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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회 직책 | 이름 | 직업 및 직책 | 국적 |
회장 | 시모오카 주지(下岡忠治) | 정무총감 | 일본 |
고문 | 이완용(李完用) | 중추원 부의장겸 후작 | 한국 |
고문 | 박영효(朴泳孝) | 중추원고문 후작 | 한국 |
고문 | 권중현(權重顯) | 徒四位勳一等 자작 | 한국 |
위원 | 이쿠다 세이자부로(生田淸三郞) | 중추원서기관장 | 일본 |
위원 |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 | 이왕직(李王職)차관 | 일본 |
위원 | 이진호(李軫鎬) | 학무국장 | 한국 |
위원 | 오다 쇼고(小田省吾) | 총독부사무관 | 일본 |
위원 | 유맹(劉猛) | 중추원참의 | 한국 |
위원 | 어윤적(魚允迪) | 중추원참의 | 한국 |
위원 | 이마니시 류(今西 龍) | 경도제국대학조교수 | 일본 |
위원 | 야마사키 마사오(山崎眞雄) | 중추원서기관 | 일본 |
위원 | 이능화(李能和) | 총독부편수관 | 한국 |
위원 | 이병소(李秉韶) | 총독부편수관 | 한국 |
위원 | 윤녕구(尹寗求) | 총독부편수관 | 한국 |
간사 | 야마사키 마사오(山崎眞雄) | 중추원서기관 | 일본 |
간사 | 김동준(金東準) | 중추원서기관 | 한국 |
간사 |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 종독부수사관 | 일본 |
수사관 |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 훈6등 총독부수사관 | 일본 |
수사관 | 후치다 료사쿠(藤田亮策) | 총독부편수관 | 일본 |
수사관 | 홍희(洪憙) | 총독부편수관 | 한국 |
수사관 보 | 다카하시(高橋琢二) |
| 일본 |
서기 | 현양섭(玄陽燮) |
| 한국 |
지도감독고문 | 구로이타 가쯔미(黑板勝美) | 동경제대 교수 | 일본 |
지도감독고문 | 구로이타 핫도리(服部宇之吉) | 동경제대 교수 | 일본 |
지도감독고문 | 나이토 토라지로우(內藤虎次郞) | 경도제대 교수 | 일본 |
상기 표1은 조선사를 왜곡 말살하기 위해서 구성된 ≪조선사편수회≫ 초기 위원회 명단이다. 위에서도 보듯이 조선사편수회에도 역시 반민족 배족자들이 무려 거의 절반에 가까운 12명이나 포진되어있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 어찌 배달겨레의 얼과 넋을 가진 자들이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감히 제 조상의 살아온 발자취를 왜곡하고 없애버리려는데 참여를 해서 부역을 한단 말인가? 이제라도 배달겨레 모두는 얼과 넋을 바짝 차리고 우리의 조상들의 찬란했던 업적을 되찾아서 후세들에게 올바르게 전수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새롭게 구성된 조선사편수회는 1925년에 제1회 위원회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 實)은 조선사편찬 작업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사료에 대한 수거가 강제로 이루어지다 보니 조선인들이 사료들을 깊숙이 숨기는 바람에 바라는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제가 바라는 대로 사료수집이 이루어지지 않자 일제는 조선사편수회를 내오고 사료수집에 대해서도 강제가 아닌 대여라는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하지만 겉으로 내건 명분은 대여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그들이 사료수집에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일제는 사료수집에 도, 군, 경찰서 등 관공서를 동원하였고 이들이 사료 수집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독려를 하였으며, 사료를 수집하는 이들에게 협조를 하라고 지시를 하였다. 또한 이들은 사료 수집을 사료탐방이라는 교묘한 말로 조선인들을 기만하였다. 참으로 교활하고 악랄한 일제의 조선사왜곡 말살책 이었다.
일제가 조선의 사료를 수거하기 위하여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지 아래 자료를 보면 짐작을 할 것이다. 아래 조선일보 서희건 기자의 《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에 기재된 기사를 보자.
“사료탐방은 1925년 처음 실시된 것이 아니다. 조선사편수 사업개요는 다이쇼(大正)11년(1922년) 조선사가 확대 - 개편되기 이전부터 사료를 수집했다고 자료들은 밝히고 있다. 1922년 8명의 관계자가 연 1백22일을 출장했으며, 23년에는 17명이 연 2백4일, 24년에는 12명이 연 1백76일, 25년에는 15명이 연 2백일 동안 전국을 누벼 조선사료를 찾아낸 것이다”
상기 글은 일제가 조선의 역사를 왜곡 말살하기 위해 사료수집에 얼마나 집요하고도 악랄하게 매달렸는지 명쾌하게 알 수 있도록 해준다. 참으로 간교하고 악랄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책동이라고 밖에 더 이상 무얼 말 하겠는가? 남의 나라 땅을 강점하고 또 그걸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역사마저도 왜곡 말살하려는 악랄성은 아마도 지구상 식민지 경영을 해온 제국주의 나라들 가운데에서 으뜸 일 것이다. 그런데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합리화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조작 왜곡 말살된 우리의 역사가 해방 이후 고스란히 우리들에게 슴베어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통탄스러운 일인가? 조상들을 어떻게 뵈온단 말인가?
