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조씨(昌寧曺氏)
창녕은 경상남도 북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비자화군 또는 비사벌인데 555년(진흥왕 16) 하주(下州)라 칭하고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는 화왕군(火王郡) 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태조때 창녕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밀성군(密城郡 : 밀양)에 귀속되었다가 인조에 현(縣)으로 복귀, 1895년(고종 32) 군(郡)이 되었으며 1914년 영산군(靈山郡)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창녕 조씨의 시조는 신라 진평왕(제 26대, 재위기간 579-632년)의 사위로 전하는 조계룡(曺繼龍)이다. 「조선씨족통보」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이며, 그의 출생에 대한 다음
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꿈 속에 장부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玉 )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아이를 낳으니 용모가 준수한 사내아이로 겨드랑이 밑에「조(曺)」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이 학사가 이상이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도 기이하게 생각하며 성(姓)을 조(曺)로 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으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계룡은 자라서 진평왕의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고 벼슬은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을 창녕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문헌의 실전으로 계룡의 후손 겸(謙)을 일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겸은 신라 말에 아간시중(阿干侍中)을 지낸 흠(欽)의 아들로 고려 태조의 딸 덕공 공주와 혼인하고 대악서승(大樂署丞)을 지냈다.
「창녕 조씨가 첩」에 의하면 겸이 손자인 연우(延祐)로부터 10세손 자기(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배출하여 가문의 번성을 누린 것으로 전한다.
고려 말에 와서 크게 이름을 떨친 민수(敏修)는 공민왕 때 순주부사(順州府使)로 여러 장군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치고 이등공신에 올라 우왕 초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왜구를 물리쳐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어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군의 좌군도통사(左軍 都統使)로 출정했다가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하여 창왕을 세우는데 공을 세워 충근양절선위
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이 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관찰사를 지낸 항(沆)의 아들 석문(錫文)이 유명하였는데,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형조·예조의 정랑(正郞)을 지냈고,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삼등공신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올라 창녕군에 봉해졌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의 난 때는 병마부총사(兵馬副摠使)로 난의 평정에 공을 세우고 적개일등공신이 되어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이듬해 왕명으로 노사신과 함께「북정록」을 편찬하였고, 성종 때 좌리일등공신을 거쳐,
1476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 이듬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호조 참판(戶曹參判) 위(偉)는 현감(縣監) 계문(繼門)의 아들로 김종직에게 글을 배우고 성종 때 문과에 올라 검열(檢閱)을 거쳐 승문원 정자가 되었으며, 사가독서를 한 뒤 성종대에서 성리학의 대가로 신진사류의 지도자였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석학 식(植)은 편교 언형(彦亨)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당대 유학계 대학자로 추앙되었으며, 뛰어난 학행으로 여러번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진력하여 문하에서 김효원·김우옹·정인홍 등 저명한 학자들을 숱하게 배출했다. 한편 중종 때 무신으로 이름난 윤손(潤孫)은 대사헌 숙기(淑沂)의 아들이다.
수차에 걸친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워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인 계상(繼商)과 계은(繼殷) 형제는 영흥판관을 지낸 구서(九敍)의 아들로, 계상은 공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을 지냈고, 계은은 목사(牧使)를 거쳐 종부사정(宗簿寺正)에 이르렀다.
계상의 아들 광원(光遠)은 명종 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우찬성(右贊成)을 지냈으며, 그의 증손 문수(文秀)는 강원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냈고 시문과 서예에 능하여 명필로 손꼽혔다. 그 밖의 인물로는 영조 때 교리(校理)·이조정랑(吏曹正郞)·
이조판서(吏曹判書)등을 지낸 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오른 명교(命敎)가 글씨에 뛰어나「능가사사적비」를 비롯한 많은 비문을 남겼으며, 윤형(允亨)도 초서와 예서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림은 풀·돌·대나무를 잘 그려 많은 작품을 남겼다. 중종 때에는 청백리에 녹선된 치우와 그의 증손 광익(光益)·호익(好益)이 이름났다. 호익은 임진왜란 때 소모관(召募官)으로 군민을 규합하여 중화(中和)·상원(祥原) 등지에 전공을 세워 녹비를 하사 받았고, 정유재란때는 다시 강동(江東)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후 안주(安州)·성천(成川)·정주(定州) 등지의 목사(牧使)를 역임했다. 연산군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숙기(叔沂)는 주역에 정통했고, 중종때의 반정공신 계형(繼衡)과 인조 때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고 시·서·화에 능하여 삼절로 일컬어진 우인(友仁), 이조판서 석우(錫雨) 등이 뛰어났으며, 근대에 와서는 만식(晩植)이 민족독립운동가로 조선일보사장을 역임하며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여 명망높은 창녕 조씨 가문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