었는데,

이 모임이 끝나기 전에 251명의 참석자 중

외국 선교사가 되기 위하여 결심했던 회원은 100명이나 생기게 되었다.


이 들 중에는 현대 개신교에 각종 운동을 일으킨 와일더(R. Wilder)나

포먼(John Forman), 그리고 모트(John R. Mott)가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 최초의, 선교운동이, 무디의 여름산상집회에서, 불이 당겨졌던 것이다.


▲1889

시카고에 <무디 성경학교>를 설립하고, R. A. 토레이 박사가 합류한다.


▲1891. 10.~1892. 3.

<제5차 영국전도>와 성지순례. 선박 편으로 미국에 오다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1893.

최초로 부인협의회를 조직하다.

 

▲1893. 56세 <시카고 만국박람회>때 6개월간 대형집회를 계속하다.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를 통하여, 그의 전도운동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무디는 이 집회를 위하여 영국을 비롯하여 각국으로부터 100명 이상의 목사를 대회 강사로 초청하였고,

그밖에 100명 이상의 시카고 강사들이 도왔으며,

300명의 성서학교 학생들이 개인전도운동을 전개하였다.


부흥집회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 결과로 1895년에는 시카고에 기독교서회를 설립하여

성서와 찬송가,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게 되었다.


▲1894.~1899.

무디의 어머니와 장모와 손자, 손녀 등 네 사람이 세상을 떠나다.


▲1895.

시카고에 기독교서회를 설립하여 성서와 찬송가 등 경건서적의 반포 사업을 시작하다.


▲1899. 62세. 소천

1899년 11월 8일 무디는 미주리, 캔자스에서 일주일간의 부흥집회를 이끌었다.

집회 도중 그는 건강의 악화로 남은 시간을 토레이(R. A. Torrey)에게 맡기고

캔자스를 떠나 노스필드로 돌아갔고, 12월 22일 무디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고향 친구인 스코필드(Cyrus Ingerson Scofield)박사는

무디의 장례식 집례사에서 5가지로 그를 말하고 있다.


“첫째는 무디는 그리스도의 구원하신 은혜를 깊이 믿음으로써

자기 영혼이 영생을 얻었다는 확신의 소유자였다.

둘째로 그는 성서를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고 한 구절도 의심치 않고

성경을 상고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심령을 움직였다.


셋째로 그의 큰 감화력은 오직 성령의 충만함과 그 은사에 있었으며,

넷째로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다섯째로 그의 높은 인격과 주도면밀한 전략으로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좋은 결실이 있을 것을 확신했다.”


이처럼 무디는 체험적인 신앙의 소유자요, 실제적인 성서연구가요,

성령충만한 은사의 소유자요, 자기의 일에 대한 비전을 가진 사명자였다.

특히, 그는 성서적인 설교자로서 사람의 공포심에 호소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여 옳은 행동을 하는 동기를 삼도록 하기에 힘썼다.

그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성공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건은

믿음의 기도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무디가 한국 교회에 어떤 영향력을 미쳤을까?

무디가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한국 교회에 온 일이 없지만,

그의 강인한 구령의 열정을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886년 헬몬산에서 열린 무디의 집회에서 시작된 학생자발선교운동SVM은

한국 개신교 선교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여기서 배출된 선교사들 중에 초기 한국에 영향을 미친 게일(J. S. Gale)와 존 모트이다.


게일은 1886년 헐먼산에서 열린 북미주 하기 학교 때에 무디 부흥회에 참석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토론토 대학 학생 YMCA가 그를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1년에 500불씩 주고 8년간 계약을 하였다.


한국에 떠나는 전날 밤 밴쿠버에서, 무디는 게일을 위해서 축복기도를 해 주었다.

1889년에 부산에서 선교사역을 하여,

미국 장로교회의 본부 선교사로 전임되던 1891년 토론토 대학 선교부 선교사로 일을 계속하였고,

1892년 헤론 박사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원산에서 선교사역을 개시 하였다.


1898년 서울로 이주 하면서 ‘성서 번역자 위원회’ 위원으로 봉사 하였으며,

한국인의 협조를 얻어 단독 역본의 신구약전서를 완성하여 발행 하였다.


존 모트는 헐먼산에서 외국인 선교사로 헌신한 100명의 한사람으로서

당시 증가하던 학생자발운동SVM을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던 시기에

이미 한국에 와 있던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a, 1858~1902)의 요청에 의해,

1901년 길랫(P. L. Gillett)을 한국에 보내,

1903년 10월에 서울에 황성 기독교 청년회를 설립하였다.


이와 같이 헬몬산의 집회를 통해서 한국교회는

무디의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무디의 집회에서 은혜 받은 청년들이,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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