2) 조선사편수회의의 우리 상고사 말살책
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내온 일제는 조선사편수회 제1회 회의에서 조선사의 시대구분을 재편하였다. 이는 조선의 상고대사를 말살하려는 저의를 더욱더 노골적으로 드러낸 회의였다.
1923년 1월 8일 조선사편찬위원회가 결정한 ① 제1편 【삼국이전】을 훨씬 더 아래로 끌어내려 조선사의 시작점을 『통일신라 이전』으로 하였다. 그리고 ② 제2편에서는 신라통일시대, ③ 제3편 고려시대, ④ 제4편 조선시대 전기, ⑤ 제5편 조선시대 중기, ⑥ 제6편 조선시대 후기로 하여 그 편수 마져도 7편에서 6편으로 줄였다. 결국 일제는 우리의 상고대사를 왜곡을 넘어 아예 말살하려던 의도를 단계별로 드러낸 것이다.
일제는 조선사편찬위원회의 결정한 삼국이전으로부터 조선사편수회에서는 통일신라 이전으로 함으로서 두 가지의 목적 실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첫째, 우리의 상대사 즉 한인의 한국시대 – 한웅의 신시시대 – 단군임금의 단군조선과 그 이후 전개되는 부여 및 삼한시대를 아예 말살해버리려는 것이다. 둘째, 조선사편찬위원회 이전부터 일제는 우리의 역사를 왜곡, 말살하기 위해서 동시대에 존재를 했던 가라(가야 – 伽倻)사를 처음부터 등장시키지도 않았다. 물론 가라사를 다르게 이용을 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을 조선사 편찬이라는 가면 속에 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병행하여 조선사편수회에서는 조선의 역사적 시작점을 제1편 통일신라 이전이라고 함으로서 지금까지 우리가 입버릇처럼 되뇌는 삼국시대(가라를 포함하면 4국시대임) 초기기록도 모호하게 가져가자는 목적이 있었다. 즉 삼국시대 초기의 역사적 사실을 모호하게 가져가자는 목적이 있었다. 일제는 조선의 상고사를 넘어 삼국의 초기 역사적 사실도 부인하는 만행을 가하고자 하는 목적이 바로 조선사편수회 제1차 회의의 목적인 것이다.
그 목적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의 역사에서 삼국시대 초기를 인정한다 해도 조선의 역사는 일본의 역사보다도 훨씬 앞서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을 강점한 일제에게는 절대로 허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식민지본국의 역사가 피식민 국가의 역사 보다 짧고 보잘 것 없다면 식민지 지배를 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것이기에 일제는 극구 조선의 역사를 일본의 역사보다 뒤쳐졌다는 것을 조작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일제는 삼국사기초기 기록마저도 부인하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조작해내는 어이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일제의 조작되고 해방 후 배달겨레에게 주입된 역사는 실제 배달겨레의 역사 중에서 무려 약 7500여년을 드러내는 천하의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강단사학에서는 단군조선의 역사마저도 우리 겨레에 의해 조작되고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후일 논할 것임)을 하는 학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참담한 심정 가눌 길이 없다. 자신을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해준 조상들의 살아온 발자취를 후손들이 극구 신화니 조작이니 허황한 소설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후손들은 지구상에서 우리 남쪽 밖에는 없을 것이다. 부끄럽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후손의 한 사람으로 조상님들께 머리 숙여 깊이 사죄를 드린다.
3) 조선사편수회에 추가로 참여한 조선의 학자들
일제가 조직한 ≪조선사편수회≫는 출범하면서부터 극렬하게 사료수집을 벌이는 한편 1927년 6월 1일 협박과 매수 등으로 확보를 한 조선사 왜곡조직을 더욱더 세밀화 하여 본격적으로 조선사왜곡에 달라붙는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서 밝힌 「조선사편수회사무분담」 조직도를 보면 아래와 같다. 주목할 점은 제1회 위원회에 들어있지 않았던 인물들도 새롭게 등장을 하고있다는 점이다. 조직도는 조선일보 서희건 기자의 『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를 그대로 인용하였다.
