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한 편의 시
배중손
-운림화첩 2
박남인
모든 쓸쓸함에는 불이 숨어있다
굴포리 간척지 갈잎으로 누운 깃발들
차마 가을을 건너지 못해
울컥 울컥 편년체 일기를 쓰고
여귀산 봉화터 억달 밭이거나
남도석성 동문 담장 틈
이끼 얼룩진 귀면와로 은신하다
새벽 눈발을 타고 한번쯤은
어둔 세상을 베어버리고 싶지 않았던가
변방의 노래는 제 스스로 곡조를 타는 법
물결도 한없는 잿빛
시간의 문 밖에서 호명하던 선단들이
낭장망 그물 밖 은빛 소용돌이를 친다
절레절레 산발한 수급들은
미역줄기를 따라 도리질을 하고
이까짓 사랑쯤이야 동백은
안개 걷힌 마을 저녁노을에 잠긴 채
모든 쓸쓸함에는 아직도 불이 숨어있다
대섬 건너 차고 매운바람이
그대의 손목을 흔드는 밤
늙은 이리 몇은 씻김굿 안당에 좌정하고
헤픈 막걸리 웃음 속에서
구암사 중의 씨앗이면 어쩔 것이냐
다시래기 산통에 새벽이 잉걸 대는데
어디서 오느냐
저 아득한 끈 고를 풀어내는
단골의 무가사설
나무 나무로 불이 오른다.
새벽 4시 잠에서 깨어 진도에 다녀온 시간을 더듬어 본다. 정신이 점차 말똥말똥해져 머리맡에 놓여있는 박남인 시인의 시집 <당신의 바다>를 정독하기 시작했다. 진도의 비끼내 당산골 한옥마당(의신면 사천리 운림예원)에서 열린 시인의 출판기념회에서 보낸 시간의 여운이 되살아난다. 단숨에 읽으려 했던 내 바람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시집을 보다가 절로 가슴이 서늘해졌고 더러는 멍멍해졌다. 그럴 때는 한참 동안 숨고르기하고 다시 읽어야 했다. 시집 전반에 걸쳐서 이승하 시인이 구석구석 세세하게 잘 해설해놓은 듯하였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이승하 시인도 몇 차례 진도 여행을 했지 않았나 생각된다.
운림화첩이라는 제목의 시집 제2부 12편의 시가 가장 완성도 높은 시라고 생각되었다. 운림화첩 제목 그대로 운림산방아래 사천리(비끼내)에서 태어나 자란 시인의 고향 마을이 훌륭한 문화유적이 얼마나 풍부하고 문화적, 정신적으로 풍성한지 알 수 있었다. 12편의 시는 빼어난 그림 같은 시이다. 시집 전반에 걸쳐 흩어져 있는 주옥같은 시편들 중 유독 배중손이라는 제목의 이 시가 내 눈을 끌어 당겼다.
'모든 쓸쓸함에는 불이 담겨있다'는 첫 문장에 시인의 놀랄만한 깊은 사유가 녹아있다고 생각된다. 박남인 시인의 시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 이야기 속에는 늘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애환과 역사가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삼별초 항쟁, 즉 삼별초가 개경 정부와 몽골에 대항하여 일으킨 싸움(1270∼1273)의 배중손 장군을 제목으로 정한 이 시에도 잊혀진 시대의 이야기를 한 폭의 격조 높은 그림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어느 늦은 가을날 우연히 들른 배중손 장군의 사당에서 쓴 시가 아닐까 짐작된다. 역사 속에서 잊히고 아무도 돌보지 않은 쓸쓸한 사당의 풍경에서 첫 문장을 얻은 것이 아닐까? 편년체로 써내려간 역사 속에서 혁명은 늘 미완성이고 그래서 더욱 아쉽기만 하다. 또한 동 시대를 함께한 민중들에게는 혁명의 실패는 늘 고통을 동반하는 삶을 강요당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시간의 문밖에서 호명하던 선단들이/낭장망 그물 밖 은빛 소용돌이를 친다/절레절레 산발한 수급들은/미역줄기를 따라 도리질을 하고/----, 백성들 편에서는 위정자들이 무섭기도 하지만 노래로서 풍자하기도 한다. 시경에 보면 ‘초상지풍 초필언’ 草上之風 草必偃,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강을 건너가는 민초들은 미완성의 혁명이 그걸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걸 믿으며 산다. 실패한 혁명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수많은 풀들이 다시 일어서듯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거듭 거름이 되고자한다. 헤픈 막걸리 웃음 속에서/ 구암사 중의 씨앗이면 어쩔 것이냐/다시래기 산통에 새벽이 잉걸 대는데/-----,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 않을 수 없지만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선다는 의지를 보인다. ’초상지풍 초필언‘ 구절 다음에 ’수지풍증 초부립‘ 誰知風中 草復立 을 대구로 넣어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 이라고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오느냐/저 아득한 끈 고를 풀어내는/단골의 무가사설/나무 나무로 불이 오른다./
박남인 시인의 시에는 이와 같은 비판과 저항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쓸쓸하여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지극히 비관적인 순간에도 불이 살아있다는 희망을 읽어 내는 시인. 빛 바래가고 쓸쓸한 역사 속에서 일겅불을 되살려내는 시인 박남인, 그의 다음 시집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첫댓글 낯선 이름의 배중손, 좋은 시 임에 틀림없지만 자칫 이해하기 어려운 시 였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완시인님의 글을 읽으니 절절히 이해가 됩니다. 시 안에서는 불과 희망이 같은것이로군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조금 어려운, 어렵다기 보다는 조금 지적인 싯귀들이 있는것이 사실입니다.