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성지 사무실
은이성지 내 금가항 성당(진쟈상) 성당
은이성지 내 김대건 기념관
김대건(金大建,안드레아) 김해김씨 대건공파 시조 김진후(비오)-김종현-김제준(이냐시오)-김대건(안드레아)
김진후(비오)는 대건 안드레아의 증조부이다. 충청도 솔뫼마을을 교우촌으로 이끌며 가다가 1791년(신해박해)때부터 홍주(홍성),전주,공주감영에서 드나들었고 신유박해(1801년)때에는 배교를 약속하고 귀양보내졌다. 1805년에 귀양에서 돌아온 후 해미옥(해미성지)에 다시 갇히어 배교를 뉘우치며 옥살이를 하다가 1814년에 옥중에서 죽었다.그 이후 2014년 8월14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하여 윤지충 권상연과 더불어 124위 복자품에 올랐다. 골배마실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솔뫼성지에서 용산 청파골에 살다가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청파골에서 골배마실로 이사하였다. 그때의 나이는 7살이었다. 그 무렵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인 모방신부가 브뤼기에르 소 주교의 대신으로 1836년 1월 상주차림으로 조선 잠입에 성공 은이 골배마실에서 들어가 사목하던 중 어린 소년이었던 재복(깁대건 신부의 아명)을 만나 그에게 안드레아로 세례명울 준 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최양업(토마스),최방제(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마카오로 향했다. 하지만 최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풍토병에 걸려 병사하였다. 김대건은 신학생때 메스트르 신부와 함게 만주로 건너가 조선으로 들어가려는 게획을 세우고 국경에서 20여리쯤 되는 곳에 도달하였을때 북경으로 가는 도중 김프란치스코를 만나 1839년 기해박해때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가 골배마실에서 체포 서소문 밖애서 참수 순교한 것과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거지가 되어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며 동정을 받아 겨우 연명하는 것 최양업(토마스)의 부모 최경환(프란치스코),이성례 마리아의 순교까지 비통한 소식을 듣게 된다. 샤스탕 엥베르 범 주교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페레올 고 주교가 1843년12월 만주에서 베롤 주교로부터 주교로 서품 받은 후 3대 주교로 취임하게 된다.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은 깁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황해 바닷길을 통해 조선으로 입국하는 경로를 탐험 서울로 들어왔다.김대건 안드레아 부제는 1845년 8월17일 상해 교우촌의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신부가 되어 라파엘 호라는 작은 배를 만들어 심한 풍파를 거쳐 조선 강경의 나바위에 정착하게 되었다. 거기서 다시 골배마실에서 어머니 고 우르술라를 재회 사목하던 중 첫 사목지로 은이공소를 세워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은이성지와 골배마실는 장소는 다르지만 7살때부터 골배마실에서 자라 15살때까지 살았으며 은이성지는 김대건신부의 첫 사목지로서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이민식(빈첸시오)가 신부님의 시체를 미리내까지 모셔가기 위해 거쳐갔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재 은이성지는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깁가항 성당을 2001년 철거되기 전에 가져와 복원되었으며 은행나무 아래에는 모방신부로부터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을 주었던 조각상이 있으며 그 옆에는 2016년에 세운 김대건 기념관이 있다. 골배마실 성지는 양지파인리조트 골프장 맨 끝 오른쪽에 있는데 거길 가려면 은이골 가족캠핑장을 지나 신덕고개로 넘어가는 도중에 있는데 장애인은 버스를 타서 용동중학교를 거쳐 양지파인 리조트에 하차해 조그만 걸어가면 된다.
첫댓글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