◇ 편수사무
1.사료의 수집
탐방부 수사관(修史官) | 홍희(洪憙) | 한국 |
정비부 촉탁 | 나카무라 에이코(中村榮孝) | 일본 |
2.사료의 편찬
사적정본(史籍定本) 촉탁 | 이마니시 류(今西 龍) | 일본 |
사적해제(史籍解除) 수사관보 | 다카하시(高橋琢二) | 일본 |
직관표(職官表) 수사관 | 홍희(洪憙) | 한국 |
3.조선사의 편찬
제1편부(신라통일 이전)
촉탁 | 이마니시 류(今西 龍) | 일본 |
수사관보 | 이병도(李丙燾) ☜ ☜ ☜ ¹ | 한국 |
제2편부(신라통일시대)
족탁 | 이마니시 류(今西 龍) | 일본 |
수사관보 | 이병도(李丙燾) ☜ ☜ ☜ | 한국 |
제3편부(고려시대)
촉탁 | 이마니시 류(今西 龍) | 일본 |
수사관보 | 이병도(李丙燾) ☜ ☜ ☜ | 한국 |
제4편부(조선시대전기 : 태조 → 선조)
촉탁 | 나카무라 에이코(中村榮孝) | 일본 |
수사관보 | 鶴見立吉 | 일본 |
제5편부(조선시대중기 광해 → 경종)
수사관 |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 일본 |
수사관보 | 다카하시(高橋琢二) | 일본 |
제6편부(조선시대후기 영조 → 갑오개혁)
촉탁 | 세노 바쿠마(瀨野馬態) | 일본 |
부속(部屬) - 도서부
촉탁 | 나카무라 에이코(中村榮孝) | 일본 |
정비부
촉탁 | 나카무라 에이코(中村榮孝) | 일본 |
촉탁 | 澁江桂藏(삽강계장) | 일본 |
상기와 같이 재편된 ≪조선사편수회≫의 조직도에 근·현대사학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이병도(李丙燾)가 드디어 등장을 한다. 위 조직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병도는 편찬부에 있으면서 『제1편 통일신라 이전』 『제2편 신라통일시대』 『제3편 고려시대』에 까지 편찬업무를 맡아하였다. 이는 결국 이병도가 우리의 상고대사 역사왜곡에 깊숙이 관여를 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부인을 하는 학자들 혹은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또한 이병도의 과(過)보다는 공(功)을 먼저 봐야하며 과보다는 한국사를 근현대화 시키는데 공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병도를 부정하는 것 온당치 못하다는 논리를 펴고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이병도의 저서를 통해서 증명해보고자 한다.
필자가 이병도를 중시하는 이유는 바로 오늘 한국사학의 뿌리이자 줄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현 한국사학이 아무리 식민사관을 극복했다고 말은 하지만 양심적인 많은 사학자들이나 연구자들의 견해는 이에 선뜻 동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한국의 독특한 학문적 풍토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자는 절대 스승의 이론을 비판하지 못하는 잘 못된 풍토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제자가 스승의 이론을 비판한다거나 부정하는 이론을 공개한다면 아마도 그는 한국의 주류사학계에 남아있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제자는 그의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 스승의 이론(理論)과 다른 견해를 가졌다 해도 스승의 이론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전개를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한국사학이 완전하게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위에 보여준 ≪조선사편수회≫의 구성은 1928년 다시 재편이 된다. 이때 등장하는 한국인 사학자가 이병도 외에 한국사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신석호(申奭鎬) 이다. 재편된 조선사편수회 구성원으로 새로이 등장하는 인물은 신석호 외에도 조한직(趙漢稷)도 있다. 일본인으로 새롭게 참여한 인물은 하기와라 히데오(荻原秀雄) 이다. 일제는 조선사 왜곡을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더욱더 강화를 하였다. 이는 일제가 조선사 왜곡을 위해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한 증거이다.
새롭게 편성된 ≪조선사편수회≫ 구성도를 보면 아래와 같다. 이 역시 조선일보 서희건 기자의 『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의 전문을 인용하여 기재해준다.
▣ 각 판별 담당자
간사 수사관(修史官) |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 일본 |
제1편(신라통일 이전시대)
촉탁 | 이마니시 류(今西 龍) | 일본 |
수사관 |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 일본 |
제2편(신라통일시대)
촉탁 | 이마니시 류(今西 龍) | 일본 |
수사관 |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 일본 |
제3편(고려시대)
촉탁 | 이마니시 류(今西 龍) | 일본 |
수사관 |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 일본 |
수사관 |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 일본 |
수사관보 | 하기와라 히데오(荻原秀雄) | 일본 |
촉탁 | 澁江桂藏(삽강계장) | 일본 |
촉탁 | 윤용균(尹瑢均) | 한국 |
제4편(조선시대 전기 : 태조 → 선조)
수사관 | 나카무라 에이코(中村榮孝) | 일본 |
수사관 | 신석호(申奭鎬) | 한국 |
수사관보 | 朝田富貴藏(조전부귀장) | 일본 |
수사관보 | 鶴見立吉학견립길) | 일본 |
촉탁 | 川口邱橘(천구구교) | 일본 |
촉탁 | 권중익(權重翼) | 한국 |
촉탁 | 스도우 요시유키(周藤吉之) | 일본 |
촉탁 | 마루가메(丸龜令作) | 일본 |
촉탁 | 구로다 쇼산(黑田省三) | 일본 |
촉탁 | 후지이 세이이치(藤井誠一) | 일본 |
제5편(조선시대 중기 : 광해 → 경종)
수사관 |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 일본 |
수사관 | 홍희(洪憙) | 한국 |
수사관 |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 일본 |
수사관보 | 다카하시(高橋琢二) | 일본 |
촉탁 | 세노 바쿠마(瀨野馬態) | 일본 |
촉탁 | 구찬서(具瓚書) | 한국 |
촉탁 | 조한직(趙漢稷) | 한국 |
촉탁 | 이시하라 토시오(石原俊雄) | 일본 |
촉탁 | 이능화(李能和) | 한국 |
촉탁 | 다나카 한지로(田中半次郞) | 일본 |
제6편(조선시대 후기 : 영조 → 갑오개혁)
촉탁 |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 일본 |
수사관보 | 다카하시(高橋琢二) | 일본 |
수사관보 | 타가와 고조(田川孝三) | 일본 |
촉탁 | 세노 바쿠마(瀨野馬態) | 일본 |
촉탁 | 소노다 요한지로園田庸次郞) | 일본 |
촉탁 | 이능화(李能和) | 한국 |
촉탁 | 조한직(趙漢稷) | 한국 |
제6편 조사부
수사관 | 홍희(洪憙) | 한국 |
촉탁 | 박용구(朴容九) | 한국 |
촉탁 | 육종윤(陸鍾允) | 한국 |
촉탁 | 조중관(趙重觀) | 한국 |
제6편 도서부
수사관 | 나카무라 에이코(中村榮孝) | 일본 |
서기 | 현양섭(玄陽燮) | 한국 |
촉탁 | 시부가와 게이조(澁江桂藏) | 일본 |
제6편 정비부
수사관 | 나카무라 에이코(中村榮孝) | 일본 |
서기 | 현양섭(玄陽燮) | 한국 |
촉탁 | 시부가와 게이조(澁江桂藏) | 일본 |
촉탁 | 마쓰오카(松岡巖) | 일본 |
제6편 심의부
수사관 |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 일본 |
수사관 | 나카무라 에이코(中村榮孝) | 일본 |
수사관 | 홍희(洪憙) | 한국 |
촉탁 | 이마니시 류(今西 龍) | 일본 |
촉탁 |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 일본 |
인쇄부
수사관 |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 일본 |
수사관보 | 이종명(李鍾明) | 한국 |
촉탁 | 마쓰오카(松岡巖) | 일본 |
촉탁 | 구로다 쇼산(黑田省三) | 일본 |
촉탁 | 시부가와 게이조(澁江桂藏) | 일본 |
개편된 제2차 조선사편수회위원회위원의 조직에 참여하는 절대적인 인원수나 그 조직의 세밀화 전문화된 구성도를 보면 조선사편찬회위원회, 조선사편수회 제1차위원회조직구성과는 대비도 안 된다. 상기 위원회구성을 보면 일제가 조선사를 왜곡, 말살하고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지를 알 수가 있다. 어쩌면 일제는 조선사를 왜곡 말살함으로서 그들이 조선을 영구감점하여 지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타산을 하였을 것이다. 즉 일제는 조선사를 왜곡 말살함으로서 조선인들의 얼과 넋을 모두 빼앗고 반 일본인화(半日本人化) 혹은 완전한 일본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여겼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하여 일본은 조선을 영원한 속국, 식민지로 경영을 하면서 조선인들을 일제의 식민지 노예로서 영원히 부려먹을 것으로 타산을 하였음이 명약관화하다. 참으로 악랄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 이었다.
재편된 제2차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수를 위한 학자들의 참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조선의 상·고대사와 고려시대 까지 배정 인원수를 보면 ① 신라통일시대 이전 : 2명, ②신라통일시대 : 2명 ③ 고려시대 : 6명으로 보잘 것이 없다. 반면 조선시대를 보면 ① 조선시대전기 : 10명 ②조선시대중기 : 10명 ③ 조선시대후기 : 7명으로 도합 27명에 달한다. 당시까지 조선사 약 9,100여년 중에서 조선사는 5.5% 정도인 500여년 밖에 안 된다. 그런데도 5.5%밖에 안되는 후조선사(後朝鮮史 - 여기서 후조선이란 상기 조직도에 보이는 후기조선을 말하는 것이 아님) 총 참여인원의 73%를 배정하고 94.5%의 역사를 가진 조선의 상·고대사 부분에는 겨우 27%만 투입을 하였다. 물론 당시 후조선(後朝鮮)이 존재를 하고 있던 관계로 후조선(後朝鮮)에서 보존한 자료가 비 할 데 없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상기 배정비율을 정상적인 사고로는 이해가 안 간다. 이는 일제의 조선사편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백히 알 수 있는 조치라고 본다. 필자의 좁은 생각으로는 진정 일제가 조선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생활사를 정상적으로 복원을 할 생각이었다면 적어도 조선의 상 · 고대사 부분에 더 많은 연구자들을 배정을 해야 했다. 사라진 자료를 보충하고 또 치밀하게 연구를 해서 완벽한 조선사를 편수를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조선의 상 · 고대사는 물론 500여년 후조선(後朝鮮)과 대등한 역사적 년대를 가진 고려시대 편수부분에도 겨우 6명만 배정을 하였다. 사실 후조선사(後朝鮮史)에 대해서는 특별히 위 조선사편수회위원 명단처럼 그리 많은 인원을 배정하지 않아도 된다. 당시까지 후조선에 관한 역사, 문화, 예술, 풍습 등에 관한 기록들은 수도 없이 존재를 했으므로 정리만 해주면 된다. 아니 후조선에 대해서는 정리를 할 필요도 없다. 조선왕조실록만 그대로 현대인이 볼 수 있도록 해제만 해주면 그게 바로 후조선사요 문화, 풍습, 생활사 등이 된다.
일제가 조선사에 대해서 그리도 많은 인원을 투입해서 편수를 하려는 목적은 조선의 상 · 고대사에 대한 조작, 말살과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조선의 상 · 고대사에 대한 왜곡 말살정책은 조선의 역사가 일본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상한이 올라가며 그 역사적 전개 역시 온누리 인류 역사에 가장 찬란한 과정이었다는 걸 일제는 정확히 알았기에 조선의 상 · 고대사를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피식민국의 역사가 피식민지 백성들의 문화 풍습이 식민지 경영을 하는 나라보다 우수하고 찬란했다고 한다면 아마도 피식민지 백성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 겨레의 얼과 넋을 잃지 않고 되찾으려는 저항을 드세게 했을 것임은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일제는 조선의 역사가 일본보다 그 상한선이 올라가서도 안 되고, 문화풍습이 뛰어나서도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는 조선의 상 · 고대사가 일본보다 상한이 낮아야 하며 역사, 문화, 풍습 등등이 일본보다 후진적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일제는 조선의 상 · 고대사 말살에 혈안이었던 것이다.
반면 일제가 후조선의 편수에 그리도 많은 인원을 투입을 한 이유는 후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조작을 하려는 의도였다고 보여 진다. 앞선 장들에서 살펴보았듯이 그것이 비록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했다고는 하지만 조선의 역사는 온통 당파싸움으로만 날을 지새고 달을 보내는 듯이 역사교육이 이루어졌다. 후조선의 역사가 온통 통합적이고 단합을 하지 못하고 분열만 온 사회를 지배를 하는 듯이 묘사가 되는 것 역시 그들의 치밀한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역사 왜곡 조작이 아니었다 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만 해도 일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중요한 부분들 얼마 던지 조작 왜곡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원래 뜻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에서 주요한 한두 글자만 고쳐도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문장으로 변하고 만다. 필자는 일제가 후조선사(後朝鮮史) 편수에 그리도 많은 인원을 투입을 한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조선의 ≪분열≫과 ≪파쟁≫을 내오기 위한 것으로 본다. 한 단어로 요약하면 전장들에서 보았듯이 조선의 ≪《당파성론(黨派性論》≫을 내오기 위한 것이었다.
식민지 조선은 단결·단합하지 못하고 어떤 정치적 견해나 이데올로기에 의하지 않고 자신들 개인 혹은 집단만의 이익을 쫒아 파쟁과 싸움만을 일삼느라고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가 되어있었다. 조선인들의 분열주의적 행태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체질화 되어있어서 이를 극복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로인해 조선이 무너지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음으로서 문명개화 하게 되고 발전을 하게 된다는 것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논리 였던 것이다. 이를 합리화 정당화시키기 위해 일제는 후조선사 편수에 그리도 많은 인원을 투입을 했던 것이다.
3)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참여
1928년 12월 20일 당시 조선의 대학자로서 문학인으로서 그 덕망과 신망이 높았던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드디어 일제가 그리도 바라고 바라던 조선사편수회위원으로 참여를 하였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과 같은 큰 인물이 조선사편수회에 참여를 하였다는 것은 그것이 자발적인 행위였건 아니면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참여였건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민족에 대한 반역행위에 속하는 것이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누구인가? 대한제국(大韓帝國)시기인 1908년 잡지 【소년】호에 발표를 한 배달겨레 시(詩) 문학사(文學史)에 있어 최초(最初)의 신체시(新體詩)를 지은 작가(作家) 아닌가. 그동안 정형화(定形化)된 시(詩) 만이 이어져 내려왔지만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그 정형을 깨뜨리고 새로운 형태(形態)의 시(詩)를 내옴으로서 배달겨레 시문학사(詩文學史)에 일대 대전환(大轉換)을 이루지 않았던가.
또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1919년 3 · 1 구국선언서(救國宣言書 - 獨立宣言書)를 작성(作成) 한 인물(人物)이 아닌가? 물론 1919년 이 당시까지만 해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철저한 민족주의(民族主義)로 무장된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였을 것이다. 그런 그가 3 · 1독립투쟁(獨立鬪爭)이 있고 불과 9년여 만에 태도가 돌변하여 일제의 조선사 왜곡을 담당하는 조선사편수회위원으로 참여를 하였는가? 하긴 당시 《3 · 1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에 이름을 올린 【33인】중에서 변절을 하지 않은 이는 겨우 만해(卍海, 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先生) 한 분이 유일(唯一) 하니 더 말해 무얼 하겠는가? 참으로 개탄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물론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의 조선사편수회위원으로 참여는 일제의 회유와 협박 포섭책동에 할 수없이 조선사편수회에 참여를 하였다고 변호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지배의 고통 속에서 신음을 하고 있는데 당시 조선인들의 신망과 믿음을 받던 대문호이자 대학자요 정치가인 육당이 넘어갔다는 것은 일반 민초들은 물론 식자(識者)들 이나 조선의 해방을 위해 일선에서 투쟁을 하던 독립운동가들 이나 이를 암암리에 지원을 하던 조선인들에게 주는 충격은 가히 짐작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아래에서 그 일단을 보도록 하자.
① 사학자 이자 시조시인·한학자·교육자·언론인. 한문학의 대가로이신 위당(爲堂) 정인보
(鄭寅普) 선생께서는 “육당(六堂)이 변절했다”고 하면서 「최남선이 죽었다」는 조문(弔
文)」을 쓰고 육당(六堂)과 절교(絶交)를 하였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先生)
은 육당(六堂)의 죽마고우(竹馬故友)였다.
② 일단의 조선의 사학자(史學者)들은 종로 명월관(明月館 - 일제강점기 유명한 술집)에
모여 군건(屈巾)과 제복(祭服 - 제사 지낼 때 입는 옷)을 입고 제사상을 차려놓고 「
최남선이 죽었다」고 하면서 방성대곡(放聲大哭)을 하면서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문정
창저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 중에서)
당시 최남선의 조선사편수회위원으로 참여를 한 행위가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 얼마나 크게 충격을 주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일단의 일화라고 하겠다. 물론 한 개인이 조선사편수회에 참여를 함으로서 조선사에 대한 모든 편수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남선의 참여는 그가 원했건 원치 않았건 그의 참여만으로도 일제의 조선사 왜곡 말살에 커다란 힘을 실어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위원으로 참여를 한 그 자체만으로도 민족에게 있어서 씻을 수 없는 죄를 될 것이다.
최남선은 해방 후 1946년에 저술한 ≪국민조선역사(國民朝鮮歷史)≫에서는 우리 겨레의 역사적 기원을 단군조선(檀君朝鮮)을 훨씬 뛰어넘어 18분의 한웅(桓雄 - 한검)이 다스리던 신시시대(神市時代 - 검불)까지 확장을 하였다. 최남선이 해방 후 1946년에 저술한 「국민조선역사」중에서 18분의 한웅(桓雄 - 한검)이 다스리던 신시(神市 검불) 시대에 대한 부분을 원문 그대로 올려준다. 본 문장을 올려주는 것은 강단사학에서 그토록 주장하는 우리 겨레의 역사적 탄생기원(여기서 역사적 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에 대한 신화이기에 허구라는 주장과 대비시켜 보라는 의미이다. 우리 겨레의 역사에 대한 기록들 찾아보면 아직도 수도 없이 많이 있다. 혹 오해를 할지 모르니 원문 그대로 실어주고 해제를 해준다. 오래된 고문이다 보니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것으로 본다.
❝ 아득한녯날에世界가秩序를일코뒤숭숭할 ᇨᇨ+ㅐ(때) 하느님의여러아드님가운데이라
는어른이人間으로나려가기를간절히바란대 하느님 ᇧ+ㅔ(께)서그 ᇨᇨ+ᅟᅳᆺ(뜻)을삷히시고
人間을두로보시다가太白山이조흔일터임을發見하시고 天上의세가지보배를내어주시
면서이것을가지고가서人間을아름답게만들라하셧다.
이에桓雄어른이部下三千을더리고太白山頂의神檀樹下로나려오셔서 거긔神市(신령님
의모여서일하는터)를배포하고스스로天王이되셧다. 天王은風伯‧雨師‧雲師들을거느리
고서에關한일, 生命에關한일, 疾病에關한일, 刑罰을施行하는일, 善惡을辨別하는
일等 무릇人間三千白六十餘事를드사리셧다. ❞
해제(解題)
❝아득한 옛날에 세계가 질서를 잃고 뒤숭숭할 때 하느님(한인=한님)의 여러 아드님 가
가운데 한웅(桓雄)이라는 어른이 인간세계로 내려가기를 간절히 바라니, 하느님(한인=한
님)께서 그 뜻을 살피시고 인간세상을 두루(넓게) 살펴보시다가 태백산(太白山)이 좋
은 일터(살기 좋은 땅)임을 발견(發見)하시고 천상(하늘나라)의 세 가지 보배를 내주
시면서 이것을 가지고 가서 인간세상을 아름답게(살기 좋게) 만들라 하셨다.
이에 한웅(桓雄) 어른이 부하 3000천을 데리고 태백산정(太白山頂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오셔서 거기에 신시(神市 - 검불)(신령님이 모여서 일 하
는 터)를 배포하고 스스로 천왕(天王)이 되셨다. 천왕(天王)은 풍백(風伯)‧우사(雨師)‧
운사(雲師)들을 거느리고서 양곡(糧穀-농사)에 관한 일,생명(生命)에 관한 일, 질병(疾
病)에 관한 일, 형벌(刑罰현대 사법체계를 말함)을 시행(施行)하는 일 등 무릇 인간(人
間) 삼백육십여사(三百六十餘事)를 다스렸다❞
상기 우리 겨레의 탄생설화 혹은 역사적 기록부분들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들에 기록된 내용들을 토대로 점차 증명을 해보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는 비록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조선사편수회위원으로 참여를 하였지만 그의 인식은 현대 한국인들이 신화로 몰아붙이는 배달겨레 기원 및 역사적 사실의 진실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해방이 되자 곧바로 ≪국민조선사(國民朝鮮史)≫를 저술을 하면서 배달겨레의 상‧고대사의 실체를 밝혔다는 것이다.
반면 조선사편수회에 촉탁으로 참여를 했으며 해방 후 근‧현대 배달겨레의 역사와 문화, 풍습 등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병도(李丙燾)의 인식에 대해서도 고찰을 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또 현재 한국 역사학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이병도의 후학들은 배달겨레의 기원설 및 역사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를 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필자가 굳이 최남선의 오래된 고서인 역사서의 배달겨레 기원설 및 역사적인 내용을 올려주는 이유는 이병도와 최남선 둘 사이의 역사 인식을 비교해보기 위해서이다. 이병도나 최남선 모두 조선사편수회에 참여를 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최남선의 우리 배달겨레의 역사 인식은 이병도의 역사 인식과 천양지차이가 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 정확한 자료를 통해서 비교분석을 해보기로 한다.
우리는 일제에 의해서 왜곡‧조작 말살된 배달겨레의 상‧고대사를 복원하지 않으면 영원히 식민지사대근성을 극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미래에 오게 될 후손들 역시 식민지사대근성과 민족적 열등의식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현재도 젊은이들이나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민족적 열등의식에 찌들어 자신감을 상실하고 오로지 외세만이 우월하고 이민족의 역사 문화가 우월하다는 인식이 넓게 퍼져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요즈음 중 ‧ 고등학생들의 우리 말 발음을 하는 걸 보면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우리 말 발음이 우리 말 같지 않고 마치나 서양인들이 우리말을 하는 것과 같은 착각을 할 정도이다. 자칫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참으로 우려스러운 일이다. 이제 기성세대들은 늦었다고 생각지도 말고, 아니면 세계화시대에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안일한 생각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 첫걸음 이자 가장 중요하게 할 일은 우리의 상‧고대사 복원 및 문화, 사상, 풍물 등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적극 복원하는 길이다. 필자가 오랫동안 우리 역사와 문화, 생활풍습 등등 많은 분야를 연구해온 바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 절대 열등하지 않으며 오히려 현생인류 문명과 문화의 줄기와 뿌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 과학성 또한 대단하다. 이제 우리의 얼과 넋을 복원하자. 그리하여 다가올 후세들에게 찬란했던 조상들의 역사와 문화를 전수해주고 자부심과 자긍심이 높은 후손들로 온 누리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도록 해주자.
단기 4347년 (한기 9244년. 서기 2014년) 5월 26일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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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선생(先生)도 『神市』를 《신령님들이 모여서 일 하는 터》로 해석을 했듯이 18분의 한웅(桓雄)에 의해 다스려지던 터를 【검불】 이라고 한다.
㉠ 여기서 신(神)은 이두로서 과거에는 『검』으로 읽었다. 여기서 《검》은 "땅신"을 의미한다.
우리네 전통에는 아이를 낳으면 금줄을 친다. 또 간장단지에 치는 줄도 역시 금줄을 두른다. 이때 금줄은 바로 [神줄]로 쓰고 읽는 것은 《금(검줄)》로 읽는다. 즉 땅신인 《검, 감, 곰, 금》님에게 악귀와 우환을 막아달라는 믿음이다.
㉡ 시(市) 역시 이두로서 옛날에는 《불, 벌》로 읽었는데 이는 【밝】에서 연유된 것이며 『밝은 터(땅)』을 의미한다. 이는 《하늘 나라》를 의미한다.
따라서 ㉠+㉡ = 神 + 市 = 검(감, 곰, 금) + 불(벌) = 신들이 건설한 땅이 된다.
※※※ 여담으로 천안함 사건이 있었던 2010년 5월 갑자기 한국을 방문한 시몬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이 중요한 언급을 하였다. 한민족(배달겨레)는 약 6000여년전에 신들의 땅을 건설하고 온세계를 살기좋은 세상으로 이끌었다※※※
또한 재해석을 하면 박달(檀)이 된다. 단군조선(檀君朝鮮)시기만 박달나라가 아니라 이미 그보다 1600여년전 18분의 한웅(桓雄)들이 다스리던 시기에 이미 《박달나라》가 시작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점차 해석을 해나갈 예정이다.
우리의 3,1절 노래가사 《비, 구름, 바람 거느리고》라는 구절은 바로 상기 해석한 우리의 역사를 노래한 것이다. 비=우사(雨師), 구름=운사(雲師), 바람=풍백(風伯)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풍물놀이〔굿, 풍장, 풍물 이라고 표현해야 함. 절대 농악(農樂)이 아님〕에 사용되는 징(바람=風伯), 북(구름=雲師), 장구(비=雨師), 꽹과리=전라도 깽메기(더 정확한 표현임)(번개=雷公, 단기고사에는 뇌공까지 언급이 되어있음)을 표현하고 있다.(본 부분도 추후 상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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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고대사 (이희진)
거짓과 오만의 역사 (이희진. 동방미디어. 2001.8)
식민사관과 민족사관 (채수목. 담수. 2008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식민사관의 형성과 그 논리 (박걸순. 순국. 2008.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수소 수 석연구원)
일제총독부 간행 역사교과서와 식민사관: 지배이데올로기와 국사교과서 (이명화. 역사 비 평15 / 역사비평사. 91.11.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식민사관의 성립배경과 본질 (이상주. 새 물결 / 자유 평론사 137. 88.4. 국사편찬위원 회위원)
또 다른 조선의 역사 (정용석. 동신출판사. 2009.1)
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 (서희건. 조선일보사.1985)
풀뭇간의 쇠망치(이병도. 휘문출판사. 1972)
조선상고문화사(신채호. 비봉출판사. 2008)
고조선력사개관(북한사회과학원 허종호외. 도서출판 중심. 2001)
한단고기(계연수 편찬. 임승국 주역. 정신세계사.2010년 3월 10일)
규원사화(북애자 지음. 고동영 옮김. 한뿌리. 2005년 1월 30일)
신단민사(김교헌 지음. 고동영 옮김. 한뿌리. 2006년 3월 15일)
단기고사(대야발 지음. 고동영 옮김. 한뿌리. 1999년 3월 15일)
국민조선역사(최남선. 원저. 동명사 발행. 1946년)
국사대관(이병도. 원저. 백영사 발행. 1954년 단시4287년(서기 195